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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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했던 마무리 투수.
박찬호가 활약하던 무렵 LA 다저스에서 뛰었기에 우리나라에선 방화범의 대명사(...) 정도로 알려져 있다.[1] 다저스 역대 최다 세이브 3위[2] 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투수이다.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여 1986년 드래프트에서 고향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1라운드 1순위로 지명된 선수이다. 참고로 제프 쇼가 지명된 드래프트는 MLB에서 마지막으로 시행된 '''1월 드래프트'''로 정식 드래프트인 6월에 열리는 드래프트가 아닌 이런저런 사정으로 4년제에 못간 주니어 칼리지(JC 또는 Community College. 알기 쉽게 말하자면 전문대) 출신 선수들이 참가하는 일종의 보충 드래프트이다. 제프 쇼 역시 4년제가 아닌 클리블랜드의 쿠야호가 커뮤니티 칼리지를 2년 다닌 뒤 4년제 편입이 아닌 1월 드래프트로 입단했다.[3]
우리가 알고 있는 제프쇼는 마무리투수이지만 애초에 제프쇼는 선발유망주로 각광받았었고,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마이너리그의 각 단계를 착실히 밟아나가 4년간 99경기(89선발) 591이닝 3.41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1990년 4월 메이저리그로 승격된다.
그러나 데뷔전인 토론토전에서 5.1이닝 11피안타 6실점 6자책 4피홈런[4] 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보이더니 이후 선발로 나선 9경기에서 39.1이닝 27자책점과 6.18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최악의 성적[5] 을 기록하며 불펜으로 강등당하며, 불펜으로도 부진한 성적을 올리며 1990시즌 총 12경기 9선발 3승 4패 48.2이닝 11피홈런 6.66 평균자책점과 1.91의 WHIP이라는 기대이하의 성적을 기록한다.
이 시기 제프 쇼의 문제점은 구위가 강력하지 못한 투수가 선발로 등판했을때 타순이 돌수록 난타당하는 패턴의 정석을 밟았다는 점이다. 경기초반에는 나름대로 호투하나 상대타자들의 파악이 끝난 4~5회즈음부터 난타당하며 강판당했고, 결국 시즌 후반에는 경기초반에도 불펜[6] 으로도 난타당하는 등 자신감 상실의 기미마저 보였다.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로의 한계를 여실히 나타낸 제프 쇼는 1991시즌을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고, 그해 6월 재승격된후 가진 선발등판 경기에서도 타순이 돈 후 난타당하는 약점을 그대로 나타내며 4.2이닝 9피안타 6실점을 기록한 후 롱릴리프 겸 불펜으로 강등당하는데 여기서 제프쇼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타순이 돌수록 난타당하는 그의 약점은 1~2이닝만을 책임지는 불펜투수 역할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고, 불펜 전환후 28경기에 등판하며 67.2이닝[7] 2.79의 평균자책점과 1.32의 WHIP이라는 수준급 성적을 기록할 수 있었다. 1991시즌의 총 성적은 29경기 1선발 0승 5패 1세이브 72.1이닝 3.36의 방어율과 1.37의 WHIP
하지만 클리블랜드가 제프 쇼에게 기대하던 것은 선발유망주로의 모습이었기에[8] 메이저리그 선발로의 정착에 실패한 제프 쇼의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했고, 1992시즌 마지막 선발기회도 3회부터 난타당해 5회에 완전히 무너지는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하며 4.1이닝 6피안타 7실점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 쯤이면 알겠지만 제프 쇼가 마이너리그에서는 꾸준히 선발로 출장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나 메이저리그 레벨에서는 선발로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의 구위를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제프 쇼에 대한 기대를 접은 클리블랜드는 남은 시즌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내게 한 후 시즌 종료와 함께 방출을 선언한다.
3년 총합 43경기 11선발 3승 10패 1세이브 128.2이닝 4.90의 평균자책점과 1.58의 WHIP.
어찌보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으나 선발로 등판한 11경기에서 올린 48.1이닝 40자책점 7.45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성적과 3년간 계속 지적된 타순이 돌수록 난타당한다는 약점은 이 선발유망주가 메이저리그 레벨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고, 어느덧 26에 이른 나이는 제프 쇼의 명칭에서 '유망주'라는 직함을 빼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결국 클리블랜드에서 방출당한 제프 쇼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을 맺은 뒤 불과 한달만에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트레이드된다.
그러나 불펜으로 등판한 32경기에 등판해 기록한 80.1이닝 30자책점 3.36의 평균자책점의 준수한 성적은 제프 쇼에게 불펜투수라는 또다른 기회를 가져다주었고, 불펜 투수 제프 쇼의 가치를 높게 본 몬트리올은 그에게 불펜 투수로의 전향을 권유하고 어느덧 26에 이른 찬밥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제프 쇼는 불펜투수로의 전향을 승낙하고 이후 성공적인 두시즌을 보내게 된다.
1993시즌 - 55경기 95.2이닝 4.14의 평균자책점 1.29의 WHIP[9]
1994시즌 - 46경기 67.1이닝 3.88의 평균자책점 1.22의 WHIP
그러나 1995시즌에는 컨트롤이 흐트러지며 50경기 4.62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한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하게 되고, 이 곳에서도 9경기 6.52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성적을 올린 후[10] 고향팀인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 된다.
그리고 지난 시즌 컨트롤 난조로 시즌을 망친 제프 쇼는 새삼 컨트롤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고, 이를 가다듬는데 성공하면서 대박을 치게된다.
1996시즌 78경기에 등판해 무려 104.2이닝을 소화하며 8승 6패 4세이브 22홀드 2.49의 평균자책점과 1.22의 WHIP의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고, 이듬해인 1997시즌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옮긴 후에는 78경기 4승 2패 42세이브 94.2이닝 2.38의 평균자책점 0.96의 WHIP이라는 한층 더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특급 불펜투수로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한편 1997시즌 기록한 42세이브는 리그 최다 기록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최우수 마무리투수에게 주어지는 Rolaids award까지 수상하는 등 제프 쇼의 가치는 하늘을 찌르게 된다.
