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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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오대 십국 시대 후당의 제2대 황제. 묘호는 명종이며 시호는 성덕화무흠효황제(聖德和武欽孝皇帝)이다. 황제가 된 이후에는 이름을 단(亶)으로 개명하였다.
5대의 14명의 황제 중에서 후주(後周)의 세종 시영(柴榮)과 함께 명군(名君)으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초기
본래 그는 대북(代北) 응주(應州)의 투르크계 사타족 호인(胡人)이었기에 성은 없었고,[1] 이름은 막길렬(邈佶烈)이었지만 후당의 1대 황제 이존욱의 부친인 이극용의 양자로 입양되어 이사원(李嗣源)이란 이름을 받았다.
무력이 뛰어나 이극용 휘하에서 여러 전투에 참전해 거란족이나 후량과의 전투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눈부신 전공을 쌓았다.
후량을 멸망시킬 때 장종 이존욱의 황명을 받들어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한 것도 바로 이사원이었다.
2.2. 재위
926년, 장종 이존욱이 내치에서 연달아 실책을 범하며, 정사를 돌보기는커녕 자기가 총애하는 연극배우들과 함께 연극 놀이를 즐기거나 그들을 관리를 감독하는 관직에 임명하는 등 막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에 후당의 각지에선 반란이 계속 일어나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중 장종은 이사원에게 명하여 하북의 반란을 토벌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이사원의 최측근이었던 양자 이종가와 사위 석경당은 이사원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가 되라고 계속 부추겼다. 이사원은 처음에는 이를 만류하였으나 세 번을 청하자 마침내 호응하여 군사를 돌려 낙양을 공격, 926년 60세의 나이로 후당의 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때 이존욱은 궁성 안에서 병사들과 대치하다가 날아온 유시에 맞고 그 후유증으로 명을 달리했으며 일곱 아들들은 모두 주살됐으니 이는 암군 장종의 자업자득이었다.
재위에 있을 때 주요 치적은 먼저 수도를 낙양에서 개봉으로 천도하였다. 또한 사치를 금지하고 본인도 검약에 노력해 궁인과 영관을 줄였고 공물을 받지 않았으며 삼사를 창설하고 내장고를 없애 백성들의 삶이 편해졌다. 그 외에도 환관을 죽여 그들의 세력을 억제하였고, 대규모 측량을 행해 세제의 정비를 행하였다. 탐관오리는 엄벌에 처하고 청백리는 후한 상을 내리기도 했다.
명종은 혼란한 시기에 잠시나마 전쟁을 멈추고, 농업생산에 주력하여 몇 년간 풍년이 들어 모처럼 6-7년간의 안정기를 이룩해냈다. 명종은 양자 출신으로써 기존 후당의 계통과는 다른 제위 교체나 다름없었던지라 새로이 사직을 세워 국명을 바꾸자는 간의가 있었지만 명종은 자신이 이씨의 양자로 들어와 이씨가 되었으니 국호를 바꿀 필요가 없다는 말로 사절했다. 명종이 간언을 따랐다면 후당은 2대로 멸망하고 이사원을 개국조로 하는 새로운 후X 왕조로 교체되었을 것이다. 그는 이민족 출신으로 한민족에 군림하는 것을 고뇌하여 밤이면 밤마다 향을 피워 나는 이민족 출신이어서 천하를 바로잡을 수 없으니 하늘에 원컨대 조속히 성인을 태어나게 하시어, 천하의 백성을 돕게 해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명종은 까막눈이라 한자를 읽을 수 없었지만 모든 상주문을 모사 안중회(安重誨)에게 읽어달라고 하여 처리하였으며 고문 겸 재상으로 풍도(馮道)를 등용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늦은 나이에 즉위한 탓인지 분별력이 흐려져 자신의 측근이었던 안중회와 임환을 참언에 흔들려 사사하였다.
또한 본인이 무장들에게 추대된 터라 즉위 이후부터 무장들을 우대하여 권력을 주었다. 이것은 무장들의 오만과 전횡을 불러일으켜, 명종이 죽은 후 3년 뒤에 후당이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933년, 명종이 병으로 쓰러지자 진왕(秦王)에 책봉된 둘째아들 이종영(李從榮)이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히 반란은 진압되어 이종영은 처형되었지만 명종은 아들이 자신을 살해하려했다는 사실을 알고 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3. 평가
5대 왕조들 중 후주의 세종과 함께 단 둘뿐인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질적으로 5대의 황제들은 어딘가 나사가 빠졌거나 권력 다툼을 벌이고 심지어 음주가무를 즐기는 등 군주로써는 적절치 못한 행보를 보인 것과 달리 이사원은 글자 하나 모르는 까막눈이었음에도 내정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본인이 손수 나서서 근검절약을 실천하고 내장고를 없앰과 동시에 토지 측량을 재실행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펼쳐 짧았지만 어느 정도의 안정기를 구축해낼 수 있었다. 실로 후주의 세종과 함께 오대 십국 군주들 중 몇 안 되는 왕다운 노릇을 했던 군주라고 정의할 수 있을 듯.
다만 세종과는 달리 완벽하지 못했던 것이 말년에 간언에 휘둘려 신하들을 함부로 사사하거나 무장들에게 너무 권력을 쥐어준 나머지 그의 사후 무장들끼리 권력다툼이 벌어져 후당이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2] 어찌보면 멸망에 어느 정도 빌미를 제공한 셈.
4. 대중매체
중국 영화 황후화의 주인공 황제(주윤발 분)의 모델이 이사원이다. 하지만 황후가 후량의 공주 출신으로 설정되고 황후와 황자들의 반란을 결국 진압하는 데 성공하는 등 실제 역사와는 전혀 다르게 창작되었다.
5. 둘러보기(계보)
[1] 이사원이 황제에 올라서 친조부와 친부를 황제로 추존하였다. 이사원의 조상들이 호족이어서 한족 성씨가 없었는데, 성씨가 이씨로, 이름이 외자로 기록되어 있다. 예전 후조의 석륵이 조부들을 석씨로 역으로 사성해서 추존했을 때나 뒤에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을 때 조상들을 추존했을 상황과 얼추 비슷하다.[2] 실제로 그의 휘하 무장들 중 총애를 받았던 석경당이 반기를 들어 거란에 연운 16주 할양이라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짓거리로 그들을 끌어들여 후당을 멸망시키고 중국에 정복왕조를 불러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