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혜왕후

 



'''조선 소혜왕후 한씨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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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추존 왕비
소혜왕후 | 昭惠王后
'''
존호 · 휘호 · 시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1px"인수자숙휘숙명의소혜왕후
(仁粹慈淑徽肅明懿昭惠王后)
<colbgcolor=#bf1400> '''존호'''
인수자숙(仁粹慈淑)
'''휘호'''
휘숙명의(徽肅明懿)
'''시호'''
소혜왕후(昭惠王后)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출생'''
1437년(세종 19년) 10월 7일[1]
조선 한성부
'''사망'''
1504년(연산군 10년) 5월 11일[2]
조선 한성부 창경궁 경춘전[3]
'''능묘'''
경릉(敬陵)
'''재위'''
'''조선 왕세자빈'''
1455년 ~ 1457년
'''조선 왕비'''[4]
1470년 ~ 1475년
'''조선 왕대비'''
1475년 ~ 1494년
'''조선 대왕대비'''
1494년 ~ 15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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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본관'''
청주(淸州)
'''전호'''
모자전(慕慈殿)
'''부모'''
서원부원군 한확, 남양부부인 홍씨
'''형제'''
'''3남 6녀 중 6녀'''
오빠 서릉부원군 한치례
언니 정선군부인 한씨
'''부군'''
덕종(의경세자)
'''자녀'''
'''2남 1녀'''
장남 월산대군
장녀 명숙공주
차남 성종
'''종교'''
유교(성리학)불교

1. 개요
2. 인생
2.1. 세자빈이 되다
2.2. 남편 의경세자의 요절
2.3. 아들 성종의 즉위
2.4. 왕대비가 되다
2.5.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다
2.6. 연산군 즉위 이후
2.7. 사후
3. 사극에서의 묘사
4.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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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昭惠王后 韓氏 소혜왕후 한씨
仁粹大妃 인수대비
한확의 딸로, 추존 왕 덕종의 아내이다. 세조의 맏며느리이자 월산대군성종의 어머니이다. 남편 의경세자가 아들 성종에 의해 덕종으로 추존된 후, 인수왕비(仁粹王妃)를 거쳐 인수대비(仁粹大妃)에 봉해졌다. 이후,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이 즉위한 이후엔 자숙대왕대비라는 호칭이 더해졌으나 인수대왕대비로 더 알려져 있다. 사후 연산군 때에 소혜왕후(昭惠王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실제 왕후로 지냈던 적이 없고 대비로만 지냈다보니 대중에는 소혜왕후보다는 인수대비라는 호칭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연산군중종의 친할머니이다. 한명회의 막내딸인 공혜왕후와 연산군의 모후인 폐비 윤씨,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자순대비)의 시어머니이다.
아들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추존되었다는 점에선 신정왕후 조씨와 비슷하고, 남편이 병으로 죽고 시동생이 왕으로 오른 케이스라는 점에서는 민회빈 강씨와 비슷하다.[5]
불교를 신봉하면서 유학자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유교에 통달했다. 여성 교육서인 내훈(內訓)을 썼다. 내훈에 '며느리가 잘못하면 이를 가르칠 것이고, 가르쳐도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릴 것이고, 때려도 고치지 않으면 쫓아내야한다.'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엄격한 성격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사회에서 며느리의 위치가 보편적으로 이 정도였을 수도 있다.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산스크리트어에 능했다. 산스크리트어는 배우기 무척 어려운 언어이다. 명나라를 통해 인도에서 불경 원본을 반입해 볼 수도 있었겠고, 이를 읽기 위해 산스크리트어를 배웠을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 영부인이 라틴어나 히브리어를 할 수 있는 느낌이다. 당시에는 왕비나 세자빈들도 한자를 못 읽는 경우가 많았고, 산스크리트어 교육용 교재도 적었을 것이므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인수대비의 큰 고모는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고 작은 고모는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따라서 영락제선덕제는 인수대비의 고모부가 된다. 남동생 한치례(韓致禮)는 정의공주의 차녀와 결혼했다.
정사가 아닌 야사 속 이미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망설이는 성종을 설득해 폐비 윤씨를 적극적으로 폐위시켰고,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박치기를 했다는 야사가 정사처럼 퍼져있다.

