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수석비서관

 




1. 개요


'''정무수석비서관'''(政務首席祕書官, 약칭 '''정무수석'''). 대통령비서실수석비서관 중 하나로 정무수석실의 장이다. 대통령을 보좌해 청와대와 국회, 정당과의 소통과 협력 업무를 주로 담당한다. 다시 말해서 대통령과 국회 등 정치권을 이어주는 가교다. 이 외에도 '정무'[1]를 담당하는 만큼 업무 영역이 사실상 거의 모든 국정에 걸친다. 예를 들어 여론 파악 등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데에도 정무수석의 보고가 결정적이다. 주로 여야의 원내대표를 교섭한다.
대통령이 국회에게 보내는 대변인이기 때문에, 정무수석은 대통령의 의중을 꿰뚫고 있어야 하고 국정 현안을 놓고 여당은 물론 야당과도 소통과 조율이 가능해야 한다. 의원들을 상대로 원활한 협상을 이끌어 내는 신분이라, 의원직 경험이 있는 인물 중 어느정도 중량감이 있는 인물(주로 재선)들이 주로 맡는 자리다. 대통령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국회와 협상을 임하는 만큼 대통령의 뜻을 잘 헤아리는 복심들이 가는 자리라는 인식이 있다.

2. 상세


국회와의 소통은 어느 정부에서나 필요한 만큼, 다른 수석비서관 자리와 달리 정권 교체 때마다 없어지지 않고 박정희 정부 때 설치된 이래 지금까지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 민정수석비서관과 함께 어떤 정권이든 이름이나 권한에 약간에 변화만 있을 뿐 자리가 통째로 사라지지는 않는 자리이다. 극히 이례적으로 참여정부에서 여당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지로 2003년 새천년민주당 - 열린우리당 분당 시에 잠시 사라진 적은 있지만 그래도 정부가 출범 했을 때는 있었다. 아예 없어진 게 아니라 정무수석 자리를 공석으로 비웠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대참패 - 한나라당이 압승하면서 야당과의 접점이 필요했기에, 정무수석 자리를 다시 채워서(민정수석이 겸임) 운영하였다. 그 때문인지 수석비서관 중 가장 힘이 센 민정수석 다음으로 개별 문서가 만들어졌다.
박근혜 정부조윤선 전 수석이 최초의 여성 정무수석이라는 기념비적인 타이틀을 얻기도 했으나, 현재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인해 재판을 받고 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또한 문재인 정부의 첫 정무수석인 전병헌도 뇌물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 기준으로 밑에 정무비서관, 자치발전비서관을 두고 있다.[2] 정무수석은 비서실장 산하 수석비서관 중 최선임으로 비서실장이 자리를 비우면 비서실장 대행한다.

3. 역대 정무수석



3.1. 박정희 정부


  • 정무수석비서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조시형 (趙始衡)
1968년 3월 21일 ~ 1969년 2월 17일
임시
김학렬 (金鶴烈)
1969년 3월 11일 ~ 1969년 4월 12일
2대
김상복 (金相福)
1969년 4월 12일 ~ 1971년 7월 9일
3대
홍성철 (洪性澈)
1971년 7월 9일 ~ 1973년 12월 3일
  • 정무제1수석비서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류혁인 (柳赫仁)
1973년 12월 8일 ~ 1979년 12월 18일
  • 정무제2수석비서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정상천 (鄭相千)
1973년 12월 8일 ~ 1978년 12월 22일
2대
고건 (高建)
1979년 1월 10일 ~ 1979년 12월 18일