1998시즌에도 39경기 23세이브 49.2이닝 1.81의 평균자책점과 1.05의 WHIP으로 특급마무리의 위용을 뽐내며 승승장구했지만 신시네티 레즈에서의 생활은 곧 끝나게 된다.
한창 치열한 포스트시즌 진출 싸움을 하던 LA 다저스는 더블 스토퍼 체제가 처참히 실패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마무리투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박찬호가 풀타임 선발투수로 정착한 첫 시즌이었던 1997년 시즌부터 마무리는 다저스의 문제였다. 이때 마무리 투수는 통산 256세이브를 기록했던 우완 정통파 마무리인 베테랑 토드 워렐이라는 선수였는데, 37세 시즌인 1997년 방어율 5.28로 처참한 성적을 거둔뒤 그 시즌에 은퇴를 하면서 다저스는 97시즌 종료후 새로운 마무리 투수를 구해야하는 시점이었다. 이때만 해도 다저스는 지금의 국저스 시절과는 달리 피터 오말리 구단주 밑에서 신인을 키워쓰던 돈 안쓰는 팀이었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를 FA시장에서 구하지 않았고 당시 셋업맨이었던 좌완 스캇 래딘스키(現 LA 에인절스 불펜 코치), 우완 안토니오 오수나[11] 가 번갈아서 맡는 더블 스토퍼를 선택했다. 즉 내부승진. 하지만 이 체제는 래딘스키와 오수나의 부진으로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시장에서 마무리 투수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1루에는 프렌차이즈 스타 에릭 캐로스가 3루에는 슈퍼 탤런트 아드리안 벨트레를 보유해 붕 떠버린 폴 코너코를 중심으로 정상급 마무리를 영입하고자 노력중이던 다저스는 결국 제프 쇼를 영입하는데 성공한 것.[12]
전반기 신시네티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생애처음 올스타에 선정되는 감격을 누린 제프 쇼는 다저스 이적이후에도 활약을 이어가며 34경기 25세이브 35.1이닝 2.55의 평균자책점과 1.19의 WHIP으로 다저스의 뒷문 불안을 깔끔하게 해결해주며 1998시즌 최종적으로 73경기 48세이브[13] 85이닝 2.12의 방어율과 1.11의 WHIP이라는 특급성적을 올렸다.
1999시즌에도 64경기 34세이브 68이닝 2.78의 평균자책점과 1.16의 WHIP으로 활약하며 A급 마무리투수의 위용을 올렸다.
1996시즌 - 78경기 8승 6패 4세이브 104.2이닝 2.49 평균자책점 1.22 WHIP
1997시즌 - 78경기 4승 2패 42세이브 94.2이닝 2.38 평균자책점 0.96 WHIP. 세이브 1위, NL Rolaids
1998시즌 - 73경기 3승 8패 48세이브 85.0이닝 2.12 평균자책점 1.11 WHIP
1999시즌 - 64경기 2승 4패 34세이브 68.0이닝 2.78 평균자책점 1.16 WHIP
리그 정상급 불펜투수로 떠오른 1996시즌을 기점으로 잡던 마무리투수로 전환한 1997시즌을 기점으로 잡던 1999시즌까지의 제프 쇼는 4년 연속 2점대 방어율과 3년 연속 +30세이브, 한번의 올스타, 세이브 1위, Rolaids Award를 수상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투수 중 한명이었고, 특히 1996~1998시즌의 활약은 발군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Rolaids Award를 수상한 1997시즌이 커리어하이 시즌이겠지만 나머지 시즌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으며, 다소 노쇠화가 찾아온 1999시즌의 성적도 여전히 발군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견의 여지없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믿음직한 마무리중 하나였던 제프 쇼이긴 하지만 33[14] 에 이르는 다소 많은 나이가 슬슬 부담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으며,[15] 1999시즌 전반기 2.37의 평균자책점으로 지난 3시즌에 비견되도 손색없는 활약을 하던 것에 반해 후반기 3.30의 평균자책점으로 다소 무뎌진 기록을 올리며 노쇠화 우려를 사기도 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런 우려는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시작한다.
지난 4년간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믿음직한 마무리투수 중 한명이었던 제프 쇼도 2000시즌엔 34살에 달하는 완연한 노장이었고, 나이를 속일수는 없는지 전반기 오른팔건초염 부상을 겪으며 29번의 등판에서 8.00의 평균자책점과 19번의 세이브 기회에서 12세이브를 올리는동안 7블론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크게 부진하며 우려를 샀다.
하지만 부상자명단에서 부상을 말끔히 회복한 후반기에는 15경기 연속 세이브를 기록하는등 31경기에서 30.1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0.89 15세이브 0블론세이브라는 특급마무리다운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명예회복에 성공하고, 시즌성적도 4.24의 평균자책점과 27세이브로 어느정도 회복하는데 성공한다.[16]
그리고 2001시즌 제프 쇼는 지난시즌 후반기의 피칭을 이어가듯 전반기 훌륭한 피칭으로 세이브 1위를 질주하며 다저스의 뒷문을 든든히 지켰고,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생애2번째 올스타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35에 이르는 나이의 노장에게 계속되는 등판은 버거웠던 것인지, 후반기 첫등판에서의 블론세이브 이후 8경기 연속 세이브를 기록하며 투혼을 불사르던 제프 쇼의 체력은 계속되는 등판과 연투로 인해 어느덧 한계에 달하게 된다. 결국 애리조나, 샌프란시스코와 선두경쟁이 한창이던 8월 제프 쇼는 7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에이스 케빈 브라운의 뒤를 받쳐야할 박찬호마저 무너지며 다저스는 포시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이 시기 제프 쇼의 문제점은 선발 제프 쇼가 겪던 문제점과 비슷했다.