2. 인생



2.1. 세자빈이 되다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450년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 숭과 혼인하여 군부인(郡夫人)이 되었다. 수양대군단종으로부터 강제로 양위받아 왕위에 오르면서 남편은 왕세자에 봉해졌고 그녀 역시 세자빈으로 위치가 격상되었다.
남편 의경세자와 금슬이 좋았다고 하며 결혼생활 5년 동안 슬하에 2남 1녀를 두는데, 월산대군, 명숙공주(이경근), 자을산군(훗날의 성종)이다.

2.2. 남편 의경세자의 요절


훗날 성종이 되는 둘째 아들이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경세자가 요절하였다. 당시 의경세자는 20살, 한씨는 21살이었다.
야사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저주라는 말이 나돌자 이 말을 믿은 세조가 형수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야사와 달리 단종이 한 달 뒤에 사망하였다. 세조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친 행위는 실제 있었다.
세자빈 자리는 아랫동서에게, 남편의 세자 자리는 시동생에게 물려주고 한씨는 정빈(貞嬪)이라는 호를 받아 어린 세 자녀[6]를 데리고 출궁하였다. 정빈이 원경왕후가 세자빈으로 있을 때의 빈호와 같았으므로 훗날 수빈(粹嬪)으로 고쳤다. 자식 교육에 매우 엄격하여 시부모인 세조정희왕후는 농담 삼아 그녀를 폭빈이라고 불렀다.[7]

2.3. 아들 성종의 즉위


수빈은 차남 자을산군한명회의 딸과 결혼시켰고, 시어머니 정희왕후 윤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등 여전히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예종이 갓난 아기인 제안대군만 남기고 사망하자 권신 한명회와 왕실 최고 어른 정희왕후의 지지를 받은 성종이 즉위하였다.
자을산군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수빈은 아들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한동안 빈의 지위였다. 국왕의 생모로서 궁 안에서 살게 되면서 애매한 수빈의 지위에 관해 논의가 시작된다.
예종의 친자였던 제안대군은 세종의 적7자인 평원대군의 봉사손(奉嗣孫)이 되면서 왕위와 영영 이별하였다.

2.4. 왕대비가 되다


처음에는 인수왕비(仁粹王妃)에 봉해졌지만 성종 2년 성종이 친아버지를 덕종으로 추존하면서 수빈도 대비가 되었다.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와 인수대비 중 어느 쪽이 더 서열이 높은지 논란이 발생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정희왕후 윤씨가 "맏며느리인 인수대비가 더 서열이 높다."고 공언하면서 이후에 다시 문제되지 않았다.
인수대비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무척 박식해서 한문에 밝았기 때문에 정희왕후는 "나보다는 문자를 아는 며느리 수빈이 수렴청정에 적합할 것이다."라며 사양하기도 했다. 또한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시기 한글은 알지만 한문에는 밝지 못한 정희왕후에게 도움을 주었다. 유교경전은 물론 범어에도 조예가 깊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을 번역하고 내훈을 짓기도 했다.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사망하자 왕실 최고 어른이 되었다.

2.5.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다


이때 아들 성종은 이미 어린 아이가 아니었고 인수대비가 평소에 "여인은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고 말한만큼 성종의 치세 동안 큰 영향력을 미치지 않았다. 실록에서 인수대비가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금승법(禁僧法)이 통과되어 불교를 거의 말살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독실한 불교 신자의 입장으로 결사반대한 것 정도이다.
폐비 윤씨 사건을 주도한 것은 인수대비가 아닌 성종이었다. 인수대비는 성종의 편을 들어 신하들에게 윤씨의 폐위가 옳다고 하였고, 시어머니 정희왕후 역시 언문 교지를 내려 성종의 선택에 힘을 실었다.
야사 중 인수대비가 폐비 윤씨를 죽이는 데 주도적이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성종후궁귀인 엄씨, 귀인 정씨와 결탁하고 성종이 폐비 윤씨가 잘 지내고 있는지 보고 오라 명령한 내관을 협박하여 "폐비 윤씨가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더라"라는 거짓 보고를 올리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야사의 전제 조건은 성종이 폐비 윤씨를 그리워했다는 것인데, 성종은 폐비 윤씨 이야기만 나오면 치를 떨면서 버럭 화를 내던 사람이었다.
폐비 윤씨의 두 차례 폐비 위기는 대비들이 아니라 성종의 주도였다. 나중에 폐비 윤씨를 사사한 것도 신하들의 동정론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진행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폐비 윤씨성종을 참조.

