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공수특전여단 동사사고
1. 개요
1998년 4월 1일(수)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예하 제5공수특전여단[1] 군인들이 천리행군을 하는 도중에 일어난 사망사고이다. 원인은 기상이변, 그리고 기상이변에도 불구하고 대대장이 무리한 훈련강행을 명령한 탓도 있다.
다만, 대대장이 이러한 무리한 결정을 한 데는 나름대로는 이유가 있었다. 하필 그들이 일반 육군도 아닌 '''특전사'''라는 점이었다. 특전사 특성상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적지에서 작전을 해야 하는데, 만약 대대장이 비가 온다고 훈련을 멈추었다면 대대장 개인뿐만 아니라 특전사 전체의 평판이 낮아진다는 것 때문이었다. 또한 21세기에 들어서는 군인들의 안전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지휘관들[2] 이 많아지긴 했지만, 당시에는 군이 현재보다도 문민화가 되지 않았다. 또한 대대장이 행군을 계속 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무렵에는 부대가 심각한 상황에 처하진 않있기 때문에 '신속하게 행군해서 지역을 이탈하자'는 중대한 오판을 했다.
당시 군인들이 민주지산을 오르다가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려 온 몸이 흠뻑 젖은 상태에서 산악행군을 계속하였다. 계속 정상을 향해 걷는데, 기상이 급변하여 4월 봄인데도 갑자기 추워져서 체감온도가 영하 30도에 이르고 비가 눈으로 바뀌어 거센 눈보라까지 몰아치자 대원들이 저체온증 때문에 쓰러졌다.[3] 게다가 심한 악천후로 헬기도 못 뜨는 등 구조가 늦어져 결국 여단 예하 제23특전대대 소속 김광석 대위(학군 30기)[4] , 이수봉 중사, 오수남ㆍ이광암ㆍ한오환ㆍ전해경 하사 총 6명이 저체온증으로 동사하였다. (#, #)
2. 상세
1998년 3월 28일(토), 특전사 제5공수특전여단 제23특전대대 소속 대원들이 천리행군을 시작하였다. 칠갑산에서 출발하여 약 8일 동안 속리산과 월악산을 거쳐 대모산에서 훈련을 종료하는 일정이었다.
5일차인 4월 1일(수) 오후 1시, 대원들은 전라북도 무주군 하두 마을에서 출발하여 충청북도 영동군 용화면에 소재한 민주지산(1241 m) 정상으로 항했다. 일기예보상으로는 비가 조금 내린다고 하였으나, 출발한 지 1시간쯤 뒤부터 비가 많이 쏟아져 내렸다.
오후 3시, 민주지산 6부능선을 통과할 즈음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서 비가 갑자기 눈으로 바뀌더니, 오후 4시 8부능선을 지날 무렵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눈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봄에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고 기상청의 일기예보도 예측하지 못한 드문 기상이변이었다. 이후 부대의 행군속도가 느려지더니, 4시 50분 무렵에는 일부 인원들이 저체온증상으로 탈진하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기상이 정상화될 때까지 훈련일정을 잠시 중단하고 일단 휴식을 취해도 될지 대대본부에 문의했으나, 당시 대대장은 "훈련을 예정대로 강행하라." 하고 지시하였다. 아직 상황이 심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빨리 현장을 통과하자''' 라는 오판을 한것이다.
오후 5시, 선두 인원이 민주지산 정상에 도달하였으나 날씨가 워낙 춥고 기상이 나빠 통신장애가 생겼다. 이 무렵 체감온도가 영하 30도에 달했다고 한다. 5시 30분부터는 부대에 탈진자가 다수 나왔으며, 오후 6시 20분에는 9부능선 후미부대에서 첫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후미 인원도 얼마 뒤에 정상에 도달했다.
오후 6시 반, 산을 내려가면서 첫 구호소를 설치하여 저체온증으로 의식을 잃은 인원을 구호하였다. 상태가 상대적으로 괜찮은 인원들은 그대로 하산하였으나, 오후 7시 10분, 5부능선에서 결국 선두부대에서도 탈진환자가 다수 발생하여 2차 구호소를 설치했다. 다른 병력들은 계속 하산하였으나 또다시 3차 구호소를 설치해야 했다. 병력 일부가 겨우 겨우 하산하여 민가에 도착한 때는 오후 8시 10분이었다. 이들은 민가의 전화기를 빌려 부대에 구조를 요청하고, 물한분교[5] 에 임시 대피소를 마련하였다.
영동소방서 119 구조대는 부대로부터 헬리콥터를 띄워달라는 요청을 접수하였으나 기상이 워낙 나빠 헬리콥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구조까지 시간이 오래 지체되는 바람에 사망자가 더 늘어났다. 구조대는 오후 9시 10분에야 도착하여 환자들을 후송하였으나, 어두운 밤중인 데다가 눈 쌓인 산속이고 대원들이 흩어져 있어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결국 이 사고로 후송 도중 사망한 인원까지 포함하여 총 6명이 숨을 거두었다.[6] 이 과정에서 김광석 대위는 먼저 저체온증에 걸려 대열에서 낙오된 한오환 하사를 구하려다 같이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사망자들은 1계급씩 추서되었다[7] . 대대장 이춘일 중령(3사 15기)는 사고의 책임을 물어 보직해임되었고 여단장 천연우 준장(육사 29기)[8] 여단 정보참모 김학영 소령(단기 15기)는 징계조치되었다 . 또한 고어텍스가 전군에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방부에서는 이 사고를 바탕으로 <아! 민주지산>이라는 영화를 1999년에 촬영하였다.
