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군

 


'''이상군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펼치기 / 접기 ]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99'''




[image]
'''북일고등학교 감독'''
'''이상군(李相君)'''
'''생년월일'''
1962년 4월 21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충청북도 증평군[1][2]
'''출신학교'''
청주우암초 - 청주중 - 천안북일고 - 한양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5년 드래프트 1차 (빙그레)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 (1985~1996, 1998~2001)'''[3][4]
'''지도자'''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5] (1998~2003)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04~2005)
한화 이글스 재활군 재활코치 (2007)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07~2009)
한화 이글스 2군 투수코치 (2009)
한화 이글스 2군 재활코치 (2010)
한화 이글스 3군 감독 (2012~2013)
한화 이글스 육성군 총괄·투수코치 (2014~2015)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5~2016)
한화 이글스 1군 투수코치 (2016~2017)
한화 이글스 감독대행 (2017)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20~)
'''프런트'''
한화 이글스 스카우트 (2009)
한화 이글스 운영팀장 (2011~2012)
한화 이글스 기술자문위원 (2018)
한화 이글스 스카우트 총괄 (2019~2020 )
'''병역'''
병역특례[6]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
3.1. 코치 1기 시절
3.2.1. 시즌 종료 직후
3.3. 북일고등학교 감독
4. 스카우트 총괄 경력
5. 연도별 주요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


[image]
빙그레-한화 이글스 소속의 투수. 현역 시절의 등번호는 18번.

2. 선수 경력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부친인 김종희천안 북일고에 야구부를 만든 후 에이스를 찾다가 청주중학교에서 두각을 드러내던 이상군을 발견, 이상군을 북일고로 데려올 것을 직접 지시하고 상당한 돈과 노력을 쏟아 북일고로 스카우트해왔다. 엄청난 자금을 투자한 것뿐만 아니라 형들의 직장까지 책임지는 조건으로 스카우트하였다 한다.
[image]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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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프로 데뷔 시절
(출처 : 포토로) 한화 이글스 초기 시절[7]
투구폼
이후 이상군은 천안북일고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어 기대에 보답했고, 김종희가 사망한 뒤 아들인 김승연이 이어서 대학을 졸업한 이상군을 빙그레 이글스의 창단멤버로 불러들였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지금도 김승연의 술동무라고 한다. 게다가 김종희 문서에도 나오지면 김종희가 사망했을 때 관 운구까지 했다고.[8]
이상군은 바로 두각을 드러내 팀의 에이스로 등극한다. 즉 '''이글스의 초대 에이스'''이다. '컴퓨터 제구'라 불릴 만큼 정교한 제구력이 특징[9]이었다. 1986년에는 3경기 연속 완봉승과 '48⅓이닝 연속 무사사구' 기록을, 1987년에는 7경기 무사사구 경기 기록을 세웠을 정도였다. 이러하듯 제구 만큼은 정말 빼어났기에 프로야구가 시작된 지 어느덧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KBO 리그 마운드에서 한 번이라도 공을 던진 투수들 중 다른 것은 몰라도 제구는 이상군을 앞설 투수가 없다는 말도 있다.[10]
하지만 빙그레는 신생구단으로 약체일 수밖에 없었고 팀내에 쓸 만한 투수는 이상군-한희민뿐이었다. 게다가 한희민은 언더핸드라는 약점이 있었고[11][12] 이는 이상군에게 더 많은 부담이 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때문에 데뷔 시즌부터 2년동안 490이닝을 던졌고, 1988년은 마무리로 규정이닝을 넘겼다. 이 3년 동안 당한 혹사로 인해 안타깝게도 빨리 진 비운의 투수.
1989년부터는 본인의 부상과 맞물려 에이스 자리를 송진우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에이스의 계보는 송진우-정민철-구대성-류현진 순으로 이어진다. 이후 1996년 은퇴 전까지 후위선발(주로 5선발) 자리를 그럭저럭 지켰다.
1996 시즌 후 은퇴하고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고, 돌아와서 코치직 수행 중 1999년에 다시 플레잉 코치로 복귀하여 한용덕, 김해님, 구대성과 함께 불펜진의 한 축을 맡으면서 빙그레 시절 못했던 우승의 기쁨을 함께 한 후, 2001년에 은퇴했다. 1999~2001년은 플레잉코치(1군 투수코치)였는데, 선수 겸 코치였던 탓에 이 시기 지도를 잘못해서 망친 선수는 없었다.
1996년 은퇴 당시 94승을 기록했지만 1999년 복귀하여 5승을 기록, 2000년 4월 30일 감격스러운 100승을 달성하였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이글스 최후의 창단 멤버'''이다. 다만 플레잉코치 기록을 제외하면 1997년 은퇴한 이강돈이 최후의 창단 멤버가 된다.
역대 KBO 최다패 공동 8위이다. 그런데 이때 평균자책점이 '''2.63'''. 86년에 기록했는데 평균자책점이 저 정도면 당시 강팀에 있었다면 15승도 가능할 수치였다. 86년의 빙그레는 창단팀으로 최약체였기 때문에 패전이 많았던 것. 2할대 승률을 찍으면서 무난히(?) 당시 꼴찌였던 7위를 했다.
심판들이 스프링캠프를 차려서 스트라이크-볼 판정 훈련을 할 때 이상군을 불러 미리 약속한 로케이션으로 공을 던지게 하고 그 판정기록을 가지고 심판들을 훈련시킨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하일성이 그에게 붙인 별명은 심판 훈련용 선수. 이런 일화는 송진우에게도 있다.
창단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약체팀이었던 빙그레의 마운드를 지탱한 선수였으며, 86년 같이 데뷔한 동갑내기[13] 한희민과 함께 원투펀치를 이뤄 마운드에서 버텨주면서 빙그레 이글스라는 팀은 빠른 시간 내에 강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만큼 선수 이상군은 이글스의 역사에서 손꼽히는 투수이다. 통산기록으로 봐도 15시즌[14] 동안 320경기 100승 77패 30세이브 '''62완투'''[15] 10완봉 1411⅔이닝 평균자책점 3.30으로 엄청난 투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레이 스타일을 보면 구속[16]이나 구위는 그저 그런 편이었지만, 그의 진가는 공을 컨트롤하는 데 뛰어났다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연령 누적과 혹사 등으로 공이 약해지는 바람에 에이스 자리에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본인은 성적이 안 좋아지자 계속해 제구력을 갈고 닦는 훈련을 한 모양이나, 아무리 제구가 잘 되어도 힘이 받쳐주지 않으니 뭐... 아래 보다시피 후기 통산 성적은 꽤나 처참하다. 좋은 제구로만은 계속 먹고 살기 힘들다는 방증. 비슷한 사례로 2018년 시즌의 윤성환이 있다. 한편 이러한 플레이 스타일에서 비롯된 컨트롤을 중시하는 성향 때문인지 투수코치가 되어서 구속보다 제구를 중요시하며, 선수들이 구속을 낮춰서라도 제구를 잡게 하는 코칭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본인이 제구만 중시하다 결국 효과를 내지 못하고 부활하지 못했듯이, 제구 위주 코칭은 코칭받은 선수들도 효과를 내지 못했다.[17] 이 덕에 이상군은 프로야구 최악의 투수코치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2.1. 플레이 스타일


