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살인 사건
1. 개요
1997년 4월 3일 밤 10시경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태원동 소재 버거킹 화장실에서 한국인 조중필(당시 22세, 1974년 4월 27일 생)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습격당해 흉기로 9번이나 찔려 살해된 사건.
2. 상세
1997년 4월 3일 밤 10시, 홍익대학교 공과대학 재학생 조중필 씨는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여자친구와 함께 근처 햄버거 가게인 버거킹[1] 에 갔다. 여자친구가 주문하는 사이에 화장실에 들어갔고, 곧이어 2명의 한국계 미국인들[2] 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잠시 후 조 씨는 화장실 바닥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발견되었으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119 구급대원들이 도착했지만 이미 9군데를 흉기로 찔린 조 씨는 왼쪽 목동맥이 절단되어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3. 조사 과정
미국 국적자 17세의 아서 존 패터슨(Arthur John Patterson 1979년생)과 18세의 에드워드 건 리(Edward Kun Lee 1979년생)[3] 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둘 다 청소년인데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조중필(23세)를 죽게 만들었다.
사건 다음 날 미합중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CID, Criminal Investigation Command)는 익명의 제보를 받는데, 범인이 아서 패터슨이라는 내용이었다. 제보에 따르면 패터슨은 평소에도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자주 보였고 늘 흉기를 소지하고 다니며 친구들에게 이를 자랑하고 다녔다고 하였다. 패터슨은 유럽계 미국인 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평소 품행이 불량해 부모와 싸움이 잦았으며, 지인들 사이에서는 패터슨이 지역 갱단과 연줄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16세 때 이미 캘리포니아 소년원에서 16개월 동안 구금된 전력도 있었다. 따라서 미합중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는 패터슨을 용의자로 수사방향을 잡았으나, 아들과 잘 어울리던 패터슨의 범행 소식을 접하고, 추궁한 아버지로 인해 에드워드 리가 자신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음을 자백하면서 용의자는 2명이 되었다.
그 둘은 서로에게 범죄사실을 미루었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김락권 형사 1팀장과 미군범죄수사대는 아서 패터슨이 온몸이 피투성이라는 점, 손에 미국 갱단의 마크가 있고 살해 방법이 그 갱단의 수법과 비슷하다는 점[4] 등을 들어 패터슨을 용의자로 지목하였으나, '''수사를 담당한 박재오 검사는 법의학적인 판단(부검결과)과 그들의 친구인 C의 증언을 근거로 에드워드 리를 용의자로 지목했고, 그를 살인죄로 기소'''하면서 사건이 꼬이게 된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당시 검찰(담당 박재오 검사)이 에드워드를 살인범으로 기소하면서 3가지 근거를 제시하였는데, 첫 번째는 키와 체격이였다. 당시 부검의는 상처의 흔적을 봤을때 176cm의 피해자 조중필보다 가해자의 키가 커야 한다는 추정을 하였다. 그리고 아서 패터슨은 피해자인 조중필씨보다 키가 작고[5] 왜소했으나, 에드워드 리는 180cm, 105kg로 피해자보다 훨씬 키도 크고 건장한 체격이였다. 그러나 이 추정에 대해서 표창원 전 경찰대학 교수는 피해자가 다른 공격을 받고 몸을 숙이거나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피해자보다 키가 작은 범인이 피해자를 찔렀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박지선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법의학적 소견과는 달리 심리학적으로는 신체적으로 왜소한 범인이 반격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이렇게 과도한 수법으로[6] 범행을 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두 번째는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였다. 에드워드 리는 거짓으로, 패터슨은 진실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조사에도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1998년 당시 거짓말탐지기 자체가 신뢰도가 낮아서 30%가 넘는 오차를 보였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조사방법도 엉터리였다는 것이다. 한국말이 서투른 에드워드 리가 조사과정에 통역을 요구했으나, 묵살되고 포승줄에 묶인 상태에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받았고, 반면에 패터슨은 한국어가 더 유창했는데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리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어 통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답변할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있었고, 편안한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해자가 범행당시의 충격으로 기억을 잃을 수 있는 해리성 장애를 이유로 에드워드 리를 범인으로 지목했다.[7] 패터슨은 가해자가 칼을 잡은 방법과 찌른 부위와 횟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여 증언했고 이는 피해자의 몸에 남은 자창과도 일치했지만, 상대적으로 에드워드 리는 사건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피해자나 목격자의 기억은 경우에 따라 부정확할 수 있으나, 가해자의 기억이 부정확하다는 연구는 어떠한 (범죄심리학)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검사가 이런 얘기를 어디서 주워듣고 이렇게 사건을 뒤집히게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상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다행히, 이런 증명된 적 없는 검사의 황당한 주장들은 대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패터슨 증언의 신빙성이 의심된다며 재판 결과를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3.1. 검찰의 실책
서울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서는 검사의 기소와 근거자료를 인정해 에드워드 리에게 살인죄로 각각 무기징역(1심)과 징역 20년(2심)을 선고하였다. #
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파기환송하였고, 결국 서울고법에서는 새로운 증거를 찾지 못하여 에드워드 리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였다. 살인범일 수도 있지만 증거가 부족하여 유죄를 확정할 수 없다는 이유. 이후 재상고심에서도 대법원은 그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한편 아서 패터슨은 단순흉기 소지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반년 만인 1998년 8월 15일 815 특별사면으로 풀려난다.
