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유
荀攸
(157년 ~ 2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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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기 군벌인 조조를 섬겼던 군사(軍師)로, 자(字)는 공달(公達)이다. 시호는 경후(敬侯).
삼국지 위서에서는 순욱, 순유, 가후를 같은 권에 모았다. 즉 조조군 최고의 3대 책사 중 하나로 꼽은 것. 실제로 순유는 전장에서 활약해 순욱 다음가는 공적을 쌓은 조조군 모사라 한다.
같이 조조를 섬겼던 순욱의 7촌 조카로[1] 순담(荀曇)의 손자이고, 순이(荀彝)의 아들이자, 순집(荀緝), 순적(荀適)의 아버지이다. 순유의 처첩은 아무 한명만 기록에 남아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조부인 순담은 광릉태수가 되었다. 아버지인 순이는 주의 종사로 있었는데 순유가 어렸을 때 죽었다.
순유가 8살 때, 숙부인 순구가 술에 취해, 잘못하여 순유의 귀에 상처를 낸 적이 있었다. 순유는 숙부의 방을 들어갔다 나왔다할 때, 언제나 귀를 숨기고 숙부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였다. 숙부는 뒤늦게 이 일을 듣고 알게 되어 놀라 사과하였고, 높이 평가하였다.
13살 때, 전 부하 장권(張權)이라고 하는 인물이 아버지의 묘지기를 하고 싶다고 신청하였다. 순유는 이에 의혹을 품고 숙부인 순구에게 "모습이 이상해보입니다. 혹시 뭔가 나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지 않을까요."라고 말하였다. 순구는 짚이는 일이 있어, 조사를 해보자, 역시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쳐 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순구는 순유의 학식을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하진이 정권을 잡았을때 원소와 음수 등에게 천거되어 황문시랑에 임명되나, 이후 동탁이 정권을 잡자 그 횡포에 분노하여 정태,하옹 등과 함께 동탁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감옥에 투옥되어[2] 사형이 결정되었다가,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동탁이 왕윤에게 암살당했기 때문에 풀려날 수 있었다.[3]
이후 활동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자신이 원하던 촉군태수(蜀郡太守)가 되려 했으나, 유언이 이미 교통로를 끊어버렸기에 형주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헌제를 자신의 본거지로 맞이한 조조에게서 편지가 오고, 군사로써 그를 섬기게 되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의 초기 행적들이 닥치고 생략되고 조조의 연주목 시절 순욱과 같이 조조의 연주목 시절에 합류한 것으로 나온다.
2.2. 조조 휘하에서
남양에 주둔한 장수를 공격할 때, '''"유표가 장수에게 식량 공급을 계속해주진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서로 사이가 멀어질 테니, 출병을 늦춘다면 유표가 장수를 돕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진언했는데, 이를 듣지 않고 출병을 서두른 조조는 과연 가후의 군략 + 유표의 원군 콤보에 패퇴하고 만다. 이후 퇴각전에서 복병을 준비해 1차 추격을 차단하는데, 가후가 패잔병을 이끌고 온 장수에게 2차 추격을 진언하고 결국 2차 추격전에서는 조조군이 큰 피해를 입고 만다.
조조의 배후에서 서주의 여포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때 많은 사람들은 여포를 친다면 장수와 유표에 의해 배후를 찔리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였으나, 순유는 여포가 용맹하며 원술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세력이 규합되지 못하고 있을 때 토벌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조는 서주의 여포 토벌에 나서 하비까지 진군하였다. 조조가 철군을 하려고 할 때, 순유와 곽가는 조조를 필사적으로 말렸고, 순유의 계책으로 하비성을 수몰시켜서 여포를 사로 잡게 된다.[4]
이렇게 하비성 수공의 공 역시 순유의 공으로만 기록되며, 순유만이 치하를 받았다.태조의 군은 하비까지 이르렀는데 여포가 퇴각하여 굳게 지키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연이어 싸우다 보니 병사들은 피로해져 태조는 돌아가려 했다. 순유와 곽가가 말했다.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는데, 지금 세 번 싸워 모두 패배하였으니 그 예기(銳氣)가 쇠퇴하였습니다. 삼군(三軍)에서 장수를 주(主)로 하여 그 쇠미한 곳에 주력하면 군대는 싸울 뜻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진궁(陳宮)에겐 지모가 있으나 더디니, 지금 여포의 기세가 다시 회복하지 못했고 진궁의 지략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때에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면 여포군을 가히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이에 기수(沂水)와 사수(泗水)를 끌어 성쪽으로 물을 대니, 성에서 물이 넘쳐나 여포를 사로잡았다. 조조는 순유의 공을 치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안자(顔子)나 영무자(寧武子)와 같은 성현이 다시 태어나더라도 순유만큼은 되지 못할 것이다.”
