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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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대한민국 정보기관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1] 재임한 기관장으로 '남산 멧돼지', '날으는 돈까스', '공포의 삼겹살' 등의 별명으로도 유명하다.[2][3]
박정희의 장기 집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 공작을 벌였지만 후에 버림받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신세가 된다. 이후 미국에서 박정희의 어두운 면을 까발리는 회고록을 집필하고 미 의회 청문회에 나가서 박정희에 불리한 증언을 하는 등 반정부 활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후 1979년 프랑스 파리에 갔다가 실종되었는데 생사불명으로 처리되었다가 1991년 법원의 실종 선고를 받아 법적으로 사망 처리되었다.
2. 생애
1925년 황해도 신천군에서 태어났으며 국민학교 졸업이었으나 광복 이후 혼란기인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하여 1949년 졸업하였다. 사실 이 기수는 한국전쟁 당시 초급 장교였기 때문에[4] 대다수가 전사했지만 김형욱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뚜렷한 전공보다는 1951년 이후 동부 전선(강원도)에서 활약했다는데 주목할 정도. 이러한 경험 때문에 회고록에서 '나는 박정희보다 애국자이다'를 강조했다.[5]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에는 중령으로 쿠데타에 참가하였으며 36세의 나이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이 된다. 당시에도 김형욱은 단순 무식한 이미지로 정평이 나있었다고 하는데 5.16 군사정변을 준비하면서 육군사관학교 8기와 9기가 서로 명단을 교환할 때 9기 쪽에서 김형욱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저런 쓸모없는 돌대가리를 왜 포함시켰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1963년 7월 김재춘의 뒤를 이어 제4대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했다. 애초 김재춘이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내놓자 박정희는 장경순을 후임으로 고려했지만 김형욱의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이 김형욱을 추천하여 생각을 바꿨다고 한다.[6][7] 1963년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생긴지 얼마 안되어 조직이 덜 갖춰졌고 김종필, 김용순, 김재춘은 재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조직에 그다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김형욱은 다다음 후임자 이후락과 더불어 온갖 악습을 중앙정보부(이후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까지)에 심은 사람이다. 그는 박정희 휘하에서 정치 공작을 도맡았으며 박정희한테 토사구팽 당했다는 것 때문에 동정표를 사기도 하지만 김형욱은 결코 선량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가 재직하던 시절에 인민혁명당 사건,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유럽 간첩단 사건, 국제적으로 큰 물의를 빚은 동백림 사건과 박정희가 3선 개헌 반대파들을 숙청할 목적으로 일으킨 국민복지회[8] 사건#도 그의 작품이다. 1969년에는 3선 개헌에 반대하는 여당 국회의원 김용태 등을 강압적으로 끌어들여서 3선 개헌에도 일조했으며 이때 박정희의 정적인 김영삼을 암살하기 위한 일명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도 김형욱이 지시한 일이라는 견해가 유력하고 3선 개헌에 찬성하되 선행 조건으로 자신과 이후락의 경질을 요구한 이만섭도 테러하려 들었다. 중앙정보부가 무서운 조직으로 찍힐 때는 이 사람이 한 몫 했는데 오죽했으면 나중에 김계원이 중앙정보부장을 맡을 때 박정희가 "김형욱이처럼 팰 필요는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의 조사 과정에서 관련자 김중태와 나눈 이야기가 참으로 가관이다. 이 말에 빡친 김형욱은 옆의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뜯어말릴 정도로 김중태를 심하게 두들겨 패버렸다고 한다.
한편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에 대한 회유 공작을 벌일 때 개헌에 강경하게 반대하던 여당 소속 양순직, 예춘호 등의 인물들은 설득해도 안될 것 같자 김형욱은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암말 않을테니 사람 모아서 반대 운동하는 것만 삼가주시오"라며 고분고분히 넘긴 반면[9]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던 국회의원들은 금전이나 여자 문제 등 치부를 무기로 개헌 반대하면 사회적으로 묻어버리겠다며 강하게 협박하여 굴복시켰다고 한다.[10] 한마디로 강자에게는 깨갱하면서 약자들만 들볶은 비열한 캐릭터였던 셈이다.
