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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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후기의 무신#s-2. 이자춘의 아들이자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 고려 조의 문과와 무과를 모두 급제한 문무겸전.[2]
역성 혁명에 반대하며 음독 자살한 고려의 충신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이복 동생인 이성계를 아꼈던 모양으로, 이자춘의 아들들은 어머니가 달라도 모두 우애가 좋았다고 한다. 다만 사망 직전 그는 "나는 고려의 신하이기에 동생(태조 이성계)에 직접 힘을 보탤 수 없지만 너희는 작은 아버지를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라."고 했다 한다.
그의 아들들(이양우, 이천우, 이조, 이백온[3] )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그들의 작은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도왔고 그의 5남이자 3대 국왕인 이방원의 집권을 돕기도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이 4명의 조카들을 매우 신뢰하고 아꼈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며 4형제 모두가 조선의 왕족으로서 주요 관직을 지내었다.
그러나 이원계 본인은 사망 후 490년이 지난 1872년(고종 9년)이 되어서야 '''완풍대군(完豊大君)'''이라는 군호를 받았다. 고려의 충신이라 오랫동안 왕족으로 대우받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태조 윗대 목조 이안사 ~ 환조 이자춘의 아들들 군호는 1872년에 일괄적으로 수여된 것이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충성 여부와는 아무 상관없으며 전주이씨 완풍대군파의 파시조이다.
2. 생애 및 업적
1330년(충숙왕 17년)에 환조 이자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주 이씨 완풍대군파보》에는 어머니 한산 이씨는 이원계가 어린 날에 죽었고 이자춘은 영흥 최씨와 결혼했고 이성계를 낳는다. 또 이자춘은 정신 김씨와도 결혼하여 의안대군 이화를 낳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원계는 첩 내은장(內隱藏)의 소생, 이화는 첩 곰가(古音加)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원계는 공민왕 대에 문과에 급제했다. 1359년 홍건적이 침략해오자 모두 이를 물리쳤으며, 특히 홍건적이 2번째로 침략했을 때는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었으나 고려 말의 삼원수 중 한명인 안우(安祐)와 함께 개경을 수복하고 2등 공신이 되었다.
강화도에서 나세와 함께 왜구를 물리치고 1380년에는 전라도로 들어온 왜구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또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를 도와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다.
이원계와 이성계 두 형제는 우애가 매우 깊었으며, 이성계는 5살 차이 나는 이복 형인 이원계를 평생 매우 깍듯이 대우했다고 한다.
3. 위화도 회군
1388년 우군도통사 이성계 밑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요동으로 가게 되었고, 이성계의 회군을 끝까지 반대했다.
4. 사망 및 추모
이원계는 이성계의 뜻이 고려를 멸망시키려는 것임을 알고 죽음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칠언 절구의 한시를 남겼는데, 이른바 절명시(사람이 죽기 직전에 남기는 시)이다.
그리고는 네 명의 아들들을 불러 "너희는 나와 입장이 다르니 숙부(이성계)를 도와서 충효를 다하라." 라는 말을 남기고 1388년 10월 23일 죽음을 맞는다. 무덤은 함흥의 정릉(아버지 이자춘(환조)의 능)의 우측에 있으며 선원사와 북청의 삼의사에 모셔져 있다.
5. 기타
사극 용의 눈물에 등장하는데 역사대로 이복동생인 우군도통사 이성계 아래에서 조전원수로 참전하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결정에 '이건 고려에 대한 반역'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회군 결정 철회를 요청한다. 허나 이성계의 마음은 정해졌고, 그 와중에 다른 장수들이 회군 결정에 반기를 들었다는 이유로 진중에서 처형 당하자 집행을 막고자 급히 뛰어오나 이미 처형은 끝난 후였다.
평소 형 이원계의 말을 줄곧 잘 따르던 이성계였으나 새로운 국가의 건설에 확신을 품은 뒤에 그 부분 만큼은 형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성계가 평소처럼 형 이원계의 말을 따랐다면 한반도의 역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내용을 포함해서 역사적 기록이 상당히 부실하고, 편찬자의 의도가 강해서, 관련된 문서를 상당한 의심 해야 하는 인물이다. 고려 공민왕대 인물인데 무과를 봤다거나,[4] 이자춘이 고려에 투항한 것이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탈환 때인데 충목왕 때 음서에 천거되고 충정왕 때 문과에 합격했다거나,[5] 가계도가 애매하다거나,[6] 심지어는 문익점의 가상 아들들[7] 을 처조카로 두었다는 식의 언급이 국방일보를 거쳐서 위키백과에 실리기도 한다.