선발로는 구위가 부족했고, 불펜투수 전환후에도 준수한 불펜투수정도이던 제프 쇼가 신시네티 시절 특급 불펜투수로 군림하게 된 이유는 정교한 제구력에 있었다. 1점대 bb/9의 정교한 제구력은 당대 마무리 투수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고, 이런 제구력을 바탕으로 다소 부족한 구위를 보완한 제프 쇼는 특급 마무리로 군림할 수 있었으나 나이가 들어 구위가 감소한 상황에서 연투로 인한 체력문제까지 겹치자 정교한 제구력이 뒷받침됨에도 타자를 제압하는데 부족함이 있을정도로 구위가 저하된 것이다.
이는 마지막 시즌 이닝당 피홈런 수치가 급증한 것에서 알 수 있으며,[17] 유리한 카운트를 잡고도 결정적으로 타자를 제압하지 못해 긴 승부로 끌려가는 경우도 잦았다. 한마디로 늙었던 것.
그러나 제프쇼는 9월부터 마지막불꽃을 불태우며 통산 200세이브를 달성하는등 리그 2위에 해당하는 43세이브를 기록하며 노익장을 과시했으나, 오프시즌 많은 나이와 확연해진 노쇠화를 이유로 소속팀 다저스와의 연장계약이 불발된 후 성공의 좋은 추억이 남아있는 고향팀 신시네티로의 복귀를 원했지만 다저스와 동일한 이유로 신시네티가 제프 쇼와의 계약에 난색을 표하자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2001시즌 성적은 77경기 74.2이닝 43세이브 3.62의 평균자책점 1.09의 WHIP
통산성적은 633경기 19선발 34승 54패 203세이브 3.54의 평균자책점 1.24의 WHIP
그리고 쇼의 뒤를 이어 등장한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가 바로 에리크 가녜이다.
전문 마무리로 올린 1997~2001시즌 제프쇼의 성적
다소 투고타저의 시대인 현시점에서 봤을때 그렇게까지 뛰어나다고 볼 수 없는 제프 쇼의 성적과 한국에서 이상할 정도로 각인된 불쇼 이미지탓에 저평가되고 있지만, 제프 쇼가 전성기와 노익장을 과시하던 커리어의 끝자락은 모두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악의 타고투저시기로 손꼽히는 스테로이드 시대의 최절정기로, 약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증가한 타자들의 장타력은 장타 한방에 따라 경기의 향방이 갈리는 경기 막판에 등판하는 마무리투수들에게 굉장한 부담감으로 작용했으며, 이는 제프 쇼와 동일한 시기 전업마무리로 전환한 역대 최고의 마무리인 마리아노 리베라마저도 한시즌 9개의 블론세이브를 기록할 정도로 투수에게 가혹한 시기였다.[18]
제프 쇼의 전업마무리 시즌인 1997-2001시즌에 각팀의 주요 마무리 투수들[19] 의 성적과 비교해보면 제프 쇼가 얼마나 좋은 마무리투수였는지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프 쇼(마무리 5년) - 2.92의 평균자책점 1.11WHIP 84.0% 세이브 성공률
제프 쇼(다저스 4년) - 3.37의 평균자책점 1.19WHIP 83.8% 세이브 성공률
기간을 5년으로 잡던, 다저스 시기로 잡던 평균자책점, WHIP, 세이브 성공률 등 모든 부분에서 제프 쇼가 당대 1류 마무리임을 뚜렷히 보여주고 있다. 제프 쇼가 마무리투수로 활약한 5년을 기간으로 잡을시 그보다 확실히 윗줄이라고 말할 마무리는 마리아노 리베라와 트레버 호프먼 정도이고, 다소 우위를 점한 마무리로 범위를 넓혀도 빌리 와그너, 랍 넨, 아르만도 베니테즈 정도까지 5명을 넘지 못한다.[25]
그럼에도 한국에서 제프쇼가 불안한 이미지를 지닌것은 투수에게 가혹했던 시기 마무리를 했던점, 마지막 2년 나이에 따른 하락세가 찾아왔던 점,[26] 90마일 중후반대의 속구로 억누르는 투수가 아니었다는 점[27]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나 그 중에서 하필이면 스테로이드 시대에 한국인 소속팀 주전 마무리였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위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마리아노 리베라, 트레버 호프먼, 랍 넨, 빌리 와그너, 아르만도 베니테즈까지 다섯 선수만이 제프 쇼만이 위라고 칭할만 하고, 존 웨틀랜드와 압도적 세이브 성공률을 기록한 톰 고든정도가 제프 쇼와 비슷한 위치일 뿐 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부진한 한, 두시즌 마무리를 비롯해 대다수의 마무리투수는 제프 쇼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나마 5시즌을 꼬박 부상없이 마무리로 뛰었던 선수로 범위를 좁히면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할만큼 제프 쇼는 꾸준히 출장하면서도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우수한 성적을 올렸음에도 한국에서 비난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리아노 리베라와 트레버 호프먼을 제외한 그 누가 다저스 마무리투수였더라고 하더라도 불안한 마무리로 비난 받았을 것이다.
한가지 예로 위키에 항목이 형성되어 있는 애너하임의 마무리 투수 트로이 퍼시벌의 경우 2000시즌 4.50의 평균자책점과 10블론세이브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하는 등 1997시즌부터 2001시즌까지의 5년간 확실히 제프쇼보다 아래급의 마무리투수였다. 그러나 해당항목을 들어가보면 '1997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주춤했으나, 1998년 42세이브를 거두며 커리어하이를 찍었고, 2001년까지 4년 연속으로 30세이브를 올리면서 꾸준히 에인절스의 뒷문을 책임졌다.'라며 안정적인 마무리투수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반해 제프 쇼는 항목이 수정되기 전까지 '우리가 아는 그 이미지대로(...)'식의 불안한 마무리라는 뉘양스.
그리나 한국에 퍼진 '제프쇼=불쇼'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박찬호 선수가 승리투수조건을 충족시킨 경기에서 등판한 제프 쇼는 동기간 마리아노 리베라와 트레버 호프먼조차 뛰어넘는 특급 성적을 기록했다.