평범한 구속과 구위를 제구력 하나만으로 커버했던 타입이다. 전성기(1986~88) BB/9가 1.69로 동시기 1위이며, 통산으로만 봐도 2.43으로 1000이닝 이상 던진 투수들 중 역대 13위이다.[18]
재미있는 건 BB/9가 저렇게 낮음에도 K/9 또한 86~89년 3.65에 통산 3.97로 낮다는 점으로, 제구력을 이용해 삼진을 잡는 게 아니라 범타를 유도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가졌다고 보면 적절할 듯 싶다. 즉 제구력으로 승부하는 기교파 투수인 셈인데, 보통 기교파 투수가 변화구로 승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상군은 꽤 이례적인 타입.
다만 1988년 이후 혹사 누적으로 인한 부상 때문에 공의 위력이 많이 줄어들어 뛰어난 제구력을 갖고도 하락세가 오게 된다. 보통 뛰어난 제구력을 가진 선수는 선수생활을 오래 한다는 인식이 있지만, 공의 파워가 감소해서 전성기가 끝나는 경우는 제구파 투수들에게서도 꽤 흔한 사례다. 공을 스트라이크존 경계에 넣든 존 구석에 걸쳐 넣든 원하는 위치에 넣어봤자 타자가 칠 수 있으면 끝이니까. 그나마 구위가 떨어진다고 제구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제구파 투수들이 프로에서 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거고, 이상군도 그랬던 경우다.
전성기에는 강철체력을 가졌던 투수로 1986~87년 선발로써 기록한 성적이 68경기 57선발 43완투 490이닝으로 선발등판 및 완투는 동시기 1위, 이닝은 2위인데 1위인 최동원과 1이닝 차이밖에 안 난다. 1988년에는 마무리로 규정이닝을 채웠다. 다만 1989년부터 부상에 시달리며 강철체력은 사라지게 된다. 여튼 덕분에 전성기에는 고무팔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3. 지도자 경력