이원계가 이성계에 반발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위에 언급한 내용이 아니라, 이원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고,[8] 개국공신 명단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9] 이후에도 이원계의 이름은 금기시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기 이성계에 반발한 이들을 다 고려 충신으로 뭉쳐서 볼 수 있느냐가 문제다. 단적인 예가 조영무. 사실 이원계의 사위인 변중량[10] 은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 의도를 정몽주에게 몰래 알려줬던 인물인데, 조선 건국 이후에는 그냥 조선에서 일하면서 정치적으로 활동하다가 정도전의 일당으로 활동한다고 1차 왕자의 난 때 사망했을 정도이다. 즉, 복잡하게 얽혀 있던 정치적, 혼맥적 문제 때문에 이들의 활동은 어느 한쪽으로 단언할 수 없다. 또한 이원계가 금기시 된 것에 대해서는 이원계가 서자가 아닐 가능성이 언급되는 것도 문제이다.
6. 후손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인 독립운동가 이용익[11] 과 그의 손자이자 보성전문학교 2대 교주(校主)인 독립운동가 이종호, 헤이그 특사사건의 이준[12] , 국무총리를 역임한 민주당 당대표 이낙연[13] 등이 그의 후손이다.
[1] 문익점의 셋째 딸이다.[2] 이때 고려는 무과가 없다[3] 이백온의 경우는 분명하지 않은데, 《선원속보(璿源續譜)》에서는 그의 이름은 없고 이서(李曙)로 적힌 게 있다. 반면에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는 그의 이름이 있고 그에게는 두 아들인 이석정(李石貞)과 이석장(李石長)(《조선왕조실록》에 이 한자이름으로 나오는 경우는 없으며, 李石杖으로만 나온다. 李石杖은 이순몽의 유일한 아들(서자)이다.)이 있다고 적혀 있다. 더불어 사후에 추증(追贈)받은 군호의 여부도 엇갈리는데, 《선원속보》, 《씨족원류》에서는 군호를 받지 못한 걸로 나오는 데 비해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을 보면 군호를 받은 걸로 나와 있다(즉, 이백온과 이서는 같은 인물). 하지만 이백온이 이서와 동일인물이라면, 족보 관계가 꼬일 뿐만 아니라 나머지 한 아들의 관계가 설명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남고, 사후에 신원받은 것과 군호를 추증받은 것과 서로 충돌된다. 다만 전주이씨 완풍대군파 양도공종중에서는 이백온과 이서의 동일인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규정된 게 없는데, 《전주이씨 양도공파세보》에서는 동일인물이라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지만 홈페이지에서는 동일인물로 표현되고 있다.# 참고로 이백온의 두 아들은 계유정난으로 화를 입었는데, 그후 숙종 때 장릉(莊陵) 묘역에 배향됐긴하나 대한제국 멸망까지도 신원(伸寃)되었는지에 대한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4] 이원계가 무과에 합격했다는 글이 위키백과를 포함해서 여러 곳에서 인용되는데, 고려시대 무과는 예종대에 존재했다가 이후에 폐기되었고, 이후에는 무과 합격했다는 사람이 없다. 하다 못해 공민왕 때는 더더욱 아니다.[5] 이것도 한국어 위키백과에 적혀 있다.[6] 태종은 태종대로 가계도를 조작할 유인이 존재하고, 이원계나 이화 집안은 그 나름대로 수정할 이유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서 명백하게 여종으로 기록되어 있는 이화의 모친에게 성이 기록되어 있다거나 하는 부분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대목.[7] 물레 민간어원살에 등장하는 문래와 문영. 문익점의 아들들이 다 밝혀지면서, 문래와 문영은 문익점의 손자로 재조정되었는데, 저놈의 민간어원 드립이 빠지지 않는 것을 봐서는 이것도 의심스럽다.[8] 위화도 회군에 가담했던 이들 중에서 당시 반역자 취급받고 제거된 6명을 제외한 이들을 무진회군공신으로 임명했는데, 이원계는 이미 죽은 뒤에 여기에 포함되었다. 즉, 이원계가 위화도 회군에 반대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9] 이원계가 개국공신에 포함되어 있다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글이 있는데, 정작 개국공신 명단 어디에도 이원계의 이름은 없다.[10] 변계량의 형으로 더 유명하다.[11] 이원계의 맏아들인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의 15대손[12] 완원부원군(完原府院君) 이양우(李良祐)의 16대손[13] 이원계의 둘째 아들인 완산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의 20대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