2001년 11월에 영동군수와 부대가 합동으로 위령비를 민주지산 입구에 세웠으나, 도로 근처라 장소도 좁고 위험하여 2017년 12월 4일에 이전하였다. 위령비와 별도로 국제평화지원단은 2017년 6월 1일 민주지산의 첫 구호소를 세웠던 터에 작은 추모비를 세웠다.
핫코다 산 참사와 함께 혹한기 훈련에 대비한 교육에서 잘 언급되는 사고이다. 위의 <아! 민주지산> 영상도 자료 영상으로 자주 등장한다.
전쟁소설 데프콘 한미전쟁편 4권에서도 이 사건을 언급한다.
3. 괴소문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인터넷상에서 여러 황당한 괴소문들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특전사 부대 초소에 쇠사슬로 묶인 관 6개를 끌고 다니는 귀신이 목격되었고, 사망자들이 전부 그때 야간 경계근무를 섰던 인원들이라는 괴담이 부대에 복귀한 1주 뒤부터 부대원들 사이에 떠돌았다. 이것 외에도 이 괴담에 기반해서 만들어진 여러 버전의 괴담들도 인터넷상에 떠돌았다.
이 사건 때문에 그 사고가 난 대대가 아예 공중분해 해체되어서 원래 여단급 부대였던 제5공수특전여단이 더 작은 단급부대인 특수임무단으로 개편되었다는 아무 근거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황당한 소문도 언젠가부터 인터넷상에 떠돌았다. 하지만 사고는 '''1998년''' 4월에 제'''23'''특전대대에서 일어났는데, 특수임무단으로 개편된 시기는 2년 뒤인 '''2000년''' 6월이고, 이때 신설 특수임무단의 소수정예화 방침 때문에 규모를 축소하느라 해체된 곳은 제'''25'''특전대대이다.[9] 즉 개편시기든 해체된 대대든 '''민주지산 사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0]
5여단은 다른 여단들과는 달리 북한 내 특정한 침투담당지역을 미리 정해두지 않은 예비대라[11] , 평상시에 다른 여단들이 늘 하는 북한 특정지역에 대한 연구와 예행연습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다른 여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평상시 훈련 스케줄 부담이 적었던 5여단을 평시에 별도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있었고, 결국 국가재난과 테러에 대비하는 부대로 개편하기로 결정했을 뿐이다.[12]
즉, 부대개편과 이 사고는 전혀 무관하므로, 불행한 사건을 흥미거리로 삼아 누군가 창작해서 인터넷에 퍼트린 사실무근의 헛소문 소설들에 낚이지 말자.
4. 기타
1956년 2월 28일, 강원도 인제군에서 탈영병을 잡으러 출동한 이규홍 중위와 병사 6명이 탈영병을 체포하여 돌아오다가 8명 모두 폭설 속에서 핫코다 산 참사와 같이 선 자세로 동사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부대의 총책임자인 5사단장은 박정희이다.
[1] 현 국제평화지원단의 전신.[2] 사건 당시 영관급, 위관급이었던 현재의 장성들[3] 옷과 몸이 물에 흠뻑 젖은 채로 기온이 급하강하면 바로 저체온증에 시달리는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빨리 따뜻한 곳으로 옮겨서 젖은 옷을 벗고 뜨거운 불로 몸을 말려 체온을 높이는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죽는다.[4] 학군 30기는 1992년에 임관한 장교들로 1998년 시점에서 전역을 2개월 앞둔 말년대위였다. 김광석 대위 역시 당시 말년대위들이 참모 대신 하는 보직인 3차 중대장이었고, 이 천리행군만 종료하면 제대할 예정이었다.[5] 충북 영동 상촌초등학교의 분교. 상촌면 물한리에 있다. 지금은 폐교되었다.[6] 당시 기사에는 사망한 6명 외에도 실종자 1명이 더 있으나(#, #), 다음날 탈영병이라고 밝혀졌다.(#, #)[7] 본 항목에서는 사고 당시의 계급으로 기록하였다.[8] 사고에도 불구하고 2001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합참 작전부장직을 마지막으로 예편하였다.[9] 참고로, 해체된 이 제25특전대대는 국제평화지원단으로 개편한 뒤에 증가하는 파병수요 때문에 2013년에 재창설되었다.[10] 참고로, 2000년에 특수임무단으로 개편하면서 더욱 소수정예 부대로 운용한다는 목표에 따라 1개 대대를 줄여 3개 대대로 편제와 인원이 축소되었다. 그래서 이때부턴 여단이 아니라 '단'이 되었기 때문에 부대장도 준장인 여단장이 아니라 대령이 부대장인 '단장'이 되었다. 이후 다시 바뀐 국제평화유지단도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단보다 작은 '단'급 부대라서 여전히 대령이 부대장인 '단장'이다.[11] 이미 침투한 다른 특전여단 팀들의 작전 추이와 상황에 따라 필요한 지역에 후속으로 추가 침투되기 때문에, 북한의 어느 지역에 침투하게 될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다.[12] 그래서 부대개편 초기에는 707특임대가 이 특수임무단 예하로 소속되기도 하였다. 그 뒤 특수임무단으로서의 실질적인 임무변화가 흐지부지되자 707특임대도 다시 사령부 직할로 원위치된다. 특수임무단은 2010년에 국제평화지원단으로 다시 개편되었다. 이것도 무슨 사고가 발생해서가 아니라, 그저 임무가 변경되어 그에 맞게 개편되었을 뿐이다. 즉 현재는 평상시엔 해외파병부대, 전쟁시엔 다른 특전여단들에 대한 예비적인 추가 대북침투 게릴라부대로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특수임무단 시절에는 최종지휘관이 대령이었으나, 특임단 개편시 해체됐던 25대대가 국평단으로의 개편 때 재창설됨에 따라 준장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