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가쿠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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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가, 제 64-65대 총리.'''"政治は数であり、数は力、力は金だ"'''
(정치는 곧 머릿수이고, 머릿수는 곧 힘이며, 힘은 곧 돈이다)[1]
별명은 서민재상(庶民宰相), 현대판 태합(今太閤, 이마타이코)[2] , 어둠의 쇼군(闇将軍, 야미쇼군), 컴도저(コンピューター付きブルドーザー, 컴퓨터 달린 불도저[3] ) 등.
취임 5개월 만에 중의원 의석 감소로 "제2차 내각"을 출범했고, 73년 11월에는 후쿠다 다케오를 대장대신으로 하는 "다나카 개조내각"을 출범시켰다.
의외로 총리로의 재임기간은 2년 5개월 남짓으로 강렬한 이미지에 비해 길지는 않다. 하지만 '야미쇼군'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막후 실세로서의 세월이 훨씬 길다'''.
2. 일생
2.1. 자수성가한 정치인
1918년 니가타현에서 태어났다. 다나카의 집안은 농사꾼 집안이긴 했지만 다나카의 아버지는 소와 말을 길러서 파는 일을 했고 할아버지는 농가용 나무를 파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중소농은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다나카의 어린시절 아버지는 잉어 양식업에 실패하고 씨받이 소를 대량으로 수입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대단히 어려운 가운데 성장해야 했다. 어린시절에 말더듬이였다고 하는데 일본의 창(唱)을 연습해서 그것으로 말더듬이를 교정했다고 한다.
1933년, 고등소학교[4] 를 졸업한 후 도쿄로 올라가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야간학교에서 토목과를 다니면서 건축기사 자격을 취득해 건축사무소를 설립하면서 건축기사 일을 하게 된다. 한때 만주국에서 병사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폐렴 때문에 귀국한 뒤, 다나카 토건공업이라는 회사를 차렸고 일본의 전쟁무기를 연구하던 이화학 연구소 관련 사업을 따내면서 회사의 규모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도쿄가 공습을 당하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지만, 다나카는 이화학 연구소 관련 사무로 '''대전에 와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면했다(...).'''
사업가로서 그런대로 기반을 잡은 가운데, 정치자금을 꼬박꼬박 갖다바치던 오아사 타다오가 "님아 출마좀 해보셈"해서 진보당[5] 후보로 출마했지만 2위 득표로 낙선했다. 이후 이듬해인 1947년에 고향 니가타 3구에 민주당(역시 보수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가 가타야마 데츠의 일본사회당과의 연립정권을 깨고 총리가 되었지만 불과 몇달만에 말아먹고, 이틈에 자유당의 요시다 시게루가 민주당 출신 의원들이 모인 민주 클럽 의원들과 연합해 통합정당인 민주자유당을 설립하면서 다나카도 민주자유당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 요시다 시게루가 총리가 되면서 법무차관으로 관료 첫 경력을 시작했지만,[6] 불과 2달도 안돼서 터진 "탄광국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가타야마 데츠 총리가 탄광 국유화를 발표하자 탄광주들이 로비를 위해 자금을 살포한 사건이었지만 재판부는 이건 "뇌물이 아니라 정치헌금"이라면서 정치인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한다.
다나카는 자신은 무고하다면서 1949년 중의원 선거에 옥중출마를 선언했고 니가타 주민들은 열렬한 지지로 그를 재선시켰다. 국회의원이면서 나가오카 철도의 사장에 취임했고 건축법 개정안을 발의해 1급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이때 자유당의 부간사장이었던 사토 에이사쿠를 알면서[7] 그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출세를 도모한다.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보수대연합 자유민주당이 탄생하고 1957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출범하면서 우정장관으로 취임했다. 현재의 일본 방송체제, 즉 신문사가 방송사도 운영하는 소위 신방겸영 체제는 다나카가 이시기 우정장관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추진했던 정책으로 이를 통해 다나카는 매스컴을 틀어쥐는데 성공했다. 특히나 방송국의 설립과 면허 유지 권한을 틀어쥔것은 후에 다나카가 총리가 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여러 대신직[8] 과 당내 요직들을 거치면서 차기 총리 자리를 노리게 되지만, 문제는 기시 노부스케 라인의 후쿠다 다케오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 후쿠다는 전형적인 엘리트, 귀공자 타입이었다.
