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시베리아 개입
일본어: シベリア出兵
러시아어: Японское участие в Сибирской интервенции
영어 Japanese intervention of Siberia
1. 개요
일본 제국이 1918년부터 1924년까지 러시아의 영토이던 시베리아 및 극동 지방을 차지하기 위하여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의 편을 들어 개입한 사건이다. 시베리아 출병이라고도 한다.
2. 상세
협상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 제국과 단독으로 강화를 맺으려던 소비에트 러시아를 막기 위하여 파병하였고, 시베리아 영토를 영원히 정복할 목적으로 타 협상국과 달리 일본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전선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약 8만여명의 대규모 병력을 파견할 수 있었다. 일본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목 하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일본군을 진군시켰다. 더 나아가 사할린 북부를 점령하고 만주 횡단철도와 연해주 동해안, 심지어 바이칼 호의 이르쿠츠크 내륙 깊숙히까지 점령했다.
콜차크의 군대가 무너져 서구 협상국은 시베리아에 있을 이유가 없어지자 러시아 내전에서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러나 일본은 협상국이 철수 후 적군이 내전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하지 않았는데 시베리아 점령지에서 전후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후 협상국이었던 미국의 견제와 외교적 압박, 준비되지 않은 시베리아 주둔으로 인한 병력손실과 사기저하, 니콜라옙스크 사건과 같은 파르티잔의 저항으로 인해 1922년 사할린 북부를 제외한 러시아 점령지에서 모든 군대를 철수시켰다. 1925년 사할린 북부[1] 에서도 완전히 철수했다. 70,000여명의 병력을 투입시키고 3,000~5,000여명의 전사자를 냈으니, 결론은 일본 제국의 실패.
3. 영향
일제가 공산사회주의인 적군(볼셰비키)과 싸우는 것을 목격한 많은 연해주의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후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노선을 좇는 경우가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는 볼셰비키가 초기에 영향력 확대를 위해 범세계민족해방을 기치로 세계 각지의 식민지 독립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가 생기는데 계기가 되었는데, 시베리아 출병에 참가한 일본군 상당수가 현지여성을 성폭행하다가 7개 사단 중 1개 사단 인원에 해당하는 수가 성병에 걸려 전투력이 저하되었고,[2] 이 때문에 일본군은 이후 이를 교훈삼아(...) 동남아 등지에서 위안부를 운영하게 되었다.
일제의 시베리아 철군에는 전투/비전투 병력손실, 군의 사기저하, 일본 대중의 전쟁피로와 같은 이유도 있었지만, 일본의 태평양지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던 미국의 외교적 압박과 국제여론도 큰 영향을 끼쳤다. 때문에 일제는 이 시기부터 군부를 중심으로 미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미국도 마찮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