1998-2001시즌 박찬호 승리투수조건 충족경기 등판성적
39경기 37.1이닝 1피홈런 8실점 31세이브 3블론세이브 WHIP 1.04 평균자책점 1.93 세이브 성공률 91%
블론세이브 일지
1998년 8월 28일 몬트리올
박찬호 8.1이닝 2실점 - 승계주자 존재(최종 3실점)
제프쇼 0.2이닝 1피안타
2001년 4월 13일 샌디에이고
박찬호 7.0이닝 3실점
제프쇼 1.0이닝 1실점
2001년 8월 14일 몬트리올
박찬호 8.0이닝 0실점
제프쇼 1.0이닝 4실점[28]
박찬호의 승리가 걸린 경기에서 완벽한 마무리솜씨를 뽐냈음에도 '제프 쇼=불쇼'라는 인식탓에 제프 쇼가 박찬호 경기에서 블론세이브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박찬호선수가 2000년 20승이 가능했다는둥의 소리가 있었는데, 위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1999, 2000시즌 제프 쇼는 박찬호 선수의 승리가 걸린 경기에서 단 한번의 블론세이브도 범하지 않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23경기 연속 노 블론세이브, 21연속 세이브의 기록을 남기며 활약했으며, 2000시즌에는 박찬호 선발 경기에서 8세이브 0블론의 무결점 활약을 했다
아마도 최고의 시즌을 보냈음에도 20승 고지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의 책임을 물을 선수가 필요했고, 당시 하락세와 마무리치고 빠르지 못한 구속, 전반기 대부진까지 겹쳐 만만한 이미지였던 제프 쇼가 희생양으로 걸렸던 것으로 추측되지만[29] 성적에서 알 수 있듯이 특급 박찬호 도우미였다.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인 선수 소속팀이라 폄하당한 당대 A급 마무리 투수.
아들 트래비스 쇼도 야구선수이다. 포지션은 아버지와 달리 1루와 3루를 볼 수 있는 우투좌타 내야수이며 2011년 9라운드에 보스턴 레드삭스에 지명되었고, 2015년에 빅리그에 콜업되었다. 유망주 치고 나이가 많고 실링이 낮아 높게 평가받는 유망주는 아니지만, 8월 마이크 나폴리가 나간 1루 빈자리를 인상적인 활약으로 메웠고, 2016년 스프링캠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FA 주전 3루수로 영입했으나 먹튀가 진행중인 파블로 산도발을 밀어내며 주전 3루수를 차지했다.[30] 2016년 시즌 종료후, 보스턴이 불펜 보강을 위해 밀워키의 타일러 쏜버그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그 댓가로 밀워키 브루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2017년부터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주전 3루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 '''대폭발''' 포텐이 터진 쇼는 타율은 낮지만 뛰어난 수비력과 1시즌 30홈런을 칠 수 있는 장타력을 가진, 팀의 중심 타선을 맡을 수 있는 선수로 성장했다. 지금의 모습을 유지한다면 조만간 아버지의 커리어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1. 개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약했던 마무리 투수.
박찬호가 활약하던 무렵 LA 다저스에서 뛰었기에 우리나라에선 방화범의 대명사(...) 정도로 알려져 있다.[1] 다저스 역대 최다 세이브 3위[2] 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투수이다.
2. 선발유망주 시절과 메이저리그에서의 실패
오하이오 주에서 출생하여 1986년 드래프트에서 고향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1라운드 1순위로 지명된 선수이다. 참고로 제프 쇼가 지명된 드래프트는 MLB에서 마지막으로 시행된 '''1월 드래프트'''로 정식 드래프트인 6월에 열리는 드래프트가 아닌 이런저런 사정으로 4년제에 못간 주니어 칼리지(JC 또는 Community College. 알기 쉽게 말하자면 전문대) 출신 선수들이 참가하는 일종의 보충 드래프트이다. 제프 쇼 역시 4년제가 아닌 클리블랜드의 쿠야호가 커뮤니티 칼리지를 2년 다닌 뒤 4년제 편입이 아닌 1월 드래프트로 입단했다.[3]
우리가 알고 있는 제프쇼는 마무리투수이지만 애초에 제프쇼는 선발유망주로 각광받았었고,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마이너리그의 각 단계를 착실히 밟아나가 4년간 99경기(89선발) 591이닝 3.41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1990년 4월 메이저리그로 승격된다.
그러나 데뷔전인 토론토전에서 5.1이닝 11피안타 6실점 6자책 4피홈런[4] 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보이더니 이후 선발로 나선 9경기에서 39.1이닝 27자책점과 6.18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최악의 성적[5] 을 기록하며 불펜으로 강등당하며, 불펜으로도 부진한 성적을 올리며 1990시즌 총 12경기 9선발 3승 4패 48.2이닝 11피홈런 6.66 평균자책점과 1.91의 WHIP이라는 기대이하의 성적을 기록한다.
이 시기 제프 쇼의 문제점은 구위가 강력하지 못한 투수가 선발로 등판했을때 타순이 돌수록 난타당하는 패턴의 정석을 밟았다는 점이다. 경기초반에는 나름대로 호투하나 상대타자들의 파악이 끝난 4~5회즈음부터 난타당하며 강판당했고, 결국 시즌 후반에는 경기초반에도 불펜[6] 으로도 난타당하는 등 자신감 상실의 기미마저 보였다.
메이저리그 선발투수로의 한계를 여실히 나타낸 제프 쇼는 1991시즌을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고, 그해 6월 재승격된후 가진 선발등판 경기에서도 타순이 돈 후 난타당하는 약점을 그대로 나타내며 4.2이닝 9피안타 6실점을 기록한 후 롱릴리프 겸 불펜으로 강등당하는데 여기서 제프쇼는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타순이 돌수록 난타당하는 그의 약점은 1~2이닝만을 책임지는 불펜투수 역할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고, 불펜 전환후 28경기에 등판하며 67.2이닝[7] 2.79의 평균자책점과 1.32의 WHIP이라는 수준급 성적을 기록할 수 있었다. 1991시즌의 총 성적은 29경기 1선발 0승 5패 1세이브 72.1이닝 3.36의 방어율과 1.37의 WHIP
하지만 클리블랜드가 제프 쇼에게 기대하던 것은 선발유망주로의 모습이었기에[8] 메이저리그 선발로의 정착에 실패한 제프 쇼의 모습에 실망을 금치 못했고, 1992시즌 마지막 선발기회도 3회부터 난타당해 5회에 완전히 무너지는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하며 4.1이닝 6피안타 7실점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 쯤이면 알겠지만 제프 쇼가 마이너리그에서는 꾸준히 선발로 출장하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는 하나 메이저리그 레벨에서는 선발로 살아남을 수 있는 수준의 구위를 지니지 못했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제프 쇼에 대한 기대를 접은 클리블랜드는 남은 시즌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내게 한 후 시즌 종료와 함께 방출을 선언한다.
