의혜공주

 



'''조선 중종의 왕녀
의혜공주 | 懿惠公主
'''
'''이름'''
옥혜(玉蕙)[1]
'''출생'''
1521년(중종 16년) 3월 26일
'''사망'''
1564년(명종 19년)
(향년 44세)
조선 한성부 중부 수진방 사저
'''부왕'''
중종
'''모후'''
문정왕후 윤씨
'''부군'''
청원위 한경록(韓景祿)[2]
'''자녀'''
3남
(장남) 한의(韓漪)
(차남) 한완(韓浣)
(3남) 한순(韓淳)
'''묘소'''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산 119-39
1. 소개
2. 생애
2.1. 혼인 생활
2.2. 왕의 누나
2.3. 사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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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조선 중종의 적2녀이자, 문정왕후의 장녀.[3] 또한, 명종동복 누나로 당대에 중종, 명종,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으면서 편안하게 살았다. 그야말로 현대의 재벌에 버금가는 부유한 삶을 누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2. 생애



2.1. 혼인 생활


1531년(중종 26) 11세의 나이로 춘천부사 한승권의 아들 한경록을 부마로 맞이하여 가례를 올렸다. 한경록은 서성부원군한확의 5대손으로, 그 아버지 한승권은 후일 을사사화로 공신이 된다.
중종은 자식들에게 후한 편이었는데, 공주의 사저를 위해 천금을 아끼지 않았다. 공주가 가례를 올리기 전인 1529년(중종 24)부터 공주의 사저에 비가 새는 곳과 무너질 위험이 있는 곳이 있다며 수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공주의 사저 공사에 들어가는 재목이 수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새로 짓는 수준이라며 비판 받았고[4], 이듬해에는 흉년으로 힘든 상황인데 군인 5백 명으로 하여금 사저를 수리하게 하였다며 원성을 들었다.[5] 또한, 1531년(중종 26)에는 공주의 집에 단청을 칠하기 위하여 많은 물건을 사들이고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많은 폐단이 발생했다.
공주가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한경록도 당연한 줄 알고 횡포를 부렸다. 정순옹주의 남편 여성위 송인과 함께 장사치들과 어울려 다니는가 하면, 권력을 이용하여 전답, 가옥, 노비, 물화와 같은 것들을 처리하면서 사사로이 이득을 챙겼다. 그러나 중종은 이런 사건 사고에도 "나이 어린 부마라 사리를 알지 못하여 벌어진 일" 이라고 하면서 감싸주었다.[6]

2.2. 왕의 누나


1545년(명종 즉위) 7월에 공주의 남동생 경원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당시 명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였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게 되었다. 이는 인종에서 명종으로의 단순히 왕위 승계가 아닌, 인종을 지지하던 대윤에서 명종을 지지하던 소윤으로의 정권 교체를 의미하는 격변이었다. 인종은 워낙 치세가 짧았고, 또 동복형제가 아니어서 그런지 기록에서 어떤 특별한 관계 형성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동복형제이자 나이 차 나는 어린 남동생 명종이 즉위하자 왕의 누나로서 공주의 권세를 누리게 된다.[7]
이 시기 의혜공주의 남편 한경록이 위사공신[8]으로 책록되었고, 뒤이어 청원부원군으로 지위가 높아졌다. 오죽하면 당시 한경록을 후한 광무제의 사위로서 총애를 받다가 화를 입은 양송에 비유했으니 나중에 한경록의 최후를 생각하면 틀린 비유도 아니었다.[9][10]
1556년(명종 11) 1월 9일 공주의 집에 혼례가 있어서 비단이 필요했다. 본래 국법에 사신으로 갈 때는 사무역을 금지하는데 역관 한희수를 통해 사무역을 했고, 검은 비단 70필이 적발되는 일이 있었다. 역관 한희수가 의금부에 잡혀 있었는데, 공주가 명종에게 청해 역관의 죄를 없애주었다. 이때 사관은 "여알(女謁)이 크게 행해졌고 국법이 크게 손상되었다"고 썼다. 여알은 ''''대궐 안에서 정사를 어지럽히는 여자''''를 뜻하니 의혜공주 뿐만 아니라 문정왕후까지 저격하는 의미로 추측할 수 있다.[11] 하지만 그러기 전에 명종과 의혜공주 남매의 우애가 좋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명종은 의혜공주가 병 들었다는 소식에 공주의 사저로 나갔는데, 이때 신하들이 "임금이 한번 움직이는 것도 반드시 조정에 물어야 하는데 왜 안 물어보고 하세요?" 하자 "옛날부터 다들 하던 거라서 그랬고, 이런 건 신하들과 의논할 필요 없다"고 했다.[12]

2.3. 사후


의혜공주의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산119-39번지에 있다.

3. 여담


  • 명종이 친히 공주의 병문안을 하고 저택을 감상하였는데, 후원 별관에 올라 오랫동안 감상하고 나서 "금중(禁中)에도 이런 좋은 경치는 없다"고 감탄하였다.
  • 의혜공주와 한경록은 '숯장수와 혼인한 공주' 라는 설화의 주인공들이다. 어느 날 중종은 딸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덕이냐?"라고 질문하였다. 다른 공주와 옹주들은 중종의 덕이라고 말했으나 의혜공주는 중종의 덕만은 아니며 "한때의 영화는 물거품 같은 것"으로 들었다고 대답했다. 이에 중종은 노하여 의혜공주를 다음 날 새벽 동대문이 열릴 때 제일 먼저 들어오는 자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하였다. 다음 날 새벽 동대문에 제일 먼저 들어온 사람은 숯장수 한경록이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성품 덕분에 그는 임금의 사위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 청원위 한경록은 기생 옥생향과 간음하여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1] 의혜공주 태지석에서 확인 가능하다. # [2] 본관은 청주, 자는 중수(仲綏)다. [3] 적장녀는 장경왕후 윤씨 소생의 효혜공주이다. [4] 중종실록 65권, 중종 24년 5월 6일 경자 2번째기사. # [5] 중종실록 67권, 중종 25년 2월 3일 계해 3번째기사. # [6] 보통 부마에 대해서는 역모가 아닌 이상 너그럽게 처분하는 편이었다. 중종은 이미 연산군과 어울려 다닌 휘숙옹주의 남편 임숭재에 대해서 사후 처벌을 논하지 않았었고, 후대에는 효명옹주의 남편이 역모죄 때문에 죽는 정도다. [7] 명종은 1534년생으로 문정왕후가 34세의 늦은 나이에 본 막내 아들이다. [8] 을사사화에서 윤임·유인숙 등 대윤을 숙청한 공로로 명종대에 책봉된 공신이다. 그러나 1577년(선조 10) 전원 삭제된다. [9] 한경록은 나중에 임진왜란 중에 불우하게 죽는다. [10] 1556년(명종 11) 9월에는 한경록의 집에 벼락이 떨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하늘이 벌을 내린 거라고 할 정도로 평판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11] 1553년(명종 8)부터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거두고, 명종이 친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문정왕후의 영향력은 존재했겠지만(...) [12] 명종실록 29권, 명종 18년 4월 29일 병자 1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