3.1. 코치 1기 시절


2001년 5월 은퇴 후 곧바로 한화 이글스의 코치를 맡으며 본격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맡는 팀의 투수진을 전부 개발살을 내는 위업을 발휘했다.''' 2003년까지 한화 코치로 있다가, 이순철의 부름을 받고 2004년부터 LG 트윈스 투수코치로 부임, LG 투수진을 모조리 박살내놓았다.[19][20] 이순철이 2006년 시즌 중 물러나자 그도 LG에서 잘렸고, 곧바로 친정팀 한화로 돌아와 2군 투수코치로 선임되었으나, 한화로 돌아온 뒤 한화 투수진도 박살내버렸다(...).
특히 선수시절 주특기였던 '컨트롤'을 후배 투수들에게 전혀 가르치지 못하고 오히려 구위만 떨어뜨리는 최악의 결과만을 잇따라 선보였다. [21]
한화 이글스로 복귀한 후에는 2군 투수코치로 선임되었으나, 정작 2군에서 유원상, 양승진 등 유망주들을 망가뜨리고 있었고, 김인식에 의해 무리하게 굴려져 재활 중이던 윤규진의 투구폼에도 무리하게 손을 대며 오히려 구위가 떨어지고 자주 부상에 시달리게 되는 등 기량 하락의 원인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7년 8월, 1군 투수코치를 맡던 한용덕 코치가 투수 기용 문제로 인해 김인식 감독과 충돌을 빚으며 2군으로 밀려나자 대신 1군으로 올라오며 남은 시즌 동안 1군 투수코치를 맡았는데, 한용덕 코치가 있었을 당시에 상위권이던 평균자책점이 꼴찌로 급 추락해버리며 큰 대비를 보여줬으며, 이 때 용덕매직과 대비되는 단어인 ''''상군매직''''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상군매직 : '''1년차''', 약간의 제구력 상승과 급속한 구위하락. '''2년차''', 제구력 하락. '''3년차''', 시 to the 망.[22][23] 대표적인 상군매직의 피해자론 유원상이 꼽힌다. 이후 선배투수의 은총으로 어찌어찌 버텨나갔지만, 결국 LG 트윈스로 트레이드된 후 2012년에 반짝했으나 2013년에는 정작 팀의 비밀번호 탈출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
2009년 꼴찌를 할 때까지 팀에 꾸준히 머물러 있었고, 이 때문에 팀의 최강 파벌인 북일고 출신에 북일고 출신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케이스라 북일고 파벌의 수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기에 북일고 파벌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다. 다만, 이 라인이 없었다면 같은 북일고 출신이었던 한용덕 코치가 부활할 기회도 잡지 못했을 거란 아이러니는 있지만...[24][25]
결국 2009년 하반기에 한화 이글스 2군으로 내려가고 이후 프런트로 이동, 잠시 이인영 대리와 함께 스카우터로 일하다가 다시 2군/재활군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다만 유창식의 등판경기에 이인영 대리와 함께 모습을 나타낸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온 걸 보면 둘 다 같이 업무를 봤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2001년 이후로 한화의 스카우터진을 진두지휘 김정무 운영팀장이 2011년을 끝으로 사직하고, 그 후임으로 부임.
이상군 본인의 성격은 온화하고 주변의 평가도 좋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성격 때문에 코칭에서도 선수에게 터치를 안해서 코치로서의 역할이 거의 없다는게 문제라는 이야기가 많다.
과거 빙그레-한화의 대투수로 명성을 날렸음에도 다른 야구선수들의 항목이 많이 작성된 이후에야 항목이 작성된 것만 봐도, 코치가 된 후의 그의 실적과 그로 인해 자신의 위상이 얼마나 추락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정말 사람은 참 좋으신 분(...)'''인데 지도자로서는 빵점이라는게 중론. 송신영 영입 건으로 그나마 '''코칭스텝만 아니면 된다'''는 말도 있었지만, 송신영의 먹튀화와 그의 손을 거친 것으로 알려진 용병 투수들이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스카우트로서의 자질 역시 최악임이 입증되었다.
한화의 장점이라고 하는 레전드에 대한 대우의 어두운 면을 잘 드러내는 사례.
김응용 감독의 부임 이후에도 용케 잘리지 않고 살아남았다.[26] 정말 질기다.
2014시즌부터는 육성군 총괄 겸 투수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팬들은 거품을 물며 경악하는 중. 심지어 2014 시즌 후 한용덕, 이정훈과 같이 '''차기 감독 후보'''로 경합 중이라는 어용성 기사가 나오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차기 감독으로 선임되는 여부와 관계없이 한화에서 짤릴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라고 볼 수 있다. 하기사 '김종희가 직접 데려온 인물 + 김종희 장례식에서 관을 들었을 정도로 구단주 가족과 가까운 사이(!) + 김승연의 술친구'라는 시너지가 합쳐 절대 잘릴 리 없는 인물 중 하나이니 팬들은 그냥 단념하는 게 좋을지도.