에드워드 리가 무죄 판결을 받음에 따라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 그를 재기소 할 수 없었던 유족들은 살인죄가 아닌 흉기소지죄로 기소되어 형을 받았던 패터슨을 고소하여 검찰이 패터슨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였으나, '''검찰이 패터슨에 대한 출국금지 연장을 미룬 사이에[8] 그가 미국으로 도주'''하는 바람에 사건은 미제로 남게 되었다. 방송에서 파악한 결과 당시 '''출국금지 등 사건을 담당하는 계장이 단란주점 뇌물수수 등으로 얽혀 담당 검사[9] 가 경황이 없어서 연장을 하지 못한 어이없는 실수라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밝혀진다.'''[10]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해 서울고등법원에서 피해자 가족들에게 34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마저 대법원에서 '패터슨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확정판결도 내려지지 않았고 조사를 아예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라는 취지로 유가족에게 패소 판결을 내려 손해배상 청구조차 받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은 사실상 진범을 밝힐 기회를 잃었다며 부모님은 1500만 원씩, 누나와 할아버지는 100만 원씩 배상을 받았다.
결국 에드워드 리의 무죄가 확정됐고, 패터슨은 살인으로는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법적인 의미의 무죄추정원칙과 별도로 패터슨에 대해서는 아직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검찰은 둘 다 살인죄로 기소하지 않고 리에 대해서만 살인 혐의를 적용하였다. 참고로 영화에서는 동료 검사가 '''정범, 종범으로 공소를 제기하라'''고 했지만 박대식 검사가 거절. 이렇게 되면 법원에서도 공범 이론을 적용할 수 없다.
3.2. 사건 이후
당시 초동수사를 지휘했던 김락권 형사가 2013년 사망 당시까지 아더 존 패터슨이 진범이라고 믿은 것과는 달리, 박재오 검사는 현재까지도 에드워드 리가 진범이라고 믿고 있다. 재판부는 경찰수사와 검찰수사에 대해 각각 다음과 같이 표했다. 당시 김락권 형사가 지휘했던 경찰수사에 대해서는 '''수집된 증거와 여러 목격자의 진술을 바탕으로 내려진 합리적인 의견이었다.''' # 그러나 박재오 검사가 담당하여 진행한 검찰수사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원칙조차 없이 수사를 했고, 어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패터슨의 진술을 진실로 믿었다.'''라고 표현해 충격이 일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박재오 검사가 취조하는 과정에서 술에 취해있었다는 것이다.# 박 검사가 취조나 기소 업무를 처리하면서 술에 취한 상태이고 횡설수설했다는 증언은 조중필 씨의 누나 뿐 아니라 기소당한 피의자 입장이었던 에드워드 리 역시 한 바 있다. 에드워드 리가 음주 상태인 박 검사의 상태를 지적하며 항의하자 욕설을 퍼붓고 서류를 집어던지는 등 격한 반응을 보였다고 아버지에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박재오 검사는 에드워드 리의 무죄 판결에 대한 회의를 느껴 무죄 판결이 난 이후 1년만에 검사를 사직하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2000년에 있었던 박재오의 인터뷰
중요한 사실로, 미국으로 도주한 패터슨은 미국에서도 다양한 범죄를 저질러 여러번 기소되어 재판에 오르내렸다. 반면 리는 오히려 한국에 정착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 한 결과 패터슨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리아 타운에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여전히 본인은 결백하며 리가 진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검찰에서 그렇게 찾아 헤매도 못 찾았다고 한 패터슨을 언론에서는 합법 사설탐정에게 수수료를 지불한 뒤 금방 찾아냈다.
