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타족

 


沙陀
Shatuo

"남녀의 문란은 대체로 토번과 동일하였지만,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용맹 · 민첩함은 그들을 능가하였다. 토번은 사타의 군대에 의존하여 항상 의 변경을 침략하여 괴롭혔다. 사타가 당에 귀부함에 이르러 토번은 이 때문에 또한 쇠퇴하였다."

-『신당서 사타전』

1. 개요
2. 역사


1. 개요


사타(沙陁) 또는 사타돌궐(沙陀突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타족은 서돌궐의 예속된 부락으로서 처월[1]의 일파이다. 사타는 천산 산맥에서 자리잡아 활동했는데 이들이 사는 곳은 주로 사막 지대였기 때문에 명칭이 여기서 유래했다.

2. 역사


서돌궐이 강성했으나 지속된 내전당태종의 연이은 공격으로 657년, 결국 서돌궐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서돌궐이 멸망하자 사타족은 당의 기미주인 영주로 거처를 옮겨 당에 귀부했다. 이후 사타족은 당태종을 따라 고구려 원정과 설연타 원정에 나서기도 하였으며, 설인귀를 따라 철륵 토벌전에서도 공을 세웠다. 이후 당나라는 공을 세운 추장 주야금산을 북정도호부의 관할을 받도록 하였다. 712년, 사타족은 토번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정주 막하성으로 이동했다. 이에 당현종은 주야보국[2]을 금만주도독에 임명하였다.
안사의 난으로 당의 서역 지배권이 토번과 위구르 제국에 넘어가자 정원 연간 사타 역시 당을 버리고 토번에 귀부했다. 이로부터 사타는 토번이 당의 변경을 침입할 때마다 선봉으로 나섰다. 790년, 토번의 명장 줘치수가 북정성을 공격했을때도 사타의 협력이 있었다. 당시 서역 일대는 토번과 위구르 제국이 지배권을 두고 팽팽한 긴장감이 나돌고 있었다. 얼마 후에 위구르 제국이 양주 점령하여 서역 일대가 어수선해지자 토번은 사타의 이심을 미리 예방하고자 이들 거주지를 이주시키고자 모의하였다. 808년, 그러자 주야진충은 무리 3만을 이끌고 다시 당으로 내투했다.
당헌종은 조서를 내려 사타를 염주에 거주시켰고, 음산부를 설치했다. 또한, 당나라가 직접 양과 소를 매입해 사타의 재력을 충당시켰다. 이후 당나라는 사타를 삭주로 사민하였다. 847년, 토번이 회흘과 연합해 당의 하서를 침공하자 사타의 추장 주사적심이 당군과 연합해 토번군을 격파했다. 868년, 방훈의 난이 일어나 농민세력이 강소성 일대와 산동성 남부, 안휘성 북부까지 미치자 당나라는 사타, 토욕혼 등의 이민족 군대를 편성했다. 주야적심과 아우 주야적충이 반란을 불시에 진압했다. 방훈의 난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주야적심에게 이국창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부친을 따라다녔던 이극용(李克用)은 당말에 일어난 황소의 난을 진압하고 경조를 회복했다. 이후에 중서령에 이르렀고, 진왕으로 책봉되었다. 손자 이존욱은 923년, 후량을 멸망시키고 후당을 세웠다. 오대십국시대에도 사타족 출신인 후진석경당, 후한유지원 등이 있었다.[3]
발해를 멸망시킬 때 거란을 도왔던 세력 중 하나로 요사에 나온다. 또는 '''발해를 멸망시킬 때 주변 지역 민족들을 평정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요나라에 복속된 사타족도 있다보니 일부는 거란을 지원했을 수도 있다.

[1] 원래는 스키타이와 같이 이란계 유목민족인 샤카 계통의 종족이었는데 오랫동안 철륵과 밀접한 관계를 맺자 튀르크계인 철륵에 동화되어 서돌궐의 한 부가 되었다.[2] 사타부락의 추장으로 추정된다.[3] 후촉의 건국자 맹지상도 사타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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