관도대전에서는 '''메인참모급'''으로 진언이나 작전을 많이 건의했다.[5] 전초전에서 원소가 안량으로 백마를 포위한 뒤 본대는 안량의 배후에 주둔하며 백마를 인질삼아 조조에게 결전을 강요하자 순유는 성동격서의 계책으로 하내를 쳐 원소 본대를 분산시키는 책략을 진언하여, 안량을 독군의 상태로 몰아넣으면서 격파하도록 설계했고, 원소의 부하 문추와 유비의 추격을 받자, 이번에는 치중대를 미끼로 쓰는 방안을 진언하여, 덫에 걸린 문추를 토벌하였다. 그 뒤, 조조는 순유의 진언에 따라, 서황과 사환에게 원소의 부하인 한순이 이끄는 수송대를 공격하게 하여, 수 천 대의 곡물 수송 수레를 불태웠고, 허유가 투항해 오면서 순우경의 오소 숙영 사실을 알리자 모두가 이를 의심했으나 가후와 함께 이 계책을 지지했고, 조조가 대부분의 병력을 이끌고 오소를 기습하는 동안 조홍과 함께 관도의 수비를 맡아 전력이 집중된 원소의 공세를 막아냈으며, 오소의 성공으로 원소군 수뇌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장합과 고람이 투항해 오자 진심인지 아닌지 의심하는 조홍을 설득하여 투항을 받아들이게 하며 역습의 발판을 마련하는 등. 조조에게 유리하게 전장의 판도를 움직인 거의 대부분의 상황들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기에 사실상 조조의 모사들 중에서는 관도대전 최대의 공로자였다.
조조가 유표 정벌에 나설 때 원상과 원담의 다툼이 발생하여, 전투에서 패한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을 제안해왔다. 다른 신하들은 유표 정벌을 우선하도록 권유하였으나, 순유는 이 기회에 원담과 원상의 다툼을 틈타 원씨의 땅을 빼앗자고 진언하였고 이 전투에서 순유도 종군하였다. 조조는 순유의 공적을 상주하여 크게 칭찬하였고, 순유는 능수정후(陵樹亭侯)로 봉해졌다.
2.3. 죽음
214년 조조의 오 토벌에 종군하던 시기 병으로 인해 쓰러져 얼마안가 진중(陣中)에서 사망했고, 경후(敬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조는 순유에 대한 이야기를 할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죽기 전 친구인 종요에게 자신의 경험을 담은 병법, 전략을 담은 책을 주었는데, 훗날 이 책은 분실되었다고 한다. 주건평전에 따르면 순유와 친하던 종요가 순유가 죽은 후 그의 집안을 정리하며 아무를 비롯한 순유의 첩들을 시집보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214년, 조조가 위왕(魏王)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여 조조의 노여움을 사서 얼마 후 충격으로 병사하지만[6] 이는 연의의 허구다. 정사(正史)에서는 조조가 왕이 되는 것을 찬성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관중이 순욱과 비슷한 이미지를 부여한 것 뿐.
3. 평가
순유의 외조카인 신도가 조조가 기주를 얻을 때 순유가 무엇을 했는지 묻자 순유는 "좌치(=신비)가 원담이 항복하도록 했고, 이에 왕사[7] 가 평정하러 갔을 뿐인데. 내가 아는 것이 뭐가 있겠느냐." 며 자신의 공을 숨겼고, 친지와 집안 식구들 누구도 순유에게 사무에 대한 일을 묻지 않았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순유는 평소 스스로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았다.
조조는 "순유는 언뜻 보기엔 우둔해 보이나, 내면은 지혜를 가지고 있어 세심하고 용감하며, 선을 과시하지 않고, 번잡하고 성가신 일은 남에게 뒤집어씌우지 않는다. 안회와 영무자(공자의 제자)라도 순유 이상은 아닐 것이다."라고 순유를 높이 평가했다.
순유는 조조의 패업을 지탱했던 명군사였다. 조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최측근이면서도 사치를 부리는 일도 없었고, 언제나 겸손하고 친절하여 친구가 많았다고 한다. 특히 종요와는 절친하여 순유가 죽을 때 남겨진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종요에게 맡기겠다고 유언하였다. 허나 두 아들 순집, 순적이 요절하여 순유의 집안은 위상이 추락하고 만다. 훗날 순유의 손자 순표(荀彪)[8] 가 성인이 된 후 다시 순유의 가문을 부흥시켰다.