또한, 신칸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신칸센을 최초로 건의한 사람은 아니지만, 현제 신칸센 계획의 대부분이 그의 정책이다.철도 사업체 출신이었던 특징을 살려 도카이도 신칸센과 산요 신칸센의 영향력을 대도시권간이 아니라 중심으로 지역의 경제를 부흥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도카이도 신칸센과 산요 신칸센을 제외한 신칸센 노선은 다나카가 추진한 것이다. [9]
1962년, 일명 다나카 구상을 통해 신칸센 정비법의 기반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고속선을 제외한 철도 건설비의 100년분에 해당하는 거액이라 무산된다. 하지만 이후 자민당 간사 선거를 앞두고 일본열도개정론(일본어 위키백과)를 출간하는 등 신칸센을 자신의 정책의 주 축으로 밀기 시작했고 특히, 그의 고향인 니가타현으로 향하는 조에츠 신칸센을 최우선 과제로 두었다. 일본열도개정론에 따라 총리가 된 후 경제개발을 진행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에는 잠시동안 경제에 붐이 일기도 했다.(버블 경제 이전)
1968년에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서 물러나려 하자 다나카는 화들짝 놀라면서 3선 도전 무드를 조성했다.[10] 그랬던 이유는 그 당시 사토 에이사쿠가 물러나버렸으면 기시 노부스케의 입김으로 인해 후쿠다 다케오에게 손쉽게 총리자리가 넘어갈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토 에이사쿠가 세 번째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한숨을 돌리게 된 다나카는 '''사토파 의원 대부분을 자신의 파벌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해 결국 1972년, 사토 에이사쿠가 세번째 총리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때에는 사토파 의원 대부분이 다나카의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해 7월 5일에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다나카는 결선투표를 거치는 고전 속에서도 후쿠다를 제치고 마침내 대망의 총리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하게 된다('''제1차 각복전쟁''').
2.2. 총리 재임과 록히드 사건
70%의 높은 지지율을 안고 시작한 다나카 내각은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는등 미중관계가 개선되자(데탕트) 이를 따라하기 위해 1972년 9월, 중국을 전격 방문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만나 정상회담을 가지고 '''대만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때 저우언라이는 다나카에게 메모지에 언필신 행필과(言必信行必果)란 글을 적어 건넸고 다나카는 멋모르고 메모지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믿음은 만사의 근본"이라 써서 저우언라이에게 보여줬는데,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이 신문에 실리자 쇼와시대의 한 석학은 메모지에 적힌 말을 보고 "교양도 없는 놈"이라고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
저우언라이가 건넨 메모지에 적힌 논어의 한구절인 "언필신행필과(言必信行必果)"의 그 뜻인즉 "말한것은 반드시 신의가 있어야 하고, 해야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것이 선비의 본분이다)"라는 뜻이었다.[11] 이렇게 보면 중국측은 다나카를 못미더워한것 같지만 실제 당시 중국정부의 요인들은 다나카의 소탈한 언동에 호의를 품었고 중일국교정상화에서 다나카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후일 다나카가 총리자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덩샤오핑, 장쩌민등 일본을 방문한 중국지도자들은 메지로에 위치한 다나카 저택을 방문하여 다나카를 위로하였다.
어쨌든 그해에 총선이 열렸지만 자민당의 의석수가 감소하고[12] 일본 공산당이 약진하는 사태[13] 가 발생했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다나카가 강력하게 밀어붙이던 열도개조론(즉 토건정책)의 영향으로 물가와 부동산 가격 상승의 문제가 대두하기 시작했는데 다나카는 이 와중에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중복출마 제도를 시행하려고 했다가 야당의 강력한 반발에 무산되고 말았다.가쿠만타
오일 쇼크가 터지자 이스라엘 지지에서 아랍권 지지로 돌려서 석유를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열도개조론으로 10%대로 올라선 물가상승률은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1974년 23%로 올라가기에 이를렀고, 휴지같은 일부 생필품은 사재기로 품귀현상을 보였으며 일본은행에서 물가억제를 위해 모든 공공사업이 축소됨에 따라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떨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율은 급속히 떨어졌다. 1974년 참의원 선거에선 '''헬기를 타고''' 일본 47개 도도부현 중에서 도치기현을 제외한 모든 현을 돌아다니며 선거유세를 했지만 결과는 패배.[14] 이 계기로 당시 혁신계 후보가 강세를 보이는 주요 지자체를 탈환하자는 '''TOKYO 작전'''[15] 을 세우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참의원에서 자민당과 야당의 백중세가 되었다[16] . 선거 패배로 인해 당내 내분이 일어나면서 내각에 참여했던 정적인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가 장관직을 사임했다.
