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조선)/가계

 



1. 가계
2. 기축별감 사건(1769년)
3. 20년 간의 짝사랑(1766년 ~ 1786년)
4. 병오년의 변고(1786년)
5. 상상 임신(1781년, 1787년)


1. 가계


  • 정비 : 효의선황후 김씨 (1753년 12월 13일 ~ 1821년 3월 9일)
  • 후궁 : 의빈 성씨(성덕임) (1753년 7월 8일 ~ 1786년 9월 14일)
    • 첫째 : 유산 (1780년 ~ 1781년 추정)
    • 둘째 : 유산 (1781년 ~ 1781년)
    • 아들 : 문효태자 (1782년 9월 7일 ~ 1786년 5월 11일)
    • 딸 : 옹주 (1784년 3월 20일 ~ 1784년 5월 12일)
    • 다섯째 : 복중 사망 (1786년 음력 9월 14일)[1]
  • 후궁 : 현목수비 박씨 (1770년 5월 8일 ~ 1822년 12월 26일)
  • 후궁 : 원빈 홍씨 (1766년 5월 27일 ~ 1779년 5월 7일)
  • 후궁 : 화빈 윤씨 (1765년 4월 11일 ~ 1824년 1월 14일)

2. 기축별감 사건(1769년)


1769년(기축년), 정조는 여동생 청선공주의 남편 흥은위 정재화, 그리고 별감들과 기생집을 드나드는 등 방황의 시간들을 보낸다. 이 일은 일명 '기축별감사건'으로 《한중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정조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는 모습과 대조적인데, 이 때 정조의 나이가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 불리는 18세였던데다, 세손빈(효의왕후)과 금슬이 친밀치 못했고, 마음에 둔 궁녀(의빈 성씨)에게는 거절당했으니 일종의 사춘기의 반항이었을지도? 

3. 20년 간의 짝사랑(1766년 ~ 1786년)


정조가 27살이던 1778년, 정순왕후가 후궁 간택령을 내리면서 정조는 궁인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 간택령으로 간택된 후궁이 바로 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다.

"대궐 안에 있는 궁인(宮人)을 어찌 많지 않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주상의 본래부터의 성념(聖念)이 미천(微賤)한 처지의 사람에게서는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2]

"빈(의빈)을 후정(후궁)의 반열에 둔지 지금까지 20년이다."

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앞서 여러 기록에 나오듯 정조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은 왕이었다. 그런데 로맨티시스트적인 모습도 보이는데,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그 일화가 전한다.
1766년, 정조는 15살이던 당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집 청지기의 딸이자 처소 궁녀였던 의빈 성씨(성덕임, 당시 나인 14세)에게 승은(왕이 궁녀와 합방하는 것)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의빈 성씨는 효의왕후(당시 세손빈 14세)가 아직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울면서 못한다고 사양하고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다시 재촉하지 않았다.
당시 실록이나 일기에 이 사건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 일은 오랫동안 비밀로 한 것 같은데, 사도세자가 궁녀들을 가까이해서 영조의 눈밖에 나 죽기까지 했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초야를 막 치른 젊은 세손이 세자와 같은 비행을 저지른다고 영조의 눈밖에 날 우려가 있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정조도 즉위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이후 후사 문제 때문에 15년 동안 후궁(원빈 홍씨, 화빈 윤씨)을 뽑았고 다시 의빈에게 명하였지만 또 사양했다. 또 사양한 이유는 안 나와 있다. 그러자 정조가 의빈의 사속(私束, 궁녀가 부리는 하인)을 책벌한 연후에야 비로소 스스로 명을 따랐다고 한다.[3]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던 정조가 15년이나 기다려 취할 정도면 의빈 성씨는 상당히 재색[4]을 갖춘 여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여홍(=여공, 바느질·자수)에 민첩하고, 요리도 잘하고, 붓글씨도 범상치 않고[5], 수학도 잘했다고 한다.
의빈 성씨는 정조에게 대단한 총애를 받아서 연년으로 유산 2번, 문효세자, 딸 하나를 낳지만 딸은 옹주 책봉되기도 전에 죽고 문효세자도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거기다 의빈 성씨는 만삭인 상태에서 정체불명의 병으로 사망해 아이 또한 복중 사망한다. 이때까지 겨우 5년이었다. 정조는 의빈 성씨와 그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에 몇 번이나 거둥(왕의 행차)하였고,[6] 이 때문에 오늘날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고개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한다.서울 지명 사전
여담이지만 숙종 - 영조 - 사도세자 - 정조에 이르기까지 4대 째 웃전의 궁녀에게 반했다. 숙종은 계증조모 장렬왕후 처소의 궁녀였던 희빈 장씨에게,[7] 영조와 사도세자는 법모/계조모인 인원왕후 처소의 궁녀였던 영빈 이씨경빈 박씨에게,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였던 의빈 성씨에게 반해 후궁으로 삼았고 아들을 얻었다.

