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기우라 타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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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서브마린 투수.'''
일본 프로야구선수이자 난카이 호크스의 원클럽맨. 그리고 '''1959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슈퍼 에이스.'''
무명이었던 고교시절과 달리 나가시마 시게오 등으로 유명한 릿쿄대학 재학 당시 도쿄 6대학리그에서 통산 36승[1] 12패 1.19, 탈삼진 233개, 베스트나인 2회등 릿쿄대학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57년 오프시즌에 난카이는 도쿄6대학의 스타들인 릿쿄 대학 동기생 스기우라와 나가시마 시게오 모두 획득에 나섰다. 난카이는 릿쿄대 출신인 오오사와를 이용해 열심히 후배들의 입단을 권유했다. 먼저 영입에 성공한 건 나가시마, 그리고 나가시마는 스기우라에게 "함께 난카이로 가자. 난카이 홈인 오사카의 한 가운데 난바의 오사카 구장을 써서 매우 도시적인 팀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가시마의 부모가 집인 치바현에서 간사이까지 아들을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치바에서 가까운 도쿄 연고의 교진군 입단을 종용했기 때문에 나가시마는 마지막에 난카이 입단 의사를 번복하였다. 당시 야마모토 카즈토 난카이 감독은 스기우라에게 "너도 교진군으로 갈 것이냐?" 물었는데 스기우라는 "제가 약속을 어기는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난카이로 갑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두 명의 대학 동기생의 각자 갈 길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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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인 나가시마(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1958년 데뷔전에서 토에이를 상대로 승리투수가 된 이후 27승(20선발승) 12패, 평균자책점 2.05라는 탁월한 성적을 거둔 스기우라는 이듬해 리그를 지배하는 괴물 투수가 된다. 1959년 한해동안 거둔 기록은 '''371⅓이닝 38승[2] 4패 평균자책점 1.40, 탈삼진 336개'''을 기록하며 다승왕, 방어율왕, 승률왕, 최다탈삼진이라는 4관왕을 달성했다. 54⅔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기록은 덤.[3]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시리즈에서 '''전설'''이 된 것이다.
1차전에 등판해 124구 8이닝 3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된 스기우라 타다시는 곧바로 다음날 2차전에도 5회부터 구원 등판하여 64구 5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고, 이동일 하루 쉰뒤 3차전에서 또다시 선발 출전해 연장 10회까지 142구 완투하는 괴력을 발휘해[4] 10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하루 쉬고 4차전에 등판한 그는 지친 기색 하나없이 106구 던지고 완봉승을 거두며 '''약 1주일동안 1~4차전 내리 등판해 투구수 416구 총 32이닝을 투구하고 모두 승리를 차지'''하며 일본시리즈 MVP를 가져가는 기염을 토해냈다. 미도오스지에서는 20여만명의 인파에 참석한 눈물의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일본시리즈 4승투수'''라는 위엄은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이나오 카즈히사와 함께 단 두명만이 가진 기록.[5] 4연투 4연승은 스기우라 혼자뿐이다.[6]
1959년 한해동안 수상한 상은 리그 최우수선수, 베스트나인, 최우수 투수, 일본시리즈 MVP, 일본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960년 31승(18선발승) 11패 평균자책점 2.05, 317개의 삼진을 기록해 탈삼진왕으로 활약하였으나, 1965년 혈행장애 증상이 나타나면서 긴 이닝을 던지지 못하게 되자, 선발투수에서 중간계투로 전향하여 꾸준히 2점대 평균자책을 찍으며 나름 활약을 보였다. 1966년~67년엔 플레잉 코치를 맡기도 한 바 있었다.
