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어진

 



1. 개요
2. 상세
2.1. 당대의 어진
2.2. 표준영정
2.3. 선원보감
2.4. 그 외
3. 기타


1. 개요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의 어진.

2. 상세



2.1. 당대의 어진


정조는 어진을 자주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어진 화사에 참여 했으므로 매우 뛰어난 어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용두동 대화재 때 홀랑 다 타버려서 정조의 얼굴은 열성어진의 간략한 초상화로 추정할 뿐이다. 정조의 표준영정이 다소곳한 이미지라면 현재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남아 있는 초상은 골격이 우람해서 무인 기질이 엿보인다. 표준 영정을 다시 그리는 것을 고려해 봐야 할 듯하다.[1] 열성어진에 실린 정조의 모습 역시 선원보감의 그림과 같은 것이라 추정된다. 게다가 그림의 퀄리티는 더 떨어졌다. 다만 정조 어진 중 수원 화성 화령전에 모셔졌던 구군복 차림의 어진은 일제강점기 때 창덕궁으로 옮기던 중 분실 되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발견될지도 모른다. 우습게도 분실된 것이 다행인지도 모른다. 만약 분실되지 않았다면 다른 어진과 마찬가지로 부산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을 것이다.

2.2. 표준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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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표준영정 지정번호 : 제42호
정조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그린 구군복 차림의 어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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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표준영정을 그린 이길범 화백이 그렸다.[3]

정조는 평생 동안 어진을 3번 그렸다고 한다. 정조를 그렸던 어진화사 중에는 김홍도도 있어 매우 귀중한 가치를 지닌 어진이었다. 정조를 포함한 조선 왕조 역대 임금들의 어진들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지 부산으로 옮겨졌는데 정전 협정 이후에도 이승만 정권은 어진을 부산에 방치하였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4] 또한 정조 어진 중 화성행궁 옆 화령전에 모셔졌던 구군복 차림의 어진은 일제강점기창덕궁으로 옮기던 중 분실되어 당대에 그려진 정조 어진은 현재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표준영정 밑의 어진은 후대에 제작된 상상도로서 정조 표준 영정을 그린 이길범 화백이 그린 것이다. 좌측은 1989년 9월 26일수성고등학교가 수원 화산릉 행차 행사에서 사용된 정조의 얼굴을 상상하여 그린 어진이고, 우측의 어진은 경매장에 나온 어진이라고 한다. 수성고등학교에 모셔진 어진이 실제 얼굴과 가깝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조의 표준 영정으로 공식 지정된 이길범 화백의 정조 어진이다. 물론 실제 어진이 불타 사라졌으므로 완전히 상상해 그린 것인데, 같은 이길범이 그린 고려 태조 왕건의 초상화와 너무 비슷하게 그려서 성의없다는 지적이 있다. 어쨌든 현재 어진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고 방송이나 왕실 관련 행사에 공식적으로 쓰인다.

2.3. 선원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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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보감에 실린 정조 초상화
열성어진에 실린 정조 초상화
그런데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실린 정조의 초상화는 위의 공식 어진과는 달리 자못 야성적인 얼굴인데 후술된 순조의 회상과 일치한다. 드라마영화에서 귀공자훈남으로 묘사된 정조에 익숙한 사람들 중 일부는 이 어진을 보고 당황하기도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시백 화백은 이 어진을 바탕으로 정조의 얼굴을 묘사했다.[5]

2.4.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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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리고 중국 도자기 골동품 경매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가 어느 미국의 박사가 스웨덴의 왕족으로 부터 정조 추정 어진을 구입하였다는 정보를 얻어서, 사진을 입수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게재를 하였다. 왕실에서 정식으로 그린 어진이 아니고 민간에서 그린 그림으로 추정된다. 열성어진의 정조와 약간 흡사해서[6] 경매 블로그 측에서는 이 그림이 실제 정조에 모습에 가까울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 포스팅을 봐선 아닐 가능성도 농후해 보인다. 특히 저 그림은 불교식 탱화에 가까운 모습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원보감과 열성어진에 실린 어진들 자체가 실제 모습과 동떨어졌다'''.

3. 기타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사도세자의 릉인 융릉에 설치된 문인석이 정조의 얼굴를 형상해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링크
[1] 정조의 표준영정을 그린 화백이 선원보감의 간략하게 그린 초상화를 바탕으로 그린 어진이 있다. 그 어진으로 교체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기타 문단에 있는 조선 문단에 있는 정조 어진 상상화를 참조.[2] 수원 화성 화령전에 봉안되었다.[3] 이 정조 어진은 수성고등학교에서 수원 화산릉 행차 행사에서 사용되었다.[4] 정조 어진 뿐만 아니라 조선 왕조의 어진 대부분이 한국 전쟁 중 또는 전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5] 그런데도 많이 준수하게 그려졌다. 가져온 것은 각진 과 짧은 텁석부리 수염 정도...다만 나이가 든 모습은 위 초상처럼 어느 정도 후덕한 모습이다.[6] 겹으로 된 턱과 구레나룻을 보면 일치하는 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