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 이씨

 



'''조선 영조의 후궁
소유영빈 이씨 | 昭裕暎嬪 李氏
'''
'''시호'''
소유(昭裕)
'''빈호'''
영빈(暎嬪)
'''출생'''
1696년(숙종 22년) 7월 18일
'''사망'''
1764년(영조 40년) 7월 26일
(향년 68세)
조선 한성부 경희궁 양덕당
'''사당'''
선희궁(宣禧宮)
'''원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수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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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의(全義)
'''부모'''
부친 이유번
모친 한양김씨
'''부군'''
조선 영조
'''자녀'''
1남 6녀
(1녀) 화평옹주
(2녀) 옹주 (조졸)
(3녀) 옹주 (조졸)
(4녀) 옹주 (조졸)
(5녀) 화협옹주
(1남) 사도세자
(6녀) 화완옹주

1. 개요
2. 생애
2.1. 궁녀에서 후궁으로
2.2. 영조의 오랜 숙원이었던 아들 사도세자의 탄생
2.3. 자녀들의 불행한 삶
2.4. 행운인가 불행인가
2.5. 비극적인 삶
2.6. 한 맺힌 죽음
3. 가계도
4. 대중 매체
4.1. 드라마
4.2. 영화


1. 개요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두 번째 후궁이다. 화평옹주, 화협옹주, 사도세자, 화완옹주의 생모이며, 정조친할머니이다.
본관은 전의(全義)로, 증 찬성 이유번(李楡蕃)과 부인 한양 김씨(김우종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사후에는 영빈 사당의 궁호인 선희궁(宣禧宮)이라고도 불렸다.[1]
사도세자를 포함한 대부분의 자식들이 불우한 인생을 살았고 심지어 영조에게 아들의 대처분을 요청한 이후에는 남은 여생을 단장(斷腸)[2]의 심정으로 살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2. 생애



2.1. 궁녀에서 후궁으로


1696년(숙종 22)에 태어나 6세의 나이로 궁녀로 뽑혀 들어왔다.[3] 지밀에 소속되어 대전에서 일했다. 당시 숙종은 이씨를 두고, "이 나이의 사대부 집 여자아이들은 어린 티를 면하기 어려운데, 위항의 여자[4]라 조숙하여 이런 일까지 다 하는구나" 라고 말했다고 한다.
1726년 11월 16일, 30살에 승은을 입으면서 아이를 갖게 되어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었다. 1727년에 장녀 화평옹주출산하고, 1728년에 내명부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다. 비록 그동안 세 명의 옹주가 조졸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1730년 11월 27일에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暎嬪)이 되었다. 이후 1733년에 5녀 화협옹주를 출산했다.

2.2. 영조의 오랜 숙원이었던 아들 사도세자의 탄생


1735년에 마침내 모두가 고대하던 왕자(王子)를 출산하였는데, 이 왕자가 바로 사도세자이다. 당시 영조정빈 이씨와 사이에서 나온 장남 효장세자를 일찍 잃고 오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때문에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출산하던 당일에 직접 그 곁을 멤돌며 지키고 있다가, 태어난 아이가 아들이란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사도세자는 곧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됐으며 세자로 책봉됐다. 그리고 1737년에 6녀이자 막내 화완옹주를 낳았다.

2.3. 자녀들의 불행한 삶


그러나 그 누구보다 영조의 총애를 받던 화평옹주는 21세에 첫 딸을 낳다 난산으로 요절해 영조와 영빈을 상심하게 만들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지만 영빈을 닮아 미색이었다는 화협옹주 역시, 20세에 홍역으로 요절했다.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사이에 낳은 딸 3명은 어린 나이에 숨져 옹주 봉작(封爵, 옹주의 작호 봉하는 일)조차 받지 못했다.
고명아들사도세자는 애초에 아버지 영조와 사이가 멀었던 데다, 성격,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수시로 영조와 내적, 외적으로 심하게 갈등했다. 게다가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인한 중압감과 계속된 아버지의 핍박 때문에 정신병까지 발병해 입어야 할 옷을 찢는 의대증 등의 기행을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연쇄적 살인과 같은 범죄까지 저질렀다. 그러던 중에 사도세자에게 아들들이 연달아 태어나자, 영조는 아들을 건너 뛰고 손자들 중에서 후사(後嗣)를 택하려 했다.
사도세자의 정신병은 이후로도 계속 심해져서 심지어 자신이 아끼던 후궁 경빈 박씨#s-2를 폭행하여 그 끝내 살해했으며, 급기야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영조(국왕)의 시해까지 운운하기 시작했다.[5] 이에 영빈은 세손을 살리기 위해 친아들의 단죄를 결심하고 울면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영조에게 달려가 고했다.[6] 영조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로 결심했을 때, "나의 꿈에 정성왕후가 나타나 '세자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고 예지(叡智)해 준 적이 있다"면서, 적모(嫡母)인 정성왕후의 계시와 생모 영빈의 밀고를 그 근거로 내세웠다.
아들의 죽음 이후 영빈은 “자식에게 못할 짓을 하였으니, 내 자취(무덤)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다.”라며 평생을 가슴앓이를 했고, 그 죄책감으로 손자인 정조를 지극 정성으로 대했다고 한다.[7]

