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1991년)

 

민주당

'''민주당'''

통합민주당
신민주연합당

새정치국민회의
새한국당

통일국민당
(개별 합류)
[image]
'''민주당'''
'''영문명'''
Democratic Party
'''창당일'''
1991년 9월 16일
'''해산일'''
1995년 12월 21일
(개혁신당과 합당, 통합민주당으로 창당)
'''통합 정당'''
''','''
(1991년 9월 16일 신설합당)

(1995년 2월 24일 흡수합당)
'''당 색'''
적색 (#D82634, 창당 초기)
녹색 (#009D68, 14대 대선부터)
'''의석수'''
39석 / 292석 (14대 국회, 개혁신당과 합당 직전)
'''중앙당사'''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318 (용강동)
1. 개요
2. 강령과 정책
3. 상세
4. 역대 선거
5. 역대 대표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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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1년 9월 16일 창당되어 1995년 12월 21일까지 존속한 한국의 정당. 제14대 국회 기간 동안 사실상 유일한 야당이었다.
민주당계 정당의 역사가 워낙 복잡하게 얽혀있어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현 민주당계 정당의 직접적 전신'''으로 언급되는 정당 중 하나이다. 민주당계의 양대 계파인 동교동계와 꼬마민주계(친노의 전신)가 결합했다는 점에서 그 상징성이 크다.[1]

2. 강령과 정책


강령

정치 : 국민적 지지에 의한 민간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국민이 신뢰하는 민주주의와 도덕정치를 구현한다.

인권 :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어떠한 제도나 행위를 배격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한다.

외교안보 : 세계평화와 공존 공영을 지향한다. 민족의 자존과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민주안보 민주외교를 적극 추진한다.

통 일 : 평화공존 평화외교 평화통일의 3단계 통일방향을 추진한다. 겨레의 염원인 통일을 이룩하는 희망찬 민족사의 창조주역이 된다.

경 제 : 자유경제 체제를 보장한다.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확립한다.(부의 공정한 분배 중소기업의 우선적 발전)

사 회 :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부당한 차별과 불균형을 해소한다. 진정한 국민화합에 서로 믿고 살수 있는 민주사회를 건설한다.

교육. 문화 : 고유의 자율성과 창작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민주화와 통일시대에 걸맞는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민족문화를 창달한다.

정책

민주적 기본질서 확립

민주안보 자주외교 태세를 확립한다.

상호 존중의 민족통일을 추진한다.

정의 경제를 실현한다.

중소기업 중심의 안전성장을 추진한다.

농민 수산업의 보호와 육성한다.


3. 상세


1990년 3당 합당에 따라가지 않은 채 반년의 반항을 거친 꼬마민주당노무현 등 몇몇 스타 정치인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조직력의 현저한 약세를 절감하고 있었고, 3당 합당으로 졸지에 소수야당이 된 평화민주당은 재야 인사들을 영입하여 신민주연합당으로 개편하였으나 지방선거에서 패배해버렸고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에 맞서기 위해서는 야권 통합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에 두 당이 합당을 추진하여 1991년 9월 16일 민주당이란 이름으로 창당된다.[2] 당시 신민당(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의 당세는 거의 10:1에 가까웠으나, 당명을 민주당으로 하고, 김대중이기택이 공동대표를 맡으며, 대의원 구성도 1:1로 하는 등 신민당 측이 많은 양보를 하였다.
여담으로 당시 영국의 외신은 1990년 창당된 민주당이 없어지고 1991년 민주당이 창당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다가 방송사고를 내는 바람에 그냥 자막으로 1990과 1991을 붙여서 보냈다고 한다.
다음해인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3]에서 97석을 차지하며 선전하였으나, 부산직할시에서 출마한 노무현, 김정길 등은 전원 낙선하는 등[4] 지역구도의 벽을 뚫지 못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 민주자유당[5] 및 친 노태우 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미 30년전인 1992년 대선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후보 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강조
결국 막판 초원복집 사건으로 지역감정이 유발되고 민주자유당 지지층이 결집하면서,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190만 표 차로 패배하고 만다. 낙선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고, 그 후로는 이기택이 단독 대표로 당을 이끌었다.[6] 이후 통일국민당이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면서 사실상 유일한 야당이 되어 민자당과 맞섰다.
1995년 3월 7일, 새한국당[7]을 흡수하여 당세를 확장하고,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선다. 조순 서울특별시장을 당선시키는 등 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을 앞섰으나, 이기택이 동교동계와 충돌을 감수하면서까지 공천한 장경우 경기도지사 후보가[8] 민주자유당 이인제 후보에게 패하면서 이기택과 동교동계의 불화가 심화되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리고 결국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여 1995년 9월 5일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동교동계 인사들이 집단 탈당하면서 제2야당으로 전락한다. 갈등이 얼마나 심했냐면 동교동계는 모금을 해서 겨우 사들인 '평화민주당 김대중' 이름으로 등기된 당사까지 던져놓고 나갔다.
김원기, 노무현 등 잔류 인사들은 이기택 퇴진론을 펼쳤으나, 이기택이 공동대표 체제를 선언하면서 일단 봉합되었다. 그 후 시민운동 계열 인사들과 합작을 모색하면서 1995년 12월 21일 개혁신당과 통합, 통합민주당(1995년)으로 개편하여 소멸되었다. 이후의 역사는 통합민주당(1995년) 항목 참조.

4. 역대 선거



5. 역대 대표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1] 흥미로운 점은 또한 이 당이 현재 보수정당의 법적 전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1995년 9월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나가면서 잔류한 사람들이 시민단체 계열의 개혁신당과 합당하여 같은 해 12월 통합민주당을 창당하였는데 이 통합민주당이 민주자유당이 당명을 바꾼 신한국당과 신설 합당해서 창당한 정당이 바로 한나라당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은 2012년 새누리당으로, 2017년에는 자유한국당으로, 2020년에는 미래통합당으로 신설합당 후, 국민의힘으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른다.[2] 그러나 꼬마민주당의 박찬종, 김광일 의원과 고영구 부총재는 여기에 동참하지 않았다.[3] 해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자신과 거리를 두던 신민주연합당 내 정치발전연구회 소속 정치인 중 일부를 공천탈락시켜 논란이 되었다. 노승환은 이에 반발하여 탈당하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4] 부산 해운대구가 지역구였던 이기택은 전국구로 옮겨 낙선을 면했다. 다른 꼬마민주당 출신 의원 중에는 장석화(서울 영등포갑)만 살아남았고 1990년 진천-음성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던 허탁도 낙선했다.[5] 국민의힘의 전신[6] 다만, 당내 다수파는 동교동계였으므로 이기택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7]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존재했던 정당으로 전형적인 보수정당이었다.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에 맞서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민자당을 탈당한 이종찬김현욱, 이영일, 장경우 등과 함께 1992년 10월 창당했다. 주로 민주자유당 내 민정계(민주정의당)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름이 신한국당과 비슷하다.[8] 동교동계가 밀었던 인물은 이종찬이었다. 그런데 내면을 보면 둘 다 민정계의 새한국당 출신이라는 점에서 도긴개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