결국 김성근 감독 취임 후에도 김재현, 김정준 등 김성근 사단 코치진이 취임하고 대부분의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코치 들이 잘려나가는 가운데[27][28] '''끝까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물이 되었다.''' 팬들도 차라리 사람은 좋으니 현 자리에서 만족하고, 1군 요직에만 앉는 일이 없기만 바라는 상황.
한화 이글스의 팬들에게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이상군은 단지 코치로서의 능력이 부족할 뿐이지 명예욕/권력욕이 심하거나 딱히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최소한 팀 케미스트리를 망가뜨리거나 감독의 팀 장악을 방해할 성격은 아니라는 평이 많다는 것.
이러한 추측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다시 한 번 강조하는데 이 이상군은 '''한화그룹의 전대 회장이 직접 손을 써서 데려왔고 현 회장의 술친구인 동시에 전대 회장의 장례식에서 관을 운구한 4명 중 1인일 정도로 오너 일가와의 친분이 각별한 인사'''이다. 본인이 마음만 먹었더라면 SK의 신영철이나 민경삼, 두산의 김태룡, 요즘 핫한 롯데의 배재후, 이문한, 공필성 같은 인물들은 애교로 보일 수준의 막장 깽판을 부리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그런 적은 없다. 선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은 몰라도 선수단과의 불화, 직접적인 갈등/마찰을 빚은 적은 없다는 것. 때문에 1군 요직이 아닌, 직함은 거창하지만 실권은 거의 없는 사실상의 명예직 정도로 타협하면 딱히 팀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 타입이므로 어찌어찌 감수하고 안고 갈 수는 있는 부류의 사람이긴 하다. 일단 2015년 보직은 육성군 총괄만 맡고 육성군을 담당하는 투수코치는 이정호로 확정되었다.
2015년 8월 1일 1군 불펜코치로 1군에 복귀했다. 더욱이 이상군을 대신해 2군으로 내려간 코치가 '''김성근 감독의 오른팔'''인 박상열 코치여서 일부 한화팬들 은 이상군의 1군 복귀를 두고서 이상군에게 감독수업을 시키고 김성근을 견제하려는 청계산의 의중이 담긴 인사가 아니냐는 음모론까지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이상군이 합류한 한화는 거짓말같이 '''5연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역대급의 DTD를 시전, 결국 '''8년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이라는 흑역사를 쓰고 만다.
다만 2015년의 한화 이글스는 김성근 감독이 전권을 가진 왕조 형태이고, 사실 불펜코치가 하는 건 그냥 전화 받아 투수 보내는 역할 정도라 사실상 뭐 명예직이긴 하다. 그리고 2015 시즌 종료 후, 김성근 사단의 일본인 코치 니시모토 다카시, 아베 오사무, 후루쿠보 겐지, 다테이시 미쓰오와 김응용 사단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전종화, 팀 프랜차이즈 출신 이영우의 해임이 확정되었다. 역시나 이상군은 '''또 살아남았다.'''
이 항목이 더 길어지지 않기를 바랬지만... 2016년 7월 2일 은근슬쩍 정민태와 자리를 바꾸어서 1군 투코로 올라왔다. 사실 이 정도 기사가 뜨면 굉장히 난리를 피우면서 망했네 어쩌네 소리가 나오는 게 일상적이지만, 정민태 역시도 무능은 마찬가지고 결정적으로 이 팀 마운드가 개판이 된 건 이런 이유저런 이유 때문이라... 시즌 종료 후 김재현, 쇼다 코조, 오키 야스시, 바바 토시후미 등 4명의 코치가 사임했으며, 박종훈 단장이 부임하며 프런트에서 김성근의 권한 대다수를 회수한 후로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중.
이상군이 1군 투수코치로 컴백한것에 대해 두가지 이유로 예측 가능한데, 첫째는 정민태 코치가 바른 소리를 하다가 잘려나갔다는 것. 그러나 이 경우에는 다른 코치가 아니라 왜 굳이 이상군이 올라왔느냐는 반박이 가능하다. 둘째는 김성근 감독의 견제용으로 올라왔다는 것. 이상군 코치는 한화그룹 최고존엄님의 비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도 감히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따라서 이 견해가 신뢰를 얻고 있다. 팬들은 제발 이상군 코치가 김성근 감독에게 투수운영에 대해 쓴소리를 하기를 바라는 중. [29]
뭐 어쨌든 이 분 성격이 원체 좋아서 쓴소리를 못하는 성격이라 그런지 김성근투수운용은 그대로 행해졌고, 권혁송창식은 결국 재활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이상군에게도 혹사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3.2. 한화 이글스 감독대행 시절