처음 용의자로 지목되었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리는 현재 한국에서 가정을 가진 가장으로 살고 있다고 한다. 2009년 말에 한 인터뷰에 의하면 리는 당시 재판으로 인해 2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었고 사건으로 인해 큰 재산상의 피해를 입었으며 살인죄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의심받고 있다는 데에 억울함을 표시했다. 2015년에도 아버지와 함께 인터뷰에 나왔는데, 살면서 잘못을 많이 했지만 최소한 살인만큼은 절대 하지 않았다는 걸 강조했다.
'''패터슨에 대한 공소시효가 2009년을 기준으로 3년가량 남아 있었다.'''[11] 만약 미국으로부터 패터슨의 범죄인 인도가 수행된다면 조사하고 재판할 시간은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리는 이미 해당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나 있으므로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거해 다시 재판이 불가능하다.
한편 이 사건이 거론되기 1년 전인 2008년. 12년 전 미국에서 갱단의 일원으로 독거노인 엔서니 슈레더를 강도 살해한 한인 데이비드 남(남대현)이 체포되어 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아서 패터슨을 다시 잡아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는 말이 있었다.[12]
이 사건 이후 밀폐된 공간에 두 명의 용의자는 서로에게 목격자가 될 수 없다.
3.3. 12년만의 재수사와 용의자 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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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외사부의 요청에 따라 법무부에서 유력 용의자로 지목된 패터슨에 대한 범죄인 인도 청구를 미국에 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2009년 기준으로 공소시효가 3년이 남아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기소가 가능하나, 일반적인 경우 범죄인 인도 청구에 오랜 시간이 걸리고[13] , 이미 십수년이 지난 상태라 증거 확보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결국 2011년 10월 10일, 패터슨이 공소 시효를 약 6개월 남겨두고 미국에서 잡혔다. 당시에는 공소시효가 6개월여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외교력 발휘가 없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게 뻔했다.
그리고 언론보도를 통해 '''패터슨이 범행을 시인했다.'''라는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었다. 물론 공권력에다 시인한건 아니고, 당초 범인으로 지목되었던 리와 또 다른 친구와 함께 LA에서 만났었는데 이 자리에서 패터슨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신이 그를 찔러 죽였다.'''라고 자랑을 했다는 것. 그리고 한국 정부를 조롱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그 자리에 동석했던 다른 친구가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까발려졌다. 또한 에드워드 리는 유족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고 했는데 사건에 대해서 유족에게 죄송하다라고 하면서 '''패터슨이 범인이라는 증거를 미국 검찰에 제출하겠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미국 검찰은 속지주의 원칙에 의거하여 패터슨이 범인이 맞다면 한국에서 처벌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14]
2011년 11월에는 미국 법정에서 패터슨의 송환절차 재판이 진행되었는데 그는 '''"나는 한국에서 형기를 다 살고 나왔으니 도주가 아니다."'''라면서 2012년 4월로 공소시효가 끝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한국 검찰은 공소시효가 끝나기전에 패터슨을 살인혐의로 기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검찰에 의하면 신병을 인도받기 전에라도 먼저 기소를 하면 공소시효의 의미가 없어진다라는 것. 송환절차 재판이 2012년 4월을 넘길 것이 분명한 상황이라 그가 재판을 끌어서 공소시효를 넘기기전에 못을 막아두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래서 2011년 12월 검찰은 보강 수사를 통해 범인으로 보고 기소하여 공소시효가 정지되었다. 검찰은 진술 분석을 통하여 리가 패터슨에게 범죄를 저지르라고 시키고, 칼을 주고 주변 동향을 감시하였고, 목을 여러차례 찌른 것은 패터슨인 것으로 분석됐다고 밝혔다. 한편 미국 법원은 패터슨의 송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미국 치안법정은 송환 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판단하였다.패터슨이 공인이 아니어야 함.[15]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어 있을 것.
