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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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전(前) 미국의 야구선수이자 감독. '''그리고 메이저리그의 흑역사.''' 별명은 '''찰리 허슬(Charlie Hustle)'''.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 안타, 최다 출장, 최다 타석, 최다 타수, 최다 아웃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도박에 연루되어 영구제명 되는 바람에 이 기록들은 빛이 바래버렸지만, 일단 그가 현재까지 가지고 있는 최고 기록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안타 수의 경우 2위인 타이 콥은 메이저리그 초창기 인물로 한참 전에 고인이 되었으며, 3,4위인 행크 애런, 스탠 뮤지얼은 각각 3771, 3630안타로 4000안타도 채우지 못했다. 타이 콥과 이 사람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4000안타를 친 스즈키 이치로는 미일통산 기록이라는 걸 감안하면 저 기록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기록인지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사람은 이치로와 달리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내셔널 리그에서만 선수생활을 했다.
여기에 '''월드 시리즈 3회 우승에 3번의 타격왕, MVP 1회, 골드글러브 2회, 신인왕, 17회 올스타 출장 경력, 10번의 200안타 시즌'''[4][5] 까지 보유했다. 말 그대로 안타 만들어내는 기계였으며 모두 로즈가 명예의 전당에 직행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놈의 도박벽 때문에 모든 명예를 시궁창에 내던져버렸다'''.[6] 거기다가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그가 암페타민 복용을 했다는 옛 동료의 말까지 나오며 약쟁이 이미지도 추가되었다. 사실 이 부분은 그 시대에는 암페타민이 금지약물이 아니었던 시절이라 암페타민을 복용하고 뛴 선수들이 꽤 많았고[7] 또 지금도 암페타민은 MLB의 약물 규정에서도 다른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있고[8] 또한 지금도 비교적 간단한 절차만 밟으면 허가를 받아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건 로즈에게는 약간 억울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이미 도박으로 더럽혀진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라...
리드오프치고는 발이 느려서 통산 198도루 149도루자라는 막장스러운 주루플레이 능력을 보여준 덕에 이상적인 리드오프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탄탄한 선구안을 바탕으로 높은 출루율을 기록한 데다 내구성까지 겸비한 덕에 매년 100경기 이상을 출장하며 대단한 활약을 펼쳐 결국 역대 최다 안타라는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
통산 타출장은 .303/.375/.409. [9] 160홈런, 198도루. fWAR 80.1.[10]
2. 유년기
웨스턴 힐스 고등학교에서는 풋볼과 야구를 병행했다. 나이에 비해 작은 체구로 인해 대학 풋볼 팀 진학에 실패하자 그는 1년을 꿇어 몸을 불렸다. 그 이후 아마추어 리그에서 포수, 2루수, 유격수를 병행하면서 .626의 타율을 기록하는 괴물같은 성적을 거두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팀 신시내티 레즈와 7000달러의 계약금을 받는 자유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프로생활을 시작한다.
3. 선수 시절
3.1. 신시내티 레즈 : 빅 레드 머신의 일원
1960년 첫해 마이너리그에서는 그리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지만 이듬해부터는 타격에 눈을 떠 타격왕, 최다 안타, 최다 3루타 등의 기록을 세우면서 자신의 진가를 알린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허슬 플레이를 서슴치 않는 적극적인 플레이를 했다. 뉴욕 양키즈와의 스프링캠프 연습경기에서 그는 볼넷을 얻었는데, 그 때 상대 투수는 화이티 포드. 포드는 볼넷을 얻고서도 전력질주하는 그에게 '''찰리 허슬'''이라는 별명을 붙혔다.
1963년 주전이었던 돈 블레이징게임[11] 의 부상으로 비어있는 2루수의 자리를 꿰찼다. 1963년 4월 13일 그는 피츠버그의 밥 프렌드를 상대로 3루타를 때리면서 통산 첫 안타를 신고했고, 그 기세를 앞세워 .273 .334 .371 6홈런 13도루 41타점 170안타를 기록하면서 신인왕에 오른다.
이후 신시내티에서 13번이나 3할을 기록했으며, 9번이나 200안타를 기록하면서 그의 진가를 알렸다. 1965년에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한 이래로 1966년과 1972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올스타전에 출석할 정도로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12]
데뷔는 2루수로 시작했지만 이후 그는 우익수와 좌익수를 번갈아가며 맡았으며, 75년부터는 3루수로 다시 포지션을 바꾸었다. 그러나 잦은 포지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꾸준했다.
