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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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랑한다''', 참으로 속이 탄다. 네가 죽고 나서 나와 헤어졌다.
- 정조, 《어제비문》
"빈(의빈)을 후정(후궁)의 반열에 둔지 지금까지 20년이다."
嬪之置後庭之列廿載于玆
- 정조, 《어제의빈묘지명》#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 정조, 《어제의빈묘표》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aa10no=kh2_je_a_vsu_25102_001&aa15no=001&aa20no=25102_001_0001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而亦哀予之不能忘哀也"
- 정조, 《어제의빈치제제문》#
'''조선의 왕의 승은을 2번이나 거절하고 15년이나 기다리게 만든 여인'''"살아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我思矣千古之訣"
- 정조,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의 세번째 후궁이자[7] 《곽장양문록》 필사에 참여한 인물[8] 중 한 명이다.
본명은 '''성덕임'''이다.정조가 직접 쓴 《어제의빈묘지명》에서 붓글씨가 뛰어나고 수학, 바느질, 요리를 잘하며, 예의가 바르고 효의왕후를 공경하며, 재주와 용모를 잊을 수 없다는 등으로 보아 팔방미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두 번 내린 승은을 모두 거절했으나 그로 인하여 하인이 문책을 당하고 벌을 받게 되자 뜻을 굽히고 스스로 후궁이 되었다.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이 되었지만 본가는 외척이라는 이유로 오빠 성식[9] 은 어영청[10] 에서 파면되었고, 아들이 왕세자(문효세자)로 책봉 되고나서 본가에 대해 증직을 해야 하는 일도 미뤄졌다.[11]
두 번의 유산을 겪고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으나 모두 앞세워 보내고 만삭의 몸으로 사망했다. 생전의 바람대로 문효세자의 무덤과 한곳에 묻혔고 정조의 배려로 모자의 사당도 한곳에 마련되었다. 고종 때 사당인 의빈궁(宜嬪宮)이 문효세자의 사친으로 칠궁(七宮)에 봉안 되었다. 하지만 순종 때 제사제도 개정안인 ‘향사이정에 관한 건’이 반포 되어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한 의빈궁 신위가 매안(埋安)[12]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의빈묘가 서삼릉 내 후궁 묘역으로 이장 되었다.
2. 생애
2.1. 곽장양문록 필사
곽장양문록 문서 참고 바람.
2.2. 출생과 입궁
본관은 창녕이고 이름은 덕임이며 1753년(영조 29) 음력 7월 8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 찬성 성윤우(成胤祐)[14] 이고 어머니는 통덕랑 임종주(林宗胄)[15] 의 딸인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이다.
아버지 성윤우는 본래 홍봉한(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자 정조의 외조부)의 청지기[16][17] 였다. 신분은 낮고[18] 집안은 가난하고 변변하지 못해서[19] 늦은 나이에 무관의 반열에 올라 1753년(영조 29)에 교련관으로 임명 되었고 1754년(영조 31)에 경복궁 가위장이 되었다. 1755년(영조 31) 6월에 절충장군으로, 9월에는 가선대부에 봉작 되었고 1761년(영조 37)에 유원 첨사(첨절제사)가 되었다.[20]
《승정원일기》에 나오는 성윤우와 《이재난고》 속의 성윤우는 동일인물이다. 1784년(정조 8)에 성흡(成洽)이 무과에 합격했을 때 아버지 성윤우의 관직이 첨절제사(무관, 종3품)[21] 였다는 점과 《무보》, 《갑진왕세자책봉경용호방》, 《창녕성씨상곡공파족보》에서 성담(成湛), 성완(成浣)[22] , 성흡(成洽)이 무과에 합격 했고, 이들의 아버지가 성윤우이며, 조부는 성수산(成壽山), 증조부는 성근립(成謹立), 고조부는 성경(成景)이라는 점이 일치한다.
전포 아문의 관리가 7천 냥을 범포(나라에 바칠 돈이나 곡식을 써 버림)한 사건으로 성윤우가 거의 죽을 만큼 무너진 일은[23] , 성윤우가 군문의 고직(고지기, 관아 창고를 지킴)[24] 으로 있을 때 생긴 일로 추측 된다. 고직의 업무가 창고 관리인만큼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많아서 엄하게 다스렸으니 당시 성윤우는 담당 고직으로서 문초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포아문 관리의 7천 냥 횡령은 제법 큰 사건인데 《조선왕조실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의빈은 홍봉한[25] 가문과의 연으로 인하여 1762년(영조 38)[26] 이후에 입궁하게 되었고 혜경궁이 친히 길렀다.[27][28] 의빈이 입궁 할 무렵 친어머니(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는 이미 1756년(영조 31)에 사망한 후였으며, 아버지는 평소 담벽증[29] 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와병 중이고 가세가 많이 기울어졌을 것으로 추측 된다.