패터슨의 유죄가 인정될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를 제시할 것.
패터슨의 범죄가 공무 수행 중에 저지른 행위가 아닌, 명백하게 사적으로 저지른 범죄여야 함.
패터슨의 범죄가 정치범과 관련이 없을 것.
패터슨의 범죄가 미국 법률상 처벌이 가능한 범죄일 것.[16]
패터슨의 범죄가 미국 시민을 송환하여 한국 법정의 심판에 세울 만한 중범죄[17]
일 것.[18]
이렇게 해서 2012년 10월 23일, 용의자의 한국 송환이 결정되었다. 이에 용의자는 결정에 불복해 인신보호 신청을 냈다. 취지는 한국에서 이미 무죄 판결을 받았기에 송환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나고, 진범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며, 공소시효마저 만료됐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그러나 2013년 8월 11일 1심에서 패소하였다고 한다.패터슨은 미군의 자녀이므로 공인이라고는 할 수 없음.
한-미 간에 범죄인 상호 인도조약이 체결되어 있음.
패터슨의 유죄가 인정될 만한 증거가 충분함.[19]
패터슨의 범죄는 사적으로 저지른 것이며, 정치적 사안과 전혀 관련이 없고, 살인죄이므로 미국법으로도 당연히 처벌가능.
미국 시민을 타국에 넘겨 처벌하게 하는 것[20]
은 매우 중요한 사안. 즉 중범죄여야만 가능하며, 사람을 죽인 살인죄는 당연히 여기에 해당.
송환 재판은 LA연방법원에서, 인신보호 재판은 캘리포니아 주 법원에서 심리하였으며, 미국의 경우 두 법원이 모두 3심제로 구성되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주의 고등법원과 대법원의 판단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2015년 5월 7일 항소심도 기각했다. 이 때문에 송환되는가 싶더니 2015년 6월 30일 패터슨의 국내 송환 일정이 연기되었다. 이의신청서를 제출해서 재심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7월, 재심도 기각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패터슨은 실수를 했다. 범죄인인도 결정의 집행정지 신청을 하지 않은 것. 각 심결 이후 2개월 이내에 집행정지 신청을 연장해야 하는데, 항소심에서 패한 이후에 신청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연장 기한을 넘기면서 집행정지가 소멸, 송환이 가능해졌다. 다만 미국 정부가 송환 가능 시점이 되자마자 제깍 송환한 걸 보면 혐의가 확실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의미가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
결국 2015년 9월 19일에 미국 로스엔젤레스 법원의 판결에 따라 미국도 송환에 동의했다. 이에 법무부는 23일 새벽 4시40분 아서 존 패터슨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송환할 예정이라고 22일 밝혔다. 참고
23일 오전 4시 26분 아서 존 패터슨이 한국으로 송환되었다. 공항에서 취재진에게 "유가족들은 고통을 반복해서 겪어야겠지만, 내가 여기에 있는 것도 옳지 않다."며 재차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였으며, 애드워드 리가 범인이라고 주장하였다. 관련기사
다만 패터슨이 유죄를 받더라도 양형은 에드워드 리가 받았을 때와 같거나 그보다는 가벼울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리가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항소심에서 20년형을 선고받은 이유는 사건 당시 만 18세를 넘기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21] 패터슨도 사건 당시 만17세 소년이었으므로 선고 가능한 최고형이 징역 20년이고[22] , 이미 별도의 혐의[23] 로 복역했기 때문에 그걸 빼줘야 하고, 미국에서의 송환재판 수감 기간 및 앞으로 재판을 받는 동안의 구속 기간도 제외해야 하는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패터슨 본인도 유죄를 정 면할 수 없다면 이 점을 적극적으로 강조해 양형을 최대한 줄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검찰은 패터슨에게 징역 20년을 구형하면서, 미국에서의 구금 기간을 양형에 반영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제시해 좀 더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다.[24]
