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코다 산 참사
오늘날의 핫코다산.
일본어: 핫코다 설중행군 조난사건 / 八甲田 雪中行軍 遭難事件
1. 개요
1902년 1월, 산악지역에서 훈련 중이던 일본 육군 1개 보병중대가 혹한으로 조난당하고, 그 결과 '''210명 중 무려 199명이 얼어 죽은 전대미문의 사건'''이다. 평시훈련 중 발생한 사고로서는, 생존률이 고작 5%에 불과한 이례적인 대참사였다.
2. 배경
20세기 초 일본 제국은 만주 및 조선의 이권을 두고 영일동맹을 등에 업고 제정 러시아와 계속 대립 중이었으며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일본군도 대러시아 전쟁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중에는 러시아군이 홋카이도를 거쳐 혼슈 북부로 침공함을 막는 방어작전도 있었다.
도호쿠 일대에 주둔한 육군 제8사단은 러시아군의 침공을 방어하고 물자 보급선을 확보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8사단은 육로침공만이 아니라 일본 해군이 제해권을 상실하여 아오모리 해안철도를 러시아 해군 함정들이 포격하여 사용 못하게 될 것을 전제하고, 이 상황에 대비한 보급루트를 확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생각한 보급선이 바로 내륙의 핫코다산을 관통하는 하치노헤-핫코다산-아오모리 루트였다. 자국, 그것도 본토 영토 내에서 보급선을 개척한다느니 루트를 확보한다느니 하니까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아오모리현은 홋카이도와 마주보는 혼슈 최북단으로, 예전부터 번이 통치하였으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곳도 많았고, 일부 지역에선 아이누들이 건재하였다. 메이지 유신 후 40여 년밖에 안 지난 시점이었으니 말이다.
이에 8사단은 아오모리에 주둔한 5연대 2대대에 동계 산악행군을 겸한 보급로 탐사명령을 내렸다. 이에 2대대 병력을 중심으로 하되 1대대와 3대대에서 병력을 약간 차출하여 최종적으로 210명이 차출되었다. 지휘관은 2대대 예하 중대장 중 칸나리 분키치(神成文吉)[4][5] 대위가 맡았으나 2대대장 야마구치 진(山口 鋠) 소좌가 동행하였다. 이렇게 지휘권이 양립했기 때문에 사태가 악화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야마구치 소좌는 이 행로를 단 하루 만에 주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작전에 임하면서 전 병력에게 혹한을 대비하여 발에 고춧가루를 뿌린 뒤 양말을 3겹으로 신게 했다.
편제와 임무는 다음과 같다.
- 편성 외 대대 본부
- 1소대 - 취사 담당
- 2소대 - 짐 운반 담당
- 3소대 - 행군방법 연구 담당
- 4소대 - 숙영 담당
- 특별소대
3. 경과
3.1. 1일차(1/23)
탐사대는 1902년 1월 23일 목요일 아침 7시경 부대를 출발했다. 행군 초반에는 여정이 매우 순조로웠고 날씨도 혹한기 산악훈련을 하기 적절한 추위 정도였기에 탐사대는 현지 주민들이 자청하는 길 안내마저 사양하며 순조롭게 산을 올랐다.
'''그리고 오후부터 급격하게 기상이 악화되었다.'''
차라리 오전 중에 기상이 악화되었다면 일찌감치 포기하고 부대로 복귀하거나, 주둔지를 세우고 사태를 지켜보다가 복귀하는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산 중턱 가까이 올라갔는데 급격하게 추워지고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자 장교들은 고민에 빠졌다. 내려가자니 지금까지 올라간 게 아깝고, 행군을 강행하자니 기상이 어떻게 변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 결국 갑론을박 끝에 일단 계속 가보자고 결정했는데, 대형참사를 만들어낸 최악의 오판이 되었다.
그치라는 눈은 계속 더 쏟아지고 밤이 될수록 날씨는 더 추워졌으며, 병사 개개인이 휴대하던 비상식량도 다 얼어서 먹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물자를 운반하던 썰매부대인 2소대는 폭설 때문에 본대와 뒤쳐진 끝에 결국 썰매를 포기하고, 썰매에 탑재한 물자를 병사 개개인이 휴대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로써 병사들의 체력부담은 더욱 커졌다. 가장 운이 나빴던 병사는 무쇠솥을 짊어지고 다녔다.