헌종 비나 철종 비는 자식이 없어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궁녀를 양녀처럼 키웠던 경우가 있었으나, 혜경궁은 의빈과 비슷한 나이의 자녀가 셋(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이나 있었다. 하지만 임오화변(1762년) 이후 아들 정조는 1776년(영조 52, 정조 원년)까지 혜경궁이 머문 창덕궁이 아닌 경희궁에 머물렀고 두 딸인 청연공주는 1765년(영조 41), 청선공주는 1766년(영조 42)에 하가를 하게 되어서 3남매가 혜경궁을 자주 만나러 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에 반해 덕임은 친정 아버지와 연이 있고 혜경궁 처소의 궁녀로 늘 혜경궁 곁에 있을 수 있으며, 3남매(정조, 청연공주, 청선공주)와 비슷한 나이대여서 혜경궁이 덕임을 자식처럼 기른듯하다.
출신 신분이 중인이었다는 점과 혜경궁이 수양딸로 키운 걸 보아 지밀, 침방, 수방과 같은 고위직속의 생각시였을 가능성이 높다.[30] 중인 출신으로 희빈 장씨와 같은데, 18세기 이후부터는 법적으로 노비나 천민만 가능한 법을 무시하고 중인 출신을 지밀, 침방, 수방의 고위부서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2.3. 승은 거부 및 승낙
1766년(영조 42)에 정조가 승은을 내리려 했다. 의빈은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정조는 납득하고 물러났다. 추정컨대 영조 재위 시절, 아버지처럼 웃전 소속의 궁녀를 후궁으로 삼으면 사도세자처럼 될 수도 있으니 당시에는 사건 자체를 덮어둔 모양이다.
1778년(정조 2)에 원빈 홍씨를 간택했고 원빈 사망 이후 1780년(정조 4)에 화빈 윤씨를 간택하자고 했을 때 정조는 새 후궁을 들이는 것을 꺼리다 받아들였다.[31] 화빈 간택 이후[32] 에 정조는 의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는데 의빈은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거절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뜻을 굽히고 정조가 내린 승은을 받아들였다.[33]
정조의 말에 따르면 승은을 입고 상의(尙儀)[34] 에 오른 것 같은데, 정작 실록에서는 궁인 성씨를 소용으로 봉작할 때 ‘의(衣)’라고 표기했다. 내명부에서 옷이 명칭으로 들어가는 궁녀는 상복(尙服)과 전의(典衣)뿐인데, 정조가 쓴 글에서는 분명 상의(尙儀)라 나오기 때문에 오기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훗날 1786년(정조 10)에 《어제의빈묘지명》에서 정조는 1766년(영조 42)부터 의빈을 후궁의 반열에 뒀다고 회상했다.[35]
2.4. 자녀
1780년(정조 4)[37] 과 1781년(정조 5)[38] 에 임신 중이었으나 유산했다. 1782년(정조 6) 9월 7일 인시(새벽 3시~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39] 이 때 의빈을 딸처럼 키운 혜경궁 홍씨가 본가에서 데려온 몸종 복례[40] 와 유모 아지[41] 를 보내 출산을 도왔다."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 ‘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 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36]
의빈은 문효세자가 태어난 날 정5품 상의(尙儀)에서 정3품 소용(昭容)으로 올랐고[45] , 문효세자가 원자로 정해지고 나서[46] 1783년(정조 7)에 정1품 의빈(宜嬪)으로 진봉 되었다. 빈호는 정조가 직접 정했는데 ‘의(宜)’는 ‘마땅할 의’ 자로 ‘마땅하다, 알맞다’라는 뜻이 대표적이지만, 그 외에 '화목하다, 화순하다(온화하고 어질고 순하다), '아름답다, 선미하다(착하고 아름답다)'라는 뜻도 있다. 어제의빈묘지명에 묘사된 의빈 성씨의 행적을 보면 딱 알맞은 한자이다.“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42]
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하여, 하교하기를,'''“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소용궁에게 올릴 빈호를 의(宜) 자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정관을 패초하여 정사를 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하교하기를,
“빈(嬪)으로 봉작(封爵)하는 관교(官敎)는 작년에 이미 옥새를 찍어 하비하였으니, 자호(字號)를 정사를 열어서 거행할 필요는 없다. 다만 지방에 있는 낭관을 재촉해서 올라오게 한 후에 전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43]
[44]
1784년(정조 8) 윤달 3월 20일 묘시에 옹주를 낳았다.[47] 정조는 “아들이 있는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48] 고 했다. 그러나 옹주는 5월에 병을 얻어 피접을 나갔고 결국 5월 12일 신시에 경풍으로 요절했다.[49] 7월 2일에 원자(문효세자)가 세자로 책봉[50] 되었으나, 1786년(정조 10) 5월 11일에 홍역으로 죽었다.
