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하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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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 58~60대 총리. 히로시마현 타케하라시 출신.
2. 생애
2.1. 총리 이전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25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대장성(현 재무성) 관료를 시작으로 공직에 입문하였다. 친구였던 사토 에이사쿠와 마찬가지로 이케다 또한 출세와는 거리가 먼 부침많은 관료생활을 보내야 했다.[1] 이후 곧 정계에 입문, 요시다 시게루의 오른팔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주로 요시다 내각의 경제 정책에 관여하였다.
1949년에는 요시다 시게루 내각의 대장대신, 통상산업대신으로 재직하면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닷지 라인이라는 강력한 긴축재정정책을 실행하였다. 때문에 경제가 일시적으로 큰 불황을 겪었는데[2] , 이런 상황에서 이케다 대신은 다음과 같은 개드립을 날린 바 있다.
다만 실제로 야당 의원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온 해당 발언은 이것과는 상당부분 달라서 "부실한 기업은 속히 청산해서 다른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서민들이 보리를 먹게되더라도 경제기조를 바꿔서는 안된다"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서 대서특필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자아냈고 요시다 내각의 지지율을 크게 깎아먹는데 일조한 바 있다.'''중소기업이 5개, 10개 도산해도 어쩔 수 없다.'''(1950년 3월 1일)
'''가난한 사람은 보리를 먹으라.''' (1950년 12월 7일)
사토 에이사쿠와는 구마모토 제5고등학교 동창이며, 요시다 시게루의 휘하에서 정치 생활을 해낸 '''요시다 스쿨''' 세대. 그러나 총리 자리를 두고 동기이자 친구[3][4] 따위의 감정은 젖혀둔 채 사토가 총리 자리에 올라가는 시절은 '''지키려는 이케다와 뺏으려는 사토'''의 난투극으로 얼룩졌다.
2.2. 총리 시절
1960년 안보투쟁의 격화로 기시 내각이 물러나게 되면서 자민당의 당수가 되어 1960년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관용과 인내'''라는 슬로건 아래[5] 안보투쟁을 수그러 들게한 소득배증계획의 수립으로 전후 일본 경제성장의 완성에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받는다.
일본 최후의 19세기 태생 수상이었다. (1899년생)
1961년에는 한국에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고, 이에 11월 방일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회담을 한 바 있다. 이케다의 재임 기간 동안 일본의 OECD 가입 (1964년)과 도쿄 올림픽 개최 (1964년)가 일어났다.
도쿄 올림픽 폐막 다음날인 1964년 10월 25일 건강 악화로 사의를 표명하여 의외로 차기 자민당 총재로 라이벌이었던 사토 에이사쿠를 지명하고 그대로 입원하였다. 그리고, 대장암진단을 받아 치료를 했지만 1965년 8월부터 병세가 악화되어 결국 사망하였다. 향년 65세. '''원수 사토에게 총리 직을 스스로 넘겨준''' 걸 보면 어쩌면 죽음을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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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1963년에 일본 공산당의 노사카 산조의 조선 인민에 대한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 총리는 진정으로 반성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을 병합한 이후 일본의 비행에 대해서는 나는 견문이 적어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라고 답변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참고로 그와 관련된 서적 중에 '''이케다 하야토 정치의 계절에서 경제의 계절로'''라는 책이 있다. 이 사람의 정치 활동이 궁금하면 읽어봐도 좋다.
참고로 저 발언은 이케가미 료이치의 만화 작품 생추어리에서도 인용되어 나온다.
프랑스 샤를 드골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소니의 최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자랑하는둥 상황과 맞지 않는 딴소리를 한 덕분에 '''트랜지스터 라디오 세일즈맨'''이란 비아냥을 들었다. 드골이 측근에게 한 말이었는데 반드골 성향이었던 《르 피가로》에 누설되었고, 이 기사가 다시 일본 언론에 소개되면서 이케다의 체면이 구겨지게 된다.
다나카 가쿠에이가 양녀의 혼처를 알아보러 다닌다는 걸 알고 이케다가 자신의 조카를 소개해줘 둘을 결혼시켰다. 고로 이케다와 다나카는 사돈지간이 된다.
일본 정치사상 재계에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였던 수상[7] 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자금 동원력도 발군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오늘날 금권정치의 대명사로 통하는 기시 노부스케나 다나카 가쿠에이도 이케다에는 못 미친다는 평가도 있다.
[1] 대장성내에서 비주류였던 교토대 출신이었던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았다.[2] 이를 닷지 불황이라고 한다. 닷지 불황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해소된다.[3] 이케다가 정계에 입문한 계기가 사토의 추천이다.[4] 이케다가 총재로 선출된 직후 사토를 찾아가 고마워하며 차기를 약속했다고 한다.[5] 아이러니하게 안보투쟁기간동안 이케다는 통산상으로 있으면서 일관되게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각의에서 전국의 경찰관들을 도쿄로 불러모아 수당을 듬뿍주고 경비에 만전을 기하자고 발언할 정도였다.[6] 이케다는 사토가 총재로 지명되었다는 소식을 비서관 이토 마사나리로부터 듣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잘됐다, 사토라면 내가 편하지' 라고 했다고 한다.[7] 특히 이케다와 가까웠던 경제인 4명(나가노 시게오 신일본제철 회장·일본상공회의소 회장, 고바야시 아타루 일본개발은행 총재, 사쿠라다 다케시 닛신방적 회장·일경련 회장, 미즈노 시게오 산케이 신문 회장)을 가리켜 재계사천왕이라 할 정도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경제계가 뭉쳐 이케다를 지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