오후 8시가 되어서야 겨우 숙영지가 결정되었다.[6] 부대는 눈을 파서 비박지를 만들었고, 오후 9시까지 낙오된 부대도 모두 도착해 취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8척(2.4 m)을 파도 땅이 나오지 않아 할 수 없이 눈 위에 화구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폭설 속에서 불도 쉽게 붙지 않는데 애써서 불을 붙여도 눈이 화구를 지탱하지 못해 녹아버려 솥이 엎어지곤 하는 등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3.2. 2일차(01/24)
오전 1시에 겨우 덜 익은 쌀과 데운 청주를 배급했다. 하지만 청주는 애써 데워놨더니 악취가 나서 아무도 먹을 수 없었고,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가운데 동상자가 속출했다. 지휘부는 당초 오전 5시 행군을 재개할 작정이었으나, 숙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오전 2시 아오모리로 복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눈이 하도 와서 방향이 분간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복귀가 어렵자 차라리 핫코다산 동쪽 다른 길을 통해 마을로 내려가기로 하였으나,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엉뚱한 협곡으로 가다가 산 중턱 하천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사실 길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안 그래도 폭설과 눈보라로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길들이 흔적조차 남지 않았고, 나침반조차 얼어붙어 작동하지 않았기에 방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판이었다. 더군다나 사토 카쓰데루(佐藤勝輝) 특무조장이 길 안내를 잘못하는 바람에 부대가 엉뚱한 방향으로 향했던 게 결정적이었다. 결국 벼랑을 기어올라가기로 했는데 이 과정에서 결국 첫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기이국 신구번의 옛 번주 미즈노 타다모토(水野忠幹)[7] 의 장남인 4소대장 미즈노 타다요시(水野忠宜) 중위[8] 가 졸도한 뒤 그대로 동사하였다.
부대는 오후 2시 반까지 행군하였지만 기껏해야 첫째날의 숙영지에서 700 m 이동했을 뿐이었다.[9] 일몰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길을 찾지 못한 부대는 결국 부대원 다수가 동사할 줄 알면서도 개활지 한 곳을 잡아 임시 숙영지로 삼았다. 하지만 눈을 팔 공구를 지닌 병사들은 전원 낙오하였기에 전날과는 달리 눈을 파서 만든 비박지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이때의 체감온도는 무려 '''영하 50도'''에 달했고 결국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밤에 5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3.3. 3일차(01/25)
부대의 운명은 사실상 이때 결정났다. 부대는 길을 찾지 못한 채 무의미한 행군을 계속할 뿐이었다. 후대의 조사에 따르면 기적적으로 제대로 방향을 찾았는데도, 폭설 때문에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채로 길을 잘못 들었다고 착각하고 발걸음을 되돌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지휘관 칸나리 대위는 이날 아침 그나마 체력이 남았다고 판단된 병력을 특무조장 2명을 포함한 12명을 선발하여 2개 조로 척후대를 편성, 각 특무조장을 척후대장으로 임명한 후 선발로 내보냈다. 말이 좋아 척후대지, 사실상 구원을 요청하는 연락병이었다. 이들 척후대 중 1개 조는 이후 연락두절, 전원 동사했으며 다른 1개 조는 길은 찾아내었으나 민간인이나 마을을 발견하진 못했다.
사태가 이 지경으로 치닫자, 남은 생존자들도 살기를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편제도 유지되지 않았고, 그저 앞에 사람이 가면 뒤를 따라가는 식으로 대열이 유지되었다. 지쳐서 조금이라도 늦으면 바로 낙오되고 낙오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이 계속되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중대원들 대부분이 죽고 210명 중 60~70명밖에 안 남은 상태였다.
한편, 산악지대와 달리 날씨가 화창해진 아오모리의 부대 주둔지에서는 훈련인원이 돌아오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아무런 연락도, 복귀자도 없어서 이상하게 여겼다. 하치노헤나 인근 지역의 군, 경찰들에게 연락을 해본 뒤에야 뭔가 큰일이 벌어졌음을 깨닫고 구조대 파견을 준비했다.
3.4. 4~5일차(01/26-27)
생존자들은 잔여인원을 2개 조로 편성하고 각자 길을 달리하여 나아가기로 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살아있던 칸나리 대위와, 또 다른 대위(쿠라이시 대위) 1명이 각 1개 조를 거느리고 나아갔다. 그러나 쿠라이시 대위네 조는 길을 잘못 들어 또다시 헤매었다.
