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현

 




조계현의 수상 경력 / 역대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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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1989
1991
1993
1996
1997
2001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2017

아시안게임 금메달(코치)
2014

올림픽 야구종목 메달(코치)
2008

[image] 1982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s-2 MVP


1993, 1994 KBO 리그 다승왕


1995 KBO 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KIA 타이거즈 역대 단장
허영택
(2014~2017)

조계현
(2018~)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26번
조도현(1984~1988)

조계현(1989)

이대진(1993-1999)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7번
강만식(1982-1988)

조계현(1990~1997)

곽현희(1998~2004)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27번
김훈(1997)

조계현(1998~1999)

남기헌(2000~2001)
두산 베어스 등번호 14번
김영수(1998)

조계현(2000~2001)

고영민(2002~2010)
KIA 타이거즈 등번호 77번
결번

조계현(2003~2005)

김태룡(2006~2007)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7번
김종모(2001~2004)

조계현(2006~2009)

김종훈(2010~)
두산 베어스 등번호 75번
권명철(2006~2009)

조계현(2010~2011)

권명철(2012~2017)
LG 트윈스 등번호 71번
김기태(2010~2011)

조계현(2012~2014)

최경훈(2015~2018)
KIA 타이거즈 등번호 76번
한혁수(2014)

조계현(2015~2017)

박기남(2019~)


KIA 타이거즈 단장
조계현 (趙啓顯 / Cho Kye-Hyeon)
생년월일
1964년 5월 1일 (59세)
출신지
전라북도 군산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학력
군산상고 - 연세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8년 1차 지명 (해태)
소속팀
농협 야구단 (1988)
[image] [image] 해태 타이거즈 (1989~1997)
[image] 삼성 라이온즈 (1998~1999)
[image] 두산 베어스 (2000~2001)
지도자
[image]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3~2005)
[image]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5)
[image]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6~2008)
[image]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8)
[image]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08~2009)
[image]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9)
[image]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0)
[image]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0~2011)
[image]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1)
[image]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12~2014)
[image] LG 트윈스 2군 감독 (2014)
[image] [image] KIA 타이거즈 1군 수석코치 (2015~2017)
프런트
[image] [image] KIA 타이거즈 단장 (2018~)
병역
병역특례[1]
1. 개요
2. 고교 시절
3. 선수 시절
4. 코치 생활
4.4. 다시 KIA 코치로
5. 프런트 시절
5.1.1. 2017년
5.1.2. 2019년
5.1.3. 2020년
5.1.4. 2021년
6. 연도별 성적
7. 여담


1. 개요


해태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두산 베어스에서 활동했던 투수. 현재는 KIA 타이거즈의 단장이다. LG 코치로 있던 2014년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이 사퇴한 후, 5월 11일까지 18일간 수석코치 보직으로 감독 대행을 맡다가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면서 2군 감독으로 보직변경되었다. 김기태가 KIA 감독으로 부임하자 LG를 나와 친정 팀의 수석코치로 복귀했다. 이후 2017년 12월에 팀 최초의 선수 출신 단장이 되었다.
팔색조라는 별명 답게 여러 변화구를 구사 했고 특히 싱커볼 마스터였다. 1990년대 중반 최고의 2인자. 1993, 1994, 1996년에 3번이나 골든글러브 2위 득표자가 되었다. 해태 타이거즈 올드 팬에게 선동열을 제외하고 이강철과 비교해서 누가 1990년대의 에이스냐 물으면, 아빠가 좋으냐 엄마가 좋으냐 정도의 행복한 고민일 것이다.

2. 고교 시절


[image]
군산상고 시절. 사진 맨 오른쪽이 조계현.
야구 명문인 군산상고 출신이다. 고교시절인 1981년 1학년 때 이미 초고교급 선수로 이름을 알렸으며, 팀을 대통령기에서 우승시켰다. 1982년 북일고와 맞붙은 청룡기에서는 당시 또다른 초 에이스급 선수였던 안성수[2]와 결승전에서 1:1로 12회 완투 + 다음날 다시 연장전을 계속하는 강행군을 하는 무지막지한 혹사를 당하면서도 결국 팀을 우승시켰다.
청룡기 준결승도 치열했다. 당시 광주일고 문희수는 2학년이었는데도 둘은 치열한 투수전을 벌였다. 둘 다 강속구 투수들이었고, 타자들은 그들 앞에서 추풍낙엽이었다. 이 게임도 연장전 승부가 아니었을지.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명승부였다. 1981년 선린상고 박노준, 김건우, 1985년 부산고 박동희, 1991년 신일고 조성민와 더불어 군산상고 조계현은 고교야구에서도 가장 화려한 별이었다.
그러나 이런 무지막지한 혹사 때문에 안성수는 완전히 야구 인생이 맛이 가서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다가 소리없이 사라졌고, 조계현도 어깨가 맛이 가서 파이어볼러에서 평범한 구속의 투수로 전락했다. 혹사와 관련하여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당시 한일고교야구 정기 교류전에서 조계현은 3차전 내내 혼자 마운드를 책임지다 시피하여 2승 1패를 거뒀다. 당시 감독이었던 경북고 구수갑 감독이 라이벌 팀 에이스를 일부러 굴렸다는 얘기가 있었을 정도.
1981년에는 대한민국 U-18 야구 국가대표팀선동열, 김건우[3] 등과 차출되어 1981년 제1회 IBAF 청소년야구대회의 초대 우승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혹사로 인해 연세대학교 저학년 시절에는 타자로 전향도 고려했다고. 그러나 연대 재학 후반부에 조계현은 팔색조 변화구라고 불리는 다양한 구질을 연마하여 변화구+컨트롤 위주의 기교파 투수가 되었고, 이것 덕분에 그는 전성기 못지않은 투수 시절을 보내게 된다.
조계현 하면 승부사처럼 조금은 경직되고 무서운 인상으로 기억하는 팬들이 많은데, 대학 시절 그는 귀여운 곰돌이처럼 푸근한 인상의 매력남이기도 했다. 연세대 에이스는 박철순, 최동원, 윤학길, 김정수, 조계현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윤학길만 순둥이다. 김정수가 가을 까치요 이순철 김성래 조계현이 큰경기 명승부를 펼친 이유는 광적인 응원을 펼치는 정기연고전의 살떨리는 큰승부를 체감한 덕분이리라. 조계현은 초등시절 학교의 요청으로 1년 유급했고, 프로 진출도 올림픽 때문에 1년을 유예했다. 고졸 선수보다 6년 늦게 프로에 진출한 것은 팬으로서 아쉬운 점이다.

