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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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4년 2월 8일 ~ 1926년 12월 8일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관료이자 군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제국에서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2년 후인 1907년 7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 조인에 찬성한 내각 대신 일곱 명[1] 의 친일파에 포함된 정미칠적이자 경술국적, 친일 반민족 행위자이다.[2]
2. 생애
1864년 2월 8일에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음력으론 1월 1일생. 정종의 서자인 무림군의 후손이며 일본군 보병 중좌를 지낸 이병규의 형이다.
1894년에 6월 무과에 급제했다. 당시에 의친왕 이강을 따라 일본으로 간 뒤 친일파가 되었다. 1894년 9월 보빙대사 의화군 이강을 수행해 일본으로 가서 같은해 10월에 일본 육군 교도단에 입학했다. 1895년 5월에 교도단을 졸업한 직후 일본육군사관학교로 파견을 가 공부하였고 1896년 3월에 육군 사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귀국해 한국으로 돌아와 육군무관학교의 교장을 지냈다. 4월에 육군 보병 정위로 임관되어 육군무관 학교 교관과 교두를 겸임했다가 1897년 6월 7일에 육군 보병 참병으로 진급했다. 1899년 6월부터 북정 지방 대대 대대장, 1900년 7월 북청 진위 대대 대대장을 거쳐 10월까지 진위 제5연대 제 2대대 대대장을 지냈다가 친일행위로 2년간 구금을 당하기도 하고 1900년에 유배를 가기도 했다.[3] 1904년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기를 잡자 복직했다. 1905년에는 이재완의 방일에 수행해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2.1. 정미 7조약의 거두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주도했으며, 고종의 퇴위도 요구했다. 칼을 들고 자기 목에 대는 시늉을 하며 겁박했다. 이후 의병 진압에 앞장섰다. 일단 러일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04년 6월 육군 보병 참령으로 복관되었다. 같은 해 7월 육군 무관 학교 교관을, 8월 군제 의정관을 거쳐 9월에 육군 보병 연대 부령으로 진급해 육군 무관 학교 교장과 육군 유년 학교 교장을 겸임했다. 1905년 4월자로 육군 보병 정령으로 승진했다. 이 해 7월 군부 교육 국장에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육군 참장으로 진급해 육군 교육 국장에 보임되었다. 1906년 1월에는 보빙대사 완순군 이재완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파견되었고 일본 정부가 주는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7년 5월 육군 부장으로 진급했고 이완용 내각이 성립하면서 군부 대신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군부 대신으로 이토 히로부미 통감의 지시를 받고 일본 헌병 70여명을 대궐에 진입시켜 고종 황제를 강박해 선위를 강요하려다가 참령 임재덕이 일본군의 입권에 완강히 항거하자 임재덕을 법원에 구속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다.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체결에 참여해 이완용, 임선준, 이재곤, 고영희, 조중응, 송병준과 함께 정미 7적으로 지탄받았다.
1907년 7월에 순종을 압박해 군대 해산 조칙을 받아낸 후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했고 이에 저항해 궐기한 군인과 의병을 진압하도록 명령하는 등 국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부대를 탄합했다. 같은 달 시종 무관장 임시 서리 사무에 8월에는 군법 회의 판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한국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조직한 신사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다. 일본 황태자 영접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장을 받았다. 1908년 10월 도쿄에 있는 황태자 이은의 생일 문안차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육군 특별 대연습을 배관하고 돌아왔다. 1909년 7월 대한 제국 군부를 폐지하고 설치한 친위부 장관에 임명되어 시종 무관장을 겸임했다. 1910년 8월 시종 무관장 겸 친위부 장관으로 ‘합병 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 회의에 참석해 가결함으로써 '''이재면 - 황실 대표 이완용 - 총리 박제순 - 내부 조중응 - 농상공부 고영희 - 탁지부 민병석 - 궁내부 윤덕영 - 시종 원경과 함께 경술국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2.2. 후기 생애
1909년 대한제국의 군부(현재의 국방부)가 해체되고 친위부가 생기면서 친위 대신을 지냈다. 1910년에는 시종무관장이 되었다. 시종 무관장이 육군 부장[4] 에 해당하는 계급자가 보임되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계급도 중장급임을 알 수 있다. 그후 일본군에 편입됐고 최종 계급은 일본군 중장이었다. 경술국치 후 1925년 10월에 종 3위 자작이 되었다. 1926년 4월에 있었던 순종의 국장 때 장의 위원장을 지냈고 떵떵거리며 살다 그해 12월 8일 사망했다. 사망 당일 정3위로 욱일동화 대수장이 추서되었다. 작위는 양자 이홍묵이 이어받았다.
나라를 팔아 철저히 일제에 충성한 덕분에 1907년 훈1등 욱일장, 1912년 한국 병합 기념장, 1915년 다이쇼(大正) 대례 기념장 #에 추서되는 등 일제로부터 훈장을 더럽게도 많이 처받았다.
3. 사후
당연히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인 명단에 포함되었고, 2006년 친일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그의 양아들인 이홍묵(1895년 - 1960년)은 1927년에 그의 자작 작위를 세습했다. 이홍묵은 1950년에 반민특위에 의해 공민권 3년 정지를 구형받았으나 실질적으로 형을 받았는지는 불명이다.
그의 증손자가 1992년 환경부 차관, 1988년 국무총리 비서실장, 그리고 2005년 웅진그룹 부회장을 지낸 이진이다.(걸그룹 핑클의 맴버 그 이진이 아니다.) 친일 선조가 남긴 재산 밑천 삼아... 떵떵거리는 후손들이진 웅진 그룹 부회장
아무리 친일파 후손들에게 연좌제를 물을 수 없다고는 해도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가난에 허덕이고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들은 조상들의 과거 친일 행적엔 나몰라라 하며 그들이 물려준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계 곳곳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뒷맛이 매우 씁쓸한게 사실.
4. 여담
- 화가이자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가인 관제 이도영(1884~1933)이 1909년 9월 2일자 대한민보에 기고한 만평으로 유명하다. 제목의 볼드체의 한자를 이으면 리병무[5] 가 된다. 즉 당시 유명한 친일파 군인이었던 이병무를 조롱한 것이다
5. 둘러보기
[1] 고영희, 송병준, 이병무, 이완용, 이재곤, 임선준, 조중응 [2] 고종을 협박하고 대한 제국의 군대 해산과 의병 진압에 압장섰다. 경술국치 이후 일본군으로 활동한 친일 행적을 지니고 있다.[3] 이때 일본에 있던 망명자에게 국내 사정을 알려준 혐의로 파직되어 2년간 미결수로 구금 되었다가 1902년 1월부터 1904년 2월까지 전라남도 관찰부 지도군 고군산으로 유배되었다.[4] 현재의 육군 중장[5] 이병무라고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