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스페인 전쟁
Spanish-American War
Guerra Hispano-estadounidense(스페인어)[1]
美西戰爭(한자)
1. 개요
1898년, 미국과 스페인 간에 벌어진 전쟁.
대항해시대의 시작을 열어 한 때 중남미 일대를 장악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본좌로 자리잡았던 스페인이 미국에게 참패하며 스페인의 몰락과 미국의 부상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한자 문화권 국가에서는 '미서전쟁(美西戰爭)'이라고도 한다.[2] 미국이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마인드를 드러낸 사건으로 실질적으로 먼로 독트린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비친 사건이자 열강으로 올라서는 계기, 그리고 필리핀의 식민지화를 통해 팽창주의적 외교전략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된다.
2. 배경
2.1. 미국과 스페인의 쿠바 대립
쿠바는 16세기 이사벨 1세 당시 스페인의 카리브 식민지배 초창기부터 이스파뇰라(히스파니올라 섬)와 함께 가장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쿠바 섬을 차지함에 따라 스페인은 플로리다 해협을 통제하고, 멕시코 만으로 들어가는 항로를 차지할 수 있었기에 카리브에서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으며, 스페인 자본에 의한 플랜테이션 농업도 성행했다. 얼마나 부유한 섬이었는지, 7년 전쟁 당시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스페인 총독부를 점령한 영국은 총독부에서 노획한 재화로 막대한 전비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페인의 국력이 쇠퇴하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스페인이 식민지 관리를 거의 못하게 되자, 미국이 "서반구에 개입하지 마라"라는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유럽열강의 아메리카 개입 반대를 천명했고, 쿠바에서도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다른 중남미 식민지는 관리 부족으로 인해 사실상 포기한 스페인도 쿠바의 독립만큼은 결코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는 10년 전쟁(1868~1878)에서 쿠바 독립군을 격파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미국은 독립 이후 국가적 확장이 시작되면서 일찌감치 쿠바 섬을 노리고 있었다. 쿠바의 전략적 중요성과 경제성을 일찌감치 깨달은 것이다. 때문에 미국은 1853년 스페인에 1.5억 달러에 쿠바를 매각할 것을 제의했다. 생각해보면 이 가격은 루이지애나나 미국-멕시코 전쟁 후의 텍사스 + 캘리포니아 + 애리조나 + 네바다 등등의 헐값 매각(1500만 달러)의 10배나 되는 가격이었다. 720만 달러의 알래스카의 20배 가격이고. 미국은 일찌감치 스페인과 협상을 통해 1819년에 플로리다를 양도받은 적이 있어서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했으나 스페인의 반응은 '''"너님 미쳤음?"''' 쿠바의 경우 그 다음 세기 프랑스의 알제리 같이 당시 스페인인들 머리 속에서는 단순한 해외 식민지가 아니라 수 백년 동안 꾸준히 투자를 하고, 이민을 보내고, 현지 사회를 기르면서 육성한 자국의 정당한 고유 영토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페인의 거부와는 별개로 쿠바 섬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높아져만 갔다. 쿠바 플랜테이션 자본은 대부분 미국 자본으로 교체되었고, 쿠바 거류 미국인도 늘어만 갔으며 쿠바 경제의 미국 예속이 심화되었다. 스페인으로서는 대서양 건너 쿠바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있어 미국보다 열세인 건 당연했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2.2. 쿠바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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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80년의 소규모 무장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이래 잠잠했던 쿠바 독립세력은, 1895년을 기해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키며 쿠바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미국계 자본의 자금 및 군수품 지원을 등에 업은 쿠바 독립주의자들은 지난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맹렬하게 싸웠으며, 스페인 역시 독립을 막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총력전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바다 건너에서의 전쟁은 스페인에 불리했던 데다, 당시 스페인의 국력은 대규모 전쟁을 치루기엔 마땅치 않을 정도로 군사력이나 경제력 모두 엉망이었으며, 군대의 질적 수준 또한 유럽의 2류 내지 3류 취급을 받고 있었다. 약 3년여에 걸친 전쟁 끝에 쿠바 독립군은 쿠바 섬의 상당부분을 확보했다. 그러나 아직 결정적인 승리는 하지 못한 상태였다.
