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스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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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 Donald Stanka(1931.7.23 ~ 2018.10.15)'''
전직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일본프로야구 선수. 일본프로야구 에서 외국인 선수로서 통산 100승을 기록한 네 투수 중 하나다.[1]
미국 오클라호마 주 태생이며 오클라호마 농공대학을 졸업하고 1950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을 맺으며 프로야구에 발을 들였다. 이후 오랫동안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1959년 9월 시카고 화이트삭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승격, 2경기에 등판하여 1승에 평균자책 3.38의 성적을 남겼다.
1960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며 일본 프로야구에 데뷔하게 되었다. 당시 난카이 감독이던 츠루오카 카즈토는 에이스 스기우라 타다시의 부담을 줄이고자 2선발급 투수를 탐색했고, 그의 눈에 들어온 선수가 스탠카였던 것이다. 그렇게 난카이 유니폼을 입은 스탠카는 츠루오카 감독의 기대에 100% 이상 부응하여 난카이의 기둥 투수로 발돋움 하였다. 일본 프로야구에 마이너리그 트리플 A급 투수가 들어온 것은 스탠카가 최초였다.
입단 첫해인 1960년 선발투수로 뛰며 17승 12패 평균자책 2.48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이후로도 난카이 마운드의 주축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64년 시즌 '''26승 7패 평균자책 2.40'''으로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시즌 MVP를 수상한 데 이어 한신 타이거즈 와의 일본시리즈 에서도 1, 6, 7차전 완봉승을 거두는 눈부신 활약으로 시리즈 MVP까지 손에 쥐며 난카이의 시리즈 제패의 1등 공신이 되었다. 스탠카는 이러한 발군의 실력으로 '''"아카오니(赤鬼, 붉은 귀신)"''' 이란 별명을 얻으며 타 팀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5년, 스탠카는 14승을 거두며 선발로서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지만, 그의 큰아들이 자택의 목욕탕에서 가스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고, 슬픔을 이기지 못한 스탠카는 돌연 난카이 유니폼을 벗고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2]
1966년 스탠카는 다이요 훼일즈 소속으로 다시 일본으로 복귀했지만 6승 13패 평균자책 4.17 이란 부진한 성적을 남기고 퇴단하며 다시는 일본 무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스탠카의 7년간 일본리그 통산 성적은 '''264경기 등판, 100승 72패 평균자책 3.03''' 이다. 또한 스탠카는 투수임에도 대타로 출장할 정도의 타격 실력을 보유하여 통산 7개의 홈런을 기록한 바 있다.
야구계를 떠난 스탠카는 미국으로 돌아와 사업가로 활동했다고 한다.
2018년 10월 15일, 미국 텍사스의 자택에서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1. 개요
'''Joe Donald Stanka(1931.7.23 ~ 2018.10.15)'''
전직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일본프로야구 선수. 일본프로야구 에서 외국인 선수로서 통산 100승을 기록한 네 투수 중 하나다.[1]
2. 생애
미국 오클라호마 주 태생이며 오클라호마 농공대학을 졸업하고 1950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을 맺으며 프로야구에 발을 들였다. 이후 오랫동안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쳐 1959년 9월 시카고 화이트삭스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승격, 2경기에 등판하여 1승에 평균자책 3.38의 성적을 남겼다.
1960년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며 일본 프로야구에 데뷔하게 되었다. 당시 난카이 감독이던 츠루오카 카즈토는 에이스 스기우라 타다시의 부담을 줄이고자 2선발급 투수를 탐색했고, 그의 눈에 들어온 선수가 스탠카였던 것이다. 그렇게 난카이 유니폼을 입은 스탠카는 츠루오카 감독의 기대에 100% 이상 부응하여 난카이의 기둥 투수로 발돋움 하였다. 일본 프로야구에 마이너리그 트리플 A급 투수가 들어온 것은 스탠카가 최초였다.
