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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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인조의 고명딸. 어머니 귀인 조씨의 장녀로 동복 동생으로 숭선군, 낙선군이 있다. 어려서는 부모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으나 효명옹주로 산 시간보다 ''''김세룡의 처''''로 산 시간이 더 많은 인물이다.
2. 생애
2.1. 축복받은 어린 시절
1637년(인조 15) 당시 궁인이었던 조씨가 옹주를 낳았다. 이에 인조는 종4품 숙원의 품계를 내려주고 더욱 총애했는데, 병자호란 직후의 음울하고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고명딸의 탄생은 인조의 유일한 기쁨이었다.
그래서 인조와 귀인 조씨는 옹주의 무병장수를 바라며, 온갖 비방을 동원했다.[1]
우선 옹주의 배냇저고리는 흰색 옷감으로 만들었는데, 목 주변의 옷깃은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붉은색은 단목(丹木)에서 추출한 염료를 사용하였다. 배냇저고리에 붉은색을 물들인 이유는 재앙을 불러오는 온갖 악귀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다. 그리고 비단으로 만든 족두리도 준비했다.[2] 이 족두리 안쪽에는 진한 붉은색의 주사(朱砂)를 발랐다.
또한, 수레바퀴의 축에 쓰이는 나무 조각[3] , 주목(朱木)의 껍질[4] , 벼락 맞은 나무[5] 등을 준비했다. 이런 물건은 대부분 옹주의 유모인 계옥이 수집했다.
옹주의 손톱과 발톱도 그냥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모아 두었다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부적으로 잘 싸서 보관했다. 효명옹주는 이것이 습관이 되어, 다 자라서도 자신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 부적에 싸서 보관했다고 한다.
2.2. 인평대군과의 갈등
아버지의 사랑받는 딸이었으니 옹주는 할 말과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하는 당돌한 성격이었다.
어느날 궐 안에 잔치가 벌어졌을 때, 효명옹주는 이복 오빠 인평대군의 아내인 복천 부부인 오씨와 누가 윗자리에 앉을 것인가를 두고 다툼을 벌인 일이 있다. 오씨는 "작급으로는 내가 옹주보다 아래이나[6] , 혈통으로써는 내가 옹주보다 먼저다"라고 주장했으며, 효명옹주는 "부왕이 계시니 내가 먼저다" 라고 주장했다.
엄밀히 말해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인조가 살아있든 죽든 옹주의 품계는 무계이나 부부인은 정1품이다. 하지만 오씨의 남편 인평대군이 효명옹주보다 15살 많은 이복 오빠이자 적통 대군이고, 오씨는 효명옹주에게 손위 올케가 된다. 각자 왕실의 법도와 집안의 예법에 따라 자신이 위라 주장한 것인데 모두 일리가 있었기에 주변 사람들도 누구 편을 들어주도 애매한 상황이라, 일이 수습되지 않고 커져 인조에게도 알려졌다. 이때 인조는 딸 효명옹주의 편을 들어, 딸이 며느리보다 윗자리에 앉도록 했다.[7]
이 일 이후로 효명옹주와 인평대군 부부는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졌고, 옹주의 혼례 때 인평대군은 저주의 뜻이 담긴 베개를 들여보내기도 했다. 추안급국안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79세의 여자 거사 설명(雪明)의 진술에서 "조 귀인[8] 이 나에게 베개를 하나 줬는데, 보니 꽤나 좋은 베개라 '이런 물건은 제게 필요없습니다."라고 하니, 조 귀인이 '인평대군 방에서 보낸 베개'라고 하면서 직접 베개를 뜯어서 검은 비단으로 된 주머니를 보여줬는데, 그 안에는 노루의 발굽과 같이 생겼다."고 했다.
2.3. 화려한 혼인
11살이 되던 인조 25년(1647년), '효명옹주'에 봉해졌다. 같은 해 인조는 옹주의 신랑감을 간택하게 했는데, 귀인 조씨는 딸을 권신 세도가인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과 혼인시키기 위해 김자점의 동의 하에 김세룡의 사주팔자를 조작했고[9] , 그 결과 김세룡은 옹주의 부마로 선발되었다.