2.3. 메인 함 사건
1898년 1월 25일, 미합중국 해군은 윌리엄 매킨리 미합중국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쿠바 주재 자국 거류민의 안전 확보 및 보호를 위해 함포 24문을 장착한 배수량 6,682t의 2등전함 ACR[3] -1 USS 메인[4] 함을 아바나에 급파했다. 그런데 2월 15일 밤 9시 40분, 메인 함은 아바나 항만에서 동시에 일어난 원인 불명의 2회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총 351명의 승조원[5] 중 261명이 사망[6] 했다. 승조원 침실 밑에서 폭발이 발생한 탓에 사상자가 많았다. 폭발 당시 함장실에서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다 넘어져 가벼운 부상을 입고 생존, 퇴함 작업 지휘 후 마지막으로 퇴함한 최선임 생존자인 함장 찰스 드와이트 식스비(Charles Dwight Sigsbee) 대령 등 생존자들은 근처에 있던 스페인 해군이 구조했다.
미국은 커다란 충격과 함께 진상조사에 나섰다. 스페인은 공동조사를 제의했으나 미국이 거부[7] , 단독조사하여 2월 20일에 석탄저장고의 자연발화에 의한 탄약유폭[8] 이라고 발표했다. 반면 미국 조사단은 "조사 결과 기뢰 폭발로 인해 침몰했다"는 발표를 3월 말에 내놓았다. 다만 누가 의도적으로 공격했다고 명시하지는 않았다. 결국 양국의 입장차이는 확연히 드러났고 미국의 여론은 복수를 외치고 있었다. 이때 나온 구호가 "메인 함을 기억하라!(Remember the Maine!)"로, 훗날 나온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the Pearl Harbor!)"의 원조다.
사실 메인 함의 침몰 원인은 1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이 부분은 미국과 스페인이 모두 동의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기뢰설, 어뢰설, 석탄창고 자연발화설, 보일러 폭발설, 의도적인 폭파설, 포장 실수로 인한 탄약 유폭설 등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나 시대, 조사 주체 등에 따라 다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다만 당시 미국과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던 스페인이 의도적으로 공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게 중론이며, 생존한 함장 식스비 대령부터가 생존 승조원들을 스페인 해군 장교들이 침몰하는 전함에서 탄약이 터져 계속 폭발이 일어나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이를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구조했다는 점을 들어 이를 부정, 본국발 첫 보고서에서도 범인을 스페인 해군으로 속단치 말 것을 요청했다. 이게 정말 용기가 필요했던 게, 미국 내 반스페인 감정이 팽배한 상황에서 스페인 편을 조금이라도 들었다간 매장당하는 게 순식간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식스비 대령은 전쟁 발발 후 다시 일선에 복귀, 소장으로 진급해 제독으로 영전하고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공원과 해역[9] 도 생기는 등 말년을 비교적 영광스럽게 보냈으며 죽은 뒤에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일단 1971년에는 보일러실의 폭발이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렸으며 2002년에는 과거 스페인 측의 결론과 같은 자연발화로 인한 석탄창고의 화재가 원인이 되어 폭발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했다. 또 다른 가설은 항만방어용 기뢰가 '''우연히''' 유실, 흘러가다가 '''하필이면''' 메인 함 근처로 다가가서 폭발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에서 철판이 안쪽으로 휘었다는 점과, 스페인이 메인 함을 의도적으로 격침시킬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지지를 받고 있으나 확증할 증거는 없다.
그 외에도 이 사건을 구실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미국의 자작극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쪽도 근거는 부족하다. 인명피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메인 함은 1895년에 취역해서 3년밖에 안된 전함이고 당시 미국이 보유한 전함은 메인을 포함해서 6척 뿐이었다. 전함이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당장 전쟁을 터뜨리려고 하는데 해군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전함을 자폭시키기엔 전력 손실이 너무 크다.