3년 총합 43경기 11선발 3승 10패 1세이브 128.2이닝 4.90의 평균자책점과 1.58의 WHIP.
어찌보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으나 선발로 등판한 11경기에서 올린 48.1이닝 40자책점 7.45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성적과 3년간 계속 지적된 타순이 돌수록 난타당한다는 약점은 이 선발유망주가 메이저리그 레벨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고, 어느덧 26에 이른 나이는 제프 쇼의 명칭에서 '유망주'라는 직함을 빼앗아 가기에 충분했다.
결국 클리블랜드에서 방출당한 제프 쇼는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을 맺은 뒤 불과 한달만에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트레이드된다.
3. 불펜 전향과 최전성기
그러나 불펜으로 등판한 32경기에 등판해 기록한 80.1이닝 30자책점 3.36의 평균자책점의 준수한 성적은 제프 쇼에게 불펜투수라는 또다른 기회를 가져다주었고, 불펜 투수 제프 쇼의 가치를 높게 본 몬트리올은 그에게 불펜 투수로의 전향을 권유하고 어느덧 26에 이른 찬밥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제프 쇼는 불펜투수로의 전향을 승낙하고 이후 성공적인 두시즌을 보내게 된다.
1993시즌 - 55경기 95.2이닝 4.14의 평균자책점 1.29의 WHIP[9]
1994시즌 - 46경기 67.1이닝 3.88의 평균자책점 1.22의 WHIP
그러나 1995시즌에는 컨트롤이 흐트러지며 50경기 4.62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한채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이적하게 되고, 이 곳에서도 9경기 6.52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성적을 올린 후[10] 고향팀인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 된다.
그리고 지난 시즌 컨트롤 난조로 시즌을 망친 제프 쇼는 새삼 컨트롤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고, 이를 가다듬는데 성공하면서 대박을 치게된다.
1996시즌 78경기에 등판해 무려 104.2이닝을 소화하며 8승 6패 4세이브 22홀드 2.49의 평균자책점과 1.22의 WHIP의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주축으로 자리 잡고, 이듬해인 1997시즌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옮긴 후에는 78경기 4승 2패 42세이브 94.2이닝 2.38의 평균자책점 0.96의 WHIP이라는 한층 더 괴물같은 성적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특급 불펜투수로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한편 1997시즌 기록한 42세이브는 리그 최다 기록이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최우수 마무리투수에게 주어지는 Rolaids award까지 수상하는 등 제프 쇼의 가치는 하늘을 찌르게 된다.
1998시즌에도 39경기 23세이브 49.2이닝 1.81의 평균자책점과 1.05의 WHIP으로 특급마무리의 위용을 뽐내며 승승장구했지만 신시네티 레즈에서의 생활은 곧 끝나게 된다.
한창 치열한 포스트시즌 진출 싸움을 하던 LA 다저스는 더블 스토퍼 체제가 처참히 실패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마무리투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박찬호가 풀타임 선발투수로 정착한 첫 시즌이었던 1997년 시즌부터 마무리는 다저스의 문제였다. 이때 마무리 투수는 통산 256세이브를 기록했던 우완 정통파 마무리인 베테랑 토드 워렐이라는 선수였는데, 37세 시즌인 1997년 방어율 5.28로 처참한 성적을 거둔뒤 그 시즌에 은퇴를 하면서 다저스는 97시즌 종료후 새로운 마무리 투수를 구해야하는 시점이었다. 이때만 해도 다저스는 지금의 국저스 시절과는 달리 피터 오말리 구단주 밑에서 신인을 키워쓰던 돈 안쓰는 팀이었기 때문에 마무리 투수를 FA시장에서 구하지 않았고 당시 셋업맨이었던 좌완 스캇 래딘스키(現 LA 에인절스 불펜 코치), 우완 안토니오 오수나[11] 가 번갈아서 맡는 더블 스토퍼를 선택했다. 즉 내부승진. 하지만 이 체제는 래딘스키와 오수나의 부진으로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시장에서 마무리 투수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1루에는 프렌차이즈 스타 에릭 캐로스가 3루에는 슈퍼 탤런트 아드리안 벨트레를 보유해 붕 떠버린 폴 코너코를 중심으로 정상급 마무리를 영입하고자 노력중이던 다저스는 결국 제프 쇼를 영입하는데 성공한 것.[12]
전반기 신시네티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생애처음 올스타에 선정되는 감격을 누린 제프 쇼는 다저스 이적이후에도 활약을 이어가며 34경기 25세이브 35.1이닝 2.55의 평균자책점과 1.19의 WHIP으로 다저스의 뒷문 불안을 깔끔하게 해결해주며 1998시즌 최종적으로 73경기 48세이브[13] 85이닝 2.12의 방어율과 1.11의 WHIP이라는 특급성적을 올렸다.
1999시즌에도 64경기 34세이브 68이닝 2.78의 평균자책점과 1.16의 WHIP으로 활약하며 A급 마무리투수의 위용을 올렸다.