효명옹주의 혼인에 쓰인 옷과 물건은 무척 호화로웠다고 한다. 게다가 옹주는 혼인 후에도 2년간 궁에서 살았으며[10] , 여전히 궁중에서 인조의 편애를 받으며 지냈다. 옹주의 남편 김세룡은 문안 인사 때에나 궁궐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입궁했다고 해도 궁중에서 잘 수 없었다. [11] 그러니 결혼했어도 사실상 독수공방이나 마찬가지였다. 효명옹주는 결혼 2년쯤 후인 인조 27년(1649년) 4월 21일에야 출합했다.
2.4. 아버지의 죽음 이후
효명옹주가 출궁한 지 약 1개월 후인, 인조 27년(1649년) 음력 5월 8일, 병석에 드러누운 인조는 새벽에 다음 후계자인 왕세자(효종) 내외를 찾지 않고 조 귀인의 세 자녀(효명옹주, 숭선군, 낙선군)를 찾았다. 인조는 왕세자(효종) 앞에서 "3명의 이복 동생들을 벌(罰)하지 말고, 죽는 순간까지 친형제처럼 사이좋게 지내고 많이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인조의 '승하(昇下)'는 효명옹주와 조 귀인 모녀에게도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믿었던 다른 버팀목들마저 인조의 승하와 함께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영의정 김자점과 봉림대군은 더 이상 두 모녀의 버팀목이 아니었다.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은 조선 제17대 왕, 그 왕위에 오르자마자 영의정 김자점을 그자리에서 파직시키고 귀양 보냈다. 조 귀인이 기대했던 것과는 180도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조 귀인과 김자점은 온갖 욕을 먹어가면서도 악역을 자처해 애를 써서 봉림대군을 인조의 다음 후계자로 확립했는데, 막상 결과는 "배신"이었던 것. 그들의 입장에서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었지만, 효종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운 '''강신(强臣)'''을 제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 귀인은 효명옹주의 사가에서 영이라는 예쁜 소녀를 데려다 자신의 큰아들 숭선군의 첩으로 들였는데, 문제는 숭선군의 아내 신씨의 이모가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장렬왕후)였다는 것. 숭선군 부인 신씨(장희빈을 도운것으로 알려진 동평군의 어머니)가 이모 자의대비에게 달려와 울면서 하소연하자 자의대비는 영이를 고문하며 추궁했고, 겁에 질린 영이는 "조 귀인이 자의대비와 효종을 저주한다"는 자백을 했고 그대로 군기시 앞에서 거열형에 처해진다.
2.5. 조 귀인의 저주 사건
인조 사후 1651년 귀인 조씨가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한 일에 관해 여종들을 국문할 때, "효명옹주가 옷 소매 속에다 사람의 뼈가루를 담아서 대궐과 이복 오라비인 인평대군의 집에다 뿌리고 흉한 물건을 궁궐 주변에 묻었다"는 자백이 나왔다.
야사에는 "효명옹주는 효종이 자신을 멀리하자 시아버지(혹은 시할아버지 김자점)를 왕으로, 자신은 세자빈(혹은 세손빈)이 되려고 했다"고 한다.
효명옹주와 남편 김세룡을 국문하라고 요청했으나, 효종은 김자점의 손자였던 김세룡만 국문하였다. 효종은 조씨의 목숨은 빼앗았지만 그 자식들에겐 달리 유감(劉感)이 없었고 혈육의 정으로 최대한 목숨은 보전해주려 나름 노력했다.
2.6. 불행한 말년
남편 김세룡, 시조부 김자점이 사지가 찢기는 처형(사지절단을 당하는 극악의 형벌)으로 명을 달리하자 효명옹주 역시 옹주 작위를 박탈당하고 김처[12] 라는 본인에게는 상당히 모멸적인 칭호로 불리게 됐다. 이후 강원도 통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1652년 통천의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경기도 이천로 옮겨갔다.