10월 4일 2017년 시즌 종료 이후 엠스플 전수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최근 거론되는 이상군 대행의 내년 거취를 포함한 질문에 감독 선임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라며 답했다. 이상군 감독대행은 자신이 감독실을 쓸만한 그릇이 아니라며 중요한 손님이 방문할 때를 빼면 시즌 내내 안 썼다는 것과 기자의 정식 감독에 대한 의향을 묻자 올 시즌 팀 성적을 이야기하며 감독 선임은 하늘의 뜻이라고 빙빙 돌려 즉답을 피해갔다. 정식 감독 자리를 원하지는 않아 보인다.
프런트와 현장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소통''''이라고 말하였고 올 시즌 최대 수확인 김재영에 관해서 김재영이 볼넷이나 안타 맞으면 덕아웃만 쳐다봤는데[30] 요즘은 자신감이 생겨서 안 쳐다본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해주었다. 더욱이 혹사를 없애기 위한 건강야구에 관해서 '''"당장 눈앞의 성적에 연연하면 결국 피해는 선수들이 입게 됩니다. 어느 감독이든 당장의 승리가 더 달콤하기에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지 못하곤 하는데 옛날 기억만 떠올리고서 팀을 운용해선 안 됩니다. 많이 던진 선수가 있으면 최대한 쉬게 해줘야 합니다."'''[31]라며 '''전임자'''와는 전혀 정반대적인 가치관이 담긴 발언 및 행동을 통해 2년 내내 전 감독만행에 절망해 왔던 반 김성근 성향 한화 팬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다.
시즌이 끝나고 임수민, 전대영, 신경현 등 프랜차이즈 출신이나 권영호, 박영태, 윤재국 등 잔존 김성근 사단 코치진 11명이 정리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고, 구단으로부터 해외 연수 또는 육성군 총괄 보직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구단에선 일단 대행으로서 팀을 수습한 것을 꽤 높게 평가하는 듯. 팬들은 대체로 '일단 수고 많았고, 육성군으로 가서 투수 성장 정체시키지 말고 해외 연수라도 다녀오라'는 식으로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반응.[32] 이후 스프링캠프에서 나름 옥석이 가려지자 '시즌 하날 날리기는 했어도 꾸준히 신인 올리니까 잡음 줄이면서 유망주를 찾아내기는 했다'며 많은 팬들의 인정을 받기도.

3.2.1. 시즌 종료 직후


2017년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이글스의 새 감독으로 한용덕 전 두산 수석코치가 부임하였고 이상군 전 감독대행은 충청-대전 지역 고등학교 야구부를 순회하면서 아마야구 선수들을 코칭한다고 한다. 그러나 신경현의 아들로 유명한 신지후를 만난 사진이 공개되자 팬들은 "제발 제구 잡는다고 구속까지 잡아주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주세요"라며 간절히 부탁하는 중.
김원석에게 원색적으로 비난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김원석을 걱정하는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3.3. 북일고등학교 감독


2021 신인 드래프트에서 천안북일고 출신선수가 한명도 지명이 안되자 한화그룹의 주도로 2020년 11월 북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2010년대부터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내지 못하며 내리막길을 걷다가 결국 지명선수0명이 된 모교 야구부의 재건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됐다.[33]

