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곤(1859)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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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이씨 경창군파의 역대 종주'''
10대
이신응

'''}}}#FAFAD2 11대
이재곤}}}'''

12대
이해국[15]


'''조선귀족 자작'''
<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이재곤
李載崑 | Lee Jae-gon
'''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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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재곤 (李載崑 / 李載崐)[1]
'''본관'''
전주 이씨 경창군
'''호'''
동원 (東園)
'''출생'''
1859년 4월 8일 (음력 3월 8일)
조선 경기도 양주군
(현 대한민국 경기도 양주시)
'''사망'''
1943년 7월 11일 (향년 84세)
일제강점기 조선 경성부
(현 서울특별시)
'''직업'''
관료, 정치가
'''주요 경력'''
진주부 관찰사
공주부 관찰사
대한제국 학부대신
조선귀족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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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62861><colcolor=#eccd7a> '''종교'''
유교 (성리학)
'''최종 국적'''
'''일본 제국 [image] '''
'''작위'''
조선귀족 자작
'''배우자'''
대구 서씨, 평산 신씨
'''자녀'''
1남 이원용, 2남 이윤용, 3남 이연용,
4남 이관용, 5남 이순용, 6남 이운용,
7남 이면용, 1녀 이씨[16]
'''비고'''
'''정미칠적'''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
2. 생애
3. 후손
4. 같이 보기

'''노년의 모습'''[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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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대한제국의 종실 출신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59년(철종 10년) 4월 8일(음력 3월 8일)에 경기도 양주군에서 경창군파의 10대 종주이자 9대 종손인 음현령 이신오(李愼五)[2]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 이을경이 있었으나 1864년 8월에 21촌 숙부인 흥완군 이정응양자가 되었고[3] 아버지 이신응 역시 얼마 지나지 않은 1870년(고종 7년) 10월에 사망하면서 12살 나이에 경창군파 종손이 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왕족은, 대군 후손의 경우 5대손까지, 왕자의 후손은 4대손까지만 포함되어 종친부에서 관리하는 사람들만 일컫는 것이다.[4] 하지만 이재곤의 조상 중 마지막으로 왕이었던 사람은 2 ~ 300년 전의 임금인 '''선조'''라서 이 시기에 그와 그의 일가는 원칙적으로 왕족이 아니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의 형 이재완이 고종의 사촌이 되면서 그 역시 자연스럽게 고종과 가까운 친척 형제로 지냈고, 이후 사실상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받았다.