진수는 위서에서 순욱, 순유, 가후를 같이 묶었는데, '''순욱이 조조군 부동의 1위 참모고 가후가 조비 때까지 살아 롱런하며 지위를 누린 조위의 참모인 걸 생각하면 조조 휘하에서의 순유의 활약이 얼마나 굉장했을지를 알 수 있다. '''
순유는 그가 해놓은 업적에 비해서 저평가를 받는 편이다. 7촌 아저씨 순욱의 공이 워낙 크므로 책사 중 부동의 1위이기는 하지만, '''순유는 병법부분에서 최고의 공적을 쌓았음에도'''[9] 후세의 인식에선 개성 강한 가후와 곽가에게 밀려 인지도가 낮다. 그러나 실제 기록을 볼 때 조조군 진영 안에서 순유의 공을 능가할 만한 참모는 순욱밖에 없다. 조조군 참모들의 공적을 매긴다면 순욱 다음 가는 부동의 2위인 인물이다.
순욱도 본래 공적에 비해 대중의 인식이 희미한 편이지만 그래도 대략적으로 조조 다음가는 No.1 이미지는 확고하고 자신의 패업을 이룩하게한 주군과 척을 지면서까지 한실을 지키려한 충신이라는 흥미로운 스토리 라인이 있어 곧잘 회자되는데 반해, 순유는 아무런 캐릭터성도 없고 비중 있게 다루는 창작물도 거의 없다. 나와봐야 순욱 덤 취급인 게 상당수. 어떤 의미에선 그냥 꾸준히 잘했다보니 후세에 개성있게 여겨질 만한 일화도 생기지 못했다고 봐야할지도. 유능한 평생사를 지닌 사람보다 조용히 살다가 강렬한 한 방의 에피소드 하나를 지닌 사람이 더 유명한 것이 흔한 일이긴 하다.
순욱의 아들 순찬은 순유가 신중하고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므로 도가의 사상에 의거해 '아버지 순욱보다 순유가 더 훌륭하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위의 조조의 평가와 순찬의 평가를 볼 때 실제로 그다지 눈에 띄는 언행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다.
위에서 설명했듯 말년에 조조의 위왕에 찬성한다. 순유 또한 한 때 동탁 암살을 시도할 정도로 의기 넘치는 충의지사였으나, 결국 한나라에 대한 신념 보다도 조조라고 하는 자신의 주인을 더 크게 중요시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4. 미디어 믹스
[1] 가족 관계만 놓고 봤을때는 조카였지만 나이는 순욱보다 6살 많았다. 이들과 비슷한 관계로는 후기 오나라의 손량&손준이 있다. 대신 이쪽은 나이 차가 '''순욱&순유의 4배인 24살'''(...)이다.[2] 이 시기에 하옹은 감옥에서 근심으로 죽었다.[3] 이런 기술을 하고 있는건 순유전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위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있다. '''순유가 동탁을 설득해서 풀려났다'''라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 이는 순유가 동탁에게 줄을 대서 목숨을 잃을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이때문에 일부에서는 순유가 채옹같은 친동탁 청류들에게 구명로비를 해서 풀려난게 아닌가라고 보기도 한다. 대체로 기전체의 열전은 그 사람 자신에게 유리한쪽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위서쪽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동탁을 암살하려한 사건이므로 동탁이 그 즉시 참했어도 할말이 없는데 감옥에 가둬두고 처형날짜만 기다렸다는건 앞뒤가 안맞는다는 지적도 나온다.[4] 이 계책은 삼덕들 사이에서 통칭 하비성 워터파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5] 의외로 곽가는 이때 활약이 '''공기'''다. 종군했다는 정도가 전부이다.[6] 심지어 조조는 자신의 장자방과도 같은 인물을 둘이나(다른 한명은 순욱) 자신의 욕심 때문에 잃었다며 자책하여 그의 유언을 받아들여 지금은 때가 아님을 인지하고 위왕에 오르는 것을 미루었다고 묘사되었다.[7] 왕의 군대(=王師)라는 뜻으로 조조를 비유한 것이다.[8] 순유의 두 아들 순집, 순적 중에 누구의 아들인지는 모른다.[9] 순욱의 군략이 순유에 비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순욱이 맡은 내치가 워낙 중요했기에 전장에 직접 많이 나서지 않았을 뿐이다. 실제로 조조는 전장에 나가서도 중요한 일을 결정하기 전에 편지로 순욱의 조언을 구하였다고 한다. 아쉽게도 해당 기록물들은 순욱이 죽기 전 전부 불태워 없애버렸다고 한다. 또한 조조세력이 미약할 초창기에는 순욱 본인이 직접 참군하기도 하였다. 이후 세력이 어느정도 커지면서 본진 관리를 하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