그렇게 충성을 바쳤으나 1969년 3선 개헌이 성공하자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버림을 받게 되었다.[11] 자신의 인척(조카사위)이자 제1의 책사였던 김종필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알다시피 김형욱은 이후락, 박종규처럼 부정부패로 엄청난 재산을 모으며 나중에 망명 생활시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12] 이후 김형욱은 1971년 쥐약 격인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거치기도 했으나 1972년 10월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되는 동시에 국회의원직 마저 잃어버렸으며 유신정우회 소속 국회의원 명단에도 들지 못했다. 그는 이미 권력에서 밀린지 오래였고 중앙정보부장일 때 전횡이 워낙 심했던지라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으며 민주공화당 실세인 김성곤, 길재호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적으로 뒀다. 생전에 김형욱은 보복을 많이 두려워했는데 당시 일기장에 "대통령이 난데없이 날더러 쉬라고 했다. 지난 6년간 악역을 다 도맡아 했는데 미칠 것만 같다."고 적었다.경질 직후부터 김형욱에 대한 온갖 협박과 저주의 전화가 들끓기 시작했다.
1973년 4월 먼저 대만으로 출국했고 대만에서 귀국하지 않고 바로 미국으로 갔다. 김형욱의 존재가 부각된 것은 1976년 10월 24일 워싱턴 포스트가 대한민국 정부가 로비스트 박동선을 통해 미국 관리들에게 수백만 달러를 뇌물로 제공했다고 폭로하면서부터였다. 이것이 이른바 '코리아게이트 사건'인데 사건이 시작된 직후인 1976년 11월 말 대외적으로는 주미한국대사관의 참사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앙정보부의 미국 활동 조직 부책임자였던 김상근이라는 사람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상근은 과거 김형욱의 비서였으며 망명 과정에서도 김형욱의 도움을 받았다. 박정희 밑에서 가장 좋은 관운을 자랑했다던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김상근의 망명으로 1976년 12월 4일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신직수의 후임이 바로 김재규였는데 김재규의 1번째 임무는 김형욱을 귀국시키는 일이었으며 1977년 1월 17일자로 김재규는 김형욱에게 정중히 예를 갖춘 편지를 보내 귀국을 종용했다. 박정희 정권의 김형욱 귀국 공작은 1977년 6월 6일과 7일 이틀에 걸쳐 뉴욕 타임스가 김형욱과의 독점 인터뷰 내용을 대서 특필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기자회견에서 김형욱은 박동선을 활용한 공작에 대해 자세히 폭로하고 박정희는 하야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그는 미국의 재미교포 언론인 줄리 문(문명자)와 손잡고[13] 1977년 6월 22일 미국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14] 에 출석하여 유신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하였다. 김형욱은 청문회에서 "박정희씨 개인에게 설사 인간적인 배신자가 되는 것을 감수한다 하더라도 국민과 역사 앞에 배신자가 될 수는 없다고 믿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5]
김형욱의 증언은 국내외적으로 대서특필되었으나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다. 증언을 마친 김형욱이 1977년 6월 말에 착수하여 실종되기 직전인 1979년 9월 말 완성할 때까지 몰두한 것은 회고록의 작성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훗날 알려진 이른바 '김형욱 회고록(부제: 혁명과 우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회고록에 더 주목했고 당시 청문회에서 프레이저 하원의원은 김형욱 자신이 아는 사실을 충분히 진술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김형욱이 미국으로 빼돌린 2천만 달러 이상의 막대한 재산 문제를 치고 들어갔다. 1977년 7월 