그는 1970년대 최고의 타자였으며, 자니 벤치, 조 모건, 토니 페레즈와 함께 신시내티의 최전성기였던 빅 레드 머신을 이끌던 선봉장이었다. 그는 1975년과 1976년 월드시리즈 2연패에 기여했을 정도로 신시내티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선수였다.
1978년 5월 5일 몬트리올의 스티브 로저스에게서 통산 3000번째 안타를 뽑아냈다. 그리고 6월 14일 컵스전으로 시작하여 7월 31일까지 44경기 연속 안타라는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는 연속 안타기록을 이어가기 위해 필라델피아와의 경기에서는 9회에 기습 번트를 통해 내야 안타를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근성있는 플레이가 부정적인 결과도 상당히 많이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으로 1970년 올스타전에서 AL팀 포수 레이 포세와 홈에서 충돌하여 포세의 오른 어깨에 부상을 안겼다. 이로 인해 포세는 선수 생활 내내 부상을 안고 살았으며 불과 30살의 나이에 은퇴를 해야 했다. 비록 그의 플레이가 야구에서 정당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벤트전에서 과한 승부욕을 보였다는 점에서는 후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3.2.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스티브 칼튼과 마이크 슈미트가 투타를 이끌던 필리스는 1976~1978 시즌 동안 NL 동부의 최강자로 군림했지만 번번히 월드 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 그러한 필리스에게 로즈는 매력적인 선수였다. 결국 필라델피아와 로즈는 4년간 320만 달러라는 당시 최고 금액의 FA 협상에 합의한다. 당시 필리스에는 프랜차이즈 스타 마이크 슈미트가 3루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1루에 자리를 새로 잡게 되었다.
그는 필리스가 바랬던 월드시리즈 우승을 1980년에 선사하는데 일조했으며, 30대 후반의 나이에도 건재한 활약을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82년과 83년에 .271 .245의 저조한 타율로 하락세에 접어들었으며,1983년 후반기에는 아예 대타요원으로 전락하였다. 로즈는 지속적인 출장을 원했지만 구단은 그걸 내키지 않아했고, 결국 구단과의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1983년 10월 방출당했다.
3.3.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방출당한 로즈는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1년계약을 맺었다. 1984년 4월 13일 필라델피아의 제리 쿠스먼에게 통산 4000안타를 뽑아내면서 역대 두번째(2015년 시즌 종료 시점에서 이 기록에 도달한 세번째 타자는 없다. ) 4000안타 타자라는 영예를 안았다.
그가 4000안타를 기록하는데 정확히 22년이 걸렸는데, 그동안 로즈는 연평균 182안타를 기록할 정도로 꾸준했다. 그만큼 '''선수로서의 자기관리'''만은 철저했다.
3.4. 다시 친정으로, 그리고 은퇴
1984년 8월 15일 신시내티의 내야수 톰 로리스와 트레이드되어 다시 신시내티에 돌아온 로즈는 선수 겸 감독의 자리에서 활약했다. 몬트리올 시절에는 이렇다할 성적을 못냈지만 신시내티에서는 .365를 기록했고, 19승 22패라는 신인 감독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시즌을 마감했다.
1985년 9월 11일 샌디에이고의 에릭 쇼에게서 좌전 안타를 뽑아내면서[13] 타이 콥의 최대 안타 개수인 4191안타를 경신하는 4192번째 안타를 뽑아냈다. 그러나 사실 타이 콥의 안타가 2개 중복으로 세어졌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실제로는 9월 8일 컵스전에서의 안타(4190개째)가 콥의 기록을 경신하는 안타로 정정되었다.
1986년 8월 17일 샌디에이고전에서 그는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고, 무안타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타석에 들어서지 않았다. 통산 4256안타의 기록이 멈추는 순간이었다. 공식적으로는 11월 11일 40인 엔트리에서 제외되면서 사실상 은퇴했다. 물론 감독 자리는 계속 유지한 채로.
4. 감독 시절
1984년 선수 겸 감독을 맡을 때부터 1989년까지 426승 388패로 신시내티 감독 통산 다승 5위의 기록을 맡았다. 다만 이 당시 내셔널리그 서부는 토미 라소다의 LA다저스가 호령하던 시기라 NL 서부 2위만 4번했고, 우승에는 실패하면서 가을야구는 하지 못했다.
감독 시절 당시 로즈는 주심과 싸우던 도중 심판 얼굴에 상처를 입혀 30일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사실 성적 자체는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으며, 많은 야구팬들의 관심사는 '''그가 1991년 MLB 명예의 전당에 과연 몇퍼센트의 득표율로 입성하느냐'''였다.
