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형

 

2. 조선 단종 때의 문신이자 세조~중종때의 은둔자
2.1. 생애
2.2. 괴화나무 전설



1. 조선 연산군 때의 문신


이수형(李守亨, ? ~ 1504)
자는 가중(嘉仲), 호는 국헌(菊軒), 초명은 지형(智亨).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486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1492년 문과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전적 등을 지내고 연산군 즉위 이후 시강원의 필선[1], 의정부 사인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벌어지자 벼슬을 사직하고 은거했으며 1504년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육경해설, 척사론 등의 저서를 남겼다.

2. 조선 단종 때의 문신이자 세조~중종때의 은둔자



2.1. 생애


이수형(李秀亨, 1435 ~ 1528)[2]
자는 영보(英甫), 호는 도촌(桃村), 별호는 공북헌(拱北軒), 본관은 우계.
아버지는 군자감] 주부 이경창이고, 어머니는 순흥 안씨이다. 이순지와 함께 세종 때의 관상감, 천문학자였던 문절공 김담의 사위이다.
18세에 음서 제도로 관직에 나가 선교랑 전생서[3]을 거쳐 조봉대부 평시서[4]이 되었다. 1455년 단종이 삼촌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사퇴했다.
그뒤 관란 원호, 어계 조여 등과 함께 영월 수주면요선정에 모여서 단종의 안위와 국사를 논하고, 단종에게 문안인사를 하기도 했다. 원주시 치악산 정상에 올라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바위에 원호, 조여와 함께 이름을 새기고 내려왔다. 그뒤 처가가 있는 봉화군 도촌으로 내려가서 마을을 개척하고 은거했다.[5]
호를 도촌이라 했는데 이는 무릉도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단종이 사사되자 단종의 3년상을 마친 뒤, 산으로 들어가 삼면은 벽이고 북쪽을 향해 문이 하나 있는 집을 짓고 평생을 숨어살았는데, 북쪽은 단종의 능침인 장릉이 있는 곳이다. 훗날 창설 권두경과 눌은 이광정은 여기에 감동하여 각각 행장과 유기, 현판을 남겼다. 성종 때 다시 직첩이 내려졌는데 역시 거절하였다. 70년간 은거하다가 1528년 94세로 사망했다.
일평생 단종에 대한 일편단심으로 은거한 것에 감동하여 창설 권두경은 천인실(千仞室)이라는 현판과 행장, 유기를 남겼고, 눌은 이광정공북헌이라는 현판과 행장, 유기를 직접 썼다고 한다.
철종경상도암행어사로 왔던 담재 임응준(任應準)이 이를 상소하여 1858년 승정원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추증됐다가 다시 1864년 고종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2.2. 괴화나무 전설


그가 평생을 은둔하던 공북헌 옆에는 1610년 지역 사림들이 뜻을 모아 그를 추모하는 사당 견일사를 세웠는데 뒷날 현판을 받고 도계서원이 되었다. 공북헌의 서쪽에 있다.
생전에 공북헌 뒷편에 괴화나무를 하나 심었는데, 이수형이 사망할 때 같이 말라 죽었다가 1715년단종숙종의 명으로 복위하니까 괴화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 괴화나무는 6.25때도 고사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1] 세자를 가르치는 기관이다. 일반 왕자나 왕손들은 왕자사부, 왕손교부를 별도로 임명하여 가르쳤다.[2] 문헌이 극히 적지만 일부 문헌에서는 李秀亭으로도 나온다.[3] 왕실의 동물을 사육하는 기관이다. 왕립 동물원[4] 시장의 물가와 도량형을 관리하는 기관이다.[5] 그가 살던 동네 주변을 도촌리라 부르는데, 이수형이 실제 살던 곳 근처는 도를 안다는 뜻의 도지미, 도지마을, 도지리 등으로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