1970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교진군과의 시범경기 겸 그의 은퇴시합에서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를 상대하기 위해 등판했는데, 이때 나가시마는 '''"힘껏 휘둘러 삼진을 당하겠다"''' 라고 시합 전 기자들에게 말했지만, 타석에서 그는 스기우라의 공을 쳐서 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안타는 그의 마지막 인사이자 우정의 상징이었고, 스기우라는 후에 인터뷰에서 '''"그가 진심으로 승부한 것이 매우 기뻤고 자부심을 느꼈다. 만약 내가 힘없는 공을 던졌다면 아마 그는 헛스윙하고 삼진을 당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통산 성적은 '''187승 106패 1756탈삼진 방어율 2.39'''
혈행장애만 아니었어도 200승을 달성해 명구회에 들어갈 수 있을 만 했던 엄청난 인재라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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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카이 호크스 최후의 감독. 사진은 1988년 10월 15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난카이 호크스의 마지막 홈경기 종료 후 팬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
은퇴 후엔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하다 1974년~1977년 니시모토 유키오 당시 감독의 부탁으로 긴테츠 버팔로즈의 투수 코치를 역임한 바 있고, 1986년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으로 취임해 난카이 호크스 시대의 마지막을 감독으로써 함께 했으며,[7]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팀명이 바뀐 이듬해인 1989년까지 감독직을 맡았다. 다만 당시 호크스는 20년간의 비밀번호를 찍던 시기라(...) 성적은 4년 내내 B클래스였다. 현장을 떠난 이후 이후 해설가로 활동하던 중 2001년 은퇴선수들의 오프시즌 리그인 마스터스 리그에 참가했다가 원정지인 삿포로의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향년 66세.
[분류:토요타시 출신 인물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서브마린 투수.'''
1. 소개
일본 프로야구선수이자 난카이 호크스의 원클럽맨. 그리고 '''1959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슈퍼 에이스.'''
2. 아마시절
무명이었던 고교시절과 달리 나가시마 시게오 등으로 유명한 릿쿄대학 재학 당시 도쿄 6대학리그에서 통산 36승[1] 12패 1.19, 탈삼진 233개, 베스트나인 2회등 릿쿄대학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1957년 오프시즌에 난카이는 도쿄6대학의 스타들인 릿쿄 대학 동기생 스기우라와 나가시마 시게오 모두 획득에 나섰다. 난카이는 릿쿄대 출신인 오오사와를 이용해 열심히 후배들의 입단을 권유했다. 먼저 영입에 성공한 건 나가시마, 그리고 나가시마는 스기우라에게 "함께 난카이로 가자. 난카이 홈인 오사카의 한 가운데 난바의 오사카 구장을 써서 매우 도시적인 팀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나가시마의 부모가 집인 치바현에서 간사이까지 아들을 보내는 것을 반대하고 치바에서 가까운 도쿄 연고의 교진군 입단을 종용했기 때문에 나가시마는 마지막에 난카이 입단 의사를 번복하였다. 당시 야마모토 카즈토 난카이 감독은 스기우라에게 "너도 교진군으로 갈 것이냐?" 물었는데 스기우라는 "제가 약속을 어기는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난카이로 갑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두 명의 대학 동기생의 각자 갈 길이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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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인 나가시마(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3. 프로시절
1958년 데뷔전에서 토에이를 상대로 승리투수가 된 이후 27승(20선발승) 12패, 평균자책점 2.05라는 탁월한 성적을 거둔 스기우라는 이듬해 리그를 지배하는 괴물 투수가 된다. 1959년 한해동안 거둔 기록은 '''371⅓이닝 38승[2] 4패 평균자책점 1.40, 탈삼진 336개'''을 기록하며 다승왕, 방어율왕, 승률왕, 최다탈삼진이라는 4관왕을 달성했다. 54⅔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기록은 덤.[3]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시리즈에서 '''전설'''이 된 것이다.
1차전에 등판해 124구 8이닝 3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된 스기우라 타다시는 곧바로 다음날 2차전에도 5회부터 구원 등판하여 64구 5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고, 이동일 하루 쉰뒤 3차전에서 또다시 선발 출전해 연장 10회까지 142구 완투하는 괴력을 발휘해[4] 10이닝 2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하루 쉬고 4차전에 등판한 그는 지친 기색 하나없이 106구 던지고 완봉승을 거두며 '''약 1주일동안 1~4차전 내리 등판해 투구수 416구 총 32이닝을 투구하고 모두 승리를 차지'''하며 일본시리즈 MVP를 가져가는 기염을 토해냈다. 미도오스지에서는 20여만명의 인파에 참석한 눈물의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일본시리즈 4승투수'''라는 위엄은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이나오 카즈히사와 함께 단 두명만이 가진 기록.[5] 4연투 4연승은 스기우라 혼자뿐이다.[6]
1959년 한해동안 수상한 상은 리그 최우수선수, 베스트나인, 최우수 투수, 일본시리즈 MVP, 일본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960년 31승(18선발승) 11패 평균자책점 2.05, 317개의 삼진을 기록해 탈삼진왕으로 활약하였으나, 1965년 혈행장애 증상이 나타나면서 긴 이닝을 던지지 못하게 되자, 선발투수에서 중간계투로 전향하여 꾸준히 2점대 평균자책을 찍으며 나름 활약을 보였다. 1966년~67년엔 플레잉 코치를 맡기도 한 바 있었다.