어쨌든 사건 당시에 미국은 이 사건을 스페인이 일으킨 것으로 몰아서 전쟁의 구실로 삼았다. 황색언론들은 전쟁을 부르짖었고, 여론은 폭발했다. 4월 11일에 대통령이 의회에 개입 승인을 요청하자 미 의회는 19일자로 쿠바 독립에 대한 절대적 지지와 함께 모든 노력을 다해 쿠바의 독립을 도울 것임을 의결, 사실상 전쟁을 선언했다. 이를 전달받은 스페인 역시 4월 23일에 미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메인 함의 선체는 미 당국이 1911년에 인양했다. 외부적 원인이 사고라는 결론을 내리기는 했으나 배 바닥은 자세히 검사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1912년에 바깥 바다로 끌고 가서 그냥 가라앉혀 버렸다.
3. 경과
이 전쟁의 승패는 전쟁이 시작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당시 미국은 선발 제국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영국이나 프랑스 등보다는 국력이 약했지만[10] 산업혁명을 빨리 이룩하여 선진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나라였고 인구와 자원이 풍부하여 발전의 가능성이 높은 나라였던데 반해, 스페인은 이미 19세기 초에 멕시코, 칠레, 아르헨티나, 페루 등 라틴아메리카에 있었던 거대한 해외 식민지들을 대부분 잃어 몰락하고 있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미국은 이제 막 신체의 폼이 절정에 다른 청년기였다면 스페인은 노쇠할대로 노쇠한 노년기였던 셈이다. 청년과 노년의 싸움이었으니 승패는 이미 거기서부터 갈린 것이다.
3.1. 카리브 해 전역
미국의 전쟁목표는 최우선적으로 카리브 해, 특히 쿠바에 있었다. 6월 6일, 미 해군은 우선 플로리다에서 가장 가까운 관타나모 만에 진입, 지상의 요새를 함락시켰다. 같은 달 22일, 미 육군 5군단은 산티아고 데 쿠바(Santiago de Cuba)의 동부에 무저항 상륙했다. 진격하던 미 육군은 7월 1일 엘 카네이 전투(El Caney order of battle)와 산 후안 언덕 전투(San Juan Hill order of battle)에서 요격에 나선 스페인 육군을 완파했으며 쿠바 독립군과 합류, 7월 17일 요충지 산티아고를 함락시키고 스페인 육군 11,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서 쿠바 섬의 스페인 군사력은 사실상 소멸했다.
스페인은 미국에 맞서기 위해 황급히 함대를 쿠바로 급파했으나, 본토 방위를 위해 주력함은 다 빼놓아야 했고, 결국 이들 함대는 산티아고 함락 직전에 도주하다가 미 해군에 의해 포착되어 괴멸당했다. 이로써 카리브 해의 제해권은 미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쿠바 섬을 점령하고 카리브 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은 만족하지 않고 보다 동쪽으로 나아갔다. 카리브 해의 동쪽 끝에 있는 스페인령 푸에르토리코가 새로운 타겟이었다.
7월 25일, 미군은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여 푸에르토리코의 과니카에 지상군을 상륙시켰다. 여기서도 反스페인 게릴라 세력의 도움을 받은 미 육군은 몇 차례의 전투 끝에 스페인 육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순식간에 섬을 점령했다. 이로서 스페인 세력은 아메리카에서 축출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바하마 상륙 이후 406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카리브 해에 만족하지 않았다.'''
3.2. 필리핀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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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미국은 카리브해 이외에도 태평양 방면으로의 진출 역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바로 '''Manifest Destiny(명백한 운명)'''이라는 신념에 따른 일련의 확장정책 때문이었다.
애초에 미국은 동부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줄기차게 뻗어나간 나라였다. 원주민을 축출하고 북아메리카 서부마저 미국의 손에 떨어진 이상 이제 바다 말고는 나아갈 곳이 없었다. 이에 미국은 끊임없이 서쪽 바다 태평양으로 함대를 파견해 영역을 확장하려 했으며, 이에 하와이를 속령화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이미 알려진 동양 국가들에도 함대를 보낸 바가 있는데, 일본의 쿠로후네 사건과 조선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 또한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남북전쟁의 수습이 더 중요했는지라 본격적 세력 확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스페인 전쟁의 시점인 1895년쯤 되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당시엔 아시아에서도 청일전쟁 찍고 있던 타이밍이다.