2.6. 연산군 즉위 이후


왕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이미 병세가 깊었던 인수대비는 한 달 후 세상을 떠났다.
야사 중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박치기를 하였고 그 충격으로 승하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그냥 야사이다.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들이받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연산군의 막장성과 패악질을 강조하기 위해 사관이 수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실록에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 것이다.
실록에는 연산군이 이복형제이자 귀인 정씨의 소생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카락을 잡고 인수대비에게 가서 "왜 제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고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고 적혀있다. 단순히 인수대비에게 소리를 지른건지, 아니면 쌍욕을 섞어가며 패드립을 쳤는지는 알 수 없다.
이날 연산군의 깽판은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음력 3월 20일 기사에 실려 있다. 건강이 나빴던 인수대비는 1개월 남짓 뒤인 4월 27일에 승하하였다. 연산군갑자사화 이전엔 할머니 인수대비를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선물도 많이 올리며 상당히 후하게 모셨다. 불사도 말리지 않았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 '윤기무' 라는 이름을 보고 신하들에게 물어보고 폐비 윤씨의 아버지라는 언급이 나오자 그날 수라를 걸렀던 일이 있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폐비 윤씨의 존재와 그 전말에 대해서 얼추 알고 있음에도 별다른 문제없이 넘어가는 분위기였던지라 인수대비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충격이었을 것이다.
사극에서 인수대비가 연산군을 향해 저주를 퍼붓거나 한이 서린 말로 유언을 남기고 죽는 장면이 많은데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인수대비가 자신의 건강이 안좋아지자 "주상(主上)이 본래 소찬[素膳]을 들지 못하니, 내가 만일 죽게 되더라도 3일 안에 육찬[肉膳]을 드리도록 하라."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2.7. 사후


일설에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가진 원한이 깊어 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전호는 임금이나 왕비, 왕대비, 대왕대비에게나 지어올리는 것인데, 연산군일기에 보면 인수대비의 혼전(魂殿)이라고는 명시되어 있진 않으나 정황상 인수대비의 혼전으로 보이는 모자전(慕慈殿)에 연산군이 참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격하하여 왕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르려한 적이 있다. 연산군이 "대행대왕대비께서는 곤위(琨位)[8]에 계셨던 적이 없으니 왕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러야 맞지 않겠는가?"하고 하문하니 신하들이 연산군의 폭력적인 행동에 눌려있다가도 이것만은 반대하고 나섰다. 영의정 유순은 "그건 주상전하의 뿌리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일입니다."[9]라고 아룄다.
그러자 연산군도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했던지 그러면 의경세자보다는 높고 안순왕후보다는 낮게 행하라고 분부하였으나 이것도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결국 왕후의 예로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상제(喪祭)를 단축하여 지내는 것을 밀어붙여 확정 지었다. 이에 대해 인수대비의 며느리이자 연산군의 계모인 자순대비가 따르지 않겠다고 항의하자 연산군은 삼종지도를 언급하며 "남편이 죽었으니 이제는 아들이 하는 말에 따르는 게 여자의 도리가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자순대비는 하는 수 없이 연산군의 뜻에 따라 장례를 치르며 "내가 대왕대비께 죄를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며 한탄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상제를 단축하여 지낸 적은 많이 있었다. 성종도 정희왕후의 상제를 한 달로 단축해서 지낸 예가 있었는데, 보통 국왕이 상제를 단축하려 한 뜻은 상제를 빨리 끝내야 조정을 정상적으로 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연산군이 딱히 인수대비를 격하시킬 의도로 그런 건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안순왕후의 장례 때는 13일 만에 상복을 벗었으나 인수대비의 장례 때는 27일 동안 상복을 입었으니 그래도 친할머니라고 조금 더 성의를 보인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인수대비가 승하한 직후 상례를 의논할 때 왕세자빈의 예로 치르자고 한 것을 보면 연산군이 격하할 의도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 경내에 있는 경릉(敬陵). 남편 덕종과 함께 동원이강릉 형태로 묻혀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인수대비의 능이 남편인 덕종의 능보다 더 화려하고 높은 위치에 묻혀 있으며 석물도 덕종의 능보다 인수대비 능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건, 덕종은 세자일 때 승하했지만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의 어른인 대왕대비일 때 승하했기 때문에 다르게 한 것이다.