2.5. 비극적인 죽음
의빈은 마음이 여리고 약해서 칠정(七情)[55] 증세가 있는데, 문효세자가 사망한 뒤에 중병에 걸려서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조금 낫자 창덕궁으로 돌아왔다.[56] 정조가 그날그날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57] ,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직접 살폈으나[58] 병이 악화 되었다. 결국 1786년(정조 10) 9월 14일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59] 의 몸으로 사망했다.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51]
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하였다.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52]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53]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病情奇怪, 竟至於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從今國事尤靡托矣)."'''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54]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정조가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고 말한 것을 볼 때 당시 의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병을 앓았던 것 같다. 일각에서는 의빈의 증세를 임신중독증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실제로 후궁이 된 이후 단기간에 수차례 임신과 출산, 유산까지 반복했으니 몸이 쇠약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3. 독살 의혹
3.1. 은언군에 의한 독살설
1786년(정조 10) 12월 1일에 정순왕후 김씨가 “은언군이 장남 상계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독살 했으니 그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언문 교지를 내렸는데, 당시 상계군은 이미 의문사 한 뒤였다.[60] 이로 인해 구선복이 상계군을 추대 하려고 했던 사실이 드러나자[61]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 보내졌다.[62]
…(중략) 기해년(1779년)에 이르러 홍국영(洪國榮)과 같은 흉악한 역적이 또 나와 감히 불측한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주상의 나이 30이 채 차지도 않았는데 감히 왕자를 둘 대계(大計)를 저지하고 상계군(常溪君) 〈담(湛)을〉 완풍군(完豊君)으로 삼아 가동궁(假東宮)이라고 일컬으면서 흉악한 의논을 마음대로 퍼뜨렸다. 주상이 그의 죄악을 통촉하고 그 즉시 쫓아내자, 흉악한 모의가 더욱 급해져서 밤마다 그의 집에 상계군을 맞이하여 놓고 널리 재화를 풀어 무식한 무리들과 체결하였으므로 잠깐 사이에 변이 일어나게 되었다…….(중략) 그런데 천만 뜻밖에 5월에 원자가 죽는 변고를 만나 성상이 다시 더욱 위태로워졌으나 그래도 조금은 기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는데, 또 9월에 상의 변고를 당하였다.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 나라에 관계됨이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 상의 변고에 온갖 병증세가 나타났으므로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필경에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히고 담이 떨려 일시라도 세상에 살 마음이 없었다…….(중략) 이때에 상계군이 불의에 죽었으므로 비록 그에게 무슨 아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방안에서 죽어 걱정이 조금 풀린 것 같지만 대의가 펴지지 못하고 윤강이 없어진 것은 진실로 그의 생사에 차이가 없다. 이러고도 나라를 보존할 수 있겠는가? ……(중략) [63]
3.2. 이윤묵에 의한 독살설
의빈이 내관 이윤묵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의혹에 정조가 직접 신문했다. 악연은 전라도의 먼 섬으로 죄인이 없는 지방의 여종으로 보냈다. 이윤묵은 1786년(정조 10) 11월 10일에 고향으로 방축(放逐: 자리에서 쫓아냄)[64] 되었으나 차후 유배 되었고 1791년(정조 15)에 유배지 파주목에서 풀려났다.[65] 손용득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 되었는데 1790년(정조 14)에 대사면(大赦免: 대규모로 죄를 용서하여 형벌을 면제함)으로 풀려났다.[66]
대제학 김종수가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어떤 인사가 찾아와서 이 종이 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종이쪽지에 ‘동내에 있는 손가(孫哥)란 놈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9월에 병환을 앓을 때에 내관 이지사(李知事)가 약물을 살펴보았는데, 약국의 약을 쓰지 않고 그의 약을 달여서 올렸으므로 그것을 먹고 그 즉시 죽었다. 비록 이런 일이 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왕대비께서 이를 알아차리고 상감(上監)에게 고하자, '''상감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 바로 성빈(成嬪: 의빈 성씨)의 치상소(治喪所)에서 이 지사를 붙잡아다 그 즉시 내보내 목을 베려고 하였다.'''[67]
그런데 중간에서 만류한 자가 있어서 그 자리에서 칼을 씌워서 멀리 귀양을 보냈다가 11월에 방면되어 돌아왔다. 대체로 이 내시는 일찍이 홍국영과 마음을 통해 체결하였는데 지극히 요악스러워서 옛날 조고(趙高) 라도 그보다 더할 수 없었다. 그의 양자 양대의(梁大宜)도 임금의 총애를 받아 품계가 높았는데, 그의 생부가 처벌을 받았을 때 그의 품계를 삭탈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약을 사용한 일에 있어서, 약을 조제하고 약을 다릴 때 내가 직접 살피었으니, 이는 궁중 안팎에서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더구나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에 두고 사용하였으니, 사실이 대체로 이와 같다.''' [68]
이는 중관(中官)이 궁방을 주관하였으므로 자기들끼리 시기한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니, 지난해에도 이처럼 터무니없는 말이 있었다. 그 단서의 유무를 기다려 문안(文案)을 내보여 주겠다."하였다. 이날 밤에 임금이 친히 손용득(孫龍得)을 신문하였다. 손용득이 공초하기를,
"내관은 바로 이윤묵(李允默)인데, 이윤묵이 귀양 갔을 때 그 집 늙은 여종이 신의 형수인 여복가(女卜家)에 와서 점을 쳤습니다. 그 여종이 말하기를 ‘우리 집 대감이 본궁을 주관하였는데, 혹 약을 쓸 때에 잘 살펴보지 않아 죄를 저질렀을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여 친하게 지낸 양반에게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여복 김아지(金阿只)에게 신문하니, 김아지가 공초하기를,
"내관의 여종이 말하기를 ‘큰 상전이 갑자기 귀양을 갔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약물을 살필 때에 잘 하지 못한 일이 있을까 염려되기에 와서 물어본 것이다.’고 하였는데, 손용득의 처도 이 말을 들었습니다."
