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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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12대 인종의 왕비. 본관은 반남,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이다.
2. 생애
1514년에 금성부원군 박용과 문소부부인 김씨의 딸로 태어나 1524년 세자빈에 책봉되고, 1544년 세자였던 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1년 뒤인 1545년 인종이 승하하고 인종의 이복 아우인 명종이 즉위하면서 왕대비로 올라갔으며, 2년 뒤인 1547년 공의(恭懿)의 존호를 받아 공의 왕대비가 되었다.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중종의 서손인 선조가 명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하였는데, 이미 대왕대비의 자리가 비어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왕대비로 승봉되지 못하였으며, 그녀의 아래 동서인 명종비 인순왕후가 왕실 최고 여성의 입장으로서 선조의 수렴청정을 하였다.[1] 1577년 2주간 괴질을 앓다가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3. 인물됨과 고된 왕비의 삶
온화한 왕비였지만 남편을 일찍 잃고 자식도 없었던 탓에 외롭게 살았다. 본인은 물론 남편인 인종도 성격이 너무 착할 뿐만 아니라 효자였기 때문에 인종을 힘들게 했던 시어머니인 문정왕후를 극진히 모셨다고 하며, 문정왕후도 이는 인정했는지 인종 사후 인종의 외가(윤임)를 숙청하면서 인성왕후나 인성왕후의 친정은 건드리지 않았다. 물론 인성왕후가 자식이 없었던 탓에,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야심을 품은 문정왕후와 맞설 입장이 아니었으니 굳이 숙청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시어머니인 문정왕후가 1565년에 사망한 지 2년 지나고 시동생 명종도 사망하고 선조가 즉위했는데, 3년 지나고 나서 조카며느리뻘이자 같은 집안[2] 인 의인왕후가 선조의 왕비가 되자 인순왕후와 인성왕후 본인이 선조의 비인 의인왕후를 예뻐했다. 워낙 의인왕후의 인물됨이 괜찮았기 때문에 두 대비들이 의인왕후를 예뻐했을 가능성이 높다.
죽기 직전에는 을사사화의 위훈 삭제 문제로 대단히 고통스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을사사화의 공신들을 인정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정통 후계자 명종을 즉위시킨 공'인데, 이는 거꾸로 말하면 명종이 즉위할 당시 '누군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신들이 명종을 즉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렇게 되면, 인성왕후가 실제로 권력이 없었고 권력 욕심도 없었던 현실과는 별개로, 왕실에서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다음 서열이며 승하한 인종의 왕비였던 인성왕후가 명종의 즉위를 방해한 그 '누군가'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을사사화로 공신이 된 사람들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한, 인성왕후는 계속 '정당한 왕위 계승자의 즉위를 방해한 인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인성왕후 본인은 정치적 실권이나 영향력이 없었으므로 본인이 위훈삭제를 직접 요구할 수는 없었고, 그만큼 괴로움은 더 컸다. 하지만 위훈삭제 문제는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라 임금인 선조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자칫하면 공신의 위훈 삭제 문제로 터진 기묘사화와 비슷한 일이 터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위훈삭제 문제는 명종의 정통성 문제와 연결되는데, 선조 본인도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넓게 보면 선조 본인의 정통성 문제와도 연결될 수 있었다. 그래서 병석에 누운 인성왕후의 하소연을 들은 뒤 '어쩌다 임금이 되어서 이런 난처한 일을 겪게 되었구나'라며 탄식했을 정도. 결국 선조는 인성왕후가 승하하기 직전에 결단을 내려 위훈삭제를 명하였다.
4. 사극
인종이 사극에서 주역으로 나온 적이 거의 없었고 또 인성왕후가 존재감이 없어 사극에 많이 등장하지 않을 뿐더러, 설령 나온다해도 비중은 거의 공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성은 역사대로 착하고 인자하게 묘사된다.
- 1985년 MBC 《조선왕조 500년 - 풍란》 - 채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