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원

 



'''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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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2대 국무총리
정홍원
鄭烘原 | Chung Hong-won
'''
<colbgcolor=#003478><colcolor=#C39335> '''출생'''
1944년 10월 9일 (79세)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1]#
'''본관'''
진주 정씨[2]
'''재임기간'''
제42대 국무총리
2013년 2월 26일 ~ 2015년 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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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 '''부모'''
아버지 정현식
'''형제자매'''
6남 6녀중 열째
'''배우자'''
최옥자 (재혼)[10]
'''자녀'''
아들 정우준(鄭宇埈)
'''종교'''
무종교개신교
'''학력'''
영도국민학교 (졸업)
진주사범학교 (졸업 / 19회)
성균관대학교 (법학 / 학사)
'''약력'''
제14회 사법고시 합격
대전지방검찰청 차장검사
대검찰청 감찰부장
광주지방검찰청 검사장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법무연수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상임위원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
제42대 국무총리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장

1. 개요
2. 생애
3. 논란
3.1.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괴담 유포자 처벌 논란
3.3. 광화문 광장 박정희 동상 세우기 논란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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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42대 국무총리.

2. 생애


1944년 10월 9일,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송리에서 정현식(鄭賢植)의 12남매(6남 6녀) 중 열번째로 태어났다. 경남중학교를 거쳐 1963년 진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인왕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낮에는 교사생활을 하고, 저녁에는 야간대학을 다녀 성균관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김황식국무총리와는 사법시험(14회), 사법연수원(4기) 동기다. 1975년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하여 1남을 두었는데 외아들(정우준)도 현직 검사다(연수원 38기). 원래 정치권 인물이라기보단 법조인 출신으로 1995년에 차장검사로 승진, 그리고 1999년에 검사장으로 승진했으며 참여정부가 되고 고검장급인 법무연수원장까지 올랐다가 김승규 장관이 임명될 무렵에 옷을 벗었다. 소위 말하는 특수통이었다.[3] 1992년에 발생한 초원복집 사건 당시 서울지검 특수1부장이었으나 실제적으로는 김기춘의 법적처벌을 면하는데 일조했다는 주장도 있다.기사.

이후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엔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후 2012년 새누리당 공직후보추천위원장을 맡으며 정치와 인연을 맺었고, 이듬해인 2013년 박근혜 정부의 첫번째 총리로 임명되었다.[4] 당시 말이 좀 있었던 소위 '''성시경'''[5] 인사 중 하나이기도 했다.[6]
비교적 짧은 정치 경력 때문인지 정치적 무게감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임기 동안에도 대부분의 국무총리가 그랬듯이 소위 방탄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유명한 데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2.1. 불멸의 총리


총리의 블랙홀

정치적 무게감보다는 이런 타이틀로 유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국무총리로서 약 2년간(1년 356일) 재임했지만 사실 그 기간 중 절반 정도가 유임된 기간이다. 2014년 6월 26일,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국무총리로서 책임을 지고 사임할 뜻을 밝혔다. 그러나 당장 업무공백을 이유로 새로운 총리가 정해지기 전까지 국무총리 사임은 유임되었다. 사표를 냈는데도 공관을 못 벗어나 현대판 황희 정승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7] 문제는 정홍원 총리 이후 새 총리를 뽑는 인사청문회에서 그 벽을 넘지 못하고 계속해서 총리 후보(안대희, 문창극)들이 낙마했고[8], 그 후임자로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임명되기까지 무려 296일을 유임한 끝에 총리직을 내려놓았다. 이런 웃지 못할 해프닝 때문에 이상한 방향으로 관심이 모아지면서 위 짤방 같은 패러디가 제법 유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총리에서 물러나는 과정에 있었던 해프닝 덕에 불멸의 총리 드립이나 좀비 총리, 허나 윤허하지 않으셨다 드립이 자주 나오며, 뫼비우스의 총리 드립도 있다.각하의 우울 - 엔드리스 국무총리
한편, 새 총리로 임명된 이완구 국무총리[9]경남기업 회장 자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에 고작 두달여만에 (70일) 자진 사퇴해버리자, 네티즌들은 정홍원 전 총리가 다시 유임하는 것 아니냐는 드립을 쳤지만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정홍원 전 총리는 다행히 이 시기에 다른 나라로 나갔다.
이 드립 중 일부는 정홍원 본인도 보았다고 한다. "(이 패러디 때문에)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고 위안을 얻는다면 나로서는 기쁜 일이고 만족한다”고 말했다고.
이완구 전 총리의 후임으로 황교안 법무부 장관이 국무총리에 취임하며 완전히 자리 잡음에 따라 다시 총리가 될 가능성은 확실히 낮아졌다.