3. 선수 시절


[image] 
1988년 농협 입단 사진
1988 서울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실업야구 농협 야구단에 1년간 몸을 담고 나서, 이듬해인 1989년에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당시 프로선수는 대륙간컵 등 국제경기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아마추어 선수 신분이어야 했다. 당시 이로 인해 발이 묶였던 선수는 송진우, 강기웅, 노찬엽 등이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덕분에 1989년은 국가대표급 신인들이 다수 쏟아져나온 해로 기록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 신인왕은 아마 시절 그들에 비해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고졸 출신에 19승이라는 어마무시한 성적을 거둔 박정현에게 돌아갔다.
[image]
[image]
선동열, 이강철과 더불어 투수진의 삼대장이었던 영광의 해태 타이거즈 리즈 시절.
선동열, 이강철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 마운드의 3인방 중 한 축[4]이었으며, 통산 320경기에 등판해, 126승 92패 17세이브에 평균자책점 3.17을 기록했다. 전성기에는 유난히 LG 트윈스에 강해서, 1993년 ~ 1995년[5][6] LG를 상대로 12연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특히 1993년 LG 김태원[7]과의 맞대결은 1980년대 선동열최동원 못지 않은 명승부였고, LG 해태의 3연전 모두 잠실 야구장이 매진되기도 했다. 조계현의 LG전 연승은 1995년 이상훈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이상훈의 1-0 완봉승으로 간신히 마감됐다.
선동열을 워낙 압도적이라 따로 이야기 하지 않고 같은해 데뷔한 이강철과 해태 시절을 비교하면 이강철은 2점대 2번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3점대의 안정적인 선발로 해태에 공헌했고, 조계현은 1점대 한번 2점대 5번의 임팩트 강한 시즌을 선보였다. 둘이 같이 뛰던 1988~1997년까지를 봐도 출전횟수, 선발횟수, 승수 이닝 등의 누적은 이강철이 조금 앞서나 투구비율성적은 조계현이 더 좋았다.
조계현은 투수왕국 해태에서 93~96에서 최고의 1선발, 즉 대한민국의 에이스였다,[8] 고로 열혈 팬들도 거느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그래서인지 그는 팬들에게 투혼의 승부사처럼 비췄다. 대단한 구속도 아닌데도 강심장의 자신있는 투구 모습은 정말 짜릿한 희열을 선물했다. 특히 삼성, LG 등 라이벌 팀과의 대전엔 더 짜릿했다. 해태는 군산상고 주축에 광주일고가 보조하는 식으로 출범했고 해태의 전성기 마지막엔 군산상고 출신 조계현이 있었다. 그가 떠난 후 해태의 우승도 끊기고, 결국 부도가 난 건 묘한 느낌을 준다. 그후로 해태나 기아에서 전북 군산, 전주 출신은 줄어드는데 쌍방울의 출범도 이유가 됐겠다. 해태에서 빛나는 선수들은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조계현은 성적 이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선수로 기억된다. 그가 던질 때는 야구 승부 정신의 처절함과 치열함이 있었기에 그만의 팬덤과 아우라를 남길 수 있었다. 당시 명 투수들이 그렇지만 문희수[9]처럼 대학을 안 가고 프로에 진출했다면 더 막강한 해태와 좋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지.
1992년까지는 셋업+마무리로 입단동기 이강철에 비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지만 1993년 그가 만개했다. 선동열이 건초염으로 사실상 선발에서 오래 할 수 없자, 마무리 공백으로 내려가면서 선발 투수로 보직을 바꾸는데, 17승6패 방어율 2.15로 다승왕과 평균자책점 4위를 차지한다. 게다가 한국시리즈 2승으로 해태의 V7를 견인했다.[10]
조계현은 고교 1학년시절 강속구 투수로 등장했다. 그후 어깨에 무리가 있었는지 속구가 무뎌졌지만, 프로에 나타날 때 그는 강속구도 자주 구사했다. 한데 1992년 200이닝에 가까운 투구를 한후 무지 힘들었다고 한다. 이대로는 야구를 오래 못할 것같은 위기감을 느꼈다는 것. 그후 본격적으로 변화구와 제구력 투수로 변신한다. 그리고 큰 성과를 얻었다. 그는 겨울전지훈련에 자주 동행치 않았다. 주로 따스한 남쪽 완도의 섬에서 보내곤했다. 보길도였을까? 아마도 체력적 부담도 있었겠고 자율훈련에 자신도 있었겠지만 구질개발이 중요하다고 보고 개인훈련을 택했을지도.
1994년은 그의 전성기였다. 그 해 해태는 LG의 맞대결에서 7승 11패를 당했지만 그 중 6승이 조계현이었다. 81승을 올리며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신바람 야구 LG에게 유일한 저승사자가 있었으니, 그건 조계현이었는데 2년 연속 다승 1위를 하였다. 라이벌 팀 LG의 이상훈과 함께 공동 다승왕에 올랐다. 하지만 그해 투수 골든글러브는 최초로 40세이브 고지를 찍은 태평양의 마무리 정명원이 받았다[11]. 그 해 8월 14일에는 쌍방울을 상대로 1안타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의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주인공은 당시 쌍방울 부동의 4번타자이자, 감독이 된 후에는 드러눕기를 취미삼는 분.[12][13]
1995 시즌은 부상으로 인해 2달가량 출장을 못 하며 9승에 그쳤으나[14] 이상훈의 트리플 크라운을 저지하면서 1.71로 평균자책점 1위에 올랐다. 규정이닝인 126이닝을 정확히 채웠다.
1996 시즌은 1993이나 1994랑 비교되지만 그해 못지않게 압도적인 투구를 보이며 1점대를 늘 유지하다가, 마지막에 2점대를 찍고 그걸 만회하려던 최종전에서 부친상을 당하고 만다. 결국 ERA 2.07에 16승을 찍고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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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순탄치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 시절
1996년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이대진, 김상진 등 신예 에이스들이 나타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지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밖에 나서[15] 1997 시즌이 끝나고 삼성 라이온즈4억원에 현금 트레이드되었다.[16][17]
여기서 1998 시즌과 1999 시즌을 보냈지만 1998 시즌은 2년전의 그 선수는 어디 갔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방어율을 5점대까지 수직상승으로 평범(?)했고, 1999 시즌은 말 그대로 몇경기 못 올라오면서 퇴물이나 다름없던 모습을 보여 1999년 시즌을 마치고 삼성에서 방출되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해태 시절 투수코치로 인연이 있었던 재활의 신 이라 불리는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 베어스로 이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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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현역 마지막을 보낸 두산 베어스 현역 선수시절.
두산 베어스에서는 예전만큼의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해태시절 후배였던 이광우와 함께 원투펀치로 이끌어 팀의 최고참으로 활동하며 2000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나와 승리를 거두며 만 36세 6개월로 역대 한국시리즈 최고령 승리투수 라는 신기록을 세우는 등[18] 2001년까지 전천후 현역 선수로 뛰며 팀의 정신적 지주로 활약하기도 했다.[19] 그렇게, 현역 마지막 우승인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고 은퇴를 한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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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가운뎃글자가 을 떠올리게 하는 '계'인데다 '변화구의 마술사', '팔색조', '싸움닭' 등의 별명을 얻은 탓에 팬들 사이에서는 조닭이라고 부르며 대차게 깐다.[21]
LG에 무척 강해서 엘나쌩 클럽의 대표 멤버였다. 1993년 개막시리즈부터 1995년 8월 18일 이상훈이 완봉한 LG에 1실점 완투패하기 전까지 LG전 12연승을 기록했다. 특히 이 시기의 LG는 21세기의 약팀 이미지가 아닌 리그에서 굉장히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프로야구의 흥행을 주도했기 때문에 조계현의 LG전 호투는 언론으로부터 크게 주목을 받았다. 이렇게 LG에 강했던 조계현이 훗날 김기태 감독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인해 LG 감독 대행이 된 게 아이러니(...). 다만 노쇠화와 함께 이병규가 입단한 1997년 이후엔 거꾸로 엘상바였다.
즉 선수 시절 전체를 보자면 이강철의 근소한 우위지만 이강철 선수생활 전체가 압도 라는 단어 자체와 거리가 있었다,
93~96의 포스는 선동열의 후계자 수준이었다. 60승 24패를 거두며 리그 최강을 에이스를 4년동안 유지하였다.[22]즉 98년도의 해태의 몰락은 이종범의 일본진출도 있지만 김응룡이 불과 1년전에 리그 최고 에이스로 군림했던 투수를 내친 것도 있었다, 그리고 98년도 이후의 해태는 꺌끔하게 망할 수 밖에 없었다. 98년도의 해태는 망했는데 조계현이 98년도에도 해태에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드는 이유.