1996시즌 - 78경기 8승 6패 4세이브 104.2이닝 2.49 평균자책점 1.22 WHIP
1997시즌 - 78경기 4승 2패 42세이브 94.2이닝 2.38 평균자책점 0.96 WHIP. 세이브 1위, NL Rolaids
1998시즌 - 73경기 3승 8패 48세이브 85.0이닝 2.12 평균자책점 1.11 WHIP
1999시즌 - 64경기 2승 4패 34세이브 68.0이닝 2.78 평균자책점 1.16 WHIP
리그 정상급 불펜투수로 떠오른 1996시즌을 기점으로 잡던 마무리투수로 전환한 1997시즌을 기점으로 잡던 1999시즌까지의 제프 쇼는 4년 연속 2점대 방어율과 3년 연속 +30세이브, 한번의 올스타, 세이브 1위, Rolaids Award를 수상한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마무리투수 중 한명이었고, 특히 1996~1998시즌의 활약은 발군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Rolaids Award를 수상한 1997시즌이 커리어하이 시즌이겠지만 나머지 시즌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으며, 다소 노쇠화가 찾아온 1999시즌의 성적도 여전히 발군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견의 여지없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믿음직한 마무리중 하나였던 제프 쇼이긴 하지만 33[14] 에 이르는 다소 많은 나이가 슬슬 부담되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으며,[15] 1999시즌 전반기 2.37의 평균자책점으로 지난 3시즌에 비견되도 손색없는 활약을 하던 것에 반해 후반기 3.30의 평균자책점으로 다소 무뎌진 기록을 올리며 노쇠화 우려를 사기도 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런 우려는 정확히 맞아떨어지기 시작한다.
4. 노쇠화에 따른 기량하락과 은퇴
지난 4년간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믿음직한 마무리투수 중 한명이었던 제프 쇼도 2000시즌엔 34살에 달하는 완연한 노장이었고, 나이를 속일수는 없는지 전반기 오른팔건초염 부상을 겪으며 29번의 등판에서 8.00의 평균자책점과 19번의 세이브 기회에서 12세이브를 올리는동안 7블론세이브를 기록하는 등 크게 부진하며 우려를 샀다.
하지만 부상자명단에서 부상을 말끔히 회복한 후반기에는 15경기 연속 세이브를 기록하는등 31경기에서 30.1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0.89 15세이브 0블론세이브라는 특급마무리다운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명예회복에 성공하고, 시즌성적도 4.24의 평균자책점과 27세이브로 어느정도 회복하는데 성공한다.[16]
그리고 2001시즌 제프 쇼는 지난시즌 후반기의 피칭을 이어가듯 전반기 훌륭한 피칭으로 세이브 1위를 질주하며 다저스의 뒷문을 든든히 지켰고,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생애2번째 올스타에 선발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덧 35에 이르는 나이의 노장에게 계속되는 등판은 버거웠던 것인지, 후반기 첫등판에서의 블론세이브 이후 8경기 연속 세이브를 기록하며 투혼을 불사르던 제프 쇼의 체력은 계속되는 등판과 연투로 인해 어느덧 한계에 달하게 된다. 결국 애리조나, 샌프란시스코와 선두경쟁이 한창이던 8월 제프 쇼는 7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에이스 케빈 브라운의 뒤를 받쳐야할 박찬호마저 무너지며 다저스는 포시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만다.
이 시기 제프 쇼의 문제점은 선발 제프 쇼가 겪던 문제점과 비슷했다.
선발로는 구위가 부족했고, 불펜투수 전환후에도 준수한 불펜투수정도이던 제프 쇼가 신시네티 시절 특급 불펜투수로 군림하게 된 이유는 정교한 제구력에 있었다. 1점대 bb/9의 정교한 제구력은 당대 마무리 투수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고, 이런 제구력을 바탕으로 다소 부족한 구위를 보완한 제프 쇼는 특급 마무리로 군림할 수 있었으나 나이가 들어 구위가 감소한 상황에서 연투로 인한 체력문제까지 겹치자 정교한 제구력이 뒷받침됨에도 타자를 제압하는데 부족함이 있을정도로 구위가 저하된 것이다.
이는 마지막 시즌 이닝당 피홈런 수치가 급증한 것에서 알 수 있으며,[17] 유리한 카운트를 잡고도 결정적으로 타자를 제압하지 못해 긴 승부로 끌려가는 경우도 잦았다. 한마디로 늙었던 것.
그러나 제프쇼는 9월부터 마지막불꽃을 불태우며 통산 200세이브를 달성하는등 리그 2위에 해당하는 43세이브를 기록하며 노익장을 과시했으나, 오프시즌 많은 나이와 확연해진 노쇠화를 이유로 소속팀 다저스와의 연장계약이 불발된 후 성공의 좋은 추억이 남아있는 고향팀 신시네티로의 복귀를 원했지만 다저스와 동일한 이유로 신시네티가 제프 쇼와의 계약에 난색을 표하자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2001시즌 성적은 77경기 74.2이닝 43세이브 3.62의 평균자책점 1.09의 WHIP
통산성적은 633경기 19선발 34승 54패 203세이브 3.54의 평균자책점 1.24의 WHIP
그리고 쇼의 뒤를 이어 등장한 다저스의 마무리 투수가 바로 에리크 가녜이다.