하였다. 내관의 여종 악연(岳蓮), 악이(惡伊)와 대질시켰다. 손용득의 처 최아지(崔阿只)가 공초하기를,
"내관의 여종이 점을 친 것을 보았는데, 여복이 그 여종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신수는 마땅히 죽어야 하므로 이런 죄를 지은 것이다. 이번 상사(喪事)는 혹시 약을 잘못 쓴 소치가 아닌가?’ 하니, 그 여종이 대답하기를 ‘우리 상전이 본궁을 주관하여 매사를 살피고 있었으니, 약을 쓸 때에 잘못한 것이 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악연이 공초하기를,
"사실입니다."
하였다. 다시 손용득을 문초하니, 손용득이 공초하기를,
"말뜻의 줄거리를 모르고 갑자기 듣고 나니 놀랍고 분개하여 친한 사람에게 우연히 말한 것이지, 퍼뜨리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손용득을 형조로 넘겨 귀양 보내고, 악연은 형추하고 나서 먼 섬으로 귀양 보내 여종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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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화빈 윤씨에 의한 독살설
《이재난고》에서는 “의빈이 자현[70] 증상이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죽었다. 화빈 윤씨의 처소에서 은밀히 독을 써서 해친 까닭에 화빈은 중한 죄를 물어 내쳤다.”고 한다.[71] 하지만 《정조실록》, 《일성록》, 《승정원일기》에 화빈 윤씨를 내친다는 내용은 없다. 다만 화빈 윤씨의 고모부 조시위(趙時偉)[72] 가 귀양 보내졌다.[73]
4. 사망 이후
4.1. 의빈묘
의빈의 상례는 영빈 이씨의 예에 따라 후정 1등의 예로 거행하라고 했다.[74] 하지만 올해 든 흉년, 문효세자의 장례, 칙행(칙명을 전달하는 사신 행차) 때 많은 돈이 들었었다. 더군다나 나라의 비용이 손을 쓸 수 없음에 이르고 호조 재력까지 탕진되어 도감을 세울 수 없었다.[75] 그래서 영빈 이씨의 《등록》을 쓰지 않고 모든 비용을 아끼고[76] 호조와 전의감에 특별히 따로 설치하여 예장을 거행하되[77] 절차 법칙은 영빈이씨 때를 따랐다.[78]
9월 16일 묘시(오전 5~7시)에 입관하고[79] 안현(安峴)의 본궁에 빈소를 차렸다.[80] 《노상추일기》에서는 동궁(東宮)에 빈소를 차렸다고 한다.[81] 11월 20일에 효창묘[82] 왼쪽 언덕 임좌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83] 의빈묘와 효창묘는 한곳에 있고 두 묘의 거리가 백 걸음 떨어져있는데, 정조가 의빈의 생전 소망을 따랐다.[84] 숙종이 숙빈 최씨의 장지를 명선공주와 명혜공주[85] 의 산으로 정한 내관 장후재를 파직 한 전례와 비교하면 매우 파격적인 일이다.[86]
본래 의빈묘는 곡장,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 쌍, 문인석 한 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불순한 의도로 효창원이 효창 공원으로 격하되면서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으로 이장되었다. 문효세자는 백부인 의소세손과 나란히 묻혀있고, 의빈 성씨는 효창원에서 2km 떨어진 후궁묘역에 묻혀있다.
4.2. 사당
4.2.1. 의빈궁(宜嬪宮)
의빈은 따로 궁호를 정하지 않았는데 1787년(정조 11)에 문효세자의 사당인 문희묘 터를 정할 때 의빈묘(宜嬪廟)와 의빈궁(宜嬪宮)이라는 호칭이 처음 함께 등장했다.[87] 1797년(정조 21) 이후에 쓰인 《제물등록》, 1799년(정조 23)에 만든 《사전사례편고》, 1865년(고종 2)에 편찬한 《대전회통》[88] , 1867년(고종 4)에 반포한 《육전조례》[89] , 1873년(고종 10)에 개편된 《태상지》[90] 등에서 의빈궁(宜嬪宮)이라고 한 점을 보아 최소 1798년(정조 22)에는 의빈궁(宜嬪宮)으로 명칭이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의빈궁(宜嬪宮)은 대빈궁(大嬪宮)과 유사한데 의빈 성씨와 옥산부대빈 장씨(희빈 장씨) 모두 따로 궁호를 받지 않고, 의빈(宜嬪)과 대빈(大嬪)이라는 호칭 자체로 사당의 명칭을 정했다.
