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드 발자크

 


'''오노레 드발자크'''[1]
'''Honoré de Balzac'''
[image]
'''국적'''
프랑스
'''직업'''
소설가, 극작가
'''출생'''
1799년 5월 20일
프랑스 제1공화국 투르(Tours)
'''사망'''
1850년 8월 18일 (향년 51세)
프랑스 제2공화국 파리(Paris)
'''배우자'''
한스카 부인
(Ewelina Hańska)[2]
'''대표작'''
'''고리오 영감 『Le Père Goriot』'''(1834~35)
'''마법의 가죽 『La Peau de chagrin』'''(1831)[3]
'''사촌베트 『La Cousine Bette』'''(1846)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우리가 상대방의 등 뒤에서 쑥덕대는 말을 그의 면전에 대고 직접 한다면 이 사회는 도저히 유지되질 못할 것이다.'''

- ''오노레 드발자크''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이다. 이름 'Honoré'[4]는 마지막 음절에 강세가 있으므로 '오노레'라고 읽어야 하며, 이름에 붙는 de는 자신이 귀족처럼 보이기 위한 자칭으로 원래는 평민 출신이며 본명은 오노레 발자크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의 프랑스인들의 삶을 다룬 인간희극(Human Comedy, '인간극'이라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로 유명한데, 이는 무려 137편에 달하는 다른 작품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놓은 것이다. 이 덕분에 한 번 나왔던 캐릭터가 다른 작품에도 나오는 등 대하작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고, 즉 연쇄사슬처럼 계속 연결되어 다르게 등장하며, 그의 전체 작품 속의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다른 세계인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
유명한 작품으로 고리오 영감이 있는데, 이 작품은 인간희극의 일부이기도 하다.

2. 생애


1799년 5월 20일(프랑스 제1공화국 시절) 프랑스의 투르(Tours) 지방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베르나르 프랑수아(1746년 ~ 1829년)는 나폴레옹 제정 시대의 투르 주둔군 병참 담당 군속이었고 모친 안 샤를로트 로르 살랑비에(1778년 ~ 1854년)는 파리 상인의 딸이었다. 부모의 나이차는 32살이나 되었다. 본디 그가 태어나기 전 형(兄)인 루이 다니엘이 먼저 태어났으나 곧 사망했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다른 아버지에게서 난 동생 앙리를 편애하여 크게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발자크는 유모에 의해 양육되었다.
1807년에 방돔(Vendôme)의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6년간 수학하였는데 교육 방식이 엄격하였다고 한다. 건강이 나빠져 집으로 돌아온뒤 1년간 요양하였다. 이후 1814년 9월에 투르 중등학교에 두 달간 통학하다가 아버지가 파리의 군수품 조달 회사 책임자로 임명되어 일가가 파리로 정착. 발자크는 파리에서 중등교육을 마친다.
1816년에 소르본 법과대학에 입학하였고 1819년 1월에 법과 대학을 졸업한다. 부모는 그가 공증인이 되기를 바랐으나 발자크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부모에게 작가의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2년간의 유예기간을 얻어 파리의 비루한 쪽방에서 작품 저술에 몰두한다. 그러다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생애에 대한 희곡 크롬웰(Cromwell)을 야심차게 저술하였는데 반응은 굉장히 나빴다. 한 대학 교수는 이것을 읽고 발자크의 모친에게 '''"아드님이 문학계에 발을 들이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데뷔작이 실패하고 결국 부모가 재정 지원도 중단하여 발자크는 본가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나폴레옹 동상에 이런 낙서를 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이룰 것이다!