11일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2차 증언을 마친 김형욱은 7월 15일 '국민과 역사 앞에 참회합니다'라는 제목의 특별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박정희씨를 인간적으로 비하시키는 개인적인 부덕을 강력 자제해 왔다"면서 오랜 기간 정보 기관의 책임자였던 자신은 "박정희씨에 대하여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형욱은 "박정희씨가 유치한 방법으로 나를 계속 중상모략한다면 이를 천하에 폭로할 작정"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 즈음 김형욱은 당시 유학생이었던 김경재[16] 와 함께 김형욱 회고록을 펴내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으며 김형욱 회고록의 존재를 알게 된 박정희는 회고록의 원고를 넘기는 조건으로 김형욱과 흥정을 벌이기도 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해외 담당 차장으로 있던 윤일균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미국에 가서 김형욱을 설득하라고 지시하는데 윤일균이 "준비되는대로 가겠다"고 하자 박정희는 당장 가라며 서둘렀다고 한다. 미국으로 달려간 윤일균은 권총을 탁자에 꺼내놓는 김형욱을 상대로 사흘 밤낮을 설득하여 복사지 2천장 분량의 방대한 회고록 원고를 건네받는데 성공했으며 대가로 50만 달러를 제공하고 김형욱의 여권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약속한다.[17] 그러나 이때 김형욱은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었는데 원고의 일부가 김형욱에 의해 일본으로 빼돌려졌고 이는 일본의 '창'이라는 작은 출판사에서 '축약 평론판'으로 1980년대에 출판되기도 했으며[18] 한국에서는 당연히 금서였다. 지금은 정식으로 출판됐으니 봐도 된다.
3. 실종
어쨌든 당시 여러 인사들에 의해 각종 회유와 귀국 종용을 받은 김형욱은 앞서 언급된 중앙정보부 해외담당차장 윤일균[19] 으로부터 원고료로 거액을 준다는 말을 듣고서 그와 만나 돈과 원고를 교환했고, 이후 프랑스 파리로 가라는 말을 들었다.[20] 그리고 1979년 10월 1일 김형욱은 파리에 도착했고 호텔에서 며칠간 머무르다 10월 8일 '''그 곳에서 행방불명됐다.'''
그의 실종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현재까지 아무것도 확증된 바 없다. 납치되어 곧바로 살해당했다는 것이 정설이긴 하지만, 누가, 어디서, 어떻게 죽였냐를 놓고는 주장이 분분하다. 근현대사의 대표적인 미스테리중 하나로 방송에서도 여러번 다루어졌다.
3.1. 국정원의 조사 결과
2005년 5월 26일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는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지시로 권총으로 암살'''당했다는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참고로 진실위의 국정원 쪽 간사를 맡았던 사람이 나중에 국정원장이 되는 김만복 당시 기조실장이었는데, 그는 이 사건 조사를 자신했다고 한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김형욱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지시에 의해 프랑스에서 연수중이던 중정요원에 의해 납치 살해당했다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정보부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고 한다. 김만복 실장은 김형욱을 살해한 요원들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었고, 이미 그들에 대한 설득 작업도 진행중이었다. 당시 이들은 상당한 정도 사건의 진상을 털어놓았다. 문제는 해당 사건 관련자들이 당시 그들에게 '작전'을 직접 지시했던 전 프랑스 공사 겸 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 이상열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이상열이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있었기 때문이다.[21]
어쨌든 발표된 조사 결과는 이러했다.