3.2. 전두환 정부


  • 정무제1수석비서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우병규 (禹炳奎)
1980년 9월 3일 ~ 1981년 12월 22일
2대
허화평 (許和平)
1981년 12월 24일 ~ 1982년 12월 20일
3대
정순덕 (鄭順德)
1982년 12월 20일 ~ 1984년 10월 19일
4대
허문도 (許文道)
1984년 10월 20일 ~ 1986년 8월 27일
5대
김윤환 (金潤煥)
1986년 8월 29일 ~ 1987년 7월 20일
6대
이진우 (李珍雨)
1987년 7월 20일 ~ 1988년 2월 24일
  • 정무제2수석비서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김창식 (金昶植)
1980년 9월 3일 ~ 1982년 1월 5일
2대
김태호 (金泰鎬)
1982년 1월 7일 ~ 1983년 10월 14일
3대
안응모 (安應模)
1983년 10월 14일 ~ 1984년 3월 28일
4대
유흥수(柳興洙)
1984년 3월 28일 ~ 1984년 10월 19일
5대
김용래 (金庸來)
1984년 10월 20일 ~ 1986년 1월 9일
6대
강우혁 (康祐赫)
1986년 1월 9일 ~ 1988년 2월 24일
국회 소통 업무뿐만 아니라 정무1수석은 외교·군사, 정무2수석 일반행정 업무도 담당해 그 권한을 강화했다.

3.3. 노태우 정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최병렬 (崔秉烈)
1988년 2월 25일 ~ 1988년 12월 5일
2대
최창윤 (崔昌潤)
1988년 12월 5일 ~ 1990년 12월 27일
3대
손주환 (孫柱煥)
1990년 12월 27일 ~ 1992년 5월 6일
4대
김중권 (金重權)
1992년 5월 6일 ~ 1993년 2월 24일

3.4. 문민정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주돈식 (朱燉植)
1993년 2월 25일 ~ 1993년 12월 22일
2대
이원종 (李源宗)
1993년 12월 22일 ~ 1997년 2월 28일
3대
강인섭 (姜仁燮)
1997년 2월 28일 ~ 1997년 7월 11일
4대
조홍래 (趙洪來)
1997년 7월 11일 ~ 1998년 2월 24일

3.5. 국민의 정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문희상 (文喜相)
1998년 2월 25일 ~ 1998년 5월 18일
2대
이강래 (李康來)
1998년 5월 18일 ~ 1999년 2월 5일
3대
김정길 (金正吉)
1999년 2월 5일 ~ 1999년 11월 23일
4대
남궁진 (南宮鎭)
1999년 11월 23일 ~ 2001년 9월 11일
5대
유선호 (柳宣浩)
2001년 9월 11일 ~ 2002년 1월 29일
6대
조순용 (趙淳容)
2002년 1월 29일 ~ 2003년 2월 24일

3.6. 참여정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유인태 (柳寅泰)
2003년 2월 25일 ~ 2004년 2월 13일
정무수석이라는 자리가 대통령의 복심으로 정당과 청와대의 사이에서 사실상 정당에게 지시를 내린다는 지적이 일자, 국회의 도움을 요구하는 정무 업무는 각 부서가 자체적으로 해결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자리를 없앴다'''.[3]
썰전에서 유 작가가 말하기를 노 전 대통령은 비서실 내에 굳이 정무 업무를 따로 둬야 하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국회의 도움 요청은 알아서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옆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형준 교수는 이명박 정부에서 정무수석을 맡기도 했던 만큼 정무 업무는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발끈했다.[4]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열린우리당을 안드로메다 관광 보낸 이후에는 민정수석이 정무수석 직무를 겸임하는 식으로 이게 부활을 했다.[5] 한나라당과의 업무협업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7. 이명박 정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박재완 (朴宰完)
2008년 3월 1일 ~ 2008년 6월 20일
2대
맹형규 (孟亨奎)
2008년 6월 23일 ~ 2009년 9월 1일
3대
박형준 (朴亨埈)
2009년 9월 1일 ~ 2010년 7월 16일
4대
정진석 (鄭鎭碩)
2010년 7월 16일 ~ 2011년 6월 10일
5대
김효재 (金孝在)
2011년 6월 10일 ~ 2012년 2월 10일
6대
이달곤 (李達坤)
2012년 2월 15일 ~ 2013년 2월 24일
초대 정무수석인 박재완부터 마지막 정무수석인 이달곤까지 모두 전현직 국회의원[6]들이 임명된 것이 특징이다. 정무수석이 주로 여야 간의 관계 조율 등을 맡은 것을 생각하면 나름 취지에 맞는 인선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만 막상 여야관계는 그리 좋지 못했다.