4. 코치 생활



4.1. KIA 타이거즈 1기 시절과 삼성 라이온즈 시절


KIA 타이거즈 No.77
조계현(趙啓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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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로)
6년만에 친정팀 코치로 다시 시작된 KIA 타이거즈 코치 시절.
삼성 라이온즈 No.77
조계현(趙啓顯)
[image]
(출처 : 포토로)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2001년 시즌을 마치고 두산에서 방출되어 은퇴한 후 2002년에는 KBS의 해설위원으로 있었고 2003년 KIA 타이거즈의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6년 만에 친정 팀으로 돌아와 2005년까지 활동했으며,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활동했다.
이 당시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는데, KIA 투수코치 시절에는 김진우에게 너클볼을 장착시키려다 제대로 망한 전적이 있고 삼성에서는 윤성환을 조련시킨 것을 제외하면 잉여 투수들을 올리고 털리느라 팬들로부터 까였다. 특히 2009 시즌에는 조현근-최원제-김상수 + 박성훈-차우찬, 소위 조원수박차라 불리는 미완성된 투수들을 심심할 때마다 올리고 털리는 일을 반복하여 팬들의 분노가 폭발했다.[23]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투수코치로 있을 때 성장한 윤성환은 조계현과 마찬가지로 빠른 구속보다 뛰어난 제구력으로 타자와 승부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윤성환은 다양한 변화구보다는 속구-커브의 투 피치로 타자와 승부할 때가 많다는 게 차이점.
결국 팬들의 열화 끝에, 2009 시즌 막판에는 2군 투수코치로 내려갔다. 이후 김용국과 함께 2009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했고, 삼성 팬들은 만세를 불렀다. 그의 후임으로 오치아이 에이지가 온 후 삼성의 불펜진이 철벽 포스를 내뿜기 시작하자, 조계현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용국은 나중에 류중일 감독이 요청하여 복귀하긴 했지만....

4.2. 두산 베어스 시절


두산 베어스 No.75
조계현(趙啓顯)
[image]
(출처 : 포토로)
9년 만에 코치로 돌아왔으나 초단기 코치 생활에 흑역사를 안긴 두산 베어스 시절
2010 시즌부터 본인이 현역 말년을 보냈던 두산 베어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하며 2001년 이후 9년 만에 두산으로 돌아왔는데, 선발-불펜 할 것 없이 두산의 투수진을 초토화시켜 놓는 위업을 달성했다. 용병들과 김선우를 제외하고 선발진이 모조리 개박살났으며, 패전조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롯데의 양상문, 한화의 이상군, 기아의 이강철과 함께 KBO 최악의 막장 투수코치로 꼽혔으며, 두산에서도 2군으로 밀려난 후에야 겨우 두산 투수진이 기사회생했다. 사실 선수들이 못하는데 코치가 다 잘못한것처럼 말하는것도 웃기는 일이다. 특히 두산 김경문의 운영이라면.
하지만 2011년 5월 이후부터 다시 1군 투수코치로 올라왔다. 헌데 그전에 올라왔던 사람이 윤석환이었기 때문인지 이전보다는 평판이 조금 나아졌다. 예로 노경은-김강률 등의 투수들이 구위가 개선되며 호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이에 일부 두산 팬들이 호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노경은의 구속이 150km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페르난도 니에베 역시 초반과 달리 불펜에서 각성해서 맹활약하였다. 페르난도의 초반 부진 이유는 성실하고 싹싹한 더스틴 니퍼트와 달리 투수코치들의 투구 조언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조계현이 그 자리에서 변화구를 몇 개 던져 주니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마운드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을 꼽는다면 일단 투수들을 다독여 주고, 격려해 준다는 것.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기존의 윤석환이나, 달감독같은 경우 도망가지 말고 맞더라도 "걍 네 공 믿고 가운데 찔러넣어"를 주문하며 타자와 피하는 투구를 하는 투수들을 갈군다면, 조계현은 "괜찮어, 슬금슬금 던져, 변화구 가르쳐 준것도 쓰고..." 하면서 조용히 다독이는 편이라 한다.
어쩌면 직구앓이, 파워직구 위주의 두산 투수들에게 변화구를 가르치면서 슬금슬금 피하면서 승부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 두산 투수진에게 활력소가 되었던 듯. 2009년까지 직구위주의 공격 투구를 했던 김선우가 2010 시즌 이후로 여러 구종을 장착하면서 2011년에 16승을 달성한 것도 조계현의 덕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대다수의 두산 베어스 팬들은 3~5선발 이후를 말아먹은 장본인으로 조계현을 꼽고 있다. 혹사로 기껏 발굴한 투수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은 계속되고 있으며, 변화구를 잘못 장착시켜 두산 투수들의 구속이 일괄적으로 5km씩 감속했다는 비판도 있다. 결과적으로 두산이 2011 시즌을 말아먹는 데 한몫했다는 것이 대다수의 평.

4.3. LG 트윈스 시절


LG 트윈스 No.71
조계현(趙啓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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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코치 시절.
어수선했던 2011 시즌이 끝난 후 두산 베어스의 코치직에서 사임하고 올림픽대표팀에서 코치로 함께한[24] 김기태 감독의 부름을 받아 LG 트윈스의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여태 맡았던 투수코치가 아닌 만큼 과연 수석코치로 어떤 활약을 할 지 기대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시즌이 개막한 이후 별다른 언론 노출도 없었으며, 투수 기용 및 관리에 있어서도 주로 차명석 1군 투수코치가 부각되는 등 투수 쪽에 개입하기보다 수석코치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듯하여 LG 팬들에게 까이지 않았다.
2012년 9월 12일 SK전에서는 5살 연하인 김기태 감독이 경기를 포기하는 것[25]을 말리다가 맞을 뻔(..)한 사건이 있었다. 다음날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나타난 걸 보면 심각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본인 말에 의하면 말리는 걸 김기태 감독이 뿌리치는 과정에서 저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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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LG의 성적이 좋아지면서, 김기태 감독을 잘 보좌하고 있는 것같다는 평가가 나왔다. 감독이 야수 출신인 만큼 투수 출신으로서 이것저것 조언해준 듯. 물론 투수진의 안정화는 차명석 투수코치의 공이 크지만...
2014년 4월 23일, 김기태 감독이 갑작스럽게 사퇴했지만, 구단이 사퇴를 수리하지 않은 상태이고 여전히 엔트리에는 김기태 감독이 올라와 있어서 사실상 감독 대행임에도 공식 직함은 여전히 수석코치인 어정쩡한 상태에서 팀을 이끌었다.
LG 프런트에서는 조계현에게 감독 제의를 했으나, 김기태 감독과의 의리를 지켜 사양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 조계현이 사실상 감독 대행역을 하면서도 처음부터 자신을 "수석코치"로 못박아 둔 것을 보면, 일부 조계현까들이 주장하는 대로 겸손을 가장한 언플은 아닌 듯하다.[26] 어쨌든, 기대한 성적반등은 없었지만,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백창수를 1군에 꾸준히 기용한 것만큼은 호평을 받고 있다.
2014년 5월 11일, 양상문 감독이 선임되고, 5월 12일 LG 트윈스 2군 감독으로 보직이 변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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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막판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차출되었다.

4.4. 다시 KIA 코치로


KIA 타이거즈 No.76
조계현(趙啓顯)
[image]
김기태가 2015년부터 KIA 타이거즈의 감독을 맡게 됨에 따라, 김기태를 따라 친정 팀 KIA 타이거즈로 팀을 옮겼다. KIA에서도 보직은 LG 시절과 똑같이 수석코치다.
당초 kt wiz에서 2군 감독으로 영입을 타진했지만, 김기태가 KIA의 감독을 맡게 되면서 고민 끝에 KIA 타이거즈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조계현이 KIA로 옮기자, kt wiz두산 베어스에서 2군 감독을 맡고 있었던 황병일을 2군 감독으로 영입하였다.
김기태 감독과의 호흡은 여전히 잘 맞는 편. 무지 재미있고 유쾌한 성격이라 선수들이 많이 존경하고 좋아한다고 한다.

2차 드래프트 1라운드로 데려온 배힘찬이 드럽게 못하고 있는데, 배힘찬을 데려온 김기태만 욕 먹었지만 사실 배힘찬을 뽑자고 얘기한 사람은 조계현 수석코치라고 한다.