이런 와중에 결정적으로 저널리스트 타치바나 타카시가 문예춘추[17] 에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그 금맥과 인맥"''', '''"에쓰잔카이의 여왕"'''을 연재해 다나카의 금권정치와 록히드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연루의혹을 제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돈을 뿌려서 정치하는 다나카의 정치행태에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결국 1974년 12월 9일, 다나카는 총리 사임을 발표했다.
2.3. 총리 사임 이후 어둠의 쇼군 시절
그러나 다나카는 '''절대 권력을 내려놓을 맘은 추호도 없었다.''' 록히드 사건 의혹이 불거지면서 최대 정적인 후쿠다 다케오나 미키 다케오가 총리가 되면 자신이 밀려날 것을 우려한 다나카는 절친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원해서 총리로 세운뒤 뒤에서 실권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자민당 간사장이던 시나 에쓰사부로가 '''"지금 국민들이 뿔나있는데 자꾸 그러면 뭔일 날지 아무도 몰라"'''라고 다나카를 거의 반협박(...)하는 바람에 결국 총재선거에서 미키 다케오가 당선되었다.
본래 미키 다케오는 다나카와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다나카가 총리가 되는데에는 미키의 협력도 크게 작용하기도 했고. 그래서 다나카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미키를 부총리로 임명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청렴한 정치를 추구하던 미키와 돈을 뿌려서 정치하는 다나카의 성향차가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격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다나카가 미키파의 지역구에 신인을 들이밀려다가 실패하면서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총리가 된 미키는 다나카의 예상대로 록히드 사건의 엄정수사를 다짐하면서 다나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 7월 27일, 다나카는 5억엔의 뇌물수수와 외국환 관리법 위반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다. 다나카는 당내의 압박에 자민당을 탈당했지만 '''내가 죽어도 미키와 같이 죽겠다'''라는 생각에 따라 당내 파벌들을 모두 규합해 미키를 끌어내리는 공작을 시행했다. 심지어는 다나카의 최대 정적인 후쿠다와도 손을 잡을 정도였으니...
이런 다나카의 공작은 성공을 거두어서 미키 내각은 말 그대로 소수여당 정권이 돼버리고 말았다. 나카소네 파를 제외한[18] 자민당 내 모든 파벌이 다나카 편으로 돌아섰으며, 심지어 미키가 총리로 당선되는데 일조했던 간사장 시나 에쓰사부로조차 미키가 건방지게 까분다면서(...) 다나카편으로 돌아서버렸다. 이에 맞서서 미키도 다나카 파벌에는 장관 한자리 밖에 안주는(...)것으로 맞대응했다.
자민당의 내분 가운데 치뤄진 중의원 총선에서 다나카는 '''전국 최다득표'''로 재선에 성공했지만(득표율 37%, 168,522 표[19] ) 자민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미키는 결국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다나카는 다시 오히라를 앞세우려고 했으나, 이때 후쿠다 다케오가 '''내가 총리 2년한 뒤에 너한테 넘겨줄게'''라면서 오히라와 동맹을 맺으면서(오후쿠 밀약) 후쿠다가 총리가 된다.
만약 후쿠다가 약속을 지켰다면 모르겠지만, 2년뒤인 1978년, 약속대로 후쿠다가 오히라에게 총리자리를 넘겨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후쿠다와 오히라의 동맹은 깨졌다. 이틈을 노려 다나카는 다시 오히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수족인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비공개인 '''당원명부를 빼돌리게 해서''' 그걸 바탕으로 1:1 접촉과 끝에 예비선거에서 오히라가 후쿠다를 누르게 되었다. 결국 후쿠다는 총재선거 본선에 나서는것을 포기하고 오히라가 무투표로 총리가 되게 되었다(제2차 각복전쟁).