3. 사극에서의 묘사


대중의 인식이 야사에 편중되어 있어 정사의 모습과 거리가 있다. 세조 때는 인수대비가 처세와 수완을 발휘했지만 예종, 성종 시절엔 아니다. 왕의 생모라는 지위를 내세워 권력을 휘두르는 대비 이미지는 후대의 문정왕후가 더 어울린다.
성종이 어렸을때 수렴청정은 정희왕후 몫으로 정희왕후를 보좌하는데 머물렀으며 스스로가 여인은 정사에 깊이 관여하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장성한 성종이 하는 일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극에선 주로 야사의 모습으로 그려져 폐비 윤씨와 성종을 구속하는 모습으로 많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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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방송된 MBC '조선왕조 오백년 - 설중매'에서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맡았던 고두심임영규.[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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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방송된 KBS 1TV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와 연산군 역을 맡았던 채시라[11][12]안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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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방송된 SBS '왕과 나'에서 인수대비 역을 맡았던 전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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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방송된 JTBC '인수대비'에서 어린 시절은 아이돌 티아라함은정, 이후에는 왕과 비에서 인수대비를 연기했던 채시라가 맡았다.
왕과 비에서는 채시라가, 왕과 나에서는 전인화가, 각각 냉철하고 권력욕이 강한 인수대비의 모습을 정말로 잘 연기해냈다.
작중 묘사의 차이점은 이러하다. 왕과 나의 인수대비왕과 비와는 다르게, 나름대로 연산군과 사이가 좋고 연산군을 아끼는 편이란 거다. 다만 계모 정현왕후와 단 둘이 있을 때 세자는 폐비의 소생이라면서 내심 못마땅하다는 속내를 털어놓는데, 그래도 기본적으로 왕실의 장자이자 왕위를 잇는 후계자로서 우대는 해 주는 편. 물론 가끔 연산군을 붙잡고 잔소리로 갈굴 때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연산군이 학문을 게을리하거나 함부로 사화를 일으켜 조정대신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걱정하는 차원에서 가족으로서 하는 잔소리다. 실제로 자신이 아끼던 상궁을 잡아가려는 것을 말리려다 연산군에게 밀쳐져서 앓아눕게 되었는데, 자신에게 문병을 온 며느리 정현왕후에게 "주상의 폭정이 더 심해지면 진성대군을 옹립하자는 말들이 들릴게요. 허나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대비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죽기 직전 연산군과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죽은 인수대비에게 연산군이 "어찌 소손의 어미를 그리도 미워하신 겁니까!! 소손을 보위에 올리시고도 어찌 따듯하게 안아주지 않으신 겁니까!! 소손은 할마마마가 원망스럽습니다!!"며 슬퍼하는 장면까지 있을 정도.
반면 왕과 비인수대비는 극 중 보면 '''친할머니가 맞나 싶을 정도로''' 손자 연산군에게 '''폐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천한 피가 흐르다고 운운하면서''' 엿을 먹이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이래서 연산군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할머니를 볼 때마다 항상 위축되면서 우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이는 세자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성한 뒤로는 연산군 역시 이에 질세라 자신의 할머니에게 항상 골탕을 먹이는데 온 힘을 집중한다.
심지어 성종이 승하하고 나서 연산군이 상주(喪主)로서 뒷처리를 해야할 때, 굳이 사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알면서도 연산군에게 성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행사인''' 수륙제를 지내야 할 것이라며 압박을 가하는가 하면, 즉위를 윤허한다는 교지 역시 쉽게 내려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나마 최측근이자 사촌오빠인 한치형이 간곡하게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연산군의 왕위를 인정해준 것 뿐이고,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문안인사를 할 때 제대로 받지 않고 자신의 둘째 손자인 진성대군만 편애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나마 이 둘의 호흡이 척척 맞았을 때는 무오사화 때 뿐.[13] 하지만 무오사화를 기점으로 자신의 왕권을 다지고 자신감을 가지게 된 연산군은 아예 자신의 친할머니의 눈치도 보지 않으면서 깽판을 놓기 시작한다.
결국 인수대비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손자와 치열하게 대립하다 못볼 꼴 다보고 죽고 죽고 나서도 자신의 손자에게 온갖 방법으로 고인드립을 당하는데, 죽기 전 연산군의 처남이자 진성대군의 장인 신수근에게 넌지시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리라고''' 암시를 주기도 하며, 실제로 마지막회에서 폐위되자 연산군 자신은 크게 웃으면서 덩실덩실 춤추고 '''"할머니, 할머니 소원대로 폐주가 되었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내쫓고 새 임금을 세웠으니 새 임금인들 임금노릇을 재대로 하겠습니까?"'''라고 외치면서 매우 기뻐한다.
또한 인수대비왕과 비는 같은 작가(정하연)와 같은 주인공(채시라)이 참여했음에도 인수대비에 대한 묘사가 크게 다른데,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군부인 시절부터 왕비가 되려고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자신의 권력유지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면 가족이라도 사람 취급도 제대로 안하는 냉혹한 면모를 지녔지만,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비교적 인간적이고 고뇌하는 면모도 많이 보이는 편이다.
특히 연산군을 대하는 모습에서 그 차이가 큰데, 가령 <왕과 비>의 인수대비는 친손자인 연산군에게조차 냉혹하고 폐비의 핏줄이라며 제대로 된 정을 보여주지 않고 심하게 갈군다. 폐비 윤씨를 사사할 때, 어미 잃은 연산군을 측은히 여겨 감싸안고 대성통곡하며, 그 전에 폐비 윤씨 사사가 거론이 되었을 때도 사촌오빠 한치형이 차라리 폐비를 죽이지 말고 원자를 같이 폐위시켜버리자고 주장할 때, 엄연히 자신의 손자이고 죄도 없기 때문에 폐위시킬 이유는 없다고 감싸주긴 한다. 하지만 어린 연산군이 자신을 볼 때마다 쫄면서 울음을 터뜨리자 죄인의 자식이라고 낙인을 찍어 개망신을 주며, 성종 승하 직후 연산군의 즉위마저도 저지시키려는 모습을 보인다. 오죽하면 연산군을 즉위시킬 바에야 차라리 제안대군을 옹립하겠다고 할 정도.