미국이 아시아의 전진기지로 점찍어둔 곳은 필리핀이었다. 필리핀도 이미 마젤란의 발견 이후 16세기 스페인의 카를 5세가 포르투갈로부터 사라고사 조약을 거쳐 획득, 아들인 펠리페 2세가 총독을 보내 수세기동안 꾸준히 통치해온 땅이었다.
필리핀은 아시아 대륙 최동부에 위치한 군도이면서 중국과도 가깝고, 기후와 자원도 풍요롭고, 골골대는 스페인도 통치가 가능할 정도로 저항 세력도 변변찮은 상황이었다. 원래는 남부 민다나오 섬과 서부 술루 제도에 자리잡고 있던 2개의 이슬람 왕국이 브루나이와 연계해 마닐라를 일시 점령하는등 강력히 저항하느라 스페인도 통치에 애를 먹던 지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이 2개의 이슬람 왕조도 국력이 매우 약해져서 스페인이 필리핀을 통제하기 쉬워졌을 뿐이다. 그리고 미국 입장에서 필리핀을 스페인이라는 압제자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명분도 그럴싸했기 때문에 잡아먹기 딱 알맞았다.
개전 뒤 불과 1주일만인 5월 1일, 영국령 홍콩에 모여있던 미 아시아함대가 필리핀의 마닐라 만에 출현했다. 4척의 장갑순양함을 중심으로 한 미 함대는 스페인 함대를 급습하여 장갑순양함 2척과 일반순양함 5척, 수송선 1척을 격침시키고 스페인 군의 항복을 받아내며 서태평양에서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더군다나 필리핀 역시 쿠바와 마찬가지로 反스페인 독립투쟁이 한창이었으나 스페인의 우선순위는 쿠바여서 필리핀의 스페인군은 상대적으로 병력도 적고 패배위기에 봉착한 상태였다. 결국 이들은 미군이 본격적으로 상륙, 침공해오자 항복했다. 이후 마닐라 만에는 홍콩에서 발진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4개국 함대가 전개하여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용인했다.
6월 20일에는 미 해군 순양함 USS 찰스턴이 괌을 무혈 점령했다.
필리핀을 순식간에 잃어버리자 당황한 스페인 정부는 본토방위를 위해 대기시키던 주력함대를 필리핀으로 급파했다. 그러나 이들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직후, 미국의 주력함대가 스페인 본토로 기동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데다가 주요 열강이 미국 지지를 확고히 하여 국제적으로 고립되자 결국 함대를 회항시킬 수밖에 없었다.[11]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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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좌)에 항복하는 스페인 육군(우)
카리브 해와 필리핀에서 모두 참패한 스페인은 결국 종전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1898년 12월 10일, 파리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은 쿠바의 독립을 인정하고 괌과 푸에르토리코를 할양했으며 필리핀도 2,000만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야 했다.
이는 스페인 식민지 '''거의 대부분'''이었다. 이로써 화려한 스페인 제국은 공식적으로 종식되며 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괌을 제외한 북마리아나 제도는 여전히 스페인령이었으나 사실상 의미가 없었으며, 그나마 패전으로 인해 유지할 능력이 없던 스페인은 세력확대를 꿈꾸는 독일 제국에게 역시 마지막 식민지를 그나마 제값받고 파는 형태로 포기해야 했다. 독일 제국은 스페인으로부터 사들인 북마리아나 제도를 자신들의 식민지인 독일령 뉴기니에 포함시켰다.[12] 이 전쟁의 패전으로 스페인은 남미와 북중미에 500년 가까이 유지하던 쿠바 식민지를 잃었으며 대서양의 패권국으로 미국이 등극하는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쿠바의 경우 스페인의 또 다른 지방으로 여겨지기도 했기에 여파가 컸다.