오히라가 총리가 되긴 했으나, 다나카의 공작으로 된것임을 잘 알던 후쿠다는 사사건건 오히라에게 딴지를 걸었고 오히라도 이에 지지 않고 맞서면서 자민당은 급격한 내홍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1979년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자 후쿠다는 이를 빌미로 오히라에게 사퇴를 촉구했고, 오히라는 사퇴를 거부하면서 자민당은 분당직전까지 가는 급격한 내홍이 일어났다.(시토카 항쟁) 겉으로 보기에는 후쿠다와 오히라의 다툼이었으나 사실상 오히라의 뒤에는 다나카가 있었기 때문에 후쿠다와 다나카의 전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서 같은 시기 그가 구상한 TOKYO 작전이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5년 간의 결실 맺었다.
결국 오히라는 사회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이 가결되자, 내각을 해산하고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선거 초반은 자민당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으로 사회당-공명당-민사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예상되었지만, 선거운동 도중 '''오히라가 사망하면서''' 자민당은 그간의 내홍을 접고 일치된 체제로 선거운동에 임했고,[20] 결국 자민당은 284석의 압승을 거둔건 물론, 다나카는 역시 니가타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다(...) - (3차 각복전쟁)
이후 일본 정계는 사실상 다나카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되었다. 후쿠다가 오히라의 사망으로 입지가 약해지자 다나카는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를 총리로 세웠고, 스즈키 내각이 맘에 안들자 2년만에 다시 나카소네 야스히로로 갈아치우는 등 뒤에서 일본 정치판을 쥐고 흔들었던것. 이리 되니 총리가 되려면 다나카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래서 다나카에서 붙여진 별명이 '''어둠의 쇼군(闇将軍, 야미쇼군)'''이었다.(...)
그러나 1983년 10월, 9년만에 록히드 사건의 1심 재판의 판결이 내려졌다. 도쿄 지방법원은 다나카에게 징역 4년, 추징금 5억엔을 판결했는데 다나카는 여기에 불복해 항소했다. 이리 되자 야당들은 다나카의 뻔뻔함에 항의해 국회일정을 거부했고 결국 중의원-참의원 의장들이 나서서 중요법안을 처리해주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치르겠다라고 설득해 12월 선거가 치뤄졌다.
그리고 해당 83년 총선에서 뻔뻔한 다나카를 심판하겠다면서 전 참의원 의원이었던 노사카 아키유키가 다나카의 지역구인 니키타 3구에 출마해 도전장을 냈지만, 니가타 3구 주민들은 "시꺼, 우리에겐 오직 다나카 뿐이야"[21] 라면서 다나카에게 무려 '''22만표, 46,6%'''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여주며 다나카는 당당히 재선에 성공했고, 노시카 아키유키는 결과적으로 사회당 후보와 표를 쪼개먹는데(5,8%의 득표율) 그쳐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일본에서 다나카에 대한 반감은 상당해 자민당은 250석으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다나카의 전횡에 반발하며 자민당을 탈당한 소장파 의원들이 창당한 군소보수정당 신자유클럽[22] 과 연립정권을 수립해 간신히 과반수를 넘길수 있었다. 국민의 호된 여론을 체험한 나카소네 총리는 '''"이제부터 다나카의 정치적 영향을 모두 배제하겠다"'''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2.4. 정치적 몰락과 사망
그러나 다나카는 이런 정점의 순간에서 서서히 정치적 몰락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장기집권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다나카의 공작으로 총리자리를 내놓게 되어 원한이 깊었던 스즈키 젠코는 다나카의 최고 정적인 후쿠다를 끌어들여 다나카에게 역습을 가하게 된다.
스즈키가 노린 틈은 바로 다나카파의 분열이었다. 다나카는 어둠의 쇼군으로 불리면서 총리직도 쥐락펴락 할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정작 다나카파에서는 "나카소네도 총리 시켜주면서 왜 정작 우리에게는 총리를 안 시켜주냐!"라면서 불만이 팽배해있었기 때문. [23] 스즈키 젠코는 이틈을 파고들어서 다나카파의 2인자였던 니카이도 스스무 부총재를 총리로 옹립하는 구상을 시행한것이다.(니카이도 옹립구상 - 제4차 각복전쟁)
후쿠다파는 물론 자민당 외에 공명당까지 끌어들여서 시행하던 이 공작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나카소네가 재선에 성공하긴 했지만 스즈키의 역습은 '''다나카파에게 충분히 먹혀들었다.''' 다나카파 내에서 더이상 다나카를 못믿겠다는 의원들이 다케시타 노보루를 중심으로 뭉쳐 "창정회"라는 새로운 파벌을 만들기 시작했던것. 결국 1985년 2월, 창정회가 발족했고 다나카는 믿었던 다케시타의 배신에 충격을 받아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실상 더이상의 정치 활동은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후쿠다 역시 옹립구상에서 실패했기에 리타이어.. 이것이 70년대와 80년대 일본 정치를 들썩이게한 각복전쟁(가쿠후쿠 전쟁)의 끝이었다.