3.8. 박근혜 정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이정현 (李貞鉉)
2013년 3월 25일 ~ 2013년 6월 3일
2대
박준우 (朴晙雨)
2013년 8월 5일 ~ 2014년 6월 11일
3대
조윤선 (趙允旋)
2014년 6월 12일 ~ 2015년 5월 18일
4대
현기환 (玄伎煥)
2015년 7월 10일 ~ 2016년 6월7일
5대
김재원 (金在原)
2016년 6월 8일 ~ 2016년 10월 30일
6대
허원제 (許元齊)
2016년 11월 3일 ~ 2017년 4월 3일
'박근혜 = 불통' 이라는 이미지가 대중들에게 인식될 정도로 소통 능력이 안 좋은 대통령을 모신 탓인지 국민들에게나 국회에게나 썩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 중에서 이정현 수석[7]의 경우에는 고향인 순천에서 2014년 재보궐선거, 20대 총선에서 내리 재선을 하고 당 대표가 되었지만 대통령이 탄핵되면서 탈당했고, 정치적 생명이 끝났다. 그리고 조윤선, 현기환 두 전 수석은 재판을 받는 등 영 말년이 좋지 못하다. 게다가 김재원 전 수석도 국정원 특활비 상납 사건 때문에 피의자 신분이 되었다. 그나마 언론인 출신인 허원제 前 수석은 탄핵정국 이후에 부임해서 그런지 존재감이 없는 편.

3.9. 문재인 정부


대수
이름
임기
초대
전병헌 (田炳憲)
2017년 05월 14일 ~ 2017년 11월 16일
2대
한병도 (韓秉道)
2017년 11월 28일 ~ 2019년 01월 08일
3대
강기정 (姜琪正)
2019년 01월 08일 ~ 2020년 8월 11일
4대
최재성 (崔宰誠)
2020년 8월 11일 ~ (현재)
여소야대 상황 속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단독으로 법안 하나 통과 시킬 수 없는 만큼 정무 업무의 중요도 커 3선에 원내대표까지 역임했던 중량감 있는 전병헌 전 의원을 임명 했지만, 롯데홈쇼핑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이 터지면서 문재인 정부 수석비서관 최초로 도중 사퇴하게 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시민당이 180석이라는 압도적인 의석수를 확보하면서 정무수석의 역할이 임기 초에 비해 다소 낮아진 편.

4. 창작물에서의 등장



[1] 정치나 국가 행정에 관계되는 사무.[2] 2019년 9월 기준. 직위가 자주 변경될 수 있으니 청와대 홈페이지의 조직도를 참고하기 바란다.[3] 때 마침 유인태 수석도 17대 총선 출마(도봉구 을)로 방향을 굳히면서 문제는 없었다.[4] 결과적으로는 참여정부가 중반부터는 여소야대 정국이 펼쳐지면서 그 정무업무가 단순한 일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다.[5] 민정수석 중에서 전해철, 이호철 수석이 정무수석 임무를 겸임한 인물이다.[6] 박재완: 17대 의원, 맹형규: 15~17대 의원, 박형준: 17대 의원, 정진석: 16~18대 의원, 김효재: 18대 의원, 이달곤: 18대 의원[7] 다만 이정현은 윤창중 대변인 성추행 사건으로 인해서 책임을 지고 윤창중의 상급자인 이남기 홍보수석이 사임하면서 홍보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임기간도 짧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