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령 가라후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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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이 북위 50도선 이남의 사할린 섬을 통치하던 시기이다.
2. 역사
사할린 섬은 17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태평양 진출에 성공한 이후 부동항 확보를 위한 전초기지로 이 섬을 노리고 있었다. 한편 일본 제국 또한 에도 막부 이래 홋카이도와 더불어 이 사할린 섬을 인식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러시아와 일본은 각각 섬의 북해안과 남해안에 정착지를 경쟁적으로 건설, 섬의 영유권을 놓고 다투었는데 1855년 맺어진 러일화친조약 이후 사할린은 양국의 공동 관할구역이 되었다. 그 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1] 으로 인해 쿠릴 열도 전도를 일본이 영유하는 대신 사할린은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그 이후 러일전쟁 뒤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 남부는 일본령으로 편입되어 '''가라후토(樺太)'''[2] 라는 이름으로 외지로 편입, 일본인들을 정착시키기 시작했다. 1905년 9월 5일 가라후토 민정서를 설립했고, 1907년 3월 15일 가라후토청으로 개편했다. 조선에서는 '화태도(樺太道)'라 불렸다.
러시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한 뒤 탄생한 소련은 당시 사할린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할린 섬의 석유 개발권을 일본에 양도했다. 일본은 적백내전 당시 러시아령 북사할린(사가렌)을 점령하였으나 결국은 가라후토로 밀려났다. 또 레닌은 사할린 영유를 로마노프 왕조의 제국주의에 의한 불법 점유라고 주장했고, 일본에게 사할린 섬 전체를 반환하려고 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5년까지 일본이 지배하였으며,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쿠릴 열도랑 더불어 사할린 섬 전체가 소련의 영토가 되었고[3] 소련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일본에서 발간되는 지도에서는 북위 50도 이하의 남사할린 지역이 어느 나라의 영토로도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사할린과 쿠릴 열도 귀속 문제를 보류했는데, 그 직후 쿠릴 열도 분쟁이 발생하여 영토 관련 협의가 모두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남사할린이 러시아 영토임을 아직 인정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말이 그렇다 뿐이지, 쿠릴 열도와 달리 일본 정부는 이 지역에 대해서 영유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지 않으며, 한때 자신들의 영토였던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일본 총영사관마저 들어서 있기 때문에[4] 자신들의 영유권을 제쳐두고 러시아의 영유권을 묵인,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에선 예전 자기들 땅이라고 아쉬워하면서 투자를 하고 일본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고자 노력한다.
3. 한국인 강제 이주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은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 이주 당해 사할린으로 끌려왔다. 오늘날 사할린에 한민족 재외동포(사할린 고려인)들이 상당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들은 강제 이주 당한 한국인들의 후손들이다. 2002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러시아인이 주민의 83%를 차지해서 1위인데, 2위는 바로 한인 교포다. 30,000명으로 주민 수의 5.5%를 차지한다.
강제 이주당한 한국인들은 대개 일본에 의해 강제 노동을 했고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의 박해를 받았다. 1990년 초반 사할린 언론은 2차대전 말기에 사할린 목재시설에서 일본인 관련자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도끼로 살해한 일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보도하기도 했다. 한국에선 듣보잡된 일이지만 소련 측은 이를 학살로 규정하여 미처 달아나지 못한 일본인 관련자를 잡아 재판에 세워 총살형까지 시켰다고 한다. 이게 보도되면서 사할린 내 한국계 거주자들이 일본에 대한 시위를 벌이면서 사할린 내 일본 기업에 돌팔매질도 벌어진 바 있다. 그리고 2012년에는 한국 측도 이 학살 관련을 조사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2차대전에서 패전한 후, 일본은 한인 교포들을 버려둔 채 본국으로 무책임하게 철수해 버렸다. 한인 교포의 귀환을 위한 소송이 일본에 대해 제기되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1989년부터 실무자 접촉 등의 가시적 진척이 있었고, 그 후 2000년에 407세대(814명)가 귀국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영구귀국을 희망하는, 미처 귀국하지 못한 사할린 교포들이 있다. 자세한 정보는 사할린 한인 문서 참고.
4. 기타
오늘날 사할린의 철도 남쪽은 이 시기 일본 제국이 깔아놓은 철도를 바탕으로, 약간씩 연장한 것이다. 북쪽 부분은 제정러시아 말기/소련시대 지은 산업철도이다.
특이한 것은 본토의 러시아 철도가 광궤인 것과 달리 이 곳은 일본 철도와 같은 케이프 협궤 철도가 깔려있다. 일본이 이 시기 철도를 갈고 닦아가며 써서 그렇다. 북쪽 부분도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러시아 본토의 광궤가 아닌 700mm/762mm 협궤 경편철도로 부설된 것을 1945년 이후 단일 철도국으로 통합되면서 운영편의를 위해 남사할린와 같은 1067mm 케이프 협궤로 개궤. 이 노선들이 러시아 광궤로 개궤 완료된 것은 2019년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이 시기에는 오도마리역과 홋카이도의 왓카나이역을 잇는 치하쿠 연락선을 통해 일본 홋카이도의 소야 본선 철도와 연계되어 운행했었다가 2차대전 이후 소련이 사할린을 점령하고 일본과 소련은 적국이어서 끊어졌다. 지금은 냉전이 끝나고 일본과 정기여객선이 다시 취항하고 있지만 해운을 이용해 양국의 철도를 연계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고 있다. 소야해협 해저터널 건설계획이 수십년간 꾸준히 제안되고는 있지만 일본 측에 비해 러시아 정부쪽은 미적지근한 반응. 사실상 일본 단독으로 요청하는 제안이고 러시아는 자칫 일본이 대륙을 공략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보고 거부한다. 대신 러시아에서 소베츠카야가반을 연결하는 연락선을 통해 BAM 철도와 연결,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와 만주 및 중국쪽으로 접속시키고 있다.
남사할린이 일본 영토였을 적에 이곳에서 하드로사우루스류 공룡의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학자들은 '일본의 도마뱀'이란 뜻의 니폰노사우루스라는 학명을 명명했다. 물론 지금은 이름만 일본 공룡이지 사실상 러시아 공룡이 된 상태(...).
5. 관련 문서
[1] 일본 측 명칭은 가라후토-치시마 교환조약[2] 아이누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카무이 '''카르 푸트''' 야 모시르(Kamuy kar put ya mosir)에서 따와 음차했다. 신이 강의 하구에 만든 섬이라는 의미.[3] 소련은 홋카이도 또한 반분할 것을 요구했고 더 나아가서 전 홋카이도를 병탄하려 했다.[4] 남사할린이 러시아 영토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총영사관이 있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