그럼에도 1986년 열린 선거에 '''또 출마'''해서 본인은 병때문에 선거운동조차 못했고 지지자들만 선거운동을 했음에도 '''또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미 다나카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으니 마침내 타케시타가 "경세회"를 만들면서 다나카파 대부분을 끌어가버렸다.(...) 다나카는 이것에 매우 크게 격분했고 타케시타가 다나카를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만 당했다. 그리고 다나카는 비록 병으로 움직이지는 못하는 처지였어도 타케시타를 공격했으니 황민당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증거는 없었으나, 많은 이들은 황민당 사건의 배후에는 사실상 다나카가 깊게 개입했을 것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이후 다나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1990년, 정계은퇴를 선언해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1993년 딸 마키코에게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주고 당선시킨 뒤 12월 16일, 도쿄도 신주쿠구에 있는 게이오기주쿠대학부속병원에서 향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3. 평가
다나카와 그의 최대 정적인 후쿠다를 비교해보면 두 사람의 차이가 극명해지는데 후쿠다가 엘리트 집안 출신인것과는 달리, 다나카는 말 그대로 밑바닥 흙수저부터 올라온 자수성가한 정치인이었다. 심지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이마타이코(今太閤: 지금의 태합. 태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칭). 그런데 본인은 오다 노부나가를 좋아해서 히데요시에 비견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집안의 배경이고 뭣이고 없던 다나카인지라 철저하게 인맥과 '''돈'''으로 정치를 해왔고 그것으로 일본 전후 정치사에서 좋든 나쁘든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 남게 되었다. 어찌보면 귀공자 스타일의 후쿠다가 다나카를 이기지 못한건 당연한 귀결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런 다나카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다나카파의 한 초년 의원이 꽃뱀에게 걸려서 100만 엔을 토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거를 막 끝낸 참이라 빚만 졌을 뿐 돈이 없던터라 고민하던 이 의원은 다나카에게 연락해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해서 다나카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 의원이 다나카의 사무실에 가보니 다나카는 없고 대신 비서가 두터운 서류 봉투를 건냈는데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300만엔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이 들어있는 메모에서 다나카는 "100만 엔은 사고난 거 해결하고, 나머지 200만 엔 중에서 100만 엔은 신세진 사람들에게 밥을 사거나 감사의 선물을 보내는데 쓰고, 남은 100만 엔은 나중에 있을 문제에 대비해 남겨두도록 하라. '''이 돈은 갚을 필요없다.'''"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이 의원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다나카에게 충성을 다짐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맞수인 후쿠다파의 의원들도 이런 식으로 돈으로 구워 삶았으며, 다나카에게 돈을 먹은 의원들은 다나카 비판도 자제할 정도였다.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 와중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무려 3천여명이 장례식에 몰렸고 화환도 600개나 들어왔는데 그나마도 '''너무 많아서 절반으로 끊은 게''' 그 정도였다. 어처구니 없게도 이 모친상에 가겠다고 국철이 파업중인데 6시간이나 차를 몰고 간 의원이 있었는가 하면, 니가타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의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 때문에 록히드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 국민들의 혈압을 상승시키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사실이다. 우습게도 다나카 자신은 정치적 영향력이 급상승하면서도 자민당은 내리막길을 걸었는데(...) 그럼에도 다나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민당내 최대 숫자의 파벌을 꾸렸고 그 파벌을 쉴드로 록히드 사건의 예봉을 결국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파벌들을 챙겨주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아이러니한 일.
