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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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부인인 루이나이웨이 九단.
중국의 바둑기사. 2015년 기준으로 九단이다.
1968년 6세 때 바둑에 입문하여 1976년 중국에서 프로에 입단하였다. 1982년 五단이 되면서 루이나이웨이와 사귀기 시작하였다.
1987년 九단으로 승단 후 1989년 천안문 사건 때 기수에 서서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시위에 참가했다. 이에 따라 장주주 九단에 체포령과 현상수배령이 떨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장주주 九단은 당시 영국령이던 홍콩을 통해 중국을 탈출, 중국 공안의 감시망을 피해 대만, 일본, 미국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1] 홍콩으로 넘어간 건 1989년 9월 경이었는데, 이 때 중국 공안의 첩자한테 잡힐 뻔했다. 다행히도 대만 쪽의 지인이 있어서 잡히지 않고 대만으로 가서 이후 일본으로 입국하는 게 1990년이다.
1993년에는 중국을 떠나 해외 생활을 하던 연인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도피생활을 끝내기 위해 일본기원에 망명을 신청했지만 일본 여성기사들의 반대로 인해 루이나이웨이 九단의 일본기원 합류가 거부되어 난처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 상황에서 차민수 四단과 조훈현 九단을 만나 상의하고 대한민국에 망명을 할 수 있는가를 타진하였다. 한국기원에서는 OK. 이래서 두 사람은 1999년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대한민국에 망명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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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의 재미있는 기록으로, 2003년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이 있다. 이 기록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 대회 준우승자가 부인인 루이나이웨이 九단이었기 때문. 세계 바둑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부부 결승전이다.
망명생활 기간동안 중국에서는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중국 개최의 바둑대회에 참석하게 되면, 그 기간동안만 수배령을 면해주기로 하였다.[2] 그러나 장주주 九단은 중국 공산당을 신뢰하지 못하여 중국 대회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주로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참석을 하게 된다.
그렇게 망명생활 하기를 12년...
망명 생활중에서도 부인인 루이나이웨이는 중국 국가대표가 되어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비록 한국에게 져서 은메달을 획득하는데 만족해야 했지만,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고려되었는지, 2011년 중국 공산당에서 당 회의를 하여 후진타오 주석 명의로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에 걸린 수배령을 풀어주고 특별사면을 행하였다.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22년 만의 일이었다.
특별사면이 행해지자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장주주 九단, 한국기원,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중국 외교부 등이 상의를 하여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의 안전보장을 약속받은 뒤 중국 귀국을 허용하게 된다.
일단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먼저 상하이로 돌아가서 안전을 확인한 뒤[3] 인 2012년 연말, 장주주 九단 역시 한국기원 객원기사직을 사퇴하고 중국에 귀국을 하게 된다.
중국에 귀국하고 나서는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바둑학원을 열어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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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부인인 루이나이웨이 九단.
1. 개요
중국의 바둑기사. 2015년 기준으로 九단이다.
2. 상세
2.1. 초창기 생애
1968년 6세 때 바둑에 입문하여 1976년 중국에서 프로에 입단하였다. 1982년 五단이 되면서 루이나이웨이와 사귀기 시작하였다.
2.2. 천안문 사건과 도피생활
1987년 九단으로 승단 후 1989년 천안문 사건 때 기수에 서서 중국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시위에 참가했다. 이에 따라 장주주 九단에 체포령과 현상수배령이 떨어지게 된다. 이에 따라 장주주 九단은 당시 영국령이던 홍콩을 통해 중국을 탈출, 중국 공안의 감시망을 피해 대만, 일본, 미국 등 여러 곳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하게 된다.[1] 홍콩으로 넘어간 건 1989년 9월 경이었는데, 이 때 중국 공안의 첩자한테 잡힐 뻔했다. 다행히도 대만 쪽의 지인이 있어서 잡히지 않고 대만으로 가서 이후 일본으로 입국하는 게 1990년이다.
1993년에는 중국을 떠나 해외 생활을 하던 연인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렀다.
2.3. 대한민국으로 망명
도피생활을 끝내기 위해 일본기원에 망명을 신청했지만 일본 여성기사들의 반대로 인해 루이나이웨이 九단의 일본기원 합류가 거부되어 난처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그 상황에서 차민수 四단과 조훈현 九단을 만나 상의하고 대한민국에 망명을 할 수 있는가를 타진하였다. 한국기원에서는 OK. 이래서 두 사람은 1999년 한국기원 객원기사로 대한민국에 망명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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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절의 재미있는 기록으로, 2003년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이 있다. 이 기록이 재미있는 이유는, 이 대회 준우승자가 부인인 루이나이웨이 九단이었기 때문. 세계 바둑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부부 결승전이다.
망명생활 기간동안 중국에서는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중국 개최의 바둑대회에 참석하게 되면, 그 기간동안만 수배령을 면해주기로 하였다.[2] 그러나 장주주 九단은 중국 공산당을 신뢰하지 못하여 중국 대회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고, 주로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참석을 하게 된다.
그렇게 망명생활 하기를 12년...
2.4. 특별사면과 중국 귀국
망명 생활중에서도 부인인 루이나이웨이는 중국 국가대표가 되어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비록 한국에게 져서 은메달을 획득하는데 만족해야 했지만,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 고려되었는지, 2011년 중국 공산당에서 당 회의를 하여 후진타오 주석 명의로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에 걸린 수배령을 풀어주고 특별사면을 행하였다. 19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22년 만의 일이었다.
특별사면이 행해지자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장주주 九단, 한국기원, 대한민국 외교통상부, 중국 외교부 등이 상의를 하여 장주주 九단과 루이나이웨이 九단의 안전보장을 약속받은 뒤 중국 귀국을 허용하게 된다.
일단 루이나이웨이 九단이 먼저 상하이로 돌아가서 안전을 확인한 뒤[3] 인 2012년 연말, 장주주 九단 역시 한국기원 객원기사직을 사퇴하고 중국에 귀국을 하게 된다.
2.5. 중국 귀국 이후
중국에 귀국하고 나서는 루이나이웨이 九단과 바둑학원을 열어서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1] 장주주 九단은 현재 천안문 사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자서전에도 알던 여성이 초청해 미국으로 간 것이라고 적었다. 중국으로 돌아간 장주주가 신변 안전을 우려해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 재미있는 것은 대만에서도 이것과 비슷한 조치가 있다. 유명 삼합회 조직의 보스가 죽으면, 그 장례식 기간동안만 삼합회 조직이 공개 행동을 하는 것을 단속하지 않기로 하는 등의 조치이다.[3] 장주주 九단은 이 때 대한민국과 중국을 오가며 관련 행정 절차를 밟았다. 정치범 지위에서 특별사면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행정처리할 것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