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석(야구선수)
1. 개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4번째 노히트 노런 기록 투수'''
前 빙그레 이글스, 쌍방울 레이더스의 야구 선수.
2. 선수 시절
군산상고 재학 당시 촉망받던 투수 유망주 중 한 명이었다. 다만 1년 후배인 당시 군산상고 에이스 조계현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조계현이 선발로 나서는 날에 이동석이 구원으로 나오거나 반대로 이동석이 선발로 나오고 조계현이 이어 던지는 경기가 종종 있었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82년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결승전 1차전이다.[1] 결승전 첫 경기 선발이 이동석이었고 3회부터 조계현이 이어던졌다.
그러나 이후 추가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영향인지 당시 연고팀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지 못했고 1987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했다.
데뷔 첫 해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프로 2년째인 1988년에 야구계의 주목을 받는 데 성공했다. 그 해 4월 17일 빙그레와 해태의 맞대결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며 1:0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것도 당대 최강이었던 '''선동열'''과 선발 맞대결을 벌여서.[2] 더 대단한 것은 출루 2개가 수비 실책인 무사사구 노히트 노런이었다는 점이다. [3]
그 해 빙그레는 이상군, 한희민 등의 원조 빙그레 에이스와 새로운 신성 이동석, 장종훈, 이정훈 등의 활약에 힘입어 창단 3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된다. 이 해 이동석의 성적은 평균자책점 3.67 7승 3패 2세이브.
빙그레 vs 해태의 1988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선동열과 이상군, 한희민을 피하게 하기 위한 김영덕 감독의 작전으로 또 다시 선동열과 맞대결하게 된 이동석은 이순철에게 솔로 홈런 1방만 맞으며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문제는 상대가 '''선동열'''이라는 것. 결국 패전의 멍에를 썼다. 이동석은 빙그레가 3패 후 2연승으로 맞이한 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해 해태의 강타선을 겨우겨우 막다가 4회 초에 안타를 맞고 김대중으로 교체되어 패전 투수는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빙그레는 해태에게 패배했다.
그럼에도 다음 시즌이 기대되는 신인으로 촉망받았으나, 그 이후 코치와 감독 등의 불화와 구위 저하로 출장 기회는 점점 줄어갔고, 결국 1992년 4월 10일 쌍방울 레이더스에 현금 트레이드됐다.(당시 트레이드 머니는 2,250만 원) 그러나 쌍방울에서도 별다른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 채 1993년 시즌 후 은퇴하게 된다.
통산 기록은 평균자책점 5.01, 12승 16패 7세이브.
3. 은퇴 이후
지도자로 변신했으며 속초상고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2004년 화순고 감독으로 부임하여 2004년 미추홀기 준우승, 2006년 대통령배 4강, 2007년 청룡기와 대붕기 16강 등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2013년부터 세한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 재직했다.[4] 아쉬움이 많았을 선수 시절에 비하면, 지도자로서는 모범적인 길을 걷고 있는 듯. 2019년을 끝으로 사임했다.
4. 기타
선수 시절 경기에 내보내주지 않는다고 감독과 코치들과 불화가 많아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투수 치고 선수 생명이 길지 못했다.
당연하겠지만, 선수 시절 최고의 순간이었던 노히트 노런 당시의 공을 '''지금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노히트 노런 당시 신었던 양말을 그 이후로도 계속 신었으며, 구멍이 나서도 계속 신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그 양말은 원래 '''이상군의 것'''이었다고 한다.
[1] 원래 결승전은 단판제지만 첫 경기에서 연장 12회 무승부를 기록하자 다음날 2차전(재경기)이 연이어 열렸다.[2] 이보다 앞서 OB 장호연이 1988년 롯데와의 원정 개막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여 1988년 시즌에만 두 번의 노히트 노런이 나오는 진기록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당시 이동석의 상대였던 선동열도 이듬해인 1989년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3] 수비실책들만 아니었으면 KBO 최초로 퍼펙트게임이 가능했었다.[4] 종전 감독은 청주고 감독을 지냈고, 역시 빙그레에서 투수로 활동했던 장정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