5. 당대 마무리로서의 제프 쇼에 대한 고찰
전문 마무리로 올린 1997~2001시즌 제프쇼의 성적
다소 투고타저의 시대인 현시점에서 봤을때 그렇게까지 뛰어나다고 볼 수 없는 제프 쇼의 성적과 한국에서 이상할 정도로 각인된 불쇼 이미지탓에 저평가되고 있지만, 제프 쇼가 전성기와 노익장을 과시하던 커리어의 끝자락은 모두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악의 타고투저시기로 손꼽히는 스테로이드 시대의 최절정기로, 약으로 인해 전체적으로 증가한 타자들의 장타력은 장타 한방에 따라 경기의 향방이 갈리는 경기 막판에 등판하는 마무리투수들에게 굉장한 부담감으로 작용했으며, 이는 제프 쇼와 동일한 시기 전업마무리로 전환한 역대 최고의 마무리인 마리아노 리베라마저도 한시즌 9개의 블론세이브를 기록할 정도로 투수에게 가혹한 시기였다.[18]
제프 쇼의 전업마무리 시즌인 1997-2001시즌에 각팀의 주요 마무리 투수들[19] 의 성적과 비교해보면 제프 쇼가 얼마나 좋은 마무리투수였는지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프 쇼(마무리 5년) - 2.92의 평균자책점 1.11WHIP 84.0% 세이브 성공률
제프 쇼(다저스 4년) - 3.37의 평균자책점 1.19WHIP 83.8% 세이브 성공률
기간을 5년으로 잡던, 다저스 시기로 잡던 평균자책점, WHIP, 세이브 성공률 등 모든 부분에서 제프 쇼가 당대 1류 마무리임을 뚜렷히 보여주고 있다. 제프 쇼가 마무리투수로 활약한 5년을 기간으로 잡을시 그보다 확실히 윗줄이라고 말할 마무리는 마리아노 리베라와 트레버 호프먼 정도이고, 다소 우위를 점한 마무리로 범위를 넓혀도 빌리 와그너, 랍 넨, 아르만도 베니테즈 정도까지 5명을 넘지 못한다.[25]
그럼에도 한국에서 제프쇼가 불안한 이미지를 지닌것은 투수에게 가혹했던 시기 마무리를 했던점, 마지막 2년 나이에 따른 하락세가 찾아왔던 점,[26] 90마일 중후반대의 속구로 억누르는 투수가 아니었다는 점[27]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나 그 중에서 하필이면 스테로이드 시대에 한국인 소속팀 주전 마무리였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위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마리아노 리베라, 트레버 호프먼, 랍 넨, 빌리 와그너, 아르만도 베니테즈까지 다섯 선수만이 제프 쇼만이 위라고 칭할만 하고, 존 웨틀랜드와 압도적 세이브 성공률을 기록한 톰 고든정도가 제프 쇼와 비슷한 위치일 뿐 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부진한 한, 두시즌 마무리를 비롯해 대다수의 마무리투수는 제프 쇼에 못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나마 5시즌을 꼬박 부상없이 마무리로 뛰었던 선수로 범위를 좁히면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할만큼 제프 쇼는 꾸준히 출장하면서도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우수한 성적을 올렸음에도 한국에서 비난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마리아노 리베라와 트레버 호프먼을 제외한 그 누가 다저스 마무리투수였더라고 하더라도 불안한 마무리로 비난 받았을 것이다.
한가지 예로 위키에 항목이 형성되어 있는 애너하임의 마무리 투수 트로이 퍼시벌의 경우 2000시즌 4.50의 평균자책점과 10블론세이브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하는 등 1997시즌부터 2001시즌까지의 5년간 확실히 제프쇼보다 아래급의 마무리투수였다. 그러나 해당항목을 들어가보면 '1997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주춤했으나, 1998년 42세이브를 거두며 커리어하이를 찍었고, 2001년까지 4년 연속으로 30세이브를 올리면서 꾸준히 에인절스의 뒷문을 책임졌다.'라며 안정적인 마무리투수로 묘사되어 있다. 이에 반해 제프 쇼는 항목이 수정되기 전까지 '우리가 아는 그 이미지대로(...)'식의 불안한 마무리라는 뉘양스.
그리나 한국에 퍼진 '제프쇼=불쇼'라는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박찬호 선수가 승리투수조건을 충족시킨 경기에서 등판한 제프 쇼는 동기간 마리아노 리베라와 트레버 호프먼조차 뛰어넘는 특급 성적을 기록했다.
1998-2001시즌 박찬호 승리투수조건 충족경기 등판성적
39경기 37.1이닝 1피홈런 8실점 31세이브 3블론세이브 WHIP 1.04 평균자책점 1.93 세이브 성공률 91%
블론세이브 일지
1998년 8월 28일 몬트리올
박찬호 8.1이닝 2실점 - 승계주자 존재(최종 3실점)
제프쇼 0.2이닝 1피안타
2001년 4월 13일 샌디에이고
박찬호 7.0이닝 3실점
제프쇼 1.0이닝 1실점
2001년 8월 14일 몬트리올
박찬호 8.0이닝 0실점
제프쇼 1.0이닝 4실점[28]
박찬호의 승리가 걸린 경기에서 완벽한 마무리솜씨를 뽐냈음에도 '제프 쇼=불쇼'라는 인식탓에 제프 쇼가 박찬호 경기에서 블론세이브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박찬호선수가 2000년 20승이 가능했다는둥의 소리가 있었는데, 위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1999, 2000시즌 제프 쇼는 박찬호 선수의 승리가 걸린 경기에서 단 한번의 블론세이브도 범하지 않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23경기 연속 노 블론세이브, 21연속 세이브의 기록을 남기며 활약했으며, 2000시즌에는 박찬호 선발 경기에서 8세이브 0블론의 무결점 활약을 했다
아마도 최고의 시즌을 보냈음에도 20승 고지를 정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의 책임을 물을 선수가 필요했고, 당시 하락세와 마무리치고 빠르지 못한 구속, 전반기 대부진까지 겹쳐 만만한 이미지였던 제프 쇼가 희생양으로 걸렸던 것으로 추측되지만[29] 성적에서 알 수 있듯이 특급 박찬호 도우미였다.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인 선수 소속팀이라 폄하당한 당대 A급 마무리 투수.