4.2.2. 안현궁(安峴宮)
인조의 잠저이자 원종[91] 의 옛집이 남부 회현방 송현에 있어서 송현궁(松峴宮)이라고 했듯이, 의빈의 빈소를 안현(安峴)의 본궁에 차려서 안현궁(安峴宮) [92] [93] [94] 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4.3. 칠궁
1873년(고종 10)에 개편된 《태상지》에서 ‘궁(宮)’에는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경우궁(景祐宮), 선희궁(宣禧宮), 의빈궁(宜嬪宮)[95] 이 속했다. 당시 의빈궁은 선희궁(영빈 이씨)과 같은 예법의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96] 1898년(광무 2)에 《향수조사책》에서 이 궁들을 칠궁(七宮)이라고 했고[97] , 의빈의 전체적인 호칭은 ‘의빈궁 의빈 성씨(宜嬪宮 宜嬪 成氏)’였다.
1908년(융희 2)에 제사 제도가 개정 되면서 의빈궁은 매안[98] 되고 제사는 원소[99] 의 예법으로 지내게 되었다.[100] 하지만 1909년(융희 3)에 만든 《향비규정(享費規定)》에서 의빈궁의 제사 때 쓰인 금액에 대해 나온 점으로 보아 칠궁에서는 폐지 되었어도 의빈궁이라는 호칭까지 폐지된 것은 아니다.[101] 이후 칠궁은 육궁(六宮)으로 있다가 1929년에 덕안궁(순헌황귀비 엄씨)이 들어오면서 오늘날의 칠궁이 되었다.
4.4. 어제문
어제문이란, 왕이 직접 쓴 글을 말한다.
4.4.1. 어제의빈묘지명
《어제의빈묘지명》 이미지
4.4.2. 어제의빈묘표
《어제의빈묘표》 이미지
어제의빈묘표는 정조가 1786년(정조10년)에 썼다. 어제의빈묘표의 탁본이 예술의 전당에 전시되었을때 보도자료에 탁본의 연도(혹은 비석을 세운 연도일 수도 있다), 서(書)한 사람들의 이름이 있다.[102]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이 함께 1책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어제의빈묘지명 또한 1786년(정조 10년)에 쓰였다.
내가 즉위한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일(1786년 음력 9월 14일)에 의빈 성씨가 사망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문효세자가 죽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달에 이르렀는데 죽었다.
빈은 사망하기 전날 밤에 옷섶을 정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게 “국가의 자손 번창 소망이 효의왕후가 아닌 천한 몸에서 나왔는데 병에 걸려 죽으니 이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입니다. 이제부터 자주 효의왕후에게 거둥하시어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바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효의왕후가 자식을 낳고 기르며 지내지 못 한 것을 항상 근심하고 탄식했다.
승은을 받기 시작할 때는 감히 효의왕후를 대신 하여 당석(잠자리) 할 수 없다며 간절히 사양했다. 내가 잠시 틈을 타서 무언가에 빗대어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해도 한 결 같이 온통 매우 간절했다. 더구나 빈은 숨이 끊어져갈 쯤에도 오히려 기운을 내서 마음속에 있는 진심을 완연히 전하니 감동 받기에 충분했다. 나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얼굴 표정을 고치고 약속하겠다고 했다.
내가 보건대 예로부터 첩이 시침하는 것을 보면 지체가 높고 귀한 사람은 항상 정위(정실)가 자신을 핍박하고 근심하게 만든다고 했다. 이에 정실을 업신여기고 욕되게 하였다. 빈은 병을 앓다가 죽음을 직면했을 때 사랑에 끌려 잊지 못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고, 사후에 사사로운 사랑에 얽매이는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빈의 권력과 부귀는 스스로 높여서 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빈은 죽음을 단연코 근심하지 않았다. 다만 한 결 같이 마음을 다하여 효의왕후가 반드시 소망을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그 현명함이 어찌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빈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고 내세우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을 억제했다. 처소는 수리하지 않고 의복을 입고 음식을 먹는데 있어서는 검소하게 절약하며 지냈다. 그리고 의빈은 “내가 지금 어긋난다면, 내가 감히 복을 바라고 아주 작은 사치라도 부리면 내 몸에 재앙이 있을 것이다. 이를 논할 겨를이 없는데 어찌 문효세자의 석복(생활을 검소하게 하여 복을 오래 누리도록 함)을 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엄히 다스려서 허둥지둥 일을 처리하게 한 적이 없었다. 때때로 은총을 받는 사람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을 만큼 엄하게 다스렸다. 하지만 빈은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지키며 임금이 내린 명령을 두려워 하는 기색 없이 분명하게 해냈다. 또한 내내 게으른 적이 없었다. 빈은 궁궐 처소에서 지낸지 20년이다. 부정하게 남에게 재물을 주는 자를 우러러보지 않았으며 효의왕후로부터 특별한 친애를 받았다. 빈을 잃은 효의왕후의 울음은 대단히 우애가 좋은 형제를 잃고 근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빈과 같은 사람이 어찌 많겠는가.
