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실라우렌
1. 개요
스페인의 前 축구선수.
2. 생애[2]
2.1. 어린 시절
바스크의 바수르토소로사(Basurto-Zorroza)에서 태어난 실라우렌의 가족들은 큰 정육점을 경영했기 때문에 실라우렌은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3]
그는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빠졌고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빠져가며 축구를 즐겼다.
2.2. 축구 선수
2.2.1. 클럽
1929년, 실라우렌은 아레나스 클루브 데게초(Arenas Club de Guetxo)에 입단했고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
다음 시즌에 실라우렌은 아틀레틱 클루브의 확고한 주전이 되어 리그 준우승과 코파 델 레이 우승을 거두는데에 공헌했다. 빌바오는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승점 2점차로 밀린 아쉬움을 코파 델 레이에서 풀었는데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2대1로 승리를 거둬 복수에 성공했다.
1933-34 시즌에 아틀레틱 클루브는 2년 연속 준우승을 뒤로 하고 3년 만에 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뒤이은 1934-35 시즌에 4위로 시즌을 마쳐 다소 실망스런 결과를 받은 실라우렌과 아틀레틱 클루브 멤버들은 절치부심하며 1935-36 시즌을 준비했다. 하지만 실라우렌은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하지 못했다. 그래도 팀 동료들이 실라우렌의 공백을 잘 메워주어 아틀레틱 클루브는 레알 마드리드를 승점 2점차로 따돌리고 라리가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런 아틀레틱 클루브의 1930년대 전성기는 스페인 내전으로 끝났다. 루이스 레게이로, 이시드로 랑가라, 기예르모 고로스티사, 호세 이라라고리 등 빌바오 멤버들은 내전을 피해 유럽 투어를 다녔고 1938년, 멕시코에 가서 CD 우스카디(Uzkadi)라는 이름으로 프리메라 푸에르사에 참여해 준우승을 거두었다.
리그가 끝나고 실라우렌은 더 이상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판단했고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CA 리버 플레이트에 입단했다. 이 곳에서 그는 그다지 중용받지 못했지만 경기에 나서면 호세 마누엘 모레노, 아돌포 페데르네라, 앙헬 라브루나 등 명 포워드들을 보좌했다.
실라우렌의 다음 행선지는 우루과이의 CA 페냐롤이었다. 당시 페냐롤에에서 실라우렌은 알바로 헤스티도의 공백을 잘 메우면서 2차례의 리그 준우승에 보탬이 되었다.
실라우렌은 멕시코로 다시 건너가 레알 클루브 에스파냐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2.2.2. 국가대표
실라우렌의 국가대표팀 데뷔전은 1931년 12월 9일의 잉글랜드전이었다. 하이버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스페인은 잉글랜드에 1대7로 박살이 났다.
실라우렌은 총 14회의 대표팀 경기에 출전했고 그의 대표팀 경력 최고의 순간은 이탈리아 월드컵이었다. 실라우렌은 스페인의 주전 하프백으로 대회에 참가했다. 비록 팀은 8강에서 우승팀이 될 이탈리아에 재경기 끝에 패했지만 그는 스페인 대표팀에서 리카르도 사모라, 하신토 킨코세스와 더불어 월드컵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다소 통통한 체형이었지만 기술적으로 빼어났고 패스에도 능해서 패싱으로 게임을 풀어나갈 수 있었다.
4. 수상
4.1. 클럽
- 라리가 우승 2회: 1933-34, 1935-36(아틀레틱 클루브)
-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회: 1941(리버 플레이트)
- 리가 MX 우승 1회: 1944-45(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 1931-32, 1932-33(아틀레틱 클루브)
- 코파 MX 우승 1회: 1943-44(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 멕시칸 슈퍼 컵 우승 1회: 1944(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 라리가 준우승 2회: 1931-32, 1932-33(아틀레틱 클루브)
- 프리메라 푸에르사 준우승 1회: 1938-39(CD 우스카디)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2회: 1942, 1943(페냐롤)
- 리가 MX 준우승 1회: 1943-44(레알 클루브 에스파냐)
- 바스크 지역 리그 우승 3회: 1931–32, 1932–33, 1933–34(아틀레틱 클루브)
- 코파 바스카 우승 1회: 1934-35(아틀레틱 클루브)
- 바스크 지역 리그 준우승 1회: 1930-31(아레나스 클루브 데게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