후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상열은 국정원 과거사위원회와의 면담에서 자신의 개입 사실 자체는 시인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내 면담 조사는 노(No)라고 기록해 달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히 함구했다고 한다. 이상열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고, 약 1년 뒤인 2006년 4월 3일에 사망했다. 작전을 직접 수행했던 A요원은 그 후 산에 오르다 사찰이 보이면 법당 앞으로 가서 절을 하며 김형욱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살았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이상열 전 공사의 생전 인터뷰당시 이상열 주 프랑스 공사는 중앙정보부 프랑스 거점장을 겸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현지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던 A요원, B요원이 담당했다. 이들은 동유럽 출신 협력자 2명을 10만 달러에 고용했다. 김형욱 전 부장은 이상열 공사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을 했다. 이 공사는 전주를 소개시켜주겠다며 10월 7일 샹젤리제 거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A요원과 협력자 2명이 나타나 이 공사의 승용차를 이용해 김형욱을 납치해서 파리 근교로 끌고 갔다. 협력자가 소련제 소음권총 7발을 발사해 살해했다. 살해한 시신은 낙엽으로 덮어두었다. 이상열 공사는 A요원에게 관저에서 결과를 보고받았다. 그는 김형욱 부장의 여권과 지갑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소지품을 철저히 인멸한 뒤 귀국할 것을 지시했다. A요원은 귀국 후 10월 13일 김재규 부장에게 결과를 보고했다. 김재규는 직접 A요원을 불러 거액의 돈 봉투를 쥐어주며, 앞으로의 근무나 생활의 편의를 봐주겠다고 약속했다.
- 2020년 12월 15일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국정원 과거사위원에서 조사한바를 가장 신뢰성있는 근거로 방송했다. 당시 프랑스 공사도 죽을때까지 이 사건에 침묵했으며, 당시 국정원장이던 김재규도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진실은 영원히 미궁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 첫째, 명색이 암살까지 했다는 요원이라는 사람들이 총기를 분실했다는 아마추어나 할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오히려 총기를 분해해서 여기저기 버렸다는 등으로 증거 인멸을 하는 것이 요원들 본인에겐 더 유리한 진술이기 때문. 만약 분실한 총기가 제3자에 의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 둘째, 시신을 낙엽으로 덮어두었다는 게 시신 처리 방법으로선 매우 부실한 주장에 가까운 데다 그 낙엽으로 인한 사체는 무풍지대가 아니고서야(...)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경찰도 사체는 찾을 수 없었으므로, 낙엽으로 시신을 덮어두기만 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 특히 살해과정을 비교적 소상하게 진술한 당시 중정 요원이 김형욱의 사체를 버린 장소가 생각나지 않는다며 진술을 회피했던 점도 석연치 않다.
어쨌든 지금 와서 사건 관계자들의 입을 열 방법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 문제다.
국정원 과거사 위원회의 발표와 전직 중앙정보부 관계자의 직접적 증언을 인용한 보도 사이에는 몇 가지 일치하는 점이 있다.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중정 요원, 혹은 중정의 고용인들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살해 직후 시신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점이다. 사건의 세부 내용은 조금씩 다를 지언정, 대략적인 얼개는 일치하는 셈이다.
3.2. 양계장 닭모이설
- 2005년 전 중앙정보부 요원 이 모씨가 자신이 김형욱을 죽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 소속 공작원 출신으로 확인된 이 인물은 《시사저널》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1979년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납치 당일 김형욱을 마취시킨 뒤[23] 반쯤 의식불명이 된 김형욱을 파리 근교까지 찾아가서 산 채로 머리부터 양계장 대형 믹서(해머밀)에 넣어 갈아 죽였다고 설명했다. 즉, 시신은 닭모이가 된 것.[24] 폐차장을 비롯한 다른 방법과는 다르게 시신의 흔적조차 찾기가 불가능한 방식이므로, 일반인들 역시 이 설을 사실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 남산의 부장들을 집필한 김충식 전 기자는 한 방송에 나와 '양계장 암살설'을 긍정하며 "정부의 입장으로 그걸 발표할 경우에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에서 일종의 부채를 공식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냥 사체를 낙엽에 파묻고 말았다라고 처리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한다"라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 한편 MBC PD수첩의 2005년 5월 3일 방송분에서 위의 '양계장 닭모이 암살설'을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결론은 '그랬을 가능성이 낮다' 였다. 당시 취재진은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했던 이 모씨와 함께 일본, 프랑스로 검증 차원의 동행취재를 수행했고, 당시 중형 닭모이 기계가 보급되지 않았다는 점, 이 모씨가 제대로 된 장소를 특정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 '닭모이 암살설'은 신빙성이 낮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인 2005년 7월 23일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당시 실제 프랑스에 중형 닭모이 기계가 보급이 되고 있었다는 증언을 확인했으며, 시사저널 측에서도 PD수첩의 보도를 반박하는 장문의 기사를 내는 등 당시 한동안 이런저런 논쟁이 계속되었다. 결국 결론이 제대로 나지 않고 흐지부지 되었다.