일단 패터슨은 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되자 한국에서 오병주 변호사를 선임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나섰다. 또한 18년이나 지났기에 증거 보전도 쉽지 않은 관계로 재판이 길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재판에 증인으로 불려나올 에드워드 리 및 그의 친구 최씨와의 법정 싸움 역시 변수가 될 것이다.[25]
4. 재판 과정
4.1. 1심 서울중앙지방법원
- 사건번호는 2011고합1600이다.(#)
- 2015년 10월 8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심규홍) 재판이 진행되었다. 패터슨 측은 여전히 에드워드 리가 살인했다고 계속 주장하고 있다. #
- 2015년 11월 4일, 1차 공판에서는 증인으로 나온 에드워드 리가 재판에 참석했다. 18년전과 마찬가지로 에드워드 리 측은 "패터슨이 범인"이라 했고, 패터슨 측은 "리가 자신에게 유리한 기억만 골라 증언하고 있다"고 말했다. # 유가족 측은 패터슨과 리 둘 다 사람이 아니라면서 재판부를 향해 한을 풀어달라고 말했다. #
- 이 재판의 최대 쟁점은 에드워드 리의 증언이 믿을만한가이다. 두 사람은 재판정에서 8시간동안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다고한다. 일단 혐의자 둘 중에 하나라 리는 당연히 페터슨의 유죄를 주장할 것이고 검찰이 주장하는 자신의 공범혐의는 정면으로 부인하는 식으로 증언하고있어서 증언의 신뢰도가 낮다. 그러니 리의 증언만으로는 범죄가 합리적 의심없이 증명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다른 증거나 증언없이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되어 영구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 2015년 11월 19일, 당시 사건을 맡았던 수사관과 당시 조중필 씨의 여자친구였던 증인에 대한 심문이 진행되었다. 당시 조중필 씨의 여자친구였던 증인은, 사건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조 씨의 유가족과 패터슨을 마주하기 힘겹다는 이유로 비공개 심문을 요청하는 서면을 지난 15일 재판부에 제출해 비공개 심문이 진행되었다. 조 씨의 여자친구였던 증인은 사건 이후 시간이 오래지나 당시 상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으며 당시 조 씨가 가방을 맸는지 여부와 조 씨가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등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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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12월 4일, 이태원 살인사건 현장검증을 위해 서울중앙지검 별관 1층에 세트장을 마련했다. 사건 당시 18년 전 사건 당시 이태원 햄버거 가게 화장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현장검증은 비공개로 진행하지만 뉴시스 단독보도로 세트장의 내부는 볼 수 있었다.
- 2016년 1월 15일, 검찰은 아더 존 패터슨에게 징역 20년을 구형하였다. 본래 무기징역으로 해야 하나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는 '당시 18세 미만인 소년을 사형 또는 무기형에 처해야 할 때는 그 형을 20년의 유기징역으로 한다'고 규정되어 있어 범행 나이가 당시 미성년자이므로 미성년자 법정 최고형인 징역 20년을 구형한 것이다.
- 2016년 1월 29일. 1심 재판부는 패터슨 측이 주장한 살인죄 공소시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판정하였다.[26] 다만 이것은 언제까지나 재판이 가능하다는 뜻에 불과하기에 패터슨이 살인죄를 인정받을지는 3심까지 확정이 되어야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사건 발생 이후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서 증거도 많이 사라졌고, 증인들의 기억도 확실치 않아 패터슨이 유죄인가를 확신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상황이다.