5. 프런트 시절



5.1. KIA 타이거즈 단장



5.1.1. 2017년


전임이던 허영택 단장이 기아 타이거즈 역사상 최초의 전임 대표이사로 가게 되면서 단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는데, 그전부터 선수출신 단장을 선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고, 결국 2017년 12월 6일, 단장으로 승진하였다.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는 닭장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타이거즈 역대 최초의 선수 출신 단장인데, 염경엽과 송구홍의 명암 때문에 우려하는 바도 있지만, 대부분 2017의 기운을 받아 기대하는 바가 큰 편이다. 성격이 부드러운 편이라 팬들 대부분은 나이 때문에 서열정리 차원의 승진과 동시에, 김기태 감독의 사람을 프런트에 앉혀서 확실히 밀어주기 위함으로 인지하는 듯.
2017년 12월 28일 드디어 KIA 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양현종과 계약 체결에 성공하면서 단장으로써 1호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1월 18일에는 정성훈도 영입했다. 이후 김주찬도 잔류시키며 FA문제를 깔끔히 해결하였다.

5.1.2. 2019년


하지만 2019년 5월 16일 김기태 감독이 개인 2번째 중도퇴진했고 외국인 선수 점검차 미 현지에 간 조계현 단장은 급히 귀국을 했다고 한다. 사퇴가 확고했다고 한 만큼 KIA 타이거즈 팬들의 비난 겸 사퇴 압박은 좀 거셀 것으로 보여진다. 미국 출장 중 급거 귀국한 조계현 KIA 단장 "너무나도 슬픈 일"
1차 지명으로 정해영을 선택하면서 많은 KIA팬들이 분노했다. 박시원을 뽑지 않고 전년 대비 성장이 아닌 하락세를 보인 정해영을 1차에 지명함으로서, 팬들에게 정회열 2군 전력분석원과의 긴 인연 때문에 지명된 것이 아니냐는 괴담이 돌 정도. 여기에 전병두 조롱 건으로 논란을 빚은 홍종표를 2차 2라운드로 지명한 것 역시 비판을 받았다. 정해영에게도 얼마나 많은 비난을 했길래, 정해영이 입단 후 '잘할테니 이뻐해주셨으면 좋겠다'라는 인터뷰를 했을 정도.
하지만 1년 후 판단한 결과 정해영을 선택한 것은 매우 올바른 판단이 되었다, 고졸신인에 내려진 시련 그 혹사속에서 왠만한 타이거즈 중간계투보다 괜찮은 성적을 낸 것을 보면 이 선택은 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38.1이닝을 던지고 ERA 3.29면 이건 내년에는 확실한 중간계투나 이민우 따위를 대신할 선발 후보까지 점칠 수 있다.
2019 시즌 종료 후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협상한 끝에 구단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감독인 맷 윌리엄스를 선임하는데 성공하면서 본인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이었던 여론 일부를 반전시켰지만, 뒤이은 2020년 코칭스태프 개편 과정에서 마무리 캠프에서 선수를 지도 중이었던 홍세완 등 기존 코치들이 자신의 해고통보를 언론 기사를 통해 접하는 촌극이 벌어지면서 다시 욕을 먹고 있다.
그리고 2020 시즌이 시작하고 정해영이 호투하자, 정해영을 왜 뽑았냐는 조계현과 프런트를 향한 비난은 또 귀신처럼 사라졌다.