2. 생애


22살인 1880년(고종 17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승정원의 벼슬을 시작으로 1882년(고종 19년)에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어윤중을 중심으로 운영한 감생청(減省廳)[5]의 설립 초기에 사과(司果)[6]로서 일을 보았다. 다음 해에는 사간원 장령[7]이 되었다.
1890년(고종 27년)에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수정할 때 찬수감인종부정(纂修監印宗簿正)으로 임명받아 수정을 관리감수하는 역할을 맡았고, 1895년(고종 32년)에는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서 진주부 관찰사[8], 공주부 관찰사[9]를 맡았다. 그후 1896년(건양 원년)에는 비서원경 직을, 1897년(광무 원년)에는 상의사장 직을 역임했다. 1898년(광무 2년)에 여흥부대부인이 사망했을 때 장례를 책임졌고, 태복사장(太僕司長)으로서 경효전제조(景孝殿提調)가 되었다. 다음해인 1899년(광무 3년)에는 특진관으로 왕실의 본 뿌리들인 전주[10]삼척[11] 에 단과 비를 세우는 일 및 조경단에서 제를 지내는 총책임을 맡았았다.
또한 장예원소경(掌禮院少卿)으로서 선원보속수교정당상(璿源譜續修校正堂上)이 되고, 종 2품 내무 협판 칙임관 3등에 올랐다. 1900년(광무 4년)에 학부 협판 칙임관 3등으로서 서리대신사무(署理大臣事務)로 임명받았고, 한성재판소(漢城裁判所) 수반판사(首班判事)직을 맡았다. 이듬해 법부 협판 칙임관 3등으로서 서리 대신 사무와 법부법률기초위원장(法部法律起草委員長)이 되었고, 1902년 회계원경으로써 홍문관 학사와 평식원 총재를 겸임하였다.
이후에도 1904년(광무 8년) 궁내부 특진관, 관제리정의정관(官制釐正議定官)을 역임하고 1905년(광무 9년)에는 정2품이 되어 내장사장(內藏司長) 칙임관 4등, 중추원 찬의가 되었다. 1906년에는 경상북도 관찰사 칙임관 3등, 재실회계심사국장(宰室會計審査局長) 칙임관 1등을 역임하였다. 이렇게 끝없이 승승장구 했는데...
문제는 이 시기 높은 벼슬을 한 왕족들은 어떻게 된다? 그렇다. '''이 사람도 역시 친일 루트를 타게 된다. 그것도 아주 부끄럽게.'''
1907년 한일 신협약, 즉 정미7조약 체결 때 학부 대신으로서 앞장서 조약 체결을 이끄는 공을 세워,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서훈받아 '''정미칠적의 명단에 그의 이름을 당당히 올리게 된 것이다.'''
이후 신사회, 대동학회, 대한여자흥학회, 한자통일회, 국민연설회 등의 각종 친일 단체에서 임원을 맡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살해되었을 때는 한자통일회 지회장으로서 한자통일회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개최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다. 다음해인 1911년에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조우로(山縣伊三郞)에게 위로금 2만 원을 더 받았으며 같은해에 사망한 순헌황귀비의 장례 때 고문이 되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도 임명받았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에게서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는 불교계왕실을 중심으로 꾸준한 친일 활동을 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후원하여 조직한 불교 종단인 삼십본산연합사무소 고문을 맡았으며, 1917년에는 불교옹호회 고문도 역임했다. 1915년 다이쇼 덴노 즉위 축하를 위한 행사가 경성신사에서 열렸을 때 참석했고, 1917년 순종이 일본 황실 참배를 갈 때 수행했다. 1926년 순종 사후 익책문제술원 자격으로 묘호를 '순종(純宗)'이라고 전 한국 홍문관 학사 명의로 지었다.
3·1 운동권중현과 함께 작위를 반납할 의사를 표시했으나 일본 정부에게서 거절당했다. 광나루(지금의 광진)에 별장을 갖고 있을 만큼 호화롭게 살다가 1943년 7월 11일, 만 84세의 나이에 경성부 자택에서 사망했다.