4.2. 2심 서울고등법원
사건번호는 2016노562이다.(#)
2016년 3월 29일, 서울고법 형사5부(부장판사 윤준) 재판이 진행되었다. (관련기사) '''패터슨은 여전히 자신은 우연히 범죄현장에 있던 목격자에 불과하다며 거듭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항소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 기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태원 살인사건, 재판부가 박재오 변호사의 증인 선정을 기각한 이유
2016년 4월 26일, 공판기일에서 에드워드 리가 제1심에 이어 다시 증인으로 선정됐다. 하지만 에드워드 리의 아버지 이모 씨는 "사건의 쟁점은 제1심에서부터 끊임없이 해명했다"며,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출석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2016년 5월 31일, 공판기일에서 에드워드 리의 증인 선정이 취소됐다. 재판부는 "제1심에서 에드워드 리와 부친 이모 씨가 충실히 증언한 것으로 보이고, 현장검증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항소심에서 반복해서 증인 출석을 요구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고 증인 선정 취소의 이유를 밝혔다. 한편, 이 사건이 1997년 발생한 사건인데다가 증인 중 다수가 미국인인 탓에 증인들의 현재 주소 파악이 어려워 증인 소환장 송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2016년 6월 28일, 공판기일에서 패터슨 측은 "직원에게 사건 현장의 물청소를 지시했다"는 증언의 당사자였던 1997년 당시 버거킹 본사 영업부장에 대해 "검사가 사건 현장을 보기 전에 물청소한 것이라서 누군가의 사주에 의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며 증인 선정을 신청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수사기관에 대한 비합리적인 의심은 부적절하다"며 이를 기각했다. 2016년 1월 12일 제1심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사건 당시 버거킹 이태원점의 직원은 "영업부장이 경찰관들과 대화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사건을 파악한 뒤 현장을 청소하라고 지시했다"며, "당시에는 살인사건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상사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에 청소했다"고 증언했던 바 있다.
2016년 7월 14일, 공판기일에서 재판부는 "폐문부재 등의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 증인 소환이 사실상 어렵다고 본다"며, "다음 공판기일에서 피고인신문 후 결심하겠다"고 결정했다.
2016년 8월 29일, 공판기일에는 피고인신문이 진행됐다. "범인은 에드워드 리"라는 취지의 변론을 이어갔던 패터슨은 최후 변론에서 "14년 9개월이 지나 범인이 아닌 나를 기소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검찰에 되물으며, "나는 희생양"이라고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검찰은 제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20년을 구형했고, 피해자 유족의 대표로 증언대에 선 조중필 씨의 어머니는 "에드워드 리와 패터슨 둘 다 사람이 아니다"라며, 패터슨에 대한 엄벌을 촉구했다.
2016년 9월 13일, 항소심에서 징역 20년 형이 유지됐다. # 재판부가 인정한 가장 유력한 유죄 근거는 세면대 오른쪽과 벽에 묻은 혈흔이었다. 패터슨은 그동안 "세면대 오른쪽과 벽에 기대 서 있었던 중 에드워드가 범행을 했고 나는 다가오는 피해자를 밀쳤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피해자가 다시 일어나서 추스르고 세면대에 피를 묻혔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며 '세면대 근처에 패터슨이 없었을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외에도 ▲사건 발생 후 에드워드 리는 혈흔이 묻은 상의를 그대로 입고 주변을 활보한 것과는 달리 패터슨은 옷을 갈아입거나 흉기를 미군 영내 하수구에 버리는 등 증거인멸을 했고 ▲범행 직후 패터슨이 흉기를 들고 일부러 늦게 나온 것으로 보이며 ▲에드워드 리에게서 거짓 반응이 나왔다는 거짓말탐지기 조사는 정황증거에 불과하다는 것 등을 기각의 이유로 들었다. 에드워드 리에 대해서도 '공모자'라고 판결해 제1심의 입장을 유지했다.
패터슨 측은 항소심 기각 직후 상고장을 제출했으므로 대법원에서 상고심을 진행하였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이상은 20년 형이 확정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4.3. 3심 대법원
사건번호는 2016도15526이다.(#)
대법원은 2016년 10월 28일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에 사건을 배당했다. 패터슨 측은 그 이전인 10월 20일과 24일 각각 상고이유서와 참고자료를 제출했다.
2017년 1월 25일, '''대법원에서 20년 형이 확정되었다.''' 재판부는 "'''패터슨이 피해자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음이 의심할 여지 없이 충분히 증명됐다'''"며 "징역 20년을 선고한 것을 무겁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검찰이 패터슨을 재판에 넘긴 것은 공소권 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과거에 확정된 사건(증거인멸)의 내용의 영향력이 이번 사건에 미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에드워드 리에 대해서 공모자로 가담한 것으로 평가했으나 이미 그는 대법원에서 살인죄에 관해 무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거 살인자로는 정식 재판을 할 수 없고, 공모 혐의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났음을 유족들은 안타까워했다. 이로써 그가 진범인지 유무는 영원히 미스테리로 남게 되었다.