칸나리 대위네 조는 비교적 정확하게 나아갔으나, 지휘자인 칸나리 대위가 끝내 쓰러졌다. 칸나리 대위는 동행하던 고토 후사노스케(後藤 房之助 1879-1924) 오장에게 "본대에 연락하여 구조대 파견을 요청하라." 하는 명령 겸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을 지키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고토 오장은 무작정 산 아래쪽으로 걷던 중 선 채로 정신을 잃었다가 구조대에게 발견, 최초로 구조되었으나 이후 양손 양발을 모두 절단했다.
고토 오장은 구조되면서 정신을 잃은 상황에서도 칸나리 대위의 이름을 되풀이하여 말했다. 이에 구조대는 그 주변을 수색하다가 죽기 일보 직전인 칸나리 대위를 발견했다. 칸나리 대위는 목숨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는데, 얼마나 추위에 시달렸는지 구조대가 급히 주사를 놓으려 했어도 피부가 얼어서 주사바늘이 부러질 지경이었다. 27일자 구조는 이것으로 종료되었다. 구조대조차 반수가 동상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그나마 회복된 날씨였으니…
결국 칸나리 대위는 사망했다. 향년 32세.
3.5. 6일차 이후(01/28-02/02)
구조대 다수가 동상에 걸리다보니 구조작업은 29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구조작업을 위한 병력도 부족해 센다이의 5포병연대에서 지원병력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29일, 구조대는 산 곳곳에 구조작업을 위한 초소와 거점을 마련하고 이곳들을 중심으로 수색작업을 개시했다.
1월 31일부터 본격적으로 생존자가 발견되었다. 생존자가 가장 많이 발견된 곳은 쿠라이시 대위 그룹이 은거한 절벽이었다. 이들은 혹한을 그나마 피할 수 있는 절벽 아래 움푹 패인 곳에 숨은 덕에 그나마 생존자가 많았다. 대대장 야마구치 소좌도 이때 같이 구출되었으나 2월 2일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10]
이후 2월 2일에 나머지 생존자들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들은 산 곳곳에 있는 주인 잃은 오두막 안에서 추위를 버티며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하지만 생환자 다수가 사지를 절단해야 하는 중상을 입었다. 이 외에 6명[11] 이 더 구조되었지만 이들은 구조 후 치료 도중 사망했다. 최종 생존자는 210명 중 겨우 11명. 그나마 심각한 동상을 입지 않은 사람은 쿠라이시 이치(倉石一) 대위, 이토 타루아키라(伊藤格明) 중위, 하세가와 테이죠(長谷川貞三) 특무조장 등 3명뿐이었고, 나머지 생존자들은 동상이 너무 심각해서 사지 일부를 잘라야만 했다. 오이카와 헤이스케(及川平助) 오장은 아킬레스건과 손가락 3개, 야마모토 도쿠지로(山本徳次郎) 일병은 왼쪽 다리를 통째로 절단했다. 몸상태가 가장 온전했던 쿠라이시 이치 대위는 이후 러일전쟁의 산데푸 전투에서 전사했다. 마지막 생존자 고하라 추사부로(小原忠三郎) 오장은 두 발과 손가락을 절단하고 1970년까지 살다가 91세로 사망.[12]
3.6. 계급별 생존율
좌관급 장교와 견습사관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또한 생존자 중 사지가 멀쩡한 사람은 위관급 장교 2명과 특무조장 1명뿐이었고, 부사관 이하 생존자는 모두 동상 때문에 사지 일부를 절단했다.
3.7. 원인
가장 큰 원인은 당연히 기상조건이다. 당시 아오모리현과 핫코다산 일대의 기후는 춥디추운 아오모리의 날씨를 생각하더라도 예상을 넘어 어마어마하게 추운 이상기후였다. 당시 1902년 1월 25일 행군 3일차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에선 영하 41도로 관측사상 최저온도를 기록했는데, 2020년 시점까지도 기록이 깨지질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제대로 된 동계장비를 갖추더라도 조난당하여 동사하기 쉽다. 여기까지는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천재(天災)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사건이 이렇게 커진 데에는 인재(人災)가 있었다. 혹한기 훈련을 계획하면서 제대로 된 동계장비를 준비할 생각이 없었다. 설상화 등을 갖추곤 있었지만 여분이 없었고 이상기후에 가까운 혹한에 도저히 대처할 수준이 아니었다. 개개인에게 동계장비를 준비하라고 말만 하고 제대로 챙기거나 확인하지 않았다. 거기다 부대원 대부분이 이와테, 미야기의 농촌 출신이었다. 같은 도호쿠 지방이긴 하지만 추위 면에선 비교가 안 된다.[13] 이때 병사들이나 초급간부들이 얼마나 안이했는가 하니, 적당히 행군하다 저녁에는 쉬면서 핫코다산의 노천온천에서 몸을 녹이자는 생각으로 수건만 챙긴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다른 문제로는 길잡이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사토 특무조장이 길 안내를 담당했는데 길을 잘못 보는 바람에 엉뚱한 곳으로 향했고 이 때문에 왔던 길로 되돌아가야 하는 고생을 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미즈노 타다요시 중위 등 여러 명이 동사했다.