3.3. 기타
- 1980년대에는 대한항공 특별기(화물기)편으로 청와대 지하실로 실려와 박정희가 직접 M1 카빈을 머리에 대고 쏴 처형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신상옥 감독의 영화 <증발>은 이 설을 따랐다.
- 차지철의 대통령 경호실 주도로 김형욱을 납치한 후 한국에 끌고 왔고 기절시킨 후 폐차장 폐차기에 산 채로 넣어서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앞서 말한 문명자 기자가 세 다리 건너 들었다는 이야기로서 역시 신빙성은 부족하다. 메인 소스는 중앙정보부 요원이고 이걸 정일권 국회의장이 들었으며 문명자가 정일권에게 들었다. 폐차기에 넣었다는 이야기는 이병주의 르포에 나오기도 한다. 여기서는 파리에서 깡패들을 시킨 거라지만. 이 설은 백무현 화백의 <만화 박정희>에서 볼 수 있다.
-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납치, 스위스 제네바 근교에서 살해하였고 그 시체를 파리까지 옮긴 뒤 외교화물로 위장하여 한국으로 공수했다라는 설도 있다. 다른 설들과는 다르게 이 설은 프랑스의 르몽드와 일본의 문예춘추에서만 보도가 된 외국발 설이다. 이 기사를 보도한 일본 기자는 한국의 어느 지위 높은 사람으로부터 들었다고 주장했다.
- 카지노 마피아들에게 살해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설은 별다른 근거나 증언이 없어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를 받은 파리 현지의 조직폭력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중정 고위 간부 출신인물의 주장을 월간조선이 받아서 보도한 것이다.
- 김형욱이 최종적으로 행방불명이 된 곳은 프랑스 파리가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설도 있다. 이는 2005년 5월 20일에 해제된 미국 국무부 비밀전문에 나온 내용인데, "김형욱은 한인 남성 한 명과 10월 9일 파리를 떠나 스위스 취리히를 경유해 사우디아라비아 다란으로 간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행적이 묘연하다"라고 적혀있다. 기존의 추정 실종 날짜인 10월 7일보다 이틀 뒤인 10월 9일이라고 특정된 것이다. 다만 이 내용은 일본 외무성이 파리 경찰을 상대로 김형욱 실종 사건에 관한 정보를 끈질기게 요구해 얻어낸 결과를 다시 주미 일본 대사관을 거쳐 미국 국무부에 전달했고, 국무부에서 이를 다시 주한 미국 대사관에 내려보낸 자료라고 한다. 일단 전언이 네단계이며, 한국 중앙정보부와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은 주장이라는 점이 약점이다.
- 10.26 이전에 잠시 월북설이 돌기도 했다. 80년대는 생존설로서 남미에 숨어산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하지만 결국 2002년 미국 뉴저지의 한 공동묘지에 가족에 의해 가묘가 세워졌다.
4. 여담
- 일단 공식적으로는 사망이 아닌 실종이기 때문에 1982년 박정희 정권하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25] 에 따른 궐석재판으로 반공법[26] , 국가보안법[27] , 형법[28] 에 의해 영혼이 징역 7년 및 자격정지 7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1996년이 되어서야 유가족측의 항소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반국가특조법 문서 참고. 중요한 점은 김형욱 궐석재판의 판결이 난 시점인 1982년은 박정희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시점이다.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
- 김형욱의 실종에서 겨우 1달도 안돼서 일어난 초대형 사건으로 인해 김형욱에 대한 관심이 하필 그 타임에 묻혀버려서 김형욱의 행적을 밝힐 수 없게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 그에게는 아들인 김정한이 있었는데, 그는 10대 초반에 아버지인 김형욱을 따라 사냥을 나갔다가 6.25 전쟁 당시에 숲속에 뿌려졌던 발목지뢰를 밟는 바람에 한 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는 한동안 치료를 위해 미국에 머물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게 되었고, 김형욱은 이 일을 평생토록 한스러워하며 후회했다고 한다. 김정한은 2002년 지병인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의 가묘가 있는 공동묘지에 함께 묻혔다.