빈은 영조 29년, 계유 7월 8일(1753년 음력 7월 8일) 생이고 득년(향년) 34세다. 본관은 창녕이며 고려 때 중윤 직위를 맡은 성인보가 비조(시조)이다. 성인보의 아들은 시중으로 지낸 성송국이다. 시중의 증손은 검교의 정승으로 문정공이며 자는 여완으로 시사했다. 나는 빈의 집안 맏아들이 조상이 엄습하여 세상이 명망이 있는 집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후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가 제릉 참봉 성만종으로 하여금 비로소 집안이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지만 또 다시 삼대 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다가 성정경이 군자감으로 지냈는데 곧 빈의 7대조로 고조부와 같다. 빈의 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며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다. 빈의 부모는 법도에 따라 추증 되었는데 이는 문효세자의 외조부모였다.
저 지체가 낮고 천한 여염(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 같이 빼어난 사람이 태어나서 세자를 낳고 영화로움을 받들어 빈의 자리에 올랐으니 마땅히 우연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문효세자의 무덤에 흙이 마르기도 전에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급히 세상을 떠났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4.4.3. 어제의빈치제제문
《어제의빈치제제문》
정조는 죽은 의빈 성씨를 위해 치제제문을 썼다. 치제(致祭)란 윗사람이 제사 때 올리는 음식과 죽은 사람에 대해 슬픈 뜻을 표하는 글을 내려서 죽은 아랫 사람을 제사하는 일이다. 제문(祭文)이란 제사 음식을 올리고 제사 때 읽는 글을 읽는 일이다.
건륭 51년 병오(1786년) 음력 11월 신미삭 7일 정축
국왕은 의빈 창녕 성씨의 영혼에 유제하니 다음과 같다.
아! 나는 빈의 죽음에 더더욱 이와 같이 슬프다. 죽음으로서 떠나보낸 재앙은 비통하고 참혹하며, 인정과 도리는 끊어질 듯이 아픈 마음이 문효세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것보다 심한 일이 없었다. 하지만 오로지 위로하고 애써 떨쳐 내면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더위와 추위가 바뀌어갔다. 평상시처럼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근심하지 않는 얼굴로 서로 잊고 지내는 듯했는데 빈의 죽음 때문에 이와 같이 슬프다.
아! 빈은 문효세자의 어머니이고 빈이 뱃속에 품은 아이는 문효세자와 같은 기운을 가졌다. 문효세자는 이 아이를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에게 반드시 친밀감을 가지고 소중히 대하며 애틋하게 여기고 그리워하기를 구했을 것이다. 또한 형제가 틀림없이 매우 비슷하고 꼭 닮기를 기대 했을 것이다.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참하며 비통한 마음을 위로할 길은 여기에 있고 도리를 떨쳐낼 방법도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문효세자의 남은 흔적과 향기는 쓸어버리듯이 사라져버렸다. 장차 내가 어찌 구하고, 어디에 기대고,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통하며 비참한 마음을 어찌 위로하고, 어찌 달래겠는가? 이에 있어서 지금의 슬픔이 거의 예전의 일보다 심하다. 내가 슬퍼하는 마음이 어찌 오직 빈의 죽음에 대한 슬픔뿐이겠는가?