그 밖에도 상술했지만 지휘계통의 원인도 있었다.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공식적인 지휘관 칸나리 대위 외에도 대대장 야마구치 소좌가 동행했고, 칸나리와 동계급인 대위도 여러 명 있었다. 칸나리 대위가 말이 지휘관이지 결정을 내리기 위해 다른 대위들과 논의하고 야마구치 소좌에게 다시 의견을 구해야 하는 체계이니 이런 위기상황에선 최악이었다. 게다가 당시 상명하복의 분위기상, 대대장 소좌 앞에서 대위들이 일치감치 복귀해야 한다고 진언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약한, 군인답지 못한 생각이라고 까일 염려가 있으므로... 더군다나 야마구치 진 소좌는 하루 만에 주파를 목표로 했으니, 이런 사람 앞에서 복귀를 진언했다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했다.
4. 뒷이야기
- 참사 소식을 들은 노르웨이 국왕이 위문품으로 스키를 보내줬다. 이게 일본 스키 역사의 시작이라고 한다.
- 8사단 5연대와 동시에 행군훈련을 행한 부대도 있었다. 31연대 소속 병력 38명이 후쿠시마 타이죠 대위의 인솔하에 조금 다른 루트로 행군했다. 이들 또한 심한 악천후 속에서 행군했지만 5연대와는 달리 전원이 무사히 귀환했다. 이들은 지휘관들부터 동계훈련 경험이 풍부해서 혹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잘 알았고, 민간인 안내원들을 배치하여 길을 잃지도 않고 전원 무사할 수 있었다. 이때 미리 민간인 안내원들을 행군 길목에 배치시키고 기다리게 했는데, 날씨가 악화되자 안내원들이 동상을 입었고, 개중에는 끝내 장애가 생긴 사람도 있었다. 일본군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이 당시 안내원들에게 보상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부대원들이 안내원과 서로 거수경례를 하며 나름대로 예의를 갖추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건 영화의 창작이다. 참고로 31연대 쪽에는 이 행군훈련을 취재하는 기자가 동행했다. 이 기자의 입장으로 보면 천만다행인 것이 5연대 쪽에 동행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칠 지경이다.
- 패전 전 일본 육군이나 패전 후 육상자위대 모두 추모 겸 해당 루트로 동계행군훈련을 몇 번 실시했다. 이때는 당연히 동계장비를 충분하게 준비한 데다가 1902년의 미친 날씨가 재현되지 않아서 무사히 성공했다. 특히 육상자위대의 경우는 이 당시에는 없던 재질인 고어텍스로 만든 방한복이 보급되었고, 통신 및 위치 파악용 전자장비 등도 지급했으므로 1902년 당시의 악천후가 다시 몰아쳤더라도 무사히 성공했을 것이다.
- 이후 일본 육군은 시베리아 출병 때도 동계장비 제대로 준비 안 했다가 똑같이 동상에 시달렸다.
- 이 사건은 1971년에 소설[14] , 1977년에 소설 원작으로 영화화되었고[15] 후자의 경우 제5공수특전여단 동사사고를 다룬 국방홍보원 영화 아!민주지산과 더불어 대한민국 육군에서도 동계작전과 방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교육용으로 틀어준다. 그 때문에 핫코다산 대신 한국식 한자 독음인' 팔갑전산 사건'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작중에서 칸나리 대위가 3일차에 부대를 해산하고 각자 알아서 생존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놓지 않던 부대원들이 집단멘붕한다. 그런데 실제 생존부대원 사이에선 부대해산명령이 없었다는 증언도,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16]
- 현재 사고현장에는 사고사실을 외부로 처음 알린 고토 오장의 동상이 있다. 아오모리시 외곽에는 설중행군조난자료관을 세워 당시의 자료를 전시한다.[17]
5. 기타
- 한국 창작물에서는 작전명 충무 에필로그에서 언급된다. 치안 유지 차원에서 사실상 영구 주둔하게 된 한국군과 자위대가 공동동계훈련을 하면서, 위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측에서 핫코다 산 근처에서 동계훈련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언급되고, 이 이야기를 들은 한국군이 민주지산에서 발생한 제5공수특전여단 동사사고의 썰을 푸는 내용이다.[18] 스케일은 이 문서에서 다루는 사건 쪽이 더 크지만...