- 당연히(...) 북한에서도 영화에 나오는데 민족과 운명 3편 홍영자편에서 박정희의 애첩이자 중정의 1급 요원 홍영자의 유일한 사랑으로 나온다. 홧김에 미국 망명을 했으나 미국에 망명중인 차홍기의 설득으로 반박정희 운동에 뛰어든다는 것. 홍영자의 활약으로 서울로 이송해서 박정희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 충격으로 회의를 느낀 홍영자는 북한으로 망명한다는 스토리.
- 김종필의 증언에 의하면 인간성에 문제가 있어서 육영수도 그것을 박정희에게 지적했다고 한다.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김종필이 5.16 초반부에 김형욱의 폭언, 폭행에 대한 뒷수습을 하는 걸로 묘사되고, 계급이 두 단계 위였던 장경순 준장한테 장군이면 다냐고 폭언을 하다가 따귀를 맞는 사건도 묘사되었다.
- 개고기를 워낙에 좋아해서 바께스채로 먹는것으로 유명했다..
5. 연기한 배우들
- 김희라 - 1994년 <증발(영화)>: 신상옥 감독 작품. 원래는 M1 카빈 소총으로 개발살이 난다는 설을 극화하려 했으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민주화운동에 힘쓰다가 김동현에게 살해되고 컨테이너에 수장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 박상조 - 1993년 MBC <제2공화국(드라마)>, <제3공화국(드라마)>: 2공화국에서는 그대로 출연했다가 3공화국 방영 때 심양홍이 캐스팅되었으나 유진산으로 캐스팅된 최불암의 출연거부로 심양홍이 대신 맡으면서 대타로 들어갔다. 5.16 당시에 천하의 개쌍놈으로 등장한다.
- 백일섭 - 1995년 MBC <제4공화국(드라마)>: 첫회에 파리에서 끌려와 고문을 당하고 차지철에 의해 청와대 사격장에서 개발살 나는 장면이... 김재규의 꿈으로 나온다.. 그뿐만 아니라 23, 24회 '김형욱 실종사건 상, 하편'에서는 드라마 특성상 딱딱할 수밖에 없는데, 감초같이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하여 웃음을 자아낸다.[30]
- 조경환 - 1995년 SBS <코리아게이트>: 그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게 나온다. 최후는 요원들이 미행하는 걸로 마무리되며 여운을 남겼다.
- 최동준 - 1998년 KBS <야망의 전설>: 여기선 김진욱이란 가상인물이지만 사실상 모티브를 땄다.
- 박상만 - 2003년 SBS <야인시대> : 한국독립당 내란 음모 사건으로 누명을 쓴 김두한을 중앙정보부에서 마구 고문하는 역할로 나온다.