6. 기타
아들 트래비스 쇼도 야구선수이다. 포지션은 아버지와 달리 1루와 3루를 볼 수 있는 우투좌타 내야수이며 2011년 9라운드에 보스턴 레드삭스에 지명되었고, 2015년에 빅리그에 콜업되었다. 유망주 치고 나이가 많고 실링이 낮아 높게 평가받는 유망주는 아니지만, 8월 마이크 나폴리가 나간 1루 빈자리를 인상적인 활약으로 메웠고, 2016년 스프링캠프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FA 주전 3루수로 영입했으나 먹튀가 진행중인 파블로 산도발을 밀어내며 주전 3루수를 차지했다.[30] 2016년 시즌 종료후, 보스턴이 불펜 보강을 위해 밀워키의 타일러 쏜버그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그 댓가로 밀워키 브루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2017년부터는 밀워키 브루어스의 주전 3루수로 출장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 '''대폭발''' 포텐이 터진 쇼는 타율은 낮지만 뛰어난 수비력과 1시즌 30홈런을 칠 수 있는 장타력을 가진, 팀의 중심 타선을 맡을 수 있는 선수로 성장했다. 지금의 모습을 유지한다면 조만간 아버지의 커리어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1] 박찬호가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을 때, 송신영이 임팩트있는 방화로 박찬호의 승리를 날려먹자 '''제프 송'''이라는 별명이 잠시 붙었다. 그리고 2013년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류현진의 팀 동료인 로날드 벨리사리오가 불질을 시전하자 팬들은 그에게 벨신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별명의 계보?[2] 1위 켄리 잰슨, 2위 에리크 가녜[3] 1986년 정식 6월 드래프트 전체 1위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의 1루수 제프 킹이다. 또한, 제프 쇼에 이어 1월 드래프트 2순위에 지명된 선수는 펠리페 알루의 아들이자 통산 332홈런 .303/.369/.516을 기록한 강타자 모이세스 알루다.[4] 선발 등판으로 보이겠지만, 해당경기 선발투수가 0.2이닝 4실점으로 경기초반에 무너진후 선발 유망주이던 제프 쇼가 긴 이닝을 던지기 위해 투입됐다.[5] 도중 마이너리그로 강등당하기까지 했다.[6] 3경기 9.2이닝 9자책(...)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성적을 기록했다.[7] 28경기에 등판한 불펜투수의 이닝으로는 굉장히 많은 편인데, 당시시대는 불펜이 지금보다 많은 이닝을 던지기도 했고, 선발 유망주였던 제프 쇼가 롱릴리프로 등판한 경기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8] 또 1990년대 초반과 지금은 불펜에 대한 가치인식이 다르기도 하다.[9] 시즌중반 8경기 선발등판의 기회를 가졌고 방어율 3.96의 성적을 기록했다. 방어율만 보면 준수해 보이지만, 8경기에서 36.1이닝 경기당 4이닝이라는 한계를 여실히 들어냈고 이후 제프 쇼는 완전히 불펜투수로 전향하게 된다.[10] 1995시즌 총 59경기 72이닝 4.88의 평균자책점 1.35의 WHIP[11] 이 선수 조카가 現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95년생 마무리 투수인 로베르토 오수나이다. 2015년 ALDS에서 최연소 세이브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2] 한 편 코너코가 활약했던 마이너레벨은 타자친화리그였던 탓에 그 능력에 어느정도 의심부호가 달렸던 점도 있다. 이런 사항들이 합쳐져 코너코 트레이드가 단행되게 된 것인데, 당시부터 그리 좋은 소리는 못들었지만 삽질로 치부될 정도도 아니었다. 이유는 당시 신시내티 레즈에는 션 케이시 라는 주전 영건 1루수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시기였다보니 신시내티 레즈에서도 기회를 많이 얻을 수 없었기 때문. 결국 폴 코너코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팀을 한 번 더 옮기고 주전 1루수를 보장받은 다음에서야 터졌다.[13] 리그 3위[14] 2000시즌 생일을 넘기면 34[15] 제프 쇼가 메이저리그 정상급 불펜으로 올라선 1996시즌이 종료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30이었고, 다저스 입성은 32에 이르던 늦깎이 스타였다.[16] 회복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지난 제프 쇼의 성적에 비하면 사실 실패에 가까웠다. 그나마 부상이 면죄부가 됐을뿐[17] 2000시즌은 부상의 여파가 있었다.[18] 리베라뿐만 아니라 당시 탑 마무리로 손꼽히던 투수들 모두 현시점에서 볼때 명성에 비해 많은 블론세이브를 기록했다. 트레버 호프먼, 랍 넨, 빌리 와그너, 존 웨틀랜드 등[19] 최소 3년 이상을 마무리투수 및 불펜투수로 활약한 선수들을 기준으로 했다., 때문에 2000년에 데뷔한 사사키나 2000시즌부터 불펜으로 전향한 호세 히메네즈는 포함되지 않았다.[20] 해당기간동안 복수의 팀에서 활약한 경우 마무리로 긴 시간을 보낸 팀, 가장 좋은 활약을 보인 팀 순으로 선정했다.[21] 디 고든의 아버지이자 스티븐 킹의 소설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의 그 톰 고든이다.[22] 오타가 아니다. 이 선수가 이5년간 세이브 성공률 1위이다.[23] 철자가 Dave Veres여서 종종 베레스라고 불렸지만 정식 발음은 비어스다.[24] 이 선수는 육손이 선수로 알려져 있다. 오른손이 다지증 발병. 공을 잡지 않는 손가락이라 제구에 영향을 주는 정도는 아니었다고.[25] 웨틀랜드가 유사한 성적을 기록하고 구장을 감안하면 더 우위로 보이나, 이 분은 2000시즌을 끝으로 은퇴했고 제프쇼는 2001시즌 비율스탯을 많이 까먹었다. 1997-2000시즌으로 비교하면 둘은 제법 차이가 난다.[26] 2000년은 부상여파로 최종성적은 2류였으며, 2001년은 1류라고 하긴 미묘한 수준이었다. 다만 위 투수들도 찾아보면 그 이상으로 말아먹은 시즌이 수두룩하게 존재한다.[27] 제프 쇼의 컨트롤과 WHIP은 당대 마무리중 최상위였으나 속도는 빈말로라도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28] 간혹 이 경기때문에 불쇼이미지가 생겼다는 말이 있지만 이 때는 1998년 다저스의 더블 스토퍼 시스템 실패로 억울하게 불쇼이미지를 뒤집어 쓴지 한참 후이다.[29] 솔직히 말하면 그냥 옆에서 그러니 그런가보다 하고, 정말로 기록을 찾아 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30] 트래비스 쇼가 가능성을 드러내기 전에는 박병호 영입에 보스턴이 1순위 후보였지만 트래비스 쇼, 그리고 1루로 전향한 핸리 라미레즈로 인해 박병호 영입 가능성이 낮아지면서 천조국 쌍둥이가 영입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