'''그러나...'''
4.1. 영구제명
1989년 2월 커미셔너 '''피터 위버로스가 피트 로즈의 베팅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고, 로즈는 당연히 부인했다. 그러나 후임 커미셔너였던 '''바트 지어마티가 로즈의 베팅을 적발'''했다. 'Sports Illustrated'에서는 로즈의 도박설에 대한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다루었고, 결국 그가 '''1987년 레즈의 52게임에 경기당 수천달러에 달하는 베팅을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1919년 블랙삭스 스캔들보다 더 심각했던 문제였던 것이, 선수들이 조작하는 것보다 '''감독이 승부를 조작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14]
굳이 로즈를 변호하자면 조사 과정에서도 로즈가 레즈가 지는 쪽에 돈을 걸거나 레즈가 시합에서 불리하게 상황을 만든 정황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즉 베팅을 하되 자기 팀이 이길 거라는 쪽에 돈을 걸었다는 이야기. 일부 야구 팬들은 이를 언급하며 로즈의 베팅이 과한 승부욕에 나온 기행이었고 승부조작을 한 것은 아니라며 그를 변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에도 나와있듯 감독이라는 직책은 승부조작을 하기가 선수보다 쉽고, 그렇기 때문에 도박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설령 로즈가 승부조작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금지된 도박을 알고 한 이상 그에 따른 처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1989년 8월 24일, 그는 MLB 야구계에서 '''영구제명'''되었다.[15]
완벽한 증거 앞에 로즈는 무릎 꿇었고 그는 제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감독직을 즉시 사임했고, 도박 중독 치료를 받기에 이른다. 당연히 1991년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도 영구 제명 명단에 올랐고, 현재까지 그가 명예의 전당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은 명단에서 삭제되지 않는 이상 없다.[16]
게다가 그가 자신의 팀을 도박 베팅 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1990년 탈세혐의로 5만달러의 벌금을 냈다.
2015년 6월 ESPN에서 그가 '''선수 시절에도 도박을 했다'''는 증거자료를 제시하였다. 기사
5. 그 뒤
그 이후 번번이 복귀를 꿈꿨으나, 보수적인 미국 야구 사회에 당연히 들어갈 수 없었다. 제명 뒤 10여년이 지난 2004년 자서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승부조작을 공식적으로 시인했다. 그는 "비록 맨날 내가 도박하긴 했지만 내 팀이 진다고 도박은 안했어요. 저는 제 팀을 믿었거든요 ㅠㅠ"로 지속적인 언플을 통해 명예를 복권하고자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나... 전혀 통하지 않고 있다. '''승부조작, 거짓말, 탈세의 쓰리런을 친 순간 그의 이미지는 오늘날 논란시되고 있는 로켓의 약물복용-위증-사생활 문제의 쓰리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추락했고, 팬들도 더 이상 그에게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그래도 그의 위상이 워낙 대단해서 도박 추문 이후로도 신시내티에서 그의 등번호 14번은 비공식 영구결번 상태였으며, 2016년에는 공식적으로 영구결번 처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레즈가 로즈에게 행하는 대우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한 예로 2003년 그레이트 아메리칸 파크 개장 경기 때 레즈 프런트는 빅 레드 머신 레전드들을 초청해 성대하게 새 구장 개장행사를 펼쳤지만 로즈한테는 그 흔한 초청장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피트 로즈는 역시 야구선수 출신인 그의 아들[17] 과 함께 자비로 티켓을 사서 그 장면을 구경했다고 한다. 하기사 초청장을 보냈다가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으니 구단 입장도 이해가 되지 않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2010년 9월 12일 최다안타를 기념하여 구장에 초대하여 같이 활동한 빅 레드 머신의 레전드들에게 환영을 받기도 했다.