2.4. 행운인가 불행인가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조선 시대에 궁녀로 입궁해 에게 승은을 입고 후궁 첩지[8]를 받은 것은 궁녀로서 최대의 벼락 출세다. 이는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며, 후궁 첩지를 받더라도 왕에게 계속 총애받으며 왕의 자녀들을 낳아 기반을 다지는 건 당연히 더 어려운 일이다.
사실 조선에서 궁녀는 승은을 입고 승은상궁으로 봉해져도 왕의 방문이 끊겨 쓸쓸히 늙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설령 계속 총애받다가 왕자를 낳아 승급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 왕자가 장차 왕통을 이을 국본이 되어 세자의 생모가 되는 경우는 더더욱 드물었다.[9] 하지만 영빈은 이 일을 모두 차근차근 해냈다.
또 영빈은 나이 30살이 되어서야 영조에게 승은을 입었는데, 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중년에 가까운 나이였다. 이때 운 좋게 화평옹주를 가져 후궁 첩지를 받은 것만도 천운이었는데, 이후 딸만 5명을 내리 낳았는데도 계속 영조에게 총애받았다. 그러다 마침내 38세에 아들 사도세자를 출산하고, 3년 뒤에 화완옹주까지 출산했다. 영조의 비빈(妃嬪)들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낳은 사람이었다.
심지어 영조는 선의왕후의 상중에 구설수에 오를 것을 감수하고 당시 귀인이었던 이씨를 빈으로 승급시키며 큰 잔치를 베푼 점, 영빈이 손자인 세손 정조와 종법상 남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10] 영빈의 발인 때 세손이 직접 참여하여 곡림(哭臨, 곡하는 일)하게 한 점 등[11], 그녀를 위해 이리 특별한 조치 등을 단행한 것만을 봐도 영조와 영빈의 부부애가 매우 극진했음을 알 수 있다. 한시라도 빨리 후사(後嗣)를 봐야 하는 영조로서는 나이도 있는 데다 줄줄이 딸만 낳는 궁녀 출신의 후궁보다는 더 어리고 배경도 좋은 후궁을 얼마든지 들일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영빈이 그렇게 오래 총애받은 건 당시 분명 특별한 일이었다.

2.5. 비극적인 삶


그러나 영빈의 인생은 그렇게 행복하다고 보기 어려웠다. 사실 조선에서 궁중 여인은 처소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왕만 바라보며 살아야 했다. 특히 영빈은 사도세자를 낳기 전부터 영조의 총애 덕분에 궁중에서 가장 높은 후궁에 봉해져 있기는 했지만 정작 사도세자를 낳고도 직접 기르지 못했다. "왕세자"라는 이유로 생후 100일이 지나자마자 생모의 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져 거기서 궁인들의 손에서 자라야 했기 때문이었다.[12]
게다가 사도세자 역시 여느 후궁 소생 왕세자들처럼 적모인 왕비의 아들로 입적되어 생모도 아닌 왕비를 어머니로 모셔야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는 정성왕후와 돈독한 사이라 그녀를 극진히 모셨고, 정성왕후 역시 사도세자를 친아들처럼 아껴 영조의 구박으로부터 사도세자를 적극적으로 대변, 보호해 주었다.
물론 사도세자는 생모인 영빈에게도 극진했다. 외롭고 마음고생이 심한 어머니를 안쓰럽게 여겨 후궁의 가마를 크게 개조해서 영빈을 태우고 창덕궁 후원(秘園)을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그때가 두 모자의 마지막 시간이었으나, 한창 사도세자가 영조의 미움을 받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는 오히려 영조에게 큰 미움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사도세자는 불안해하였다. 영빈은 사도세자를 걱정하면서 아들의 정신병 증세가 더 심각해진 건 아닌가 의심하며 더욱 불안해했다고 한다.
결정적으로 영빈 소생 자녀들도 거의 다 요절했다. 막내딸 화완옹주만이 부모보다 먼저 죽지 않고 천수를 누렸으나, 화완옹주도 젊은 나이에 어린 딸과 남편 정치달을 겨우 한달 간격으로 연달아 잃었다. 게다가 조카인 정조를 자식같이 대해주었는데도 말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오히려 그에게 배신당해 서인으로 강등된 뒤, 유배형을 받고 왕족 신분에서 정처(鄭妻), 즉 그냥 '정 모씨의 아내'라고만 불리는 서인(평민)으로 격하되는 불행을 겪었다.