4. 스카우트 총괄 경력


감독대행 이후 기술자문위원을 거쳐 스카우트 총괄로 임명되었다.# 이 소식이 처음 들려왔을때만 하더라도 스카우터로 성과를 인정받던 이정훈과 보직을 맞바꾼 탓에 한화 팬들은 걱정을 했었다. 먹튀가 된 송신영을 운영팀장 시절에 모셔오다시피 영입했던 당사자가 이 사람인지라... 이후 처음으로 맡은 드래프트에서 4라운더 강재민을 픽하여 대졸 지명을 해야하는 신설 규정을 채웠음에도 5라운더에 다시 대졸 장웅정을 픽하였고, 팬들이 싫어하는 대졸 선수를 뽑아서 우려도 많았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8순위로 지명한 20시즌 드래프트가 1년 차부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평가가 완전히 뒤집혀 신뢰의 대명사로 반등했다. 비록 신지후, 남지민, 한승주로 대표되는 상위 라운더 투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하면서 장기 육성 대상자로 빠졌으나 중위 라운더들이 벌써부터 1군 자리를 꿰차고 있다. 9월 15일 기준 20시즌 드래프트 대상자 중 WAR 1위를 자랑하며 셋업맨까지 승격, 한화이글스 투수의 단일 시즌 최다 홀드까지 도전하고 있는 4라운더 사이드암 투수 강재민, 강력한 어깨와 .260 근처의 준수한 타격을 선보이며 종종 1군 외야수로 선발 출장하고 있는 3라운더 임종찬, 프로 1년차에 3할 9푼의 고타율로 2군을 평정하고 1군으로 올라와 임종찬과 더불어 외야수로 출장 중인 6라운더 최인호 등 굉장히 잘 뽑았다고 평가할만한 드래프트 성과를 만들어냈다.
특히 경쟁이 덜한 해였거나 조금만 더 빨리 1군으로 콜업됐다면 신인왕 레이스에서 더 강력한 후보가 되었을 수준의 4라운더 강재민과 6라운더인 최인호가 2군을 평정하고 1군에서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
위의 세 명을 제외하고도 5라운더 장웅정도 2군에서 상위권의 성적을 내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1년차에 2군을 평정하는 수준이면 1군에서도 적응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은 유망주들이고, 이미 강재민이 패전조로 시작해 셋업맨까지 승격되며 팀에 기여하면서 성공 확률이 굉장히 높은 드래프트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8라운드에서 뽑은 박정현마저 안정적인 수비와 꾸준한 타격 생산력을 통해 차기 시즌 하주석을 밀어내고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보일 정도로 급부상했다. 덤으로 삼성 라이온스 입단 후 내야수에서 투수로 전향했으나 1군 등판 한 번 없이 방출당한 경험이 있었던 윤대경이 1점대 초반의 ERA를 자랑하며 화려한 데뷔시즌을 보내고 있는데, 윤대경을 일본에서 보고 데려온 사람도 이상군이라 끊임없이 재평가되는 중.
북일고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스카우터를 그만둘 때 경력 있고 유능한 팀원들 덕분이라며 팀에 공을 돌렸다.

5.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6
빙그레
35
'''243⅓'''
(3위)
12
17
1
-
0.414
2.63
216
17
54
'''104'''
(5위)
88
71
1.064
1987
'''33'''
(4위)
'''246⅔'''
(1위)
'''18'''
(2위)
11
2
-
0.621
'''2.55'''
(5위)
233
13
62
'''85'''
(5위)
83
70
1.155
1988
'''38'''
(2위)
135
10
3
'''16'''
(1위)
-
'''0.769'''
(2위)
'''2.40'''
(4위)
120
7
25
47
38
36
1.052
1989
27
140⅓
'''16'''
(3위)
5
3
-
'''0.762'''
(3위)
2.57
138
9
38
74
45
40
1.240
1990
19
86⅓
6
4
0
-
0.600
3.13
91
5
25
30
35
30
1.332
1991
9
12⅓
3
2
0
-
0.600
13.86
36
2
21
20
25
19
4.459
1992
29
96⅔
10
2
2
-
'''0.833'''
(2위)
3.82
89
12
40
55
46
41
1.252
1993
29
128⅓
7
7
3
-
0.500
2.52
115
5
49
51
41
36
1.223
1994
한화
21
107⅔
6
7
1
-
0.462
4.26
116
4
39
46
59
51
1.375
1995
21
97
6
8
1
-
0.429
4.73
106
11
43
43
56
51
1.485
1996
9
23⅔
0
3
0
-
0.000
8.75
35
5
15
11
26
23
2.028
1999
30
57
5
5
1
-
0.500
4.42
59
6
16
38
34
28
1.281
2000
10
30⅓
1
2
3
0
0.333
4.75
32
6
8
15
19
16
1.253
2001
10
7
0
1
0
1
0.000
7.71
10
2
8
3
6
6
2.571
<color=#373a3c> '''KBO 통산'''
(14시즌)
320
1411⅔
100
77
30
1
0.565
3.30
1396
104
443
622
601
518
1.259
완투, 완봉 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6년
'''19완투'''
(1위)
'''4완봉'''
(3위)
1987년
'''24완투'''
(1위)
'''3완봉'''
(3위)
1988년
'''3완투'''
'''1완봉'''
(8위)
1989년
'''7완투'''
'''1완봉'''
1993년
'''5완투'''
'''1완봉'''
1994년
3완투
0완봉
1995년
'''1완투'''
0완봉
<color=#373a3c> 통산
'''62완투'''
(10위)
'''10완봉'''