아아! 후궁으로 있으면서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알았으니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聖人)의 다음 가는 사람과 같았다. 지체가 높고 귀한 자리에서 몸가짐과 언행을 조심하고 검소함을 지켰다. 이에 마땅히 복을 받아야 하는데 문효세자를 잃고 겨우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잘못 되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빈의 운명은 그것도 이것과 마찬가지로 심히 불쌍하고 슬프도다.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아아! 슬프도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4.4.4.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발인부터 3년 탈상 후 담제까지 제사 때마다 어제 제축문을 지었다.[103]
4.4.5.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어제의빈삼년후각제축문》
정조가 의빈 성씨의 상례를 모두 마치고 탈상한 후, 1년간 각종 제사를 지낼 때 어제 제축문을 썼다.[104]
5. 관련 장소
5.1. 거둥고개
정조는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묘에 몇 번이나 거동해서 오늘날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의 이름이 '''거둥 고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서울 지명 사전
5.2. 승가사
정조와 의빈 성씨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세자 책봉 때, 청나라 황실은 문효세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미얀마산 옥불을 선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옥불을 보관하기 위해 승가사를 중건했으나 오늘날 그 옥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6. 가족 관계
6.1. 본가(창녕 성씨)
- 6대 조부 : 성운(成䉙)
- 6대 조모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5대 조부 : 노사직 성숙양(籚司直 成叔良)
- 5대 조모 : 대구 백씨(大邱 白氏)
- 고조부 : 군자감 정 성경(軍資監 正 成景)[109]
- 고조모 : 김해 김씨(金海 金氏)
- 증조부 : 증 이조참판 성근립(贈 吏曹參判 成謹立, 1639 ~ 1709)
- 증조모 : 증 정부인 충주 유씨(贈 貞夫人 忠州 劉氏, ? ~ 1705)
- 조부 : 증 이조판서 성수산(贈 吏曹判書 成壽山, 1668 ~ 1749)
- 조모 : 증 정부인 김해 김씨(贈 貞夫人 金海 金氏, 1674 ~ 1698)
- 조모 : 증 정부인 창원 황씨(贈 貞夫人 昌原 黄氏, 1677 ~ 1747)
- 백부 : 성윤조(成胤祚)[110]
- 백모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사촌 : 성호(成灝)
- 사촌 올케 : 경주 김씨(金海 金氏)
- 사촌 : 성연(成淵)
- 사촌 올케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아버지 :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 1709 ~ 1769)
- 어머니 :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 1722 ~ 1756) - 통덕랑 임종주(通德郞 林宗胄)의 딸
- 어머니 : 장흥 마씨(長興 馬氏, 1715 ~ 1775) - 직장 마시행(直長 馬時行)의 딸
- 어머니 : 단양 지씨(丹陽 池氏)
- 오빠 : 성담(成湛, 1741 ~ 1783) - 무과 합격[111]
- 올케 : 성주 이씨(星州 李氏, 1739 ~ 1770)
- 올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751 ~ 1799)
- 조카 : 현감 성국민(縣監 成國民, 1766 ~ 1809)
- 질부 : 강릉 유씨(江陵 劉氏, 1768 ~ 1809) - 동지중추부사 유계조(同知中樞府事 兪啓祚)의 손녀
- 조카 : 성희민(成羲民, 1780 ~ 1809)
- 질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오빠 : 절충장군 성협(折衝將軍 成浹, 1742 ~ 1810)[112]
- 올케 : 강릉 최씨(江陵 崔氏)
- 올케 : 단양 문씨(丹陽 文氏)
- 조카 : 선략장군 성도민(宣略將軍 成道民)
- 질부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조카 : 성호민(成皥民)
- 질부 : 청주 한씨(淸州 韓氏)
- 오빠 : 부사용 성완(副司勇 成浣, 1743 ~ 1806) - 성식(成湜)에서 개명[113]
- 올케 : 청주 한씨(淸州 韓氏, 1742~1794)
- 조카 : 첨정 성순민(僉正 成舜民, 1763 ~ 1849)
- 질부 : 단양 우씨(丹陽 禹氏)
- 조카 : 성덕민(成德民, 1782 ~ 1828)
- 질부 : 의령 남씨(宜寧 南氏, 1780 ~ 1812)
- 조카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질서 : 조상주 (趙尙周) - 한양 조씨(漢陽 趙氏)
- 오빠 : 성숙(成淑)[114]
-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 강덕순(康德淳) - 승평 강씨(昇平 康氏)
-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형부 : 윤귀영(尹貴永) - 파평 윤씨(坡平 尹氏)
- 동생 : 성흡(成洽) - 무과 합격
- 올케 : 금천 나씨(錦川 羅氏)
- 조카 : 성준민(成俊民)
- 숙부 : 성연지(成淵祉)
-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 정희규(鄭熙揆) - 연일 정씨(延日 鄭氏)
-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 고모부 : 임성징(林聖徴) - 임천 임씨(林川 林氏)
- 고모 : 공조판서 정방(工曹判書 鄭枋, 1707 ~ 1789)의 첩[115]
- 언니 : 영의정 홍낙성(領議政 洪樂性, 1718 ~ 1798)[116] 의 첩[117]
- 6촌 언니 : 정득환(鄭得煥)의 첩[118]
6.2. 왕가(전주 이씨)
- 남편 : 정조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8일)
7. 장희빈과의 유사성
여담이지만 그 유명한 장희빈과는 100년(정확히는 94년) 간격으로 유사한 삶을 살았다. 정사에 기록된 건 아니지만 조선 시대 빈들 중 이름(장옥정, 성덕임)이 알려진 경우 역시 두 사람 뿐이다.