반면 <인수대비>의 인수대비는 어린 연산을 매우 귀여워하고 어린 연산의 장난을 스스럼없이 받아주며 같이 잠을 자며 보살필 정도로 각별한 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여럿 나온다. 폐비 윤씨를 죽이려고 마음먹었음에도 어린 연산까지 목숨을 잃을 것이 우려되어 못내 망설여 한명회에게 방법을 묻기도 한다. 아마 연산군과 인수대비의 관계에 대한 평가가 왕과 비 방영 당시와 어느 정도 달라진 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다보니 <왕과 비>를 본 시청자 입장에서 <인수대비>를 본다면 가히 충격과 공포를 느낄 정도
40대 이후 세대들은 MBC 대하사극 조선왕조 오백년에서의 고두심장녹수에서 말년의 인수대비를 연기한 반효정이 가장 기억에 남고 연기력이 훌륭했다 평가하는 반면 30대 초반 혹은 이하 세대들은 인수대비 하면 채시라를 주로 떠올리며 그녀의 연기에 대해 호평한다. 참고로 채시라는 같은 작가의 2번 항목의 드라마에 출연함으로써 다시 한 번 인수대비 역할을 맡았다. 이외 한명회(드라마)에서는 김영란이 연기했고,[14] 2017년 드라마 역적 - 백성을 훔친 도적에선 배우 문숙이 연기했다.
왕의 남자에선 노년의 모습으로 잠시 등장한다. 갑자사화 당시, 경극을 공연하는 과정에서 공길이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숨지는 황후, 즉 연산군의 친모인 폐비 윤씨와 매우 비슷한 역을 연기하자, 감정에 북받친 연산군이 분에 못이겨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직접 칼로 살해했으며 인수대비는 그 충격으로 쇼크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4. 관련 항목