6. 관련 문서


[1] 청주시 출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송진우2009년 은퇴 당시 매거진 S의 박동희와의 인터뷰에서 '그즈음 같은 증평 출신인 이상군(당시 한화 2군 코치) 선배가 시쳇말로 ‘날아다니던 때’였다'라고 인터뷰한 바가 있다. 따라서 이상군 코치는 송진우와 같은 증평 출신이다.[2] 다만 이상군이 태어난 해인 1962년에는 행정구역상 괴산군 증평읍이었다. 증평군이 괴산군으로부터 별도의 군으로 독립한 건 2003년에야 이루어졌다.[3] 1985 시즌은 빙그레 창단 첫 해라 2군 리그 참가[4] 1996년 은퇴했다가 1998년 다시 플레잉코치로 복귀했다.[5] 1997년은 연수. 1998~2001년은 플레잉코치를 맡았다.[6] 19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준우승#[7] 유니폼 오른쪽 소매에 주황색 '''H'''자, 한화그룹의 로고와 로고 밑에 영문으로 'HANHWA'라고 써진 것으로 보아 1995년~1996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참고로 1994년 빙그레에서 한화로 바뀐 첫 시즌에 오른쪽 소매에는 '''한화그룹'''이라고 써져 있었다.[8] 관을 운구한 것은 맞지만 그것을 개인적 친분관계로 생각하는 것은 과하다. 김종희는 여느 재벌 회장과 다르게 북일학원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컸다. 뒤에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전까지 개교 초기에는 주말을 이용해 북일학원에 자주 들렀다. 이상군이 한양대 1학년에 입학했던 81년 여름 김종희의 장례식이 있었다. 서울을 출발한 장례 차량이 북일학원을 들러 별도의 영결식을 갖고 공주 선영에 엄수되었다. 이 때 야구부원들이 운구 요원을 담당하였다. 이상군은 한양대 1학년으로, 고교 1년 선배 동아대 김진욱 등과 고교 재학생 후배들과 함께 운구에 참여한 것이다.[9] 천하무적 야구단에서 일구회와 치른 경기에서도 등판했었는데, 선수에서 은퇴한 후에도 여전히 칼 같은 제구를 구사하여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였다. 전성기에는 홈플레이트에 10원짜리 동전을 놓고 그것을 맞혔다는데... 이건 믿거나 말거나 수준인 듯하다.[10] 일본프로야구에서는 같은 우완 투수인 키타벳푸 마나부가 정교한 제구력으로 잘 알려져있다.[11] 언더핸드는 좌타자 입장에서 공이 잘 보이기에 좌타자들을 상대하기 불리하다는 한계가 있고, 필연적으로 장타 허용률이 높다. 때문에 한희민은 이강철 등장 전까지만 해도 홈런 공장장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따라다녔다.[12] 무엇보다 1986년 시즌 피홈런 1위가 한희민, 2위가 이상군인데 한희민은 이상군보다 '''68이닝을 덜 던졌으면서 홈런은 1개 더 맞았다.'''[13] 하지만 한희민이 1년 유급한 관계로 이상군이 한희민보다 선배이다.[14] 97, 98은 코치직 수행으로 제외라 실질제로는 13년.[15] 거의 다 86~89년에 세운 것이다.[16] 최고구속은 간신히 140km/h 가까이 찍을 정도였으며 평속은 80년대 중후반 당시 평균수준.[17] 이와 반대되는 경우가 바로 정민태. 구위와 구속 위주로 코칭을 하다보니 그가 다듬은 투수들이 공만 빠르지 제구는 아주 처참하다. 그 결과물이 싸융짱문오족까고마. 공교롭게도 둘이 한화에 같이 있다.[18] 다만 이글스 선수들 중에서는 이상목한용덕이 이상군보다 더 위에 있다.[19] 이상군 이전의 LG 투수코치는 1군 정삼흠, 2군 김용수였는데 둘 다 능력이 없다고 꽤나 까였다. 그러나 이는 상군매직 덕분에 묻혔다(...).[20] 다만 이상군 혼자투수진을 박살냈다는데 대해 살짝 반론거리가 있긴 한데, LG의 전임 감독이 '''김성근'''이었다는 점, 그리고 이순철 역시 이동현 등 부상 선수들을 무리하게 당겨쓰려다가 아예 망가뜨리는 등 각종 삽질을 했다는 점 등이 있다.[21] 그와 관련된 일화로, LG 투수코치 시절 어떤 유망주가 이상군에게 제구력을 잡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하자 이상군은 '''자신의 현역시절 비디오'''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선수 시절 자신의 투구폼을 참고하면서 답을 찾자는 의미였겠지만...