1655년에는 효종의 명으로 유배지를 교동으로 옮겨 남동생들인 숭선군, 낙선군과 함께 살다가 1658년 해배하였다. 오빠 효종은 물론 생질 현종과 종손 숙종까지 이들 삼남매를 배려해주어 숭선군과 낙선군은 왕실 어른으로 상당히 우대를 받았다. 숭선군의 장남이자 효명옹주의 조카인 동평군도 청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올만큼 명망있는 종친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 반면에 효명옹주는 시가인 김자점 일가가 역적 모의로 완전히 작살나서 옹주 작위를 삭탈당했을뿐만 아니라, 불과 15세의 어린 나이로 남편을 잃었기 때문에 단 한명의 자식도 두지 못한채 평생을 해도여자라 불리며 죽을 때까지 감시 속에서 살아야 했다. 보통 왕위계승권이 없는 왕녀들은 역모사건에 휘말려도 신분하락은 해도 감시까지 당하진않는데 이렇게까지한 이유는 효명옹주가 동복형제들인 숭선군과 낙선군과는 달리 어머니 소용 조씨의 저주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렇게 조용히 살다가 1700년(숙종 26년) 64세의 나이로 죽었다.[13] 소용 조씨 소생의 삼남매뿐만 아니라 생존한 인조의 5남 1녀를 통틀어 가장 장수했다.
[1] 사실 인조는 인열왕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넷째, 다섯째, 여섯째 아들을 각각 6살, 1달, 사흘 만에 잃은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귀한 딸을 위해 비방까지 썼다고 봐야한다. [2] 족두리는 성년이 되어야 쓸 수 있었는데, 효명옹주가 태어나자마자 족두리를 준비했던 것이다. [3] 수레바퀴 축에 쓰이는 나무는 단단하고 질겼다. 그런 나무처럼 단단하고 질기게 오래오래 살라는 소망이 담긴 것이다. [4] 주목은 붉은 나무라는 뜻 그대로 껍질이 붉은색을 띄었다. 붉은색의 주목 껍질에는 악귀를 몰아내는 마력이 있다고 믿었다. [5] 벼락은 하늘의 위력을 상징하며, 벼락 맞은 나무에도 그 위력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6] 왕의 서녀인 효명옹주는 옹주를 비롯해 왕의 자녀들은 무품, 대군의 부인은 정1품이다.[7] 이때 다툼의 상대가 복천 대부인 오씨가 아니라 첫째 올케인 민회빈 강씨였다는 판본도 있는데, 신빙성은 없다. 대부인은 엄연히 품계가 옹주보다 낮으니 서로 할 말이 있지만, 세자빈이면 왕이 아니라 선왕도 옹주편 못들어준다. 세자빈은 차기 국모(왕비)로써, 무품 중에서도 왕녀(공주/옹주)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다. 설령 옹주가 아니라 장공주(세자의 누나)여도 손아래 올케인 세자빈에게 함부로 대하면 큰일난다. 효명옹주가 아무리 오만했어도 세자빈에게 덤볐을 가능성은 없다.[8] 소용 조씨가 종1품 후궁 품계의 '귀인(貴人)'이었던 때다.[9] 정태화의 아들과 홍중보의 아들에게 사주팔자와 궁합이 밀렸다고 한다. 그리고 정태화는 나중에 다른 아들을 효종의 딸 숙정공주에게 장가보내 결국 왕과 사돈이 된다.[10] 본래 공주건 옹주건 결혼하면 궁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 한다.[11] 남성들은 왕과 왕자군, 내관들을 빼고는 궁에서 밤을 보낼 수 없었다.[12] 김세룡의 처라는 뜻. 한마디로 선왕의 고명딸이던 왕녀에서 일반인 김씨의 아내로 신분이 '''수직하강'''한 거다.[13] 그로부터 1년 후인 1701년에는 조카 동평군도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사후 역모 혐의에 연루되어 사사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