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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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정웅(鄭雄)
'''본관'''
경주 정씨
'''출생일'''
1928년 4월 17일 (96세)
'''출생지'''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제천리
'''학력'''
순천공립중학교 (졸업)
육군호국사관학교 1기(졸업)
육군보병학교 1기 (졸업)
육군대학교 (졸업)
합동참모대학교 (졸업)
전북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경력'''
전북대 ROTC 단장
제31향토방위사단장
민추협 부의장
평민당총재 안보국방특보
평민당 군정치 중립화 추진 위원장
김대중 대통령후보 선대본부 부위원장
평민당 안보국방위원장
평민당 당무지도위원회 부의장
평화민주당 행정위원
대한민국 국회의원
자유민주연합 특임행정촉탁위원

1. 개요
2. 생애
4. 영향
5. 정치활동
6. 선거 이력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2. 생애


1928년 4월 17일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면 제전리에서 태어났다. 1945년 3월 순천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서 근무하다 1949년 육군호국사관학교에 지원해 합격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육군소위로 소집되어 호남 지구 공비토벌전과 저격 능선 등 전방에서 전투부대 중대장으로 싸웠다. 휴전협정 이후 소령으로 진급하여 육군본부 감찰관실에서 일하다 중령으로 진급하고 군 교육기관 교관과 전방사단의 사단 작전참모, 정보참모로 근무했다. 1968년 대령이 되면서 연대장을 하다 전북대 ROTC 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사단 참모장과 육군본부 작전참모국을 거쳐 1974년 사단 부사단장 재임 당시 국방부 유엔군 참전 기념비 건립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6.25에 참전한 유엔군 16개국 중 미국, 프랑스, 필리핀, 그리스 등 12개국의 기념비를 건립했다. 1976년 준장으로 진급하고 관구 참모장과 군사령부 인사참모로 근무했다. 1980년 1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제31향토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돼 광주로 부임했다.

3. 5.18 민주화운동 시기


5.18 민주화운동 초기, 그 당시 육군 제31향토방위사단장으로서 "첫 번째"로 학생시위 진압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강경 진압"을 기대했던 신군부 측의 바람과는 다르게, 현장에 있는 시민들의 말을 경청하며 "유혈진압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병력을 적절히 운용하지 못했고 분산 운용으로 효율적인 진압을 하지 못했다."는 명분으로 진압군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이후 신군부는 익산에 있는 특전사 제7공수특전여단을 "2번째 진압부대"로 파견했으며, 이들 2차 진압부대들은 고층 건물 옥상을 하나씩 점유해가는 한편, "민간요소(civilization)"를 고려하지 않고, 학생-일반시민 구분없이, "전투적인(combat) 행위"를 최우선으로 두는 행태를 보였으며, 특히 5월 21일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향해 "총기발포"를 자행, "주민등록이 된 사망자" 수만 165명(후유증 사망자 376명)이 나오는 유혈사태를 불러오고 말았다.
강경 진압에 미온적이었던 정웅은 이후 반강제로 육군 소장 예편되었다.

4. 영향


당시 사단장이던 정웅 소장(1980년 예편)은 강경진압에 부정적이었다. 전남북계엄분소장 및 전투교육사령부(현 육군교육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윤흥정 중장의 출동명령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정웅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던 31 향토사단에 대한 광주 시민들의 인터뷰 기사[1] 에 따르면 향토사단에게는 심지어 ''빵이나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고 할 정도. 31사단 병력은 공수부대와 달리 온건한 대응을 폈다는 증언도 있다.
신군부에서 내린 강경진압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정웅 장군은 강제예편되었고, 이후 김대중에게 광주의 진상을 폭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광주 북구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가 당선되었을 때 90%가 넘는 지지율을 받으며, 정웅 장군의 과잉진압을 거부하며 강제예편 당한 희생을 광주 시민들이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군내에서 지휘관의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었다. 나아가, 아무리 상급자의 명령이라도 그것이 부당하면 그것을 무마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양심과 강단이 있느냐, 없느냐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살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5. 정치활동


대한민국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 출마하려고 했지만, 외부의 강압으로 후보자에서 사퇴하는 등 7년 동안 제약받는 사회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1988년 6공화국 출범 후, 평화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대한민국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광주 북구 후보로 나가 5.18 희생자와 광주시민의 명예 회복을 내걸고 "초선 출마", 91.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당시 전국 최고 득표율 기록이며, 2020년대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당선되었다. 1992년 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

6.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동구·북구)
무소속

후보사퇴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광주 북구)
'''평화민주당'''
'''127,579 (91.5%)'''
'''당선 (1위)'''

[1] 해당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략) 이와 관련하여 광주 사태를 목격했다는 박 모씨(38)는 『광주 사태 때 광주 시민들이 정 장군의 향토 사단 병력에는 빵, 음료수 등을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공수부대는 얼룩무늬 군복을 , 향토 사단은 초록빛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향토 사단 병력은 시민들을 과잉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때 향토 사단마저 발포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라고 말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