[1] 음력 9월 8일. 공교롭게도 음력 9월 8일은 소혜왕후의 시아버지 세조의 기일이다. 이 때문에 소혜왕후가 인수왕비로 책봉된 성종 1년부터, 그녀의 탄신 하례는 이튿날인 9월 9일에 올리게 되었다.[2] 음력 4월 27일.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하는 의식을 치르기로 한 바로 전 날이다. 드라마 왕과 비 등에서 이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3] 훗날 인현왕후도 여기서 승하한다.[4] 추존 의경왕의 비(妃)라는 뜻으로 왕비의 칭호가 수여되었다.[5] 참고로 혜경궁 홍씨의 경우엔 한중록에서도 드러나듯 사도세자가 추숭되지 못해 대비가 되지 못했고, 손자인 순조가 즉위했을 때도 추숭되지 못해 정순왕후 김씨 사후에는 사실상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는데도 공식 지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사도세자가 장종(대한제국장조)으로 추숭된 것은 훗날의 고종 때의 일이다. 이때 혜경궁도 헌경왕후, 효강대비, 헌경의황후로 추숭되었으나 남편이 죽은 지 100년, 홍씨가 죽은 지 50년이나 넘은 까마득한 사후의 일이었다.[6] 4살이던 장남 월산대군, 2살이던 명숙공주, 생후 5개월 갓난아기였던 차남 자을산군(훗날의 성종)[7]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은, 그 당시 조선왕실의 왕위계승법인 유교식 종법에 따르면 본래 의경세자 사후 원손이었던 월산대군이 그 뒤를 잇는 것이 맞다. 하지만 세조는 나이와 경험이 더 많다는 이유로 차남인 해양대군(예종)을 다음 세자로 지목했다. 훗날 인조 치세 때 소현세자 사후 봉림대군이 차기 세자로 지목되었을 때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났으며 이 때문에 효종은 재위 기간동안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평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예송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적장자 상속제가 사대부는 물론 민간 까지 널리 퍼진 조선 후기와 달리 조선 전기때는 이런 종법을 어겼어도 이에 대해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조선 전기 임금들은 문종단종을 제외하고 거의 종법과 거리가 먼 케이스이기도 했다. 나이 순으로 따지면 당연히 해양대군이 월산대군보다 많은 데다가 항렬로 따지면 월산대군의 삼촌이었지만 웃기게도 이 둘은 나이차가 고작 4살밖에 나질 않았고 다음 세자가 결정되었을 때 해양대군은 8살, 월산군은 4살이었다. 어차피 해양대군이나 월산군이나 비슷했다.[8] 왕비의 자리를 곤위라고 한다.[9] 의경세자는 왕세자일 때 사망하였으니 당시에는 왕세자의 예로 장례를 치를 수 밖에 없었으나, 인수대비가 죽었을 때는 이미 의경세자가 왕으로 추존된 이후다. 그러므로 인수대비의 장례를 세자빈의 예로 치른다면 의경세자까지 도로 격하시키는 일이 되며, 그렇게 되면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 대부터 족보가 꼬이게 된다.[10] 배우 견미리의 전 남편이기도 하다.[11] 저 당시에 30대 초반이었다.[12] 사실 저 모습으로 나온 건 그리 오래되진 않는다. 드라마가 세조 때부터 시작해 무려 50년의 세월을 다루는지라, 세조의 며느리 때였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해 중년, 노년까지 다루며, 중반쯤 되면 세조가 승하하는데 이때쯤부터 대부분의 출연분량은 약간의 분장을 한 중년 모습으로 나왔다. 저 사진의 모습은 연산군이 장성을 한 이후인 후반부인데, 워낙 긴 드라마다보니 (186부작) 후반부만 해도 분량이 꽤 되지만 전체 분량에 비하면 적은 편.[13] 하지만 연산군이 작심하여 선비들을 제대로 족쳐내려고 하자 죄 없는 선비들은 함부로 죽이지 말고 더 이상의 사화를 일으키지 말라고 말리기도 한다.[14]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원경왕후, 용의 눈물에서는 신덕왕후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