5. 관련 보도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SBS '문성근의 다큐세상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살인자인가? 목격자인가? 이태원 살인사건'''이라는 주제로 방송하였다. 이후 '그것이 알고 싶다'는 2009년 '''이태원 살인사건 12년의 추적-누가 진실을 두려워하는가'''로 다시 이 주제를 다뤘으며, 패터슨이 국내로 강제로 송환된 후 2015년 10월 '''최후의 송환-이태원 살인사건의 진실'''로 또 한번 다뤘다.
2003년에는 MBC 실화극장 죄와벌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방영하였다.[29]
이태원 살인사건이라는 영화의 개봉과 맞물려 2009년 9월 27일에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도 해당 사건에 대해 취재하였다. 현재 시사매거진 2580 홈페이지에서 다시보기(무료)가 가능하다. #
팟캐스트 방송 '나는 변호사'에서 이태원 살인사건을 다뤘다. 법조인의 입장에서 법률적 쟁점이나 앞으로 패터슨에 대한 판결을 전망했다.#
2017년 3월 이태원 살인 사건 피해자의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10억원대 소송을 제기했다.,네이버 뉴스 링크
2018년 7월 법원은 검찰의 부실수사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여 유족에게 3억 6천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1] 이태원역 3번 출구 근방에 있었으며, 현재 이 자리에는 올리브영이 있다. 버거킹 자체는 사건 이후에도 몇 년동안 그 자리에 있었으며, 이후에도 다른 곳으로 옮겨서 계속 영업하다가 이후 이태원에서 철수했다. 여담으로 버거킹 이전에는 웬디스가 있었다. 간혹 맥도날드 살인 사건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도 있다.[2] '''아서 패터슨'''과 '''에드워드 리'''. 훗날 범인으로 밝혀진 아서 패터슨은 한미 혼혈인이었다.[3] 에드워드가 패터슨보다 생일이 빨랐다.[4] 패터슨은 캘리포니아에 근거지를 둔 노르테 14의 일원으로 추정되었다. 본인은 이를 부인하였으나 해당 지역 경찰이 사진만 보고 패터슨을 알아보았을 정도. 그리고 mad-dogging 수법(상대가 화가 나도록 여럿이서 빤히 노려보다가 상대가 화를 내면 이를 구실로 삼아 싸움을 건 뒤 상대를 제압하고, 죽을 때까지 흉기로 난자하는 미국 갱단들 고유의 수법)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그가 갱단 일원이라고 볼 근거는 충분하다.[5] 당시 패터슨의 키는 173cm.[6] 무방비 상태의 비면식 피해자를 등 뒤에서 공격하면서 9차례나 칼을 이용해서 거듭 찔렀다.[7] 검사는 칼로 사람을 찔러 피를 보면 이성을 잃어 그 후의 범행에 대하여 기억을 못하는 것이 범죄심리학의 일반적 상식이라고 증명된 적 없는 본인만 아는 상식을 주장하였고, 에드워드 리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다.[8] 패터슨의 출국 금지일은 99년 8월 23일까지였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검찰이 출국금지 연장 요청을 한 것은 3일 후인 8월 26일. 일시적으로 출국금지가 풀린 8월 24일에 패터슨은 미국으로 유유히 도주하였다. 패터슨은 출국금지가 풀린 2일의 간격을 어떻게 알고 출국했는지는 미지수이다.[9] 패터슨의 출소 후 소재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퉁명스럽게 모르쇠로 일관하던 검사. 이후 취재진이 패터슨의 미국 도주 사실을 확인하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검사는 패터슨의 도주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지난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질까 싶어 거짓말 했음을 시인한다.[10] 이는 유족이 국가배상소송을 하는 과정에서야 뒤늦게 밝혀짐.[11] 만약 공소시효가 끝나도 범인이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경우 그 기간 동안 공소시효는 정지된다.(형사소송법 제253조 제3항)[12] 실제로는 2000년에 체결된 한미 범죄인 인도조약에 의한 것. 실제로 1999년에 한국 검찰이 그를 체포해 처벌하려고 했지만 당시에는 미국 국적자였기에 미국인들간의 범죄이고 범죄인 인도조약이 없었다는 이유로 풀어주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었다. 