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 퀴리
1. 개요
Ève Curie(1904.12.6 ~ 2007.10.22)
프랑스 및 미국의 피아니스트 겸 저널리스트 겸 작가 겸 사회운동가. 마리 퀴리와 피에르 퀴리의 차녀. 흔히 '이브' 퀴리로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어 발음 및 표기법으로는 '''에브'''가 맞다. 이브라고 불리는 것은 이후 그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오랜 기간 미국에서 살면서 영어식 이름으로 많이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일생
퀴리 집안의 전통을 어기고 과학자의 길을 포기했으며, 이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기 위해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이때 마리의 친구들의 시선이 따가워서 힘들어했다고 한다. 마리 본인은 이브에게 과학자의 길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딸이 연주회에 입고 나가는 드레스에 대해서는 불평을 했다고 한다. 수수한 옷만 입고 복장에 대해선 어느 정도 보수적이었던 마리에게 딸이 입는 드레스는 '등이 몇 km는 파인' 것처럼 보였다고. 당대 유명한 미인에 늘 하이힐을 신고 화장을 하는 등 언제나 멋쟁이였고 성격도 사교적이라, 파티 등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대체로 예술가적이고 셀레브리티적인 타입이었던듯 하다. 당시 사진을 보면 미모가 굉장하다.[1]
마리가 죽은 이후 어머니의 전기인 <퀴리 부인전>을 썼고, 이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넘어가자 이브는 프랑스에서 탈출하여 미국으로 피했고 이후 미국에서 살게 된다. 이후 반나치 활동에 전념하여 1941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박탈당하지만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이브의 프랑스 시민권은 회복되었다. 1958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얻어 이중국적이 되었다.
이브는 남편인 미국인 외교관 헨리 라부아스 주니어(1904~1987)와 함께 유니세프에서 활동하였으며, 이 단체는 1965년에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이때 남편이 UNICEF를 대표하여 상을 받았는데, 이 일 때문에 이브 퀴리는 '''"저는 우리 집안의 수치입니다."'''라는 농담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 어머니, 언니, 형부, 남편까지 모두 노벨상을 탔는데 자신만 못 탄 게 이유라고. 노벨상 대신 레지옹 도뇌르, 전미 도서상(National Book Award), 폴란드 부활기사십자훈장(Order of Polonia Restituta) 등 훈장으로 찰갑을 만들고 100세 생일에 세계 국가원수들로부터 축전을 받은 사람만이 칠 수 있는 개드립이다. 과학자의 길을 포기해서 방사선 피폭되지 않아 60대에 사망한 어머니, 언니와 달리 103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퀴리 가문 내에서 독특한 존재였던 셈.
이브 퀴리는 UNICEF에서의 활동으로 존경받는 일생을 살았지만, 50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입양한 의붓딸이며 라부아스의 죽은 전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인 앤 페레츠 라부아스가 이브를 어머니로 모셨다.
[1] 미모 전성기때는 '프랑스 최고의 미녀'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유명한 미인이었다. 실제로 당시 사진을 보면 당시 시대의 여배우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이다. 당대에도 미인으로 유명할 정도의 미모가 나온 것이 의외일 수 있으나, 마리 퀴리도 과학자 이미지가 너무 강하고 꾸미는데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이목구비도 준수하고 젊을적 일하던 부잣집 아들과 사랑에 빠져 결혼할뻔하고 독신으로 살려고 한 피에르 퀴리와 결혼해 금슬좋게 산 걸 보면 이 미모와 매력이 갑자기 튀어나온건 아니었다. 피에르 퀴리도 훤칠하고 준수한 외모. 잘보면 퀴리부부와 많이 닮은게 그야말로 부모의 장점만 뽑아놨다. 그래도 전가족이 외곬수로 연구만 하는 과학자인데 사교적이고 외향적이며 패셔너블한 셀레브리티적인 성격은 누굴 닮은 건지 미스테리. [2] 국내에도 <마담 퀴리>로 2006년에 정식 번역본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