3. 후손


부인은 대구 서씨(1858년 ~ 1936년)와 평산 신씨(1870년 ~ 1963년) 두 명이고 두 명의 부인들 사이에서 7남 1녀를 보았다. 딸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고 1남은 이원용(李源鎔), 2남은 이윤용(李潤鎔), 3남이 이연용(李淵鎔), 4남은 이관용(李灌鎔), 5남이 이순용(李淳鎔), 6남은 이운용(李沄鎔), 7남이 이면용(李沔鎔)이다.
장남 이원용은 1880년에 태어나 내각 참서관을 역임했는데 아버지보다 4달 앞선 1943년 3월에 사망했다. 이원용은 딸 다섯과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이 이해국(李海菊), 차남이 이해백(李海栢)이다. 이해국은 이재곤 사후 그의 자작위를 물려받아 친일 활동을 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말년이 영 좋지 않았다. 1950년 9월 30일 9.28 수복 직후 살해당했고 동생 이해백은 아예 실종되었다. 둘 다 자식은 없었고. 그래서 이원용의 대는 이재곤의 6남 이운용의 아들 이해석(李海釋)이 양자로 들어와 잇고 있다.
2남 이윤용은 1883년에 태어나 1947년 사망했는데 딱히 행적이 드러나진 않는다. 3남 이연용은 1890년에 태어나 1970년 사망했고 딸 둘만 있을 뿐 아들이 없어 남계는 단절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4남과 5남이다. 이 둘은 아버지와 다르게 독립운동가'''이다. [12]
4남 이관용은 1891년 태어나 대한민국 임시 정부 파리 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의 한국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한국 사회당 대표로 국제 사회주의자 회의에도 참여했으며 구미 위원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광주 학생 사건과 관련해 신간회 간부들과 일제 관헌을 규탄하는 한인중심의 대회를 개최코자 결의문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고 얼마 뒤 가출옥했으나 1933년 의문의 익사를 하고 만다.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이해인(李海寅)은 한국 전쟁 때 실종되어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고 후손도 없어 역시 대가 끊기고 말았다. 그 공을 인정받아 2007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에 지정되고 2008년 1월 20일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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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곤의 5남 이순용.
5남 이순용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쫓겨 상하이로 망명했고, 24세 때인 1921년에는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 선생이 쓴 소개장을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이승만을 만났다. 이후 이승만의 권유로 43세의 고령으로 미군에 입대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CIA의 전신인 OSS 요원으로 샹그리라[14]에서 장기현, 이문상, 현승엽, 조종익 등 11명과 함께 비밀 군사 훈련을 받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해 인도양을 거처 버마 등 남방 전투와 중국까지 진주한 뒤 한국 광복군의 이우전 회장 등과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8.15 광복 이후엔 이승만의 측근으로써 내무부, 체신부 장관에 외자처장과 외자구매청장과 해운공사 사장 등을 역임하며 대한제국 황실과 이승만 사이를 중재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 서울 컨트리 클럽을 만드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으며 1988년 사망했다. 슬하에 아들 둘 이해성(李海誠)과 이해정(李海正)이 있고 손자에 증손자로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서 이재곤의 아들들 중 후손이 가장 번성하고 있다.

4. 같이 보기





[1] 둘 다 '산이름 곤' 자로서 '山' 자가 '昆' 위에 있느냐 왼쪽 옆에 있느냐의 차이만 있다.[출처]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2]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이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내려 이신응(李愼應)으로 개명했다.[3] 양자가 되면서 이름을 이재완으로 개명한다.[4] 다만 그것은 원칙적인 것이다. 조선 왕계 최초로 서출 방계 임금인 선조 이후로 점차 왕사를 잇는데 위기감이 생기고 인조 이후 인조계 왕손이 매우 귀했기 때문에, 순조 시기부터는 대원군들의 종손(봉사손) 왕자의 4대손 이후에도 계속해서 왕족 신분을 유지시키는 경우가 생겨났다. 원리원칙대로 군의 후손들을 점차 왕족에서 배제할 경우 정말로 왕통 단절을 걱정해야할 판이었기 때문. 이러한 세습왕족가문들은 마치 일본 덴노가의 세습친왕가와 비슷한 목적이다. 세대가 지남에 따라 원래대로라면 신적강하로 평민화 되어야하는 방계들이 덴노가의 단절에 대비해 평민화되지 않고 계속해서 왕족 신분을 유지하는 것.[5] 1882년 국가 재정 절감을 위해 설치한 임시 관청으로 임오군란 이후 관제 개혁을 하면서 관상감 안에 감생청을 두고 개혁안을 제시하도록 하여 정부 기구를 재정비하고자 했다. [6] 조선 시대 5위에 있던 정6품 무관직.[7] 사간원은 조선 시대, 삼사의 하나로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로 장령은 사헌부, 사간원 등 소속의 정4품 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다.[8] 현재의 경상남도지사 격.[9] 현재의 충청남도지사 격.[10] 조선 왕실의 본관이다.[11]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전주를 떠나 처음 정착했던 곳이다.[12] 이는 전세계에서 생각보다 많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각 나라의 매국노는 자식들에게 최고급 교육을 해주길 마련이고 공부 잘하는 자식일수록 식민지 본국과 본래 민족에게도 속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자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다.[13] 단, 대가 끊겼기 때문에 경창군파 13대 종주인 조카 이해석이 대신 수여받았다.[14] 현재 캠프 데이비드, 미국 대통령 별장이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