야구 외에는 WWE에 가끔씩 출연한다. WWF 레슬매니아 14에서는 케인[18] 에게 '''툼스톤 파일드라이버'''를 맞으며 장렬히 떡실신했고, 이듬해 WWF 레슬매니아 15에서는 복수하겠다고 샌디에이고 치킨 복장을 하면서 나왔지만 또 '''툼스톤 맞고 떡실신'''. 그리고 다음 WWF 레슬매니아 16에서 다시 등장했다가 이번엔 초크슬램, 그리고 리키쉬에게 '''스팅크 페이스'''까지 맞고 3년 연속 떡실신했다. WWF 노 머시(2000) PPV 광고때는 과자달라는 애들을 피트가 쫒아냈는데 그 다음 초인종이 울리자 또 과자달라는 애들인줄 알고 "꺼져! 꼬맹이들!" 하고 화내며 문을 열였는데 거기에 있는건 바로 케인! "안녕, 피트" 하고 인사말을 건네는 케인에게 목을 잡히고 이윽고 들리는 피트의 절규로 광고는 끝난다. 광고 끝에 나오는 문구인 할로윈이라고 '''함부로 문을 열어주면 안됩니다'''는 그야말로 금언이 아닐수가 없다. 이 뒤에도 계속 WWE에 등장하는데 심심하면 케인에게 관광당한다. 뭐 빅 레드 머신이라는 기믹을 가진 두 선수니까 그렇다 치지만...그래도 WWE가 피트 로즈의 이 기믹을 (상업적으로) 쏠쏠히 잘 써먹은 덕택에 2004년 WWE 명예의 전당에 그를 헌액시키기도 했다. 당연히 그동네에서도 뜬금없는일이기에 야유를받았다.
2014년 2월 10일에는 '''"금지약물이 도박보다 나쁘다"'''는 말을 했다. 한국내 반응은 "당신이 할 말은 아닐텐데?"로 통일되었다.
한때 전설로 남을 수 있었던 선수가 이렇게 비참하게 추락한 걸 보면, 그만큼 사생활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하겠다.
2016년 1월 20일, 신시내티 레즈 구단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선수와 감독 시절 도박도 문제가 크지만 여전히 도박에 빠져 살기 때문에 복권이 힘들다는 커미너셔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신시내티 레즈 구단 측에서도 조심스러웠으나, 팬들의 지지로 [19] '프랜차이즈 포'[20] 에 뽑히는 등 지역 여론의 영향으로 이번 결정을 내리게 된 것으로 명예의 전당 주간인 6월 말에 이름을 올릴 것이고 구장 앞에 그의 기념 동상이 설치되었다.
2016년 지금은 스즈키 이치로가 새로운 안타 기록을 작성할 때마다 인터뷰를 하여 야구 관련 기사에 가끔씩 등장하고 있다. 물론 한국 반응은 로 통일되고 있다.
2017년 7월 31일, 자신이 선수시절에 겪은 미성년자와의 섹스 스캔들이 터졌고, 여기에 관련된 여성이 단순한 성관계가 아닌 강간이었다고 증언하면서 명예는 더더욱 추해지고 있다. 당연히 연초부터 두고두고 욕 먹었던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티즌스 뱅크 파크 명예의 벽 헌액식은 나가리(...). 이 기사 참조.
사족이지만 대다수 백인 야구선수들이 그렇듯이[21] 열성 공화당 지지자다. 도널드 트럼프에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 주셈" 이라면서 싸인볼을 건네기도 했다.
2017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한 휴스턴이 사인 훔치기 스캔들을 했다고 확정되자 자신은 내가 이기는 쪽에만 돈을 걸었지 사인 훔치기는 안 했다며 복권 시켜달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팬들의 입장은 개같은 소리 하지 말라며.. 나쁜 짓을 한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영구 제명을 당할 죄는 맞다.[22]
6. 둘러보기
[1] 우익수[2] 사실 타석과 타수는 그가 리드오프였다는 걸 감안했을 때 애런이나 야즈보다 약간 우위에 설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폄하될 수는 없다.[3] 다만 피트 로즈가 기록 말살형에 처해진 것은 아니다. MLB 공식 홈페이지를 참조. 물론 상술하였듯 말살되지 않았다고 하여, '''어떤 유의미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4] 더 놀라운 것은 좌익수, 우익수, 1루수, 2루수, 3루수로 모두 출장한 경력이 있다는 것이다![5] 10번의 200안타 시즌은 2001~2010 10년 연속으로 달성한 스즈키 이치로와 타이.[6] 금지약물 복용을 한 선수들의 기록도 야구팬 사이에서는 신뢰성이 떨어지는 쓰레기 기록 취급을 하긴 하지만, 영구제명은 되지 않았으므로, 피트 로즈보다는 사정이 다소 나은 편이다. [7] 마이크 슈미트, 행크 애런 등이 대표적.[8] 경기력 향상 약물(PED) 카테고리엔 스테로이드 계통만 포함되고, 암페타민 등의 약물은 각성제(Stimulants)로 따로 분류된다.