희빈 장씨와 의빈 성씨 모두 중인 출신 궁녀였으며, 각각 웃전인 장렬왕후(숙종의 증조 할머니)와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의 예쁨을 받았다. 웃전의 처소에서 왕(숙종, 정조)을 처음 만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첫 아이(경종, 문효세자) 출산 시기도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0살로 같으며[125] , 둘째 아이(성수, 옹주) 출산 시기도 32살로 같다. 왕의 사랑을 받았으나 각각 43세,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사약, 병사)을 맞는다는 점에서 최후도 비슷하다.[126]
하지만 장희빈이 왕비 인현왕후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과는 달리 의빈 성씨는 왕비 효의왕후와 사이가 좋았다.[127] 또 장희빈이 왕비 자리에 오를 만큼 야심 있는 성격이었던 것과는 달리 의빈 성씨는 승은을 두 번이나 거절할 만큼 욕심 없는 성격이었다.
또한 장희빈과 숙종의 이야기가 적힌 《인현왕후전》이 한글 소설이라 장희빈 역시 대중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반면, 의빈 성씨와 정조의 러브 스토리가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은 굉장히 긴 한문으로 되어있어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 거절의 이유
의빈 성씨가 정조의 승은을 2번이나 거절한 이유로 다음과 같은 추측들이 있다.
- (공식적 이유) 왕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고 슬하에 자식도 없는 왕비를 배려했기 때문.
- (가설) 승은후궁들의 삶이 순탄치 못했기 때문.
- 귀인 조씨(인조의 후궁) - 사사
- 승은상궁 이씨(인조의 후궁) - 사사
- 승은상궁 김씨(현종의 후궁)[128] - '홍수의 변'에 연류되어 유배
- 희빈 장씨(숙종의 후궁) - 자살
- 정빈 이씨(영조의 후궁) - 독살
- 영빈 이씨(영조의 후궁) - 직접 친아들을 죽여달라 간청[129]
- 폐숙의 문씨(영조의 후궁) - 폐출 및 사사
- 숙빈 임씨(사도세자의 후궁) - 첫 임신 때 낙태미수 및 사도세자 사후 작호도 깎이고 어렵게 생활[130]
- 경빈 박씨(사도세자의 후궁) - 사도세자에게 맞아 죽음
- (가설)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
- (가설) 자신이 승은을 입는 것이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
9. 미디어
왕을, 그것도 정조를 15년간이나 기다리게 만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지만 이와 같은 사실이 적힌 《어제의빈묘지명》이 한문으로 기록되어있어 지금까지도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본명, 가족 관계 등이 적힌 《이재난고》도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기 전에도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이라는 점 때문에 소설, 드라마에서 주로 정조가 진심으로 사랑했으나 비극적인 죽음[132] 을 맞는 '''정조의 첫사랑'''[134] 으로 그려졌다. 2005년 로맨스 소설에 처음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모습은 한지민이 연기한 드라마 《이산》 속 성송연 캐릭터. 최근에는 정조를 다룬 창작 뮤지컬 《정조 - 만천명월주인옹》에도 등장하였다. 실제로는 궁녀 출신이나 도화서 다모, 호위 무사 등으로 각색되어 등장하였다. 본명은 '성덕임'이나 작품마다 '성송연', '성선우', '성연' 등 각양각색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정조와 의빈이 약 10세 전후에 만났다는 사실과 정조가 그녀에게 15년동안 2번 고백하였다가 차였다는 흑역사를 기록했다는 사실등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같은 실화가 있지만, 이 사실이 2016년쯤에 알려져서 이를 다룬 드라마는 없다. 하지만 의빈 성씨와 정조를 다룬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135] 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2021년 9월 MBC에서 방영한다고 하니 이러한 내용을 기반으로 방영될 가능성도 있다.
9.1. TV 드라마
- 1989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파문》
- 배우 : 정은숙
9.2. 예능
- 2017년 MBC 예능 《신비한TV 서프라이즈》 746회
- 배역 : '성덕임' 역
- 배우 : 구민주(아역) → 김하영(성인)
- 2018년 JTBC 《차이나는 클라스》 46회
- 2019년 채널A 《천일야사》 118회-성덕임, 정조의 첫사랑 : 2019년 3월 25일 방송, 정조와 궁녀 성덕임(의빈 성씨)의 사랑이야기
- 배역 : '성덕임' 역
- 배우 : 송도원
9.3. 창작 뮤지컬
정조와 장터에서 처음 만나 '물의 근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9.4. 창작 판소리
9.5. 소설
- 2005년 로맨스 소설 《비단속옷》
- 세자익위사 우익위 '성연' 역
- 2005년 로맨스 소설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 콘티 작가 '강건희' 역
- 2007년 ~ 2008년 드라마소설 《이산 정조대왕》
- 도화서 다모 '성송연' 역
- 2017년 로맨스 소설 《우아한 환생》
- '의빈 성씨' 역
작가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8년에 걸쳐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며 집필한 첫 소설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의빈 성씨는 궁녀였습니다. 경희, 영희, 복연이라는 궁녀들과 소설을 필사하고 임금의 사랑에마저 순순히 응하지 않는, 정조의 완고한 가치관과 맞지 않을 법한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그녀를 절절히 사랑했는데 왜 하필 그녀여야만 했던 걸까요?' 이러한 의문을 이야기로 풀어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