5.1.3. 2020년


조계현은 2019 시즌 당시 '프랜차이즈 선수들에게 대우해주겠다, 꼭 잡겠다'고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으나, 금액 제시도 안하고 협상을 질질 끌어대서 근 두 달동안 나오는 기사들은 두 선수의 타팀 이적 가능성과 선수들의 감정이 매우 상해서 좋지 않다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그러니까 안치홍의 이적은 조계현 단장의 이해할 수 없는 협상 태도로 인해 촉발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 도대체 뭘 잘하는 단장인지 알 수 없다는 평가와 함께 김기태가 나갔을 때 같이 나갔어야 했다며 KIA팬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고 있다. 협상을 열심히 해서 교감을 많이 나눴음에도 놓친 것이라면 팬들도 이해를 했겠지만 조계현의 협상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장으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짓만 골라서 하고 있었으니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안치홍의 이적 이후 조계현 단장은 대놓고 대체 자원이 많이 있으며 '나주환을 데려왔으니 괜찮다'는 팬들의 속을 뒤집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군대를 간 자원을 포함해도 FA 영입이 아닌 1군에서 내야수로 뚜렷한 성과를 계속해서 보여준 선수[27] 자체가 이 팀에 없는 수준이다.
허나 맷 윌리엄스 라는 빅네임 외국인 감독을 데려왔고, 코치진도 순혈 철밥통 코치들을 내치고 물갈이를 하며 2020 시즌을 준비했다. 윌리엄스 감독은 기존 전력을 지켜달라고 요청했지만, 조계현 단장은 안치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안치홍의 부진, 2루로 옮긴 김선빈과 그 자리를 메꾼 박찬호의 안정적인 키스톤 수비, 무주공산인 3루에서 단단한 플레이를 보여주는 나주환, 맹활약하는 외인들, 홍상삼정해영의 호투, 그리고 맷 윌리엄스를 비롯해 새로 꾸린 코치진이 제 몫을 다한다는 평가[28]를 받으면서 KIA팬들의 냄비같은 여론이 갑자기 칭찬세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점차 박찬호의 스탯이 떨어져가고, 셋이 합쳐 WAR -4를 향해 달려가는 야심차게 영입한 3루수들의 부진과 터커와 가뇽의 기복, 일주일을 못넘기는 황대인의 포텐, 되도 않는 홈런 타자 스윙에 목매단 박찬호, 최주형으로 전락하는 최원준을 방치하는 코치진 등등 윗 문단이 무색하게 팀 전력에 구멍이 뻥뻥 생기면서 다시 이전처럼 박한 평가로 되돌아갔다.
시즌 초 홍건희를 주면서 류지혁을 받아오자 갸갤, 엠팍, 네이버, 펨코 야구게시판 등등 온갖 야구 커뮤니티에서 찬사를 한몸에 받고 있다. 닭승수, 백숙승수라는 별명을 얻은건 덤. 그래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가가 급격하게 좋아졌다. 게다가 많은 전문가들이 구단을 하위권 전력으로 분류하면서 리빌딩 시즌이 되리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7월 26일 기준 단독 3위를 기록하면서 더 평가가 좋아지고 있었다.
홍건희와 류지혁 트레이드 때의 류지혁은 만능 백업이라는 이미지에 타격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시즌 성적도 괜찮은 편이었으니 팬들이 좋아했다. 그러나 김선빈의 잦은 햄스트링 부상과 류지혁의 복귀가 점점 늦어진다는 점에서 부족한 내야를 채우겠다고 데려온 것으로 보이는 김태진은 그 박찬호보다도 훨씬 못한 타격을 보이고 있었던데다 7월 초에 인대 부상을 입고 재활을 하던 선수다. 심지어 이 팀은 리빌딩을 하는 팀도 아니고 성적을 포기한 팀도 아니고 당장 5강에 들어가냐마냐를 두고 피터지게 순위싸움을 하는 팀이다.
팀이 가을야구에 가냐 못가냐를 경쟁하는 상황에서 이런 트레이드를 한 이상, 장현식과 김태진의 포텐이 터지지 않으면 조계현은 어마어마한 욕을 먹게 될 것이다. 심지어 홍건희-류지혁 트레이드때만 해도 더 이상의 트레이드는 없다고 못을 박았으면서도 이런 트레이드를 한 시점에서 팬들에게 신뢰를 잃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올 시즌 트레이드에 대한 배경 설명에 대한 기사가 나왔는데 이범호의 은퇴로 애매해진 3루를 장영석으로 메꿔보려 했으나 장영석이 결과적으로 매우 부진했고 그나마도 무상 트레이드로 내야 백업을 두려고 했던 나주환이 있어서 버티고 있다가, 이 때문에 류지혁을 영입했고 또 류지혁과 김선빈의 부상 장기화로 내야 공백을 우려해 김태진이 박정수와 트레이드 되었다고 한다. 문경찬, 장현식의 경우만 독립된 트레이드 케이스인 거지 나머지는 조계현 단장의 트레이드 실패로 촉발된 연쇄 트레이드인 것이다.
게다가 문경찬을 트레이드한 이유로 '전상현이 마무리로 잘 하고 있으니 서로 눈치보인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실언을 해서 팬들을 더 어처구니 없게 만들었다. 김태진은 심지어 부상 때문에 당장 1군에 올려서 쓰지도 못하는데, 내야 보강을 위해 트레이드를 했다는 것도 도대체 언제 어떻게 쓰려고 트레이드를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될 정도. 당장에 추격조로 쓸 투수가 넉넉한 상황도 아닌데 자꾸 불펜을 보내버리니 이제는 마무리 전상현을 제외하면 필승조와 롱릴리프를 맡고 있는 고영창과 정해영, 추격~승리조 급의 홍상삼을 빼면 이제는 올라오면 이닝이 끝나지 않는 투수들이 대부분이다. 미래에 돌아올 자원을 이야기하기 전에 지금 당장에 던질 투수가 없다.
장현식이 이적 후 이형종에게 홈런을 맞자마자 '저 봐라, 폐급투수였다. 조계현 사퇴해라.' 등의 여론이 컸는데, 정작 그리고 며칠 후 문경찬이 0.1이닝 2피홈런(투런 2개)으로 4실점하면서 또 트레이드 부정론을 가지던 KIA팬들의 여론은 사흘도 못 가서 뒤집혔다. 거기에다 8월 15일, 장현식이 등판하여 2이닝 1K 퍼펙트 무실점 피칭을 펼치며 승리 투수가 되자, 트레이드 부정론을 가진 팬들은 또 조용해졌다. 그러나 8월 22일, 23일 키움전에서 첫째날 오심부터 흔들린 장현식이 올라올 때마다 피홈런을 허용하는 등, 실점을 계속해서 하면서 역시 실패한 트레이드라며 조계현 단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물론 장현식의 투구를 재응매직의 위대함으로만 치부하는 팬들도 있고 트레이드의 성패를 가리는 데엔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이적한다고 선수가 갑자기 달라지는 건 아니라 장현식은 키움전의 오심 이후 3경기 연속 부진한 피칭으로 키움전 2경기에 두산전 1경기마저 쓰리런 홈런 허용으로 혼자서 뒤흔들었다. 장현식을 필승조로 쓰는 건 상관 없는데 상위권 팀 경기에 내면 터진다는 NC팬들의 충고대로 상위권 팀과의 경기가 1승 2패로 끝나자 기아팬들은 이럴려고 문경찬을 보내고 장현식을 데려왔냐며 조계현 단장에 대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다. 문경찬이 LG전 이후로는 무실점이고 한화전에서 여전히 제구가 잘 잡히지 않는 피칭을 하면서도 결국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연신 웃고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기아팬들은 할 말을 잃고 있다. 기아에게 이 트레이드의 성공 여부는 사실상 김태진이 얼마나 활약하느냐에 달렸다.
문경찬과 박정수를 보낸 이후로 불펜 실점이 점점 미쳐가고 있고 8월 28일 경기에서는 기어코 차명진과 김현수 둘이서 0.2이닝동안 7실점을 하는 등, 추격조 롤을 담당해줄 투수들을 죄다 보내버리니 남아있는 투수들 중에 추격조 혹은 가비지 이닝 소화를 위해 올라오면 대부분이 이닝 소화 이전에 실점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팀이 후반 불펜 싸움에서 대량 실점으로 따라가질 못하거나 점수를 많이 뽑아놔도 대량 실점으로 마지막에 필승조가 올라오는 사태가 계속 벌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문경찬이 NC 데뷔전의 2피홈런 외에는 무실점, 박정수는 나올 때마다 1.1이닝 ~ 2이닝을 막으며 무실점이라 이제 트레이드 옹호론자는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김선빈의 공백 때문에 데려왔다는 김태진은 정작 김선빈보다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는데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팬들을 더더욱 황당하게 만들고 있다.
8월 30일 더블헤더를 앞두고 전상현이 근육통으로 이탈하면서, 박전문 트리오는 1군에서 완전히 자리를 감추었다. 이제 1군에 남아 있는 그나마 믿을 만한 불펜은, 고졸 신인 정해영, 제구 랜덤 홍상삼, 최근에 좋아진 이준영을 제외하고는 전무한 상황이다. 전상현과 박준표의 부상 방지는 단장의 권한 밖의 일이라지만, 귀하디 귀한 투수 둘을 미래를 볼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대책없이 트레이드한 건 단장의 책임이 없다곤 할 수 없다. 멧 윌리엄스 감독이 1년차인데다 감독의 경기 개입이 많지 않은지라 감독에 대한 비난까지 한꺼번에 먹고 있다.
장현식이 9월 4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더블헤더에서 1차전은 폭투로 양현종의 승을 날리고, 2차전은 감독과 투코의 막으면 좋고 맞으면 어쩔 수 없다식 기용도 문제긴 했지만 이대호에게 홈런을 허용하는 등 여전히 나오기만 하면 홈런은 하나 맞고 들어가고 있어 트레이드의 승패가 김태진에 달린 가운데 9월 5일에는 김태진의 데뷔 경기를 보려고 대전까지 온 것이 포착되었다. 다행히 김태진은 멀티 히트로 활약했고 2번째 안타는 정우람을 상대로 쳤다.