입단 첫해인 1960년 선발투수로 뛰며 17승 12패 평균자책 2.48의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이후로도 난카이 마운드의 주축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64년 시즌 '''26승 7패 평균자책 2.40'''으로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시즌 MVP를 수상한 데 이어 한신 타이거즈 와의 일본시리즈 에서도 1, 6, 7차전 완봉승을 거두는 눈부신 활약으로 시리즈 MVP까지 손에 쥐며 난카이의 시리즈 제패의 1등 공신이 되었다. 스탠카는 이러한 발군의 실력으로 '''"아카오니(赤鬼, 붉은 귀신)"''' 이란 별명을 얻으며 타 팀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5년, 스탠카는 14승을 거두며 선발로서 변함없는 활약을 보였지만, 그의 큰아들이 자택의 목욕탕에서 가스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고, 슬픔을 이기지 못한 스탠카는 돌연 난카이 유니폼을 벗고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2]
1966년 스탠카는 다이요 훼일즈 소속으로 다시 일본으로 복귀했지만 6승 13패 평균자책 4.17 이란 부진한 성적을 남기고 퇴단하며 다시는 일본 무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스탠카의 7년간 일본리그 통산 성적은 '''264경기 등판, 100승 72패 평균자책 3.03''' 이다. 또한 스탠카는 투수임에도 대타로 출장할 정도의 타격 실력을 보유하여 통산 7개의 홈런을 기록한 바 있다.
야구계를 떠난 스탠카는 미국으로 돌아와 사업가로 활동했다고 한다.
2018년 10월 15일, 미국 텍사스의 자택에서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3. 에피소드
- 196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와의 일본시리즈 4차전 때 난카이가 1점 차 리드를 잡고 있던 9회말 스기우라 타다시를 구원하여 마운드에 오른 스탠카는 2아웃 까지 잘 잡아놓고 야수 실책이 겹치며 벌어진 만루의 위기 상황에서 요미우리의 미야모토 토시오를 상대로 2스트라이크 1볼에서 결정구를 던졌는데, 누가 봐도 스트라이크 였지만 주심인 엔죠지 미츠루가 이를 볼로 선언했다. 스탠카는 엔죠지에게 강하게 항의했지만 판정이 번복될 리는 없었고 열받은 스탠카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던진 투구를 미야모토가 역전 끝내기 적시타로 연결하며 경기는 요미우리의 승리. 끝내기 안타 당시 스탠카는 포수 뒷쪽으로 백업을 들어오면서 홈플레이트 뒤에 서있던 엔죠지에게 초강력 몸통 박치기를 먹이며 엔죠지는 그라운드에 나동그라졌다. 이것은 어떻게 보더라도 스탠카의 명백한 화풀이였다(...). 결국 그 해 시리즈는 요미우리가 가져갔고,[3] 스탠카는 이날 경기에 한이 맺혔는지 나중에 일본의 거래처 사람으로부터 선물받은 "엔죠지, 그게 볼이냐, 가을 하늘(円城寺、あれがボールか、秋の空)" 라는 하이쿠를 액자에 넣어 자신에 사무실에 걸어놓았다고...
- 스탠카의 난카이 입단 기자회견 때, 일본의 기자들이 2미터에 가까운 스탠카의 덩치를 보고 "오오키이(大きい, 크다)" 라고 감탄했는데, 스탠카는 오오키이 라는 말을 오클라호마 사람을 뜻하는 속어인 "오키" 라고 알아듣고 "내가 오클라호마 출신이라는 게 일본에서도 그렇게 유명한가?" 라고 착각했다고 한다(...)
[1] 외국인 일본프로야구 100승 클럽에는 스탠카와 같은 시기에 한신 타이거즈 소속으로 활동한 진 바키, 80년대에 대만 출신으로 NPB에서 활약한 곽태원과 곽원치가 있다.[2] 이후 난카이는 다이에-소프트뱅크 시절을 포함하여 2009년 '''데니스 홀튼'''이 11승을 거둘 때 까지 무려 44년간 외국인 투수가 두 자리수 승수를 거둔 적이 없었다(...). 덧붙이자면 홀튼은 소프트뱅크 소속으로 2011년 시즌 19승을 거두며 퍼시픽리그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했고, 이듬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12승으로 준수한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2014년 한국으로 적을 옮겨 KIA 타이거즈에 입단했지만 일본 시절과는 달리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하고 시즌 도중 퇴출당했다.[3] 카와카미 테츠하루 의 감독 캐리어 첫 일본 제일이었다. 이후 카와카미는 요미우리 감독으로 일본시리즈 우승 11회에 9년 연속 시리즈 제패(1965~1973년)를 기록하며 명 감독으로 이름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