- 손호균 - 2004년 MBC <영웅시대>
- 최상훈 - 2005년 EBS 문화사 시리즈 3편 <지금도 마로니에는>
- 곽도원 -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맡았다, 극중 이름은 박용각. [31]
[1] 자그마치 6년 3개월. 다음이 이명박 정부~박근혜 정부에 걸쳐 4년 1개월간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원세훈이다.[2] 김형욱 본인도 이런 '단순, 무식, 과격'한 이미지의 별명에 대해 알고 있었던 듯하다. 김형욱은 1971년에 펴낸 '대지의 가교'라는 책에서 스스로 "이 모든 나에 대한 '닉네임'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3] 코리아게이트와 김형욱의 실종을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극 중 김형욱을 오마주한 인물인 박용각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로비스트 데보라 심이 "박부장 이미지도 바꿔야돼 미 의원들이 박부장 너무 싫어해!"라며 박용각을 까는 장면이 있다.[4]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총알받이 소위"라고 표현했다.[5] 제8대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도 한국전쟁 당시 일선 대대장으로 전방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대표적으로 황간 전투에서 3사단 22연대 2대대장 으로 참전한 인물이 바로 김재규였다. 당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 경력이 들통나 군복을 벗고 보국 문관(대한민국 군무원)으로 연명하다가 북한군 동향 보고를 확인해 이들이 조만간 남침한다는 보고서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상부에 제출하여 이는 군 당국으로부터 사상 전향을 인정받아 한국전쟁이 터지자 장교로 복직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락, 김종필처럼 후방의 전투 정보와 보급 보직으로 복무하고 있었다.[6] 그러나 김형욱은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오르자 박정희의 마음에 들기 위해 김종필을 온갖 음해와 모략으로 괴롭혔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 거기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장 취임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전임 중앙정보부장 김재춘에게도 정치적인 박해를 가했다.[7] 그래놓고 중앙정보부장에서 밀려난 후 자신이 괴롭혔던 사람들이 복수할 것이라는 피해 망상에 사로잡힌 김형욱의 신세 한탄을 받아준 사람은 바로 김재춘이었다. 그는 사람이 좋아서인지 제5군관구사령부 참모장 시절 부하이던 김형욱이 '참모장님 참모장님'하며 하소연하자 "나도 당신한테 그렇게 당하고도 가만히 살고 있다. 그냥 조용히 참고 살라"며 타일렀다고 한다. 사실 김재춘은 인간 관계가 넓고 원만해서 5.16 군사정변 당시 진압군을 설득하여 반란을 성공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8] 국민복지회 사건이란? 1968년 한국국민복지회라는 기관에서 3선 개헌에 반대하는 김종필계 의원들이 김종필을 박정희에 이어 차기 대선 후보로 세우려하자 박정희는 김형욱에게 김종필계 의원들이 대통령에게 도전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중앙정보부에서 심문을 받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필은 민주공화당 의장직을 사퇴하고 탈당까지 하게 된다.[9] 이후 민주공화당 내 개헌 반대파 국회의원들은 1971년 8대 총선 때 신민당으로 이적하여 출마하려 했지만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요청으로 신민당 유진산 당수가 이들의 입당을 불허했고 이후락이 직접 "각하께서도 용서하셨고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민주공화당 공천 줄테니 딴데 가지말고 출마하시오"라며 국회의원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이들이 받은 공천은 사실상 실속없는 껍데기 공천으로 선거 기간 내내 중앙당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며 모조리 야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 크리를 먹었다. 3선 개헌에 반대한 대가를 박정희와 이후락에게 철저히 받은 것이다.[10] 이 때 오른손을 위아래로 뒤집으면서 손바닥이 바닥을 향하면 찬성, 위를 향하면 반대인데 어느 쪽을 택할 거냐며 위압적으로 물어봤다는 얘기는 유명하다.