물론 데이비드 남은 그 직후 당연히 법을 개정해 체포에 나설 것을 직감하고 잠적했기에 이후 다시 잡는 데 8년이나 걸렸던 것이다. 현재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미국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13] 범죄인 인도라고 해서 바로 보내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국에서 재판을 거쳐 범죄인 인도가 확정되면 그때 보내준다. 그리고 어느 국가나 재판은 금방 끝나는 게 아니다.[14] 만일 미국이 대륙법계 혹은 이슬람교법계나 관습법이고 속인주의라면 패터슨의 재판은 미국에서 열게 된다. 그러나 미국은 대륙법계 국가가 아니고 호주, 홍콩, 파키스탄, 캐나다, 영국, 뉴질랜드처럼 영미법계 국가이다. 영미법계에서는 형법에서는 속지주의 원칙에 속인주의 예외를 규정한다. 즉 영토 외 범죄에 대해서는 특별한 사유가 아닌 이상은 처벌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국민이라고 할지라도 해외 국가에 인도하는 것을 허용하는 입장이다.[15] 즉 미군 출신 등이라면 한국에서 저지르고 잡혔다면 모를까, 미 본토까지 넘어간 이상 넘기기 어렵다는 뜻이다.[16] 살인죄이므로 물론 송환이 가능하다.[17] felony[18] 여기서 중범죄는 사안마다 다르다. 연방법 기준으론 재산 혹은 인신에 심각한 피해를 일으켜 징역 1년 이상의 선고가 가능한 죄를 가르킨다. [19] 여기에는 미군 범죄수사대. 즉 미합중국 육군범죄수사사령부가 패터슨의 유죄를 확신하고 있었던 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20] 물론 미국으로 도망쳐온 한국인이라면 횡령죄 같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범죄라도 유죄만 맞으면 제깍 송환을 하겠지만, 패터슨은 미국 시민권자였다. 그러나 미국 법은 호주, 영국, 홍콩과 마찬가지로 영미법계라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속인주의 예외를 규정한다. 즉 범죄인 인도는 미국 시민권자라도 해외 인도 대상에 해당이 된다.[21] 기록에 의하면 위 피고인은 1979년생으로 이 사건 범죄를 저지를 당시인 1997. 4. 3.에는 만 18세에 달하지 아니하였음이 분명한 바(서울고법 97노2396)[22] 특강법 제4조(소년에 대한 형) 제1항[23] 살인죄에 흡수되는 불법무기 소지 등.[24] 실현가능성은 낮다. 송환재판 기간도 엄연히 패터슨의 유죄를 확정하기 위한 재판 기간이고, 불구속이라면 모르나 이 기간 패터슨은 인신을 구속당한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구속기간으로써 양형에 합산되어야 한다.[25] 다만 에드워드 리는 살인죄로는 무죄판결을 받았고, 살인방조죄 등 기타 혐의는 이미 공소시효가 끝나 처벌이 불가능하다. 이후 재판에서도 공모자로는 평가했지만 정식재판 자체가 불가능하여 이 사람 범인이라고 정할 권한이 없으므로 진실이라 단언할 수 없다.[26] 단 이것은 살인죄에 대한 재판을 받지 않은 패터슨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27] 다만 패터슨의 유죄를 가리는 과정에서의 판단이기에 실제 에드워드 리가 공범이 명백하므로 범죄자 낙인을 찍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부분은 별도의 재판으로만 가릴 수 있는데 이미 무죄가 확정된 뒤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라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따라 다시 재판할 수가 없다.[28] 증거인멸은 살인죄에 합산되므로 형기에 자동으로 포함되지만 재판부가 따로 언급할 이유는 없다. 또한 미국에서의 송환재판 대기기간에 대해서는 검찰측에서 반대하고 있는데 패터슨이 유죄를 받는 조건으로 포함된 기간이기 때문에 미국측에서 형량에 합산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물론 재판부가 이걸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고, 징역 20년을 그대로 선고하면 실제 복역 형량은 20-살인죄에 흡수되는 증거인멸죄 복역기간 및 미국에서의 송환재판에 따른 인신구속기간을 빼는 형태로 집행하게 된다.[29] 그런데 이 방송에서는 앞부분에 실제 사건이 일어났던 문제의 버거킹 점포가 그대로 나왔다. (그것도 자료 화면이 아닌 재연극에서) 다만 촬영은 파파이스에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