흔히 자민당-보수관료-대기업(경단련[24] )의 철의 삼각동맹을 자민당 38년 일당지배의 비결로 꼽는데, 다나카 가쿠에이 전까지는 대체로 중앙정부 차원에 그쳤다. 그러나 다나카 가쿠에이는 이걸 규모만 축소해서 지역 행정 단위까지 노골화해서 자민당의 지방조직을 강화했다. 72년 집권하면서 '''국토개조론'''을 내걸고 전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이권을 미끼로 지역토호들을 모조리 자민당의 지역조직으로 만들어버렸다.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으로 대대적인 토목사업을 벌여서 지역토호들이 운영하는 건설업체에 이권을 안겨주고 반대급부로 정치자금을 받아서 자기 파벌의 사조직망을 강화하는 금권정치가 지역에서까지 대세가 되었다. 이 과정을 지원하는 보수관료는 퇴임후 자민당을 통해서 정계 입문하거나 혹은 산하 기관 및 유관 기업에 낙하산으로 들어가서 압력 단체가 된다. 이런 낙하산을 위한 산하 기관, 공기업이 엄청나게 비대해져서 빈약한 재정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이런 정치구조에서 국민의 삶의 질 개선에 들어가야할 예산이 의미없는 토목사업에 대거 투입되면서 결국 부동산 버블 붕괴와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지면서 잃어버린 10년의 원인이 되었다. 다나카에 의해 만들어진 건설업체-족의원 간의 정경유착은 자민당 부총재 가네마루 신에 의해 계승되면서 이어졌고 이러한 담합 시스템은 훗날 1993년 제네콘[25] 스캔들의 발단을 제공하게 됐다.
다나카가 정치 비리로 일본 국민들의 원성을 샀음에도 정작 고향 니가타에서는 늘 압도적인 지지로 그를 당선시켰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고향에 막대한 투자를 했기 때문이었다. 니가타는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이었는데 다나카는 자신의 정치력을 총동원에서 니가타에 간에쓰자동차도와 조에츠 신칸센을 들어오게 했으며, 눈이 많이 오는 니가타의 특성을 고려해 니가타 각 도시에 제설 장치를 설치하고, 심지어 '''불과 60가구밖에 안사는 마을'''이 눈이 오면 고립되는 걸 막겠다고 '''터널을 뚫어주는'''(...) 일까지 있었다. 이 터널 공사에는 반발이 많았으나 다나카는 이를 다 묵살해버리고 공사를 강행해 결국 터널을 완성시켰다. 또한 원자력 발전소의 유치에도 힘을 쏟았다. 이렇게 공을 들였으니 니가타 주민들이 나오기만 하면 우르르 표를 찍을 수밖에. 이런 탓에 니가타에서는 아직도 다나카 하면 영웅으로 대접하며 심지어 니가타 현에 소재한 역 중 우라사역의 앞에는 다나카의 동상까지 세웠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리고 다나카의 장녀인 마키코가 출마하자 다시 마키코에게 우르르 표를 찍어주고 있다.
선거민을 향한 연설 중에 「미쿠니토우게(三国峠)를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겠습니다! 그러면 동해의 계절풍은 태평양측으로 불어서 빠져나가 에치고에 눈은 내리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나온 토사는 동해에 옮겨 매립에 쓰면 사도와는 연륙될 겁니다!」라는 드립을 친 적이 있다.
4. 기타
다나카가 1947년부터 90년까지 16번에 걸쳐 무려 43년을 니가타 지역구 중의원으로 재임했고, 장녀 다나카 마키코는 93년부터 현재 2012년까지 19년을 내리 재임했으니 두 부녀의 의원 재임기간을 합치면 무려 '''62'''년이 된다. 한마디로 1947년부터 다나카씨가 아닌 사람이 니가타 중의원을 한 적은 1990년에 딱 한번을 빼고는 62년간 계속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우습게도 다나카 마키코는 비서 급여를 횡령한(...) 혐의로 자민당에서 탈당 된 뒤에 무소속으로 다시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서 민주당 정권을 말아먹는데 한몫했다.(...)
2대에 걸친 다나카 부녀의 니가타 지역구 장기집권은 결국 2012년 12월 16일 중의원 총선에서 마키코가 낙선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무리 다나카가 니가타에서 영웅이래도 마키코가 하도 전국적으로 쪽팔리는 짓을 많이 한 탓에 니가타 주민들도 결국 포기한듯 싶다. 그나마 득표수에 따라서 비례대표 구제를 받을수도 있는것도 못해서 완전히 낙선확정. 하필이면 선거날이 '''다나카 가쿠에이의 기일'''이었다는건 보너스.