1822년부터는 가명을 쓰면서 상업소설, 통속 소설이라고 할 만한 분야에 손을 대어 여러 편의 작품을 썼다. 이때 부터는 로르 드 베드니 부인과 교제하며 조력을 받는다. 아울러 그의 육체적 경험의 첫 번째 상대이다. 그녀는 발자크보다 22살이나 많았고 모친과 이름이 같았다. 1836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이 관계는 계속된다. 1825년부터는 다브랑테스 공작 부인과 사귀기 시작하는데 발자크의 인생을 보면 이렇게 문학적 조언자, 물질적 후원자를 해주는 여인이 항상 곁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후 인쇄업과 출판업에 손을 대지만 전부 실패하고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럼에도 쉼없이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매일 집에 틀어박혀 수도복처럼 긴 옷을 입고 하루에 50잔 가량의 커피를 마시며 15시간씩 글을 썼다고 하며 그 빚 덕에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면 그대로 도망치곤 했다고 한다. 발자크는 20년동안 97권이라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1830년에 마법의 가죽(La Peau de chagrin)[5]을 발표하여 이때부터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1832년부터는 훗날 결혼하는 한스카 부인과 교제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1833년에 시골 의사(Le Médecin de campagne) 외제니 그랑데(Eugénie Grandet) 등을 발표. 여담으로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이 외제니 그랑제를 읽고 영감을 받아 저명한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쓰기도 했다. 1835년엔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 서른 살 여인(La Femme de trente ans)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체계속에 집대성하려는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1846년엔 한스카 부인이 임신하지만 사산하고 만다. 그리고 이 해에 인간극을 출간한다.
1850년이 3월에야 한스카 부인과 결혼을 한다. 그것도 그나마 그가 병약해진 모습을 보고 한스카 부인이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5월에 파리로 돌아와 살림을 차리지만 이미 발자크는 와병중이었다.
1850년 8월 18일 몇일을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있던 그는 51세의 나이로 영면하고 만다. 같은 시대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그의 죽음에 대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그가 동의했건 동의하지 않았건 인간극이라는 이 방대하고 비범한 작품의 저자는 혁명적인 작가들의 강렬한 혈족에 속합니다"라는 조사(弔辭)를 남겼다.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 전체를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 삼고자 했고 철학적 사변이 두드러지는 풍자적이며 사실주의적인 그의 저서들은 오늘날 그를 대문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3. 여담


다소 게걸스럽다 할 식탐이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을 엄청나게 좋아해서 하루에 백 마리씩 먹어치웠다고 한다. 또한 도박광이어서 "도박은 병보다 치명적인 열정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게다가 발자크는 생계는 물론, 빚을 갚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6] 잠에 들지 않게끔 커피, 그것도 독한 터키쉬 커피를 하루에 대략 30 잔 ~ 60 잔 정도 마시며 하루 15시간씩 글을 썼다고 한다.[7] 평생 동안 그가 마신 커피의 추정량은 약 '''3~5만 잔'''
이 시절에는 글자 수 대로 원고비를 지급했기에 이렇게 마구 글을 쓴 노력 끝에 빚은 모두 갚았지만 결혼한 지 5달만에 사망했는데 연구에 따르면 커피를 하루에 규칙적으로 이 정도 양을 마시면 카페인 중독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 발자크의 유력한 사망원인으로 카페인 중독이 꼽힌다.
유언으로 '''"비앙숑을 불러줘! 그만이 나를 치료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비앙숑은 그의 작품 고리오 영감에 등장하는 인물로, 직업은 의대 수련생이다.
파리 8구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발자크 로(Rue Balzac)'가 있다. 샹젤리제 거리 124 - 포부르 생 토노레 로(rue du Faubourg-Saint-Honoré) 193을 잇는다.
초등학교 중퇴생인 에디슨과 더불어 정규 교육에서는 부진했던 '꼴찌 천재'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기숙학교 시절 고압적인 교육 방식을 따라가지 못해 주로 도서관에서 독서를 했다고 한다. 강압적인 교육방식이 오히려 그의 재능을 사장시킬 뻔했다. 그나마 독서라도 하지 않았으면 발자크는 사회에서 완전히 낙오되었을 것이다.
[1] 영어를 제외한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1805~1882. 한스카 부인은 발자크가 죽은 후 홀로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3] 일명 나귀 가죽[4] '존경받는', '유명한'라는 뜻의 라틴어 이름 '호노라투스(Honoratus)'의 프랑스어 베리에이션이다.[5] 우리나라에서는 나귀 가죽으로 번역되기도 했다.[6] 발자크는 도박 외에도 인쇄소 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댔다가 대부분 파산했다.[7] 하루의 태반을 자신만의 블렌딩을 만드는 데 소비했다고 전하는데, 발자크의 블렌딩은 레시피는 남아있지만 그가 사용했던 원두들이 지금은 멸종되어 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