김태진이 9월 12일 친정 NC 다이노스를 상대로 4타수 1안타 1타점 1볼넷에 공격적인 주루 2번으로 1득점하는 등 2득점으로 맹활약하여 팀이 승리에 기여하면서 이번 트레이드의 균형이 어느 정도 맞게 되었고, NC는 이번 경기로 상당한 내상을 입었다. 다만, 이는 데려온 선수들이 장영석이나 이우성 처럼 엉망은 아니라는 것이지, KIA에게 이득이었거나 적절한 트레이드 였다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무리가 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난 시점 김태진과 장현식이 팀에 어느정도 녹아든 점은 있어서 내년까지 가봐야 알겠지만 그 둘은 2020 하반기에 처참한 성적을 내면서 당장 올해만 보면[29] 망한 트레이드가 되고 말았다, 이에 단장으로서 책임을 지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운영과 운용[30]을 현장에서 한다면 그 운영과 운용을 할 전력을 만들어주는 것은 결국 백오피스인 프런트가 해야하는데, 2017년 우승 이후 과연 KIA 타이거즈 프런트는 전력을 만들어주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는가라는 질문에는 대답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한게 없다. 시스템을 만들었는지, 하다못해 전력보강이라도 시켜줬는지. 오죽하면 팀 이미지가 재활용센터라는 이미지가 붙기 일보직전이겠는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연임할 가능성이 높다. 기아는 모기업이 구단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정말 엄청난 일이 벌어지지 않는 이상 방임주의에 가깝게 운영되기 때문이다. 조계현 본인도 남들이 욕하든 말든 물러날 생각없이 끈질기게 연임할 욕심이 커보인다.
그리고 진짜로 재계약이 이루어진 듯하다. 기사 심지어 조계현 본인 재계약이 메인이 아니라 이범호의 총괄코치 발탁 기사에 묻혀쓴 정도. 재계약을 메인에 안세우는 것 보면 본인도 재계약을 할만한 성과가 없었다는 것 정도는 아는 모양. 이대로 간다면 성민규 취임 전 롯데 자이언츠[32]가 되는 건 시간문제다.
개편으로 팀을 떠나게 된 박흥식 2군 감독마저 '갑작스러운 트레이드까지 이어지며 선수 육성 방향이 다소 꼬인 느낌이 있었다.'고 트레이드로 인한 1군 불펜진 붕괴 때문에 2군까지 흔들린 것을 간접적으로 밝혔는데, 이런 가운데 서재응만 2군 투수코치로 사실상 좌천되면서 트레이드 실패의 모든 책임을 혼자 지는 모양새가 되었다.[33]
서재응 KIA 투수코치 '퓨처스행' 왜? 조계현 단장 "'좌천' 아냐, 더 많은 역할 부여" 보다시피 가만히라도 있어야 다행일 상황에 좌천이 아니라고 직접 이야기했고, 이 기사에서 "트레이드와 FA 등 외부영입으로 볼 수 있는 효과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잘 갖춰진 유망주 육성 시스템을 통해 팀 뎁스를 다지는 것이 궁극적으로 KIA는 물론 KBO 리그에 소속된 팀들이 그려나갈 그림이 아닌가" 라고 입을 터는 바람에 기아팬들의 분노는 들끓고 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건 2010년대 KIA가 외부 영입으로 데려온 선수가 이범호, 김주찬, 이대형, 최형우 총 4명이며 이 중에 단 한 명도 실패한 선수가 없다. 이대형조차 계약할 때는 비웃음당했지만 막상 계약하고 1년간 좋은 활약을 펼치고 갔을 정도로 FA 영입의 맛을 톡톡히 봤던 팀이며 당장 자기가 수석코치로 있던 17년에 그 FA 영입 효과와 트레이드 효과가 빛을 발해 우승까지 하는걸 자기 눈으로 봤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자꾸 트레이드와 FA 영입 효과는 한계가 있다며 FA를 사지 않을 것처럼 입을 털고 있으니 최악의 내야진에 뒷목잡으며[34] 외부 FA 영입을 간절하게 바라는 KIA 팬들을 자꾸 화가 날 수 밖에 없다. 당장에 양현종이 해외로 진출하면 20시즌 양현종이 부진했다지만 선발진 하나가 구멍이 뚫리는거라 전력 약화는 불보듯 뻔한데 FA 영입까지 하지 않으면 21시즌 KIA는 상위권은 커녕 꼴찌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선수진이 답이 안나온다.
급이 맞는지 제대로 따져보기는 하는지 알 수 없는 트레이드 남발로 이미 타팀 팬들에게는 조계현 단장은 거의 호구로 찍혀 있으며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는 최원준, 박준표, 전상현같은 KIA의 주전급 선수까지 뜯어먹을 수 있지 않을까 놀리러 오는 분탕들까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정도로 생각없고 계획없는 단장으로 소문이 자자한 상황이다. 게다가 자기가 트레이드를 남발해 놓고 자꾸 트레이드 효과는 한계가 있다며 트레이드로 온 선수들한테까지 꼽을 주고 있으니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는 상황. 구단 운영에 돈을 안쓰는 이미지를 남겨 무능한 데다가 오랫동안 월급까지 축내는 단장으로 있을 생각하지 말고 하루빨리 팀에서 나가기를 모든 KIA 팬들이 기원하고 있을 정도로 단장에 대한 기대감이 손톱만큼도 없다. 게다가 트레이드로 내야 보강을 많이 해서 FA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후에 입을 털까봐 두려워하는 상황.
KIA와 트레이드로 불펜 보강에 성공한 NC와 두산은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며 2018년의 LG 양상문 단장과 비슷한 모양새가 됐다.[35] NC를 상대로는 지난해 이명기에 이어 올해는 문경찬, 박정수를 퍼주며 붕괴직전의 NC 불펜진에 날개를 달아줬고 반대급부로 얻어온 김태진과 장현식은 이렇다 할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두산에는 홍건희를 퍼주며 SK에서 건너온 투수 이승진과 함께 당시 붕괴 직전에 있던 두산 불펜이 리그 1위의 불펜으로 탈바꿈하는데 공헌했다. 그리고 류지혁은 오자마자 부상으로 사이버 타자가 됐다. 또한 무리한 트레이드로 종잇장처럼 얇아진 KIA 투수 뎁스로 인해 KIA 투수들이 타선이 강한 두산에 연일 털려서 3승13패로 압살당하며 10월을 시작했을 때 6위까지 떨어졌던 두산이 3위로 마감해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게 하는 1등공신이 됐다.
일단 외국인 투수 애런 브룩스와 재계약에 성공하며 팬들의 비난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FA 협상에서 지지부진한 협상으로 다시 욕을 먹고 있으며, 결국 FA 최대어이자 팀의 가장 큰 구멍인 3루수 자리를 메꿀 수 있는 재원으로 평가받는 허경민을 놓쳤다. 하지만 허경민의 계약 기간 및 금액이 워낙 길고 컸기에 놓친 것에 대해 이해한다는 팬들도 많이 존재하기에, 이후 잔여 오프시즌에서의 행보가 조계현의 평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원래대로라면 2020년을 마지막으로 단장 임기가 만료될 예정이었으나, 12월 11일에 2년 재계약을 맺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 당연히 조계현의 삽질을 꾸준히 지켜봤던 KIA 팬들은 그의 연임 소식에 엄청나게 반발하는 중.
이에 더해 12월 13일, 광주일보의 기사에서 특급 유망주를 통해 트레이드를 시도한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현재 팬들은 혼란에 빠졌다. # 기사의 내용으로만 본다면 유망주 한 명을 팔아 즉전감 투수를 영입해온다는 뉘앙스로 보이는데, 과연 특급 유망주의 정체를 차치하고서라도 누구 때문에 투수진이 초토화되었는데 또 트레이드를 통해 투수를 영입해온다는 것을 듣고 팬들이 과연 조계현을 용서할지 의문이다. 도대체 언제는 리빌딩을 통해 미래를 본다고 하고, 또 언제는 트레이드를 통해 즉전감을 얻어오고자 하는 오락가락하는 단장에 대해 이미 바닥나버린 팬들의 민심이 얼마나 더 얼마나 기다려줄지도 미지수이다. 거기에 더해 지금까지 이 단장이 해온 트레이드가 이창진-오준혁 트레이드를 제외하면 모두 썩 좋지 않은 결과를 야기한 것을 보았을 때 도무지 특급유망주와 동급인 선수를 트레이드해올 것 같지도 않기에 이 소식을 듣고 팬들은 모두 못 미더워하는 반응이다. 급한건 상대방인데 오히려 이 팀이 퍼주려고 드는 호구 트레이드를 계속 지켜본 KIA 팬들 속만 뒤집히고 있다.
12월 14일, 기아의 국내 전력중 가장 중요한 선수인 최형우를 3년 47억으로 붙잡아 놓는데 성공했다. 바로 당일 협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듯한 뉘앙스의 기사가 나와 팬들이 불안함에 떨었으나, 결국 최형우를 잔류시키는데 성공했다.
총평하자면 최형우를 잔류시킨것을 제외하면 맷 윌리엄스의 발목을 잡은 무능한 단장 그 자체이다. 윈-윈 트레이드였던 홍건희-류지혁 트레이드는 조계현 본인이 주도한것이 아니라 두산 단장 김태룡의 제안을 듣고 넙쭉 받은것에 지나지 않으며, NC와의 트레이드는 왜 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뻘짓 그 자체였으며, 기껏 두산에서 받아온 류지혁은 기아의 부실한 트레이닝 관리 때문에 온지 얼마 안되서 갑자기 햄스트링 파열로 이탈되어버렸다.
더 암담한것은 외부 비판이나 피드백을 들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는것이다.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받고 때로는 적극적인 해명을 하는 동시에 왜 그런결정을 한것인지 논리적으로 팬들에게 설명하는 LG단장 차명석과는 달리, 조계현은 기아팬들에게 전혀 소통하려 하질 않으며 감독과의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은채 독선적인 판단을 남발하고 있다. 언플을 통해서 윌리엄스와의 소통을 중시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정작 현장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는 않고 있다.
다만 외부 FA 영입을 하지 못한것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기아는 실질적인 구단주인 정의선이 야구단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구단을 통째로 매각해버려도 이상할게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36]조계현 입장에서는 모기업에게서 돈을 꾸려고 해도 꾸어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5.1.4. 2021년