[9] 뭔가 역대 최고의 안타기계에 어울리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로즈가 24시즌을 뛴 걸 기억해야 한다. 말년에 많이 깎아먹어서 저 수치.[10] 통산 WAR 80은 매우 높은 수치지만 역시 역대 최고의 안타기계에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데, 수비에서 엄청나게 깎아먹은데다 리드오프답지않게 주루에서도 깎아먹었다..[11] 아시아 야구 팬들에게는 '돈 블레이저'라는 별명이 더 잘 알려졌을 것이다. 나중에 일본에서 그 별명을 등록명으로 난카이 호크스에서 1967~1969시즌까지 뛰었고, 이후 난카이에서 코치를 지낸 것을 시작으로 1979~80년 한신 타이거즈, 81~82년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을 맡는 등 동양 야구에서 오래 지도자 생활을 했다. 노무라 카츠야, 히로오카 타츠로 등에게 당시의 메이저리그식 훈련이나 작전 등 '선진 야구' 문물을 전수해주었다고.[12] 1973년부터 1982년까지 10년 연속 올스타전 출전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13] 여담으로 당시 파드리스 포수는 現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감독인 브루스 보치였다.[14] 일단 선수들이 승부조작을 하려고 해도 그러기 위해선 기본적인 실력도 탄탄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운까지 따라줘야 한다. 그러나 감독은 선수단을 자유롭게 구성,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니(대신 그에 맞먹는 성적을 내야 할 책임도 있지만) 그에 따라 승부조작을 하는 것도 더 쉽다. '''만약 감독이 실력 좋은 선수들은 전부 백업으로만 쓰거나, 아예 써먹질 않거나 그냥 마이너리그(KBO, NPB의 경우는 2군)에 강등시켜버리고 실력 나쁜 선수들을 성적이 엉망이어도 무조건 주전으로 쓴다면?'''[15] 그리고 커미셔너 바트 지어마티는 로즈의 영구제명 처분이 내려진 후 열흘도 채 안 지난 그해 9월 1일 급작스럽게 심장마비로 타계했다.[16] 우선 기자단 투표에 의한 기간은 2006년을 끝으로 15년이 지났으므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베테랑 투표밖에 없는데...이미지가 이미지라 거의 불가능하다.[17] 피트 로즈 주니어. 1988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에 지명되었으나 마이너를 전전하다 1997년 신시내티 레즈에서 11경기 16타석에 들어선게 메이저 경력의 전부이다. 이후에도 레즈 산하 마이너구단서 뛰다 2002년에야 방출. 그러나 이후에도 끈질기게 타 마이너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2009년후 은퇴. 2006년엔 약물빨다 걸려 출장정지까지 먹은 바 있다. [18] 참고로 케인의 별명인 빅 레드 머신은 바로 신시내티 레즈의 별명에서 온 것이다.[19] 그래도 현역시절부터 은퇴 이후에도 팬서비스는 대단히 좋았다.[20] [image]
좌측부터 피트 로즈, 배리 라킨, 조 모건, 조니 벤치.[21] 가장 좋은 예 둘을 들자면 토니 라 루사는 대표적인 보수단체인 티 파티의 회원이고, 커트 실링 같은 경우는 굳이 더 말 할 필요가 없다.[22] 그치만 놀랍게도 영구제명까지 당할 죄인가 의구심을 가지는 한때 다저스 팬들이었지만 현재 토론토 팬들이 네이버 야구 댓글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다. 왜냐면 사인 훔치기로 인한 피해자가 '''류현진이 당시 속했던 다저스니까.''' 만약 이렇게 된다면 무임승차이긴 하지만 우승반지는 받는 것이 맞다. 우승반지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MLB에서는 엔트리에 없었던 선수들도 반지를 준다.
좌측부터 피트 로즈, 배리 라킨, 조 모건, 조니 벤치.[21] 가장 좋은 예 둘을 들자면 토니 라 루사는 대표적인 보수단체인 티 파티의 회원이고, 커트 실링 같은 경우는 굳이 더 말 할 필요가 없다.[22] 그치만 놀랍게도 영구제명까지 당할 죄인가 의구심을 가지는 한때 다저스 팬들이었지만 현재 토론토 팬들이 네이버 야구 댓글을 중심으로 존재하고 있다. 왜냐면 사인 훔치기로 인한 피해자가 '''류현진이 당시 속했던 다저스니까.''' 만약 이렇게 된다면 무임승차이긴 하지만 우승반지는 받는 것이 맞다. 우승반지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MLB에서는 엔트리에 없었던 선수들도 반지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