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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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天祐
1354년 ~ 1417년
1. 개요
2. 생애
3.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이자춘의 손자이며 이원계의 아들. 태조 이성계의 조카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 어머니인 남평 문씨는 목화로 잘 알려진 문익점의 딸이다. 즉 이천우는 문익점의 외손자이고 민제의 사위이다. 즉 태종 이방원의 사촌형이면서 동서지간. 다만 조선왕조 실록과 선원속보[1]에는 이천우의 두 번째 부인 황보씨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누구의 딸인지는 기록이 없다.
다만 1902년에 편찬된 선원속보(璿源續譜)를 보면, 익조의 셋째 아들인 함원대군(咸原大君)의 현손으로 나온 게 있는데 함원대군파의 오류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만약 함원대군파속보를 따를 경우 아버지는 서성군 이대중, 어머니는 전주 주씨이며, 부인은 청주 한씨 한충의 딸이 된다.

2. 생애


고려 공민왕 때 동녕부(東寧府)의 수령으로 있다가 이성계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숙부를 따라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 → 강원도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 중추원동지사(中樞院同知事)가 되었으며 결정적으로 사촌 이방원왕자의 난을 도운 공으로 정사공신 2등으로 '''완산후(完山侯)'''라는 작위를 받았다.
1402년 조사의의 난 당시 박순ㆍ송류 등과 함께 선발대로 나갔으나 조사의에게 관광 당했다.
이천우가 초반에 보낸 기병 백여 명은 조사의에게 잡혔으며, 다음날 전투에서 포위당했다가 아들을 포함한 10여 명의 기병과 겨우 탈출하였다.참고1참고2
1403년 태종 때 다시 완산군(完山君)으로 작위가 개봉되었다[2].
1407년에는 명나라에 다녀왔고 1409년에는 병조판서와 도진무도총제(都鎭撫都摠制)의 직위를 겸했다. 후에는 의흥부판사(義興府判事),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도 겸했다.
1413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414년에는 그의 군호가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17년 사망하였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양도(襄度)이다.

3. 대중 매체에서


인지도가 높은 인물은 아니라서 그런지 해당 시대 즉,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그나마 비중이 있게 나온 건 용의 눈물 뿐이고, 정도전에서는 출연 자체가 없고,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카메오 수준으로 출연하는 정도.[3]
용의 눈물에서는 김옥만[4]이 맡았는데, 배우 특유의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은 인상 때문에 은근히 존재감이 있다. 방원의 인척이라는 사실은 사병 혁파에 저항하다 귀양가기 전까진 크게 언급되지 않는다. 이 사실이 강조되는 건 이천우가 귀양에서 돌아온 뒤의 일.[5] 상왕으로 물러난 이성계가 궁 밖으로 나가려 하자, 금위장 신분이라 말리다 따귀를 얻어맞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방원의 다른 공신들 중 조영무와 친밀하여 자주 붙어다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나름 공신임에도 이방원이 충분히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느끼지만, 2차 왕자의 난 당시 조영무와 콤비를 이루어 활약했다[6]. 이후 중반부 사병 혁파 시점에 이방원에게 반항하다 귀양 직전 불려온 술자리에서 귀양 간다는 말을 듣고는 험악한 인상을 마구 구기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거리오이까", "저하께서는 인면수심이시옵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 먹는다더니... 우리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구나"'''라고 울부짖는 장면에서 존재감을 크게 발했는데, 이방원 본인도 이 말에 대해서는 딱히 변명하지 않고 하고싶은 말을 계속하게 했으며, 이후 공신들을 모두 귀양보내고, '인면수심' 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가슴 아파했다.
이후, 귀양지에서 조온과 장기를 두며 세월을 보내다[7] 복직 소식을 받은 후에는 자신들의 사병을 빼앗아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자신들은 귀양보냈다 적당한 시점에 불러들여 감복케 하는 이방원의 정치력에 놀라며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며 경외심을 보인다. 조영무와 마찬가지로 조사의의 난 진압에 참여[8]한 것을 마지막으로 정국이 안정화되면서 장수가 아닌 조정 대신 중 한 명으로 꾸준히 얼굴을 내비친다. 정많고 소탈한 조영무와 달리 왕족으로서 태종의 왕권 강화 정책을 철저히 지지하며, 민씨 4형제 숙청에 목소리를 높였고 세자(양녕)을 보필해 명에 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것을 끝으로 극에서 퇴장하는데, 웬만한 인물들은 모두 졸기를 띄워 주는 와중에 별다른 언급도 되지 않고 사라진다. 역사적으로는 민씨 형제 중 막내인 민무휼과 민무회가 사사되고 난 이듬해에 졸했는데, 극중에서 하륜과 이숙번이 세상을 떠나거나 실각한 이후 1년을 그냥 건너 뛰는 도중에 졸했으니 졸기가 나올 수 없기는 하고 졸기가 없는 게 이천우 하나는 아니나 그래도 극 중의 비중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운 일.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상술한대로 등장하긴 했으나 비중은 매우 낮다. 무인정사 즈음에 등장했는데 사실 드라마 특성상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배역이 이름까지 달고 등장한건 당시 흑화하고 있던 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종친 세력의 대표격 인물이라서인듯 하다.

[1] 완풍군파속보 기준[2] 오등작의 폐지로 인한 명칭 변경.[3] 앞의 용의 눈물은 '''159부작'''의 장편 대하사극이고, 뒤의 두 작품은 각각 50부씩 나눈 경우도 있긴 하다. 그만큼, 뒤로 갈수록 사극 제작 여건이 현격히 안 좋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 무엇보다 '육룡이 나르샤'는 실존과 가상, 그리고 역할들이 겹친 인물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이천우의 경우는 드러낸 경우가 없다고 볼 수 있다.[4] 후속 작인 태조 왕건에서는 충주 지역의 장군이던 금식 역을, 여인천하에서는 류순정 역을 맡았다.[5] 세자(양녕대군)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이천우가 수행하는데, 이때 태종이 '''완산군 이천우 백부'''께서 함께 가실 것이라고 직접 말한다.[6] 다만 이방원에 대한 충성심은 조영무보다 밑인지라, 전투 도중 이방간의 군사에게 수적으로 크게 밀리자 차라리 항복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단순한 충성심 차이만이 아니라 이성계의 아들들과 사촌 형제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7] 조온이 곧 자신들을 죽이지 않겠느냐며 불안해하는 것과는 달리 죽이든 살리든 어차피 사병을 뺏긴 이상 죽은 거나 다름없다며 자포자기한 모습을 보인다.[8] 다만 조사의로부터 '삼국지로 비유해서 장비라고 하면 딱 좋을 자' 라는 평을 듣고 그 후 대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