-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이 대개 그렇지만, 이 이후로 이 산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망사건이 여럿 발생한다거나, 버려진 산장에서 뜬금없이 구조대로 전화가 걸려온다거나# 하는 알 수 없는 일들이 이어진다는 카더라도 있다는 모양이다.
- 이 사건을 다룬 논문. 의학에서도 동상 관련 논문이다.
- 팔갑전산 조난사건 관련 블로그 링크
[1] 주요 직위자 중에서 유일하게 이 행군이 끝난 뒤, 결혼식을 올릴 때 촬영했다.[2] 최종계급 소좌[3] 러일 전쟁중에 일어난 산데푸 전투에서 야포 공격을 받아 전사. 이때 그와 함께 참전하여 같이 중상을 입은 후쿠시마 타이죠는 치료도중에 다음날인 28일에 사망.[4] 1869년 5월 6일-1902년 1월 27일. 1894년에 군대에 입대해서 보병 특무조장으로 임관해 군복무를 시작했다. 이후 1897년 9월 7일 소위로 진급한 후 동년 10월 25일 중위로 진급했다. 이후 1901년 5월 25일에 대위로 진급했다. 위계는 1901년 9월 30일 정 7위를 받았고 1902년 1월 27일 사망하면서 종 6위로 올랐다.[5] 과거 일본군이나 현재의 자위대의 경우는 무슨 이유인지 사관생도가 졸업하면 소위가 아닌 조장(원사)으로 임관한다. 그러고 나서 '''원사에서 소위로 진급'''한다.[6] 부대 행군에서 숙영지의 결정은 일몰 2~3시간 전에는 결정되는 것이 상식이다.[7] 생몰: 1839년 1월 21일-1902년 4월 30일. 메이지유신 후 남작. 장남이 죽고 석 달 만에 숨을 거두었다.[8] 생몰: 1877년 9월 1일-1902년 1월 24일[9] 훗날 실측 결과 겨우 10분 거리에 불과했다는 점이 밝혀졌다.[10] 이 사단을 낸 가장 큰 책임자이면서도 부하들에게 업혀 다니며 민폐를 끼치다가 구출 후 사망했다. 영화에서는 구출된 후 병원에서 권총으로 자살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실제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괴담들이 전한다.[11] 미우라 타케오 하사, 타카하시 흐사지 하사, 콘노 이치지로 이등병, 사사키 이등병, 오노데라 일병[12] 1964년 자위대에서 이 사건을 재조사할 때에 고하라를 만난 곳이 척수장애인을 주로 수용하던 국립하코네요양소였으므로, 아마도 사건 이후 60여 년을 국립병원에서 살다가 죽은 듯하다.[13] 겨울전쟁 때 핀란드의 겨울 전장에 우크라이나 농민 출신 병사들을 집어넣은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4] 아름다운 동행, 고고한 사람 등 여러 등반소설을 펴낸 닛타 지로(新田 次郞.1912~1980)가 썼다. [15] 키타오오지 킨야,타카쿠라 켄,미쿠니 렌타로를 비롯한 당시 대세였던 남배우들이 총출동한 호화캐스팅으로 유명. 상당한 흥행성적을 거두었다.[16] 해산명령이 없다고 증언을 한 이토 중위는 장교 신분이었으므로 군의 명예를 위해 거짓말로 회피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3일차의 부대 해산명령에 대해 증언한 사람은 고토 후사노스케 오장과 고하라 추사부로 오장으로 대부분의 여론은 3일차에 부대해산 명령을 내렸다는 게 정설.[17] 방문기[18] 우연인지 작전명 충무를 쓴 김경진은 전작인 데프콘(소설) 한미전쟁 편 4권에서 이 민주지산 사고를 언급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