[11]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던 이후락도 김형욱과 같이 잘리며 주일대사로 밀려났지만 그는 김형욱과 달리 일본에 있으면서도 박정희에 대한 충성은 변함없음을 강조하며 박정희의 눈 밖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결국 1년만에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하게 된다. 주일대사 시절 이후락은 도쿄 대사관 부근의 초밥으로 유명한 식당에서 초밥을 먹고는 "이런 맛있는 초밥을 어떻게 나 혼자 먹을 수 있겠는가. 각하께도 맛보여드려야 한다"라며 초밥을 사서 간이 냉동 상태로 포장하여 외교행낭을 수송하는 비행기 편으로 청와대에 보내 박정희의 밥상에 올릴 정도였다.[12] 3선 개헌 성공 이후 박정희로부터 버림받은 대목이나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는 대목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언급된다.[13] 나중에는 갈라섰다.[14] 프레이저 하원의원이 주도했기에 프레이저 청문회[15] 다만 문명자 기자의 회고에 의하면 김형욱은 겉으로 유신에 반대해 망명한 민주 인사인냥 행세하면서 뒤로는 박정희 정권과 거래하며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김형욱은 유엔대표부 부대사로 와 있는 박정희의 사위 한병기(박정희와 전처 김호남 사이의 딸인 박재옥의 남편)와 함께 골프를 쳤고김형욱은 서울의 폐차장에서 죽었다 중언부언하는 중에서도 결코 박정희를 직접 겨냥해 비판하지 않았다고 한다.김 부장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요.[16] 박사월이라는 필명을 썼으며 후에 귀국하여 새정치국민회의(15대)와 새천년민주당(16대)에서 각각 국회의원을 역임한다. 18대 대선 때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화갑, 한광옥과 함께 새누리당에 입당한다.[17] 문명자 기자는 박정희 정권에서 김형욱에게 당시 500만 달러를 제시했다고 주장한다.[18] 원래는 일본의 유명 출판사인 고단샤에서 출판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한국 정부에서 고단샤에 이권을 주고 출판을 저지했다고 한다.[19] 훗날 중앙정보부장 직무대행을 역임.[20] 김형욱과 친분이 있던 어느 여자 배우의 회유와 연락을 받고 파리로 갔다는 설이 있다.[21] 이상열은 예전부터 김재규와는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김재규가 과거 3사단 부사단장을 지낼 때, 이상열이 그의 부관이었고, 김재규가 보안사령관을 지낼 때도 함께 보안사에 근무했으며, 김재규의 동생 김항규와 이상열은 젊은 시절부터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22] 물론 이 보고서의 정보 소스가 일본 정부-주미 일본 대사관-미국 국무부-주한 미국 대사관이라는 4단계 전언이라는 점은 상당한 약점이다.[23] 목을 꺾고 마취제를 입에 집어넣었다고 주장했다.[24] 이 내용은 김경재가 쓴 '혁명과 우상'에도 언급된다. 단, 여기서는 마취시킨게 아니라 목을 부러뜨리고 넣었다고 적혀있다. 어찌됐든 잔혹하게 죽은건 마찬가지지만.[25] 사실상 김형욱 때문에 만든 법으로, 훗날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으로 효력을 상실했으며(헌재 1996. 1. 25. 95헌가5 결정), 1999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26] 법률 제643호, 제4조 제1항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 이후 1980년 12월 31일에 반공법은 폐지되고 그 내용은 국가보안법에 통합되었다.[27] 제7조 제2항 국외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자[28] 제127조 공무상비밀누설죄, 제104조의2 제1항 국가모독죄[29] 조지 타케이가 맡은 박정희(극중 이름은 한성태)는 색마 그 자체이고 일본에 몰래 요원을 보내서 야당 인사를 바다에 처넣는 일을 서슴치 않고 하고 있다. 한국어를 못하는 조지 타케이의 목소리는 이강식이 맡았다. 이 영화에서 조지 타케이는 쿠데타 부분은 선글라스를 끼고 나오지만 국정과 밤일에 전념하는(..) 부분에서는 맨얼굴이 그대로 나온다. 사실 영화가 워낙 마이너한지라 해외에서도 그가 여기 나왔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신상옥 감독은 김형욱과 친분이 있었으며 홍콩에서 납북되기 며칠 전에 미국에 있었을때 이 때 김형욱의 집에서 김형욱과 같이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 식사 자리에서 김형욱은 자신의 회고록의 원고를 보여주며 거액의 인세를 받게 되었다고 자랑했었다고 한다. 결국 신상옥 감독은 민주화가 되고 시간이 꽤나 지난 2000년에 한국으로 귀국한다.[30] 23화에서 국회의원 암살 지시를 내릴 때, 감칠맛 나는 욕설과 구수한 이북 사투리를 구사한다.[31] 실제 김형욱과도 풍채와 이목구비가 비슷하고 소품으로 사용된 안경과 복장도 고증에 신경을 써서 이질감이 없는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