1970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교진군과의 시범경기 겸 그의 은퇴시합에서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나가시마 시게오를 상대하기 위해 등판했는데, 이때 나가시마는 '''"힘껏 휘둘러 삼진을 당하겠다"''' 라고 시합 전 기자들에게 말했지만, 타석에서 그는 스기우라의 공을 쳐서 안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 안타는 그의 마지막 인사이자 우정의 상징이었고, 스기우라는 후에 인터뷰에서 '''"그가 진심으로 승부한 것이 매우 기뻤고 자부심을 느꼈다. 만약 내가 힘없는 공을 던졌다면 아마 그는 헛스윙하고 삼진을 당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통산 성적은 '''187승 106패 1756탈삼진 방어율 2.39'''
혈행장애만 아니었어도 200승을 달성해 명구회에 들어갈 수 있을 만 했던 엄청난 인재라서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4. 은퇴 이후
[image]
난카이 호크스 최후의 감독. 사진은 1988년 10월 15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난카이 호크스의 마지막 홈경기 종료 후 팬들과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
은퇴 후엔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하다 1974년~1977년 니시모토 유키오 당시 감독의 부탁으로 긴테츠 버팔로즈의 투수 코치를 역임한 바 있고, 1986년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으로 취임해 난카이 호크스 시대의 마지막을 감독으로써 함께 했으며,[7]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팀명이 바뀐 이듬해인 1989년까지 감독직을 맡았다. 다만 당시 호크스는 20년간의 비밀번호를 찍던 시기라(...) 성적은 4년 내내 B클래스였다. 현장을 떠난 이후 이후 해설가로 활동하던 중 2001년 은퇴선수들의 오프시즌 리그인 마스터스 리그에 참가했다가 원정지인 삿포로의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다. 향년 66세.
5. 기타
- 스기우라가 뛰던 시절에는 안경을 쓴 선수가 드물었고, 외모 자체가 선하게 생겼던지라 안경을 낀 스기우라는 겉보기에 인자한 선생님 같은 인상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한다. 실제로 성격도 온화했다고. 마운드에 오르면 투구폼은 물 흐르듯 우아하고 유연했지만 구질은 외모와는 정반대로 무시무시한 강속구와 뚝 떨어지는 커브를 구사하는 파이터 스타일의 투수였다.
- 장훈이 스기우라에게 안타를 뽑아냈어도 스기우라의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빛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한 바 있다.
[분류:토요타시 출신 인물
[1] 스기우라 타다시는 릿쿄대 역사상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투수다.[2] 24선발승으로 역대 잠수함 투수 단일시즌 공동 선발승 2위(55년 하세가와 료헤이)에 올라 있으며 단일시즌 역대 잠수함 투수 최다 선발승 1위는 55년 오오토모 다쿠미,68년 미나가와 무쓰오가 기록한 26선발승이다[3] 이 기록은 퍼시픽리그 역사상 최장기간 무실점 기록이다.[4] 심지어 이 땐 경기중에 손가락 물집이 터져서 손에서 피가 나고 통증이 어마어마했음에도 완투했다[5] 흥미롭게도 두 기록의 제물은 모두 요미우리였고, 이나오와 스기우라는 1년 간격으로(이나오는 1958년, 스기우라는 1959년) 이러한 대기록을 세웠다. [6] 참고로 상대팀이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후지타 모토시도 2~4차전에 연속 등판, 시리즈 내내 22이닝을 던지며 맞불을 놓았으나 타선이 받쳐주질 못하여 그냥 '''투혼'''으로 끝났다...[7]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홈게임 최종전 후의 세레모니에선 '''"나가시마 군은 아닙니다만, 호크스는 불멸입니다. (후쿠오카에) 다녀오겠습니다!"'''란 말을 하기도 했다.(나가시마가 은퇴식 때 말한 '''"저는 오늘 은퇴하지만 우리 교진군은 영원히 불멸입니다!"''' 의 오마쥬인듯.)[8] 일본에서는 주로 서브마린이라고 표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