4. 병오년의 변고(1786년)


임오화변으로부터 24년 뒤인 1786년(정조 10년, 병오년)에는 유독 정조와 관련된 인물들이 많이 죽었다. 5월 11일, 맏아들 문효세자가 홍역이 발병한 지 8일 만에 훙서(薨逝)했으며,[8] 7월에는, 계조모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가 유배지인 흑산도에서 죽었다. 9월 14일, 셋째를 임신 중이던 후궁 의빈 성씨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졸하였고, 11월에는 조카 상계군 담이 의문사[9]했다.
정조는 이러한 불행의 원인이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 자리가 흉지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했고, 정조 11년에 올라온 상소에 따라 사도 세자의 무덤을 천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0]

5. 상상 임신(1781년, 1787년)


《정조실록》에 의문의 산실청 기록이 두 번 보인다. 산실청은 비빈의 출산을 돕기 위해 설치하는 임시관청으로 보통 출산 6일 뒤에 철수된다. 《정조실록》 첫 산실청 기록은 1781년(정조 5년) 1월, 후궁 화빈 윤씨의 산실청 설치 기록이다. 10개월 뒤인 《일성록》1781년 11월에 화빈의 출산을 고대하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뒤 어디에도 출산 기록은 없고, 화빈의 산실청이 무려 30개월이나 지속되었다는 기록만 보인다.
비슷한 케이스로 1787년(정조 11년) 9월, 이번에는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가 임신하여 산실청을 설치했다. 정조는 6년 전 화빈이 임신하자마자 산실청을 설치했으나 출산에 이르지 못한 실망감 때문인지 이번에는 해산달에 산실청을 설치했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출산하지 못했고, 결국 1788년(정조 12년) 12월, 산실청을 철수했다.
이들의 경우 공통적으로 산실청이 1년 넘게 지속되었으나 어디에도 출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임신해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상상 임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1]
그런데 화빈처럼 효의왕후도 상상 임신이었지만 화빈과는 다른 점이 효의왕후의 경우에는 상상 임신이었어도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는데 반해, 화빈은 산실청을 철수한 기록도 없다.


[1] 정조대에 가선 왕실의 손이 워낙 귀해졌기 때문에 남녀+적서차별 없이 태어나기만 했으면 금이야 옥이야 자랐을 텐데 엄마 뱃속에서 세상 빛도 못 보고 죽었다.[2] 1778년, 정순왕후의 후궁 간택령(조선 왕조 실록)[3] "承恩之初以內殿之姑未誕育涕泣辭以不敢矢死不從命予感之不復迫焉後十五年廣選嬪御復以命嬪又固辭至責罰其私屬然後乃從命自當夕之月卽有身以壬寅九月誕元良是歲封昭容旋進秩宜嬪以子貴也", 정조 《어제의빈묘지명》[4] "嬪之葬必用予銘豈爲才色之不忘乎哉", 정조 《어제의빈묘지명》[5] 실제로 정조의 두 여동생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전10권에 달하는 고전 소설 《곽장양문록》을 필사하기도 했다.[6] 문효 세자가 먼저 죽고 뒤이어 의빈 성씨가 죽었는데 정조는 그래도 죽어서라도 모자가 함께 있으라고 의빈 성씨를 문효 세자 옆에 묻어줬다.[7] 숙빈 최씨는 웃전 소속은 아니다.[8] 우연의 일치이지만, 사도 세자도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죽었다.[9] 자살했다는 설, 아버지 은언군이 죽였다는 설이 있다.[10] 그리고 신기하게도 진짜 아들이 태어난다.[11] 정조 5년, 정조 11년은 정조가 무남이던 때였다. 왜냐면 정조의 장남인 문효 세자는 정조 6년 ~ 정조 10년까지 살았고 정조의 차남인 순조는 정조 14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