이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게임이 바로 코어랜드/세가의 아임 쏘리. 다만 게임 내에서는 음독/훈독 차이를 이용한 변형으로 ごんべえ(곤베에)라고 히라가나로 나온다.
영문판 위키백과의 모 대통령 항목에는 그를 한국의 다나카 가쿠에이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다.
차지맨 켄!으로 유명한 나크의 1970년대 괴작 투명소년탐정 아키라에 실명 그대로 등장한다. 가쿠에이 총리로 변장한 Z단의 단장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있던 모나리자를 훔쳐 달아나고, 이후 총리 본인이 뉴스에 등장해 모나리자를 회수하겠다고 발표한다.
일본 최악의 총리로 악명을 떨치던 그였으나 2000년대 들어서는 '''비록 비리는 저질렀어도 추진력과 결단력은 존경할만하다'''라는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런 재평가의 배경은 삽질만 거듭하는 일본 자민당과 민주당에 질려버린 국민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상황하에서 나오는 이야기지만. 비리로 일본 국민들의 혈압을 올리는데 공헌했던 그가 결단력있는 지도자로 재평가받는걸 보니 참 씁쓸하다.
여담이지만 다나카 가쿠에이때가 일본에서 가장 취업이 잘 된 시기였다. 위에 언급하다시피 열도개조론을 펼치며 지방 토건사업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면서 건설직을 중심으로 일자리가 크게 늘어난 영향이다. 이 당시 유효구인배율이 '''1.7을 넘었는데'''[26][27] 1980년대 말-90년대 초반 버블경제기 때에도 그 기록을 깨지 못했고 2010년대 중반 이후로도 그 기록이 경신되지 않을 정도로 일자리가 넘쳐났다. 물론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일시적인 현상에 그쳤지만 말이다.
총리를 역임한 자가 사망하면 위계[28] 와 훈장[29] 이 수여되지만 다나카는 피고인 신분으로 사망하여[30]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더욱 안습인것은 다나카의 보스였던 요시다 시게루와 사토 에이사쿠는 위계는 종1위에 이르렀고 훈장도 일본의 최고등급 훈장인 대훈위국화장경식을 수여받았다.
나카무라 기시로 의원이 그의 비서였다.
[1] 다나카 가쿠에이의 정치관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수의 논리(数の論理)'.[2] 비슷한 의미로 '20세기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별명도 있다.[3] 이명박이 훗날 이 별명을 써먹었다. 그러나 원조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4] 오늘날의 중학교.[5] 진보당이라는 말을 썼지만 보수우익계열이다. 당시 일본의 진보/좌파세력을 언론에선 혁신(革新)계란 표현을 사용했고, 진보는 발전의 의미였다. 한국도 그 흔적으로 1970년대까지는 혁신계, 혁신정당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이것이 민중정당 등을 거친 뒤 다시 미국식 표현인 진보정당으로 넘어가게 된건 1990년대 초부터였다.[6] 학력도 경력도 없는 새파란 초선의원이던 다나카를 요시다가 발탁하였고 이때부터 다나카는 요시다의 측근으로 활동한다.[7] 당시 사토는 차가운 외모 덕분에 관료출신들조차 기피하면서 당내에서 제대로 융화하지 못하고 붕 뜬 상태였는데, 정작 다나카는 사토가 거물이 된다고 생각하고 접근했다. 사토도 당내에서 튀는 분위기를 보이던 다나카의 내면에 숨은 능력을 짐작하고 그를 받아들여 키웠는데 덕분에 50년대 사토의 별명은 '''"귀밝은 사토"'''였다고. 총리 막판시절의 권위적이고 독재적이기까지 했던 행태와는 딴판이다.[8] 대장대신직(한국의 기획재정부 장관에 해당)에 있었을 때는 기자들 앞에서 아직 편성도 시작하지 않은 예산안을 구체적인 수치를 나열해가며 예언하여 관료들과 기자들이 비웃었는데, 정작 '''통과된 예산안은 다나카의 예언과 거의 동일하게 맞아 떨어졌다고.''' [9] 그가 총리로 재직하며 신칸센을 추진하며, 최초 철도건설심의회와 협의된 노선은 홋카이도, 호쿠리쿠, 큐슈 동(東), 큐슈 서(西). 