[22] 제구를 잡기 위해 팔스윙을 느리게 가져가니 구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팔스윙을 느리게 가져가는 것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당장 잡힌 듯하던 제구도 시간이 지나면서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23] 와중에 몸상태도 느리게 던지는 데에 익숙해지면서 구속도 당연히 떨어지고,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24] 하지만 한화에 실제로 북일고 파벌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된 적이 없으며, 다른 구단 사례를 가지고 추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다.[25] 실제 이상군은 감독 제의를 받은 적이 있으나 자신은 감독감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와 관련해 당시 김상국 북일고 감독이 이상군의 한화 감독 취임을 기정사실화하고 북일고 감독직을 버렸다는 설이 있었으나, 사실은 사생활 문제(도박)가 드러나 해임된 것이었다.[26] 김승연의 술친구라는 위의 글을 생각하면 짤리는게 더 이상한 걸지도...[27] 김응룡 사단에서는 김종모, 이종범, 오대석, 이선희, 신용균이 해임되었고, 프랜차이즈 스타들 중에서는 송진우, 강석천, 조경택이 해임되었다.[28] 그나마 잔류에 성공한 게 장종훈, 이상군, 정민철, 이정훈, 신경현, 임수민인데, 정민철은 10월 30일에 스스로 재계약을 포기한 뒤 MBC 해설위원으로 옮겼고, 장종훈도 이종운 감독의 부름을 받아 롯데 자이언츠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프런트에 있던 한용덕마저 두산 베어스로 옮겼다.[29] 80~90년대까지 대부분 밥먹듯이 혹사를 당했던 투수들이 지도자를 하는 경우 혹사에 꽤나 둔감한 경우가 많은데, 이 분야 최고로는 혹사당해 선수생활이 끝장나고도 감독으로 김성근, 선수 생활부터 감독 생활까지 김인식 등이 대표적이다. 혹시 이상군도? 그런데 어느 팀이든 감독과 코치가 알력이 생겨 파워게임을 하면 그 팀 이미지와 분위기는 망가지기 십상이다. 당장 롯데에서 공필성이 욕먹던 이유가 무능함도 있지만 프런트의 앞잡이로 파벌을 만들거나 다른 코칭스탭과 마찰을 일으켰기 때문. 물론 방관한 점에서 이상군도 책임이 있지만, 그렇다고 구단의 힘을 내세워 이래저래 간섭하고 월권하는 것도 좋은 것은 아니다.[30] 이와 관련해서 전임 감독은 신인 투수들이 조금만 흔들려도 바로 내려버리는 기이한 운영을 하였고 신인 선수들은 전임 감독의 눈치를 보느라 공을 제대로 못 던졌다는 썰이 있었다. 실제로 김재영도 2016년 시범경기 당시 인상적인 투구로 선발을 확정지었지만 첫 선발등판 당시 퀵후크를 당했고 바로 3일 뒤 선발로 나와서 다시 퀵후크를 당한 뒤 패전처리조로 강등당했으니 눈치를 볼 만도 하다. 전임 감독 경질 이후 1회 피안타율이 5할을 넘고 위기 상황마다 볼질을 일삼는 끔찍한 투구를 몇 차례 이어갔음에도 꾸준히 선발 자리를 보장받더니 9월에는 5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할 정도로 큰 성장세를 보였다. [31] 이상군 대행의 평소 성품이 적을 만들지 않는 스타일임을 고려하면, 딱히 특정 인물(특히 전임자)을 직접적으로 비난했다라기 보다는, 그저 개인적인 일반론을 말했다고 볼 수 있다.[32] 감독대행 문서가 분리되기 이전 서술에 순혈이라서 쉴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들은 대체 누가 깠단 말인가? 더군다나 상군매직, 칰무원이라는 단어 역시 이상군이 LG에서 한화로 넘어온 이후 꽤 꾸준히 쓰였던 단어다. [33] 사실 이는 자율형 사립고 전환 이후 예전 같은 공격적인 투자를 하지 않는 게 큰 이유이다. 실제로 북일고는 2010년대 후반부터는 충청권 지역 유망주 위주로 선수 수급을 하고 있다. 그나마 지역 중학교 팜인 온양중, 천안북중 등에서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점이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