2.6. 한 맺힌 죽음


한중록 기록에 의하면 임오화변이 있은 직후 영빈 이씨는 손자인 정조가 임금이 되는 날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왔으나 영조 40년 세손으로 하여금 효장세자의 장통(長統)을 계승하게 하겠다는 영조의 처분이 있은 직후 식음을 전폐하며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이후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난 바로 다음날인 1764년 음력 7월 26일에 그녀는 먼저 간 아들을 뒤따르듯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13] 향년 68세.
영조는 영빈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빈의 장례를 후궁 제일의 것으로 하였고, 의열(義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연희궁(衍禧宮) 자리[14]에 시호를 따 의열묘(義烈墓)라는 이름으로 조성되었으며, 고종 때 사도세자가 황제의 묘호인 장조(莊祖)로 추존되자 영빈의 묘소도 묘에서 원으로 승격되어 수경원(綏慶園)이라는 원호를 받고 정자각과 비각이 새로 건립되었다. 1969년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으로 천장해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연세대학교 루스채플이 들어섰다. 천장할 때 정자각과 비각은 그대로 두고 비각 안에 있는 비석만 옮겼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선희궁(宣禧宮)에 고이 모셔졌다.

3. 가계도



4. 대중 매체


희한하게 대부분의 작품에서 생전에도 선희궁으로 지칭되는 경우가 많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선희궁은 영빈 이씨의 사당 이름이다.

4.1. 드라마



4.2. 영화


궁합에서의 영빈 이씨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가녀리고 약한 이미지가 아니라 아들 이선을 위하여 세자 이선의 이복누나 송화옹주를 적극적으로 음해하는 메인 악역으로 나온다. 그러나 결국 전부 실패하고 세자 이선 앞에서 영조에게 펑펑 울며 용서를 빌고 영조는 세자 이선을 꼭 안아준다. 그러나 훗날 어떤 일이 일어날지 관객들은 다 알고 있다...

[1] 당초에 부군 영조의 뜻에 따라 사도세자대처분을 청한 일 등이 종묘 사직을 보호한 일이라며 '의열(義烈)'이라는 시호가 주어졌으나, 손자인 정조대에 이르러 사당의 명칭을 시호를 딴 의열궁에서 선희궁으로 개칭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2] 새끼 원숭이를 잃은 어미 원숭이의 심정은 창자가 마디마디 끊어지는 것과 같다.[3] 본래 궁녀는 공노비 중에서 차출하는데, 지밀 등에서는 양인 출신을 선호해 편법으로 입궁시키곤 했는데 영빈 이씨도 여기에 해당하는 듯 하다. [4] 민가의 여자 [5] 강력한 전제군주제 국가였던 조선 시대에서 국왕의 시해를 운운한 건 제아무리 세자라 하여도 사형당할만큼의 중죄였다.[6] 세손의 보위와 정통성을 지키고, 궁내의 마지막 평화라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법이었다. 선희궁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지만 이 선택 때문에 남은 여생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7] 하지만 정조는 살아 생전 할머니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어쨌든 어린 나이(임오화변 당시 정조의 나이는 11살)에 친할머니가 아버지를 죽여달라 간청한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 용서하기 어려웠던 듯하다.[8] 최종적으로 정1품 빈에 봉해졌으므로, 후궁으로서는 가장 높은 품계까지 올라갔다. 관리로 치자면 종9품 말직에서 시작해 정1품 영상까지 오른 것.[9] 왕자를 낳는다 해도 후궁 소생의 왕자군이므로, 왕비가 대군을 낳는다면 계승권에서 바로 밀리게 된다.[10] 영빈이 사망하기 몇 달 전 영조가 단행한 '효장승통처분' 때문이다. 이 '''효장승통처분(孝莊承統處憤)'''으로 인해 정조는 영조의 장남이자 사도세자의 이복형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했다. 즉, 혈통상으로는 친조모-친손자 관계일지라도 법적상 정조와 영빈은 남남이었다.[11] 영조 자신은 생모 숙빈의 상중에 부왕 숙종 등의 영향으로 마음대로 망곡하지도 못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서에도 누차 나와있다시피 영빈 이씨의 장례 당시에 세손은 공식적으로 효장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할아버지의 첩이 죽었을 뿐이었는데, 영조의 유일한 후계자 자격으로 장례 절차에 참여하여 조문하고 영전에서 울 수 있게 해준건 분명한 영빈 이씨에 대한 영조의 특혜였다.[12] 한중록에 따르면 영조와 대립했던 선의왕후가 있었던 궁이고 사도세자의 보육을 담당하던 궁인들 역시 영조와 척을 진 사람들이라, 어린 사도세자에게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정조도 아버지가 일찍부터 생모 곁을 떠나 있어서 엇나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훗날 의빈 성씨문효세자를 낳자, 정비인 효의왕후의 아들로 입적은 시키되 생모 의빈이 양육하게 했다고 한다.[13] 절묘한 사망 시점 때문인지 자살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만약 병사했다면 매일같이 며느리로서 시어머니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던 혜경궁 홍씨가 간병했을 텐데 한중록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는 점, 영빈 이씨의 사망 직후 한동안 한중록이 중단됐다는 점이 그 근거. 더 나아가서 우울증이 갑작스러운 자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4] 지금의 서대문구 신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