시즌 시작전에는 의외로 별다른 뻘짓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 상태이다. 다만 작년에도 온갖 뻘짓과 실없는 소리를 일삼았던것을 보면, 막상 시즌이 시작되면 언제 어떻게 윌리엄스의 발목을 잡을지 모르는 상태이다.

6. 연도별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해태
31
174
7
9
4
-
0.438
2.84
153
3
73
97
64
55
1.27
1990
30
178⅓
14
(4위)
13
0
-
0.519
3.28
144
8
81
130
(5위)
73
65
1.25
1991
21
130⅓
9
9
0
-
0.500
3.25
100
6
52
75
50
47
1.12
1992
37
156
10
6
12
(4위)
-
0.625
2.94
(5위)
123
13
59
98
64
51
1.14
(4위)
1993
28
196⅓
(3위)
17
(1위)
6
1
-
0.739
(4위)
2.15
(4위)
141
8
58
118
54
47
0.98
(2위)
1994
27
210
(2위)
18
(1위)
5
0
-
0.783
(2위)
2.61
171
12
68
135
69
61
1.11
1995
19
126
9
6
0
-
0.600
1.71
(1위)
97
2
43
59
28
24
1.06
1996
27
191⅔
(5위)
16
(3위)
7
0
-
0.696
(3위)
2.07
(2위)
145
12
52
116
51
44
0.99
(3위)
1997
25
114
8
9
0
-
0.471
3.71
111
11
36
71
64
47
1.2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8
삼성
29
150⅓
8
11
0
-
0.421
5.21
171
19
76
94
99
87
1.56
1999
12
20⅓
0
3
0
-
0.000
11.51
36
5
15
16
27
26
2.36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0
두산
16
89
7
3
0
0
0.700
3.74
81
7
31
53
40
37
1.20
2001
18
87
3
5
0
0
0.375
5.28
99
7
38
38
53
51
1.52
<color=#373a3c> KBO 통산
(13시즌)
320
1823⅓
126
92
17
0
0.578
3.17
1572
113
684
1100
736
642
1.19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89
7완투
0완봉
1990
10완투
(1위)
5완봉
(2위)
1991
1완투
0완봉
1992
3완투
1완봉
1993
10완투
(공동 4위)
4완봉
(1위)
1994
14완투
(1위)
5완봉
(1위)
1995
4완투
0완봉
1996
11완투
(1위)
3완봉
(공동 2위)
1997
2완투
1완봉
(공동 4위)
1998
2완투
0완봉
1999
0완투
0완봉
2000
0완투
0완봉
2001
0완투
0완봉
<color=#373a3c> KBO 통산
64완투
19완봉
(4위)