이 3가지(사실상 4가지) 였으며 이후, 홋카이도 남회, 츄오, 서부 종관, 일본해 종관, 오우, 코토(湖東) 신칸센, 산인. 이 6개를 추가로 추진하였다. 이후 서부 종관선은 시코쿠와 큐슈 횡단으로 나뉘어 총 11개. [10] 그나마도 후쿠다를 싫어한 당시 당 부총재인 가와시마 쇼지로가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꼼짝도 못했을 것이라고. 실제로도 사토 4선 무드의 조성은 가와시마가 다 했고, 다나카는 구경만 했다.[11] 저우언라이가 적은 이 말은 논어 제 13장 자로편에서 나온 말로 자공이 공자에게 선비라 할 수 있는 본분에 대해 공자가 최저선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저우언라이는 다나카에게 "당신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여기겠다."란 뜻으로 글을 준 것.[12] 1969년:288석, 1972년: 271석[13] 그래서 1970년대의 일본정치를 자-공(自-共)시대라고도 한다. 사실 일본공산당의 약진할 조짐은 60년대 말부터 있었고(사실 그때도 자민당의 득표율이 줄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의석수 유지에 성공한 반면에 일본사회당이 의석수도 말아먹으면서 묻혀졌긴 했다.) 당시 자민당 부총재인 가와시마 쇼지로는 '''70년대는 자민당과 공산당이 일본정치를 주무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 총리인 사토와 간사장인 다나카를 포함한 당내 거물들은 노인네가 걱정이 많다!고 무시했는데, 정작 그 사태가 오자 패닉에 빠졌다고. 그래도 공산당의 약진으로 인해 본격적인 복지정책이 일본에도 도입되기 시작했으니 얼씨구 좋을시고.[14] 그래도 1인구에서 꽤 효과를 봐서 야당을 완전히 떡실신시켜버리긴 했다. 하지만 다인 선거구에서 말아먹으면서 패배.[15] 각각 '''T'''okyo, '''O'''saka, '''K'''yoto, '''Y'''okohama, '''O'''kinawa를 뜻한다.[16] 이 선거에서 다나카는 1천억엔을 뿌렸다고 한다.[17] 1974년 11월 호[18] 정작 나카소네는 72년 당시 다나카 총리 당선에 불출마로 일조했었는데..[19] 당시엔 중선거구제 였기에[20] 반대로 2000년 총선에선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사망으로 선거 초기에 자민당이 압승할거같았지만 후임인 모리 요시로 총리가 망언을 내뱉으면서 지지율이 떨어져 과반확보에 실패했다. 뭐, 공명당이 31석을 확보했기에 자민당은 안정적인 의석확보는 할수있었긴 했었고, 예측치에 비하면 조금 더 나오긴 했다.[21] 사실 다나카가 문제가 많은 인물이기는 했지만 후술하듯 니가타에 온갖 투자를 하면서 니가타 성장에 큰 공헌을 했으니 주민들이 다나카를 밀어주지 않는게 더 이상하기는 했다.[22] 이곳의 리더가 한국인들에겐 고노 담화로 유명해진 고노 요헤이. 신자유클럽은 다음번 선거에선 쫄딱 망하면서 결국 자민당으로 전원복귀했다. [23] 다나카는 자기 파벌에서 총리를 배출하면, 현실권력인 총리때문에 파벌내에서 영향력을 잃을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파벌후계자를 키우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었다.[24] 경제단체연합회의 준말. 일본판 전경련. 애초에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경단련을 모델로 만든 게 전경련이다. 회원사에서 모금한 정치자금을 가지고 자민당과 거래하면서 대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관철시켰다.[25] General Contractor의 일본식 약어로 종합건설업체를 가리킨다. 건설업자를 Contractor로 표현하는데서 나온 단어.[26] 구직자 한사람당 일자리가 1.7개가 있다는 얘기다.[27] 월별로 본다면 1973년 11월에 유효구인배율이 1.93을 기록했다. 한 사람당 일자리가 두개가 있다는 얘기[28] 일반적으로 정 2위 또는 종2위[29] 일반적으로 대훈위국화대수장[30] 재판도중 사망하였으므로 유죄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