3. 논란



3.1.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괴담 유포자 처벌 논란


총리 재임시절 후쿠시마 방사능 사태가 터졌는데 관련 괴담 유포자를 처벌하겠다는 발언을 했다가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물론 온갖 괴담과 유언비어가 난무하던 것은 사실이며, 여기에 근거없는 부추기기가 일정부분 기여한 부분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기는커녕 일본 정부도 사태 해결에 애를 먹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공포가 극에 달했으며, 한국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 원자력 사고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로 전무했기 때문인 점도 분명 고려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조사에 나서 국민을 안심시키기는커녕 괴담 유포로 처벌하려는 태도 자체가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
결국 이런 상황에서 괴담 유포로 자국민을 처벌하는 건 그 법리적 타당성을 떠나 상당한 여론의 반발을 만들 수밖에 없다. 특히나 정부의 신뢰도가 확보되지 않은 정국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때문에 실제로 괴담 유포로 처벌받는 사람 없이 이 해프닝은 종결되었다.

3.2.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image]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비선실세 국정개입 의혹을 두고 근거 없는 소리라 일축한 바 있다. 물론 지금은 다 사실로 드러났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에 발표한 호소문에서도, 대통령의 책임을 추궁하는 목소리들을 한낱 "일시적 분풀이", "마녀사냥" 등으로 치부하였다.#
1993년에 우병우의 장인 이상달과도 관련되어 있다. 이상달 전 회장은 우 전 수석을 통해 검찰에도 새로운 인맥을 쌓았다. 이 전 회장은 1993년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돼 3년 징역형을 받았지만 불과 54세의 나이에 건강상 이유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담당검사는 서울지검 특수 3부 정홍원 부장검사(전 국무총리)였다.#
훗날 발간한 자서전에 의하면, 탄핵심판 당시 박근혜로부터 대리인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변호사 일을 사실상 안 해 온 지 오래라서 고사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처음 의혹이 불거졌을 때 대통령이 국민들께 진심을 다해 모든 것을 밝히고 잘못된 부분에 대하여는 진정성 있게 용서를 구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토로하였다.

3.3. 광화문 광장 박정희 동상 세우기 논란


현재 박정희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세우겠다며 모금운동을 예고했다. 안 그래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문에 어수선한 상태라 갑론을박이 벌여졌다. 참고로 벌써 동상제작중이다. #

4. 여담


  • 2018년에 《(운명과 경주를 한) 정홍원 스토리》라는 자서전을 출간하였다.

[1] 인근의 중평리, 대치리, 덕천리와 함께 진주 정씨 집성촌이다.[2] 은열공파 27세손[3] 대검찰청 감찰부장, 광주/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4] 당시 김기춘은 청와대 비서실장[5] 당시 임명된 인물의 주류를 이루었던 성균관대 - 고시출신 - 경기고를 일컫는 말.[6] 정홍원 총리와 같은 시기에 임명된 법무장관인 황교안도 경기고 - 성균관대 라인이었다.[7] 황희가 당대 최고위치의 관리였다는 점과 국무총리의 명목상 위상을 생각하면 정말 비슷하다. 물론 대통령중심제의 국무총리의 실권이 현시창스럽다는 것과 황희는 너무 유능해서 써먹으려고 세종이 사직을 윤허하지 않은 거지만, 정홍원은 별로 유능하지 않은데 훨씬 더 무능한 대통령이 기준미달 후보만 계속 데려오는 바람에 억지춘향으로 자리를 지킨 거라는 차이는 있다.[8] 안대희도 정홍원과 비슷한 특수통 검사였고 고검장과 대법관을 지낸 거물이었다. 그 안대희가 전관예우성 억대 수임료로 낙마하면서 지명된 문창극은 중앙일보 주필을 지낸 언론계의 거물이었으나 각종 실언과 주필 시절의 친일성향의 사설이 논란이 되면서 낙마했다.[9]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맡다가 워낙 총리감이 없던 정부에서 급하게 차출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