7. 여담


  • 선수 시절에도 유머러스하고 쿨한 성격인지, 최해식에 인터뷰에서 하루는 피칭 중에 팜볼을 던지겠다고 하자 최해식이 팜볼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느리게 오는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자 웃으면서 어디가서 그런 소리하지 마라면서 넘겼다고 한다. 다만 박재홍이 고향 팀 해태와 계약과정에서 잡음이 생겨 입단을 거부하자 광주팬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는데, 박재홍이 프로 입단 후 조계현이 혼쭐내주겠다고 벼른적이 있다. 박재홍 항목 참조.
  • 1997년 4월 15일 당시 LG 트윈스의 신인이었던 이병규가 당시 LG에게 매우 강했던 조계현을 상대로 무려 3안타 4타점을 기록한 바 있는데 당시 이병규는 인터뷰를 통해 "(조계현 선배가)신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시고 좀 열심히 던져주시면 좋겠다" 라는 말을 하여 논란이 된 바 있다. 이 말은 상대팀이었던 해태 선수단을 자극하고 말았고, 당시 화가 난 해태 선수들이 조계현에게 이병규를 한 대 맞추겠다고 하자 후배들에게 "쟤는 분명히 야구 잘 할것 같다. 그냥 둬라." 라고 했다고 한다. 훗날 2014년 5월 6일 조계현이 잠시 LG 감독대행을 맡고 있었을 때 이병규는 통산 2000안타를 기록했고 조계현은 이병규의 신인 시절이던 1997년을 회상하며 이병규의 기록을 축하해 주었다.
  • 정세균 국무총리가 그의 팬이라고 한다. 해태 시절부터 조계현의 팬이었다고 하며, 2017 한국시리즈 2차전 시구 당시에 정세균 당시 국회의장이 입은 옷에도 조계현의 이름과 해태시절 등번호인 17번이 마킹되어 있었다.
  • 모 BJ와 목소리가 상당히 비슷하다..#[37]
[1] 1981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2] 이 분은 연고지 팀인 빙그레 이글스와 계약을 했지만, 뚜렷한 성과없이 얼마안가 은퇴한다.[3] 이때 선린상고 동기였던 박노준은 차출되지 않았는데 이유는 1963년생인 선동열, 김건우와 달리 박노준은 1962년 생으로 1살이 많아서 나이제한에 걸렸기 때문.[4] 일례로 이대진도 넣긴 하나 이대진은 93년도에 입단으로 오히려 선배들에게 밀린다. 그래도 저 위에 3인방과 함께 100승 투수 반열 중 한 명은 틀림없다.[5] 결정적으로 이 기간은 LG 트윈스의 리그 전성기였다.[6] 1993년 4월 11일 LG와의 광주 홈경기에서 9회 2사까지 노히트 노런을 이어가다 송구홍에게 통한의 중전안타를 맞고 노히트 노런이 깨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조계현은 15년 후 삼성 투수코치로서 친정팀의 어느 후배 투수친정팀의 레전드가 키운 브콜돼에 의해 자신처럼 9회 2사에서 노히트 노런이 깨지는 순간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된다.[7] 1993년에 조계현과 김태원의 맞대결은 세 차례 있었는데 각각 0-0 무승부(더블헤더 1차전), 조계현의 1-0과 2-1의 두 차례 1점차 승리였다. 당시 김태원은 141.1이닝 방어율 2.42라는 엄청난 호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조계현과의 맞대결에서 전혀 승리를 챙기지 못하는 등 불운이 겹쳐 시즌 8승에 그치고 말았다. 결정적 요인은 조계현과의 맞대결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8] 이때 조계현과 이강철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실례이며, 이강철의 89~92와 조계현의 93~96을 비교해도 조계현의 우위다. 이상훈조차 94~95에서 최고였을 뿐 4년 평균을 내면 조계현한테 절대 미치지 못한다. 남은 후보로는 정민철이 있겠지만 정민철이 대단한 투수임은 사실이지만 조계현처럼 압도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해태의 타격? 95년도는 해태가 쌍방울보다 못하고 태평양과 꼴지를 다툴만한 형편없는 타격이었다,[9] 역대 최초의 고졸 지명선수[10] 하지만, 그해 시즌이 시작되기 전 스프링 캠프 팀내의 분위기가 개판이였는데 구단 초유의 항명사건으로 인해 조금 싫어하는 팬들도 있었다. 반대로 그와 대비되는 이강철은 반대파.[11] 전년도 선동열의 31세이브에서 9개 더 갱신을 했다. 선동열 역시 그 해 골든글러브를 수상[12] 후에 김기태가 LG와 KIA에서 감독을 맡을 때 조계현이 수석코치가 되어 옆에서 그를 보좌한 걸 보면 참 인연이다.[13] 그리고 공교롭게도 1993년에 조계현의 노히트 노런을 9회 2사에서 저지한 송구홍은 조계현이 1997 시즌 후 삼성으로 트레이드되고 얼마 후 해태로 트레이드되었다.[14] 이건 당시 방위복무 중이었던 이종범이 없는 타선의 무기력함도 있었다.[15] 하와이 전지훈련 중 이순철, 송유석, 김정수, 이건열, 정회열 등과 같이 항명사건을 터뜨린 게 원인이었다. 결국 이 선수들은 1996 한국 시리즈 후 ~ 1997 정규시즌 종료 사이에 대거 정리된다. 단 김정수만큼은 예외, 어느 정도 사건 수습을 했기 때문에 비교적 오래 살아남았는데 이 덕인지 2000년 김응용 감독의 추천을 통해 SK로 이적했다.[16] 이 시기 삼성은 우승의 한을 풀기 위해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타 팀에서 여러 선수들을 데려오는 등 현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 사례들을 살펴보면 삼성의 막대한 자금력에 감탄할 정도인데, 먼저 김영진(야구)양용모(...)가 주전을 하던 포수진을 보강하기 위해서 1998년에는 해태에서 방출된 정회열을 자유계약으로, OB로 입단해야 했던 신인포수 김지훈(1973)을 지명권 양도로 데려왔고, 1999년에는 우완투수 이상훈과 4억원을 주고 두산에서 진갑용을 사온다. 그리고 1999시즌이 끝나자마자 LG에서 주전포수인 김동수를 3년 8억의 조건 + FA 보상금 + 김상엽을 주고서 사왔다. 또한 투수진 보강을 위해 1997 시즌이 끝나고 해태에서 4억원을 주고 조계현을 영입했으며, 1999년 시즌을 앞두고 OB의 에이스 투수 김상진6억 5,000만원을 내주고 데려왔다. 그리고 동시기에 해태의 젊은 마무리투수 임창용을 무려 간판타자 양준혁에 곽채진, 황두성을 얹고 거기에 현금 30억까지 줘가면서 데려왔다. 그리고 쌍방울의 주축 선수들이었던 불펜투수 김현욱과 좌타자 김기태를 무려 20억을 주고 데려왔다. 여기서 끝이 아닌데, 사이드암/언더핸드 투수를 보강하기 위해서 1999년 말 FA 제도가 도입되자마자 해태에서 이강철을 3년 8억 + FA 보상금 + 박충식을 주고서 영입했다. 그리고 당시 최고대우로 9회 우승신화를 일군 해태 타이거즈 감독 김응용과 코치진들까지 모셔오는 투자를 단행했다. 1997~2000년 4시즌 동안에 삼성이 선수영입에 쓴 돈은 자그마치 100억 이상이다. 그리고 이 당시 삼성과 현대가 서로간의 전력 상승을 위해 야구판에 돈X랄을 한 탓에 강한 팀들과 약한 팀들의 전력 양극화가 심해졌고 결론적으로 리그 흥행 저하의 큰 이유가 되었다.[17] 모기업의 위기 문제도 있었다. 당시 해태그룹은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타이거즈가 우승한 바로 1주일 후 부도가 나는 바람에 돈이 매우 필요한 상황이었으며, 리그 탑급이던 주축 선수들은 여기에 있어 더없는 현금화 자원이었다. 시의적절하게 현대와 삼성 간 재계 라이벌리가 야구계를 불태우고 있었고, 해태는 이에 조계현과 임창용, 이강철양준혁을 팔아 현금을 마련한다. 해태뿐만이 아니라, 쌍방울 또한 97년 중순 부도가 나는 바람에 박경완, 김기태, 김현욱, 조규제 등 주축 선수들을 삼성과 현대에 팔아 자금을 확보해야 했다.[18] 두산이 3연패후 3연승으로 7차전까지 가는데 큰역할을 하였다.[19] 당시 김인식 감독에게 재활신 별명을 붙여주게 한 사례 중 하나.[20] 그리고 19년 뒤 다른 팀이지만 똑같은 커리어를 지내고 마지막에 같은 팀에서 우승하고 현역 은퇴한 선수가 나온다.[21] 투구 동작시 다리를 반대쪽 다리 위로 꼬아서 내려오는 게 닭싸움하는 듯한 모습이라 싸움닭이라 하기도 했었다.[22] 그 기간 유일하게 비빌 수 있는게 정민철 뿐이었을 수준이었는데 그 정민철과 ERA가 0.5가 차이난다. 이상훈은 2년 무리하고 중간계투로 갔다.[23] 이후 위의 잉여 라인(...)에서 조현근은 2009 시즌 후 경찰 야구단에 입대했으나 군 복무 중 2군 리그에서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가 제대 후 토미 존 수술까지 받고 여전히 성장하지 못한 채 2016 시즌 후 방출당한 후 은퇴했고, 최원제는 군 제대 후 결국 타자로 전향했다. 투상수박성훈은 시즌 후 넥센 히어로즈트레이드됐다. 그나마 차우찬이 이듬해인 2010년 승률왕에 오르며 포텐이 터지긴 했는데, 이쪽도 이후 6점대 평균자책점을 찍는 등 2년 간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이다가 2013년부터 삼성의 주축 투수로 활동하며 2015년에는 탈삼진왕에 올랐고 시즌 후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다가 2016 시즌 후 FA 자격을 얻어 무려 4년 95억 이라는 대박을 터뜨리며 LG로 이적했다. [24] 사실 김기태와는 삼성에서 1999 시즌에 한솥밥을 먹기도 했었다.[25] 9회 2아웃 2루 상황에서 박용택 대타로 신인 투수 신동훈을 기용한 것. 그것도 이전에 투수로 등판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데뷔전을 대타로 치룬 것이었다.[26] 수석코치는 대체로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감독이 자신을 보좌하기 위해 데려오는 경우고 두번째는 감독을 중간에 잘랐을 때, 보험을 위해 프런트에서 선임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가 조계현, 그리고 2011년 선동열이 KIA에 부임할 때 데려온 이순철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계현이 김기태가 사라진 이후 감독대행을 계속 맡기도 좀 껄끄러웠을 것이다. 후자의 범주는 2009년 당시 조범현 KIA 감독 아래서 수석코치를 맡았던 김종모, 그리고 2006년 이순철이 LG 감독을 사임한 후, 감독대행을 맡았던 양승호가 있다. (김기태 자신도 박종훈 밑에서 프런트 보험용 수석코치를 했다.) 기아가 해당년에 우승한 후, 조범현의 발언권이 높아지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자신과 인연이 전혀 없고 껄끄러운 관계였던 김종모를 자른 것이었다.[27] 김선빈도 2018년에 잠시 부진했고, 박찬호가 주전 3루수를 이어받아 도루왕을 수상하긴 했으나, 타격 부문에선 아쉬움이 많았으며 1루수 자리는 돌려막기 식이라 주전 성립 자체가 어려웠다.[28] 특히 황대인이 포텐이 터질 기미를 보여주고 있고, 한승택과 백용환 모두 작년에 비해 일취월장한 수비를 보여주고 있다.[29] 장현식은 두자릿수의 ERA, 김태진은 타출장이 박찬호와 비슷하다. 즉 1군 선수 중 최하위의 성적이다.[30] MLB같은 경우 라인업을 현장과 프런트가 합동으로 짜는 경우도 있다 한다.[31] 당장 2019년에 전상현이 신인왕을 못받은것은 프런트의 탓이 크다.[32] 소위 티샤쓰 뿌려로 요약되는 마케팅에만 힘을 주고 (심지어 그 마케팅 조차도 잘하는 게 아닌 수준에다가)[31] 그 외의 요소에는 야구팀이라 부르기도 힘든 수준의 프런트를 의미한다.[33] 물론 서재응이 투수 교체에서 문제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허나 이번 보직 이동의 문제는, 불펜진의 난조가 트레이드 이후에 시작되었고 브룩스라는 완벽한 선발 카드 하나가 날아간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재응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고, 예전처럼 1군 불펜코치에서 정명원을 보필했다면 적당했을지 모르나 갑작스럽게 2군 투수코치였던 곽정철과 자리를 맞바꾸는 징계성 인사가 되어버린 것.[34] 2020년 KIA 타이거즈의 내야 공격 WAR은 -0.19로 이는 역대 시즌 모든 팀의 내야진으로 나열해도 꼴찌다. 애초에 내야진 공격 WAR을 합쳐서 음수가 나온게 20시즌 이 팀 밖에 없다. 맷 윌리엄스 감독은 이런 최악의 내야진으로도 5할이 넘는 성적을 내는 기적을 보여준 것.[35] 양상문은 LG 감독과 단장으로 지내며 SK에 정의윤과 신재웅, 강승호를 트레이드로 내주었다. 또한 정상호를 FA로 영입해 그의 대체자원이었던 김민식으로 1년 뒤 KIA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노수광을 얻으면서 발빠른 외야수를 보강했고 비록 노수광 본인은 부상으로 한국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정규시즌 2위에 힘을 보탰다. 또한 두산에는 1승 15패로 압살당하며 두산의 정규시즌 1위의 1등 공신이 되기도 했다.[36] 신세계에게 구단 매각 의사를 밝혔다가 거절당한 기업은 현대-기아가 유력하다.[37] 실제로 감스트와 조계현 둘 다 호남 출신이라 서남 방언이 짙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