이 시점에서 스페인의 남은 식민지는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사하라-스페인령 모로코와 서아프리카 스페인령 기니 정도 등만 남은 상태였다. 그나마 스페인령 기니도 이후 파리조약의 결과로 기존 스페인이 영유권을 주장하던 나이저 강 ~ 가봉의 오고우에 강(Ogooué) 영역에서 북쪽과 남쪽을 각각 독일과 프랑스에 넘겨주고 영역이 축소되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결국 이들을 독립시키거나, 1956년에 독립한 신생국가인 모로코에게 영유권을 넘겼고 현대에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세우타와 멜리야, 카나리아 제도만을 자치 도시(Autonomous cities)와 자치 지방으로 유지하고 있는데, 그나마 이게 가능했던 것도 현지 주민들이 대부분 스페인 국민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외 남은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은 플라사스 데 소베라니아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중앙정부 통치하에 있다.
미국은 카리브 해의 패권을 차지하여 먼로 독트린을 무력으로 실현시켰다. 또한 필리핀을 차지함으로서 서태평양과 아시아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로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에 걸친 새로운 제국을 건설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스페인이 이 시점에서 몰락하고, 그 왕관을 미국이 넘겨 받았다고 생각하면 쉽다.
미국의 승리요인 중 하나는 쿠바인, 필리핀인과의 전투가 아닌 철저하게 '''식민국가인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해방과 독립을 약속한다'''는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스페인군만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실제로 쿠바상륙 초반부터 막시모 고메스(Máximo Gómez)가 이끄는 반 스페인 저항군이 합류했고, 미국 국내에서도 마크 트웨인같이 본질을 꿰뚫어 본 인물도 있었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같이 배달의 기수 미국에 대한 환상으로 자발적으로 참가한 사람도 많았다. 미국 국내의 흑인 공동체도 쿠바의 반란군을 강력하게 지원하고, 전쟁 수행을 지원했으며 부커 T. 워싱턴같은 흑인 지도자도 전쟁수행을 독려했다.[13]
어쨌건 명분은 쿠바의 독립이었으니 4년간 군정을 실시한 후 1902년 미국은 쿠바에게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과시할 요량으로 쿠바를 전격 독립시켰다. 그러나 관타나모를 미국에 헐값으로 임대해야 했으며,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미국의 입김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무늬만 독립국인 사실상 속국이었다. 이는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기 전까지 계속 유지된다. 관타나모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미국이 이용 중이다. 일부 미국 사가들은 쿠바를 푸에르토리코처럼 미국에 귀속시켰어야 했다며 '''쿠바 독립을 미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 실수 중의 하나'''라고 평하고 있기도 하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해서는 이런 약속을 하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식민지로 간주하여 독립 세력을 인정하지 않고 독립 역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립운동 세력은 미국에도 저항했고 결국 미국과 필리핀 독립세력과의 전투가 벌어진 끝에 필리핀 독립세력은 미군에 의해 진압당한다. 미국이 오기 전에 이미 필리핀은 독립 상태였고, 정부와 대통령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때 미국은 스페인의 필리핀 도독령뿐만 아니라 당시 필리핀 영토에 속해있지 않았던 민다나오 섬 등을 1912년까지 무력 점령하여 미국령 필리핀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미국은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필리핀 통치를 어디까지나 '필리핀의 독립을 위해서'라고 선전했고 이 때문에 다른 식민지에 비하면 많은 자치권을 보장해준 편이지만, 친미 지주 계급인 필리피노스들에게 이권을 보장해주고 그들을 잘 대해주었을 뿐 일반 필리핀인들은 여느 식민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착취의 대상이었다.
대서양-태평양 두 대양에 걸친 국가를 건설하다보니 해군력의 분산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아직 열강국가에 비하면 허약했던 미국의 해군력을 괜히 분산시키다간 참패할 것이 분명했는데, 그렇다고 전력을 집중시키면 나머지 한 쪽 대양을 포기하는 사태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최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었고, 결국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게 된다.
일본도 엉뚱하게 이 전쟁의 혜택을 얻었다. 부족한 해군전력으로 독자적인 필리핀 방위를 보장할 수 없었던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서로 필리핀과 대한제국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한 것이다.
5. 여담
- 초전부터 고전한 스페인 해군에 비해 스페인 육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쿠바 전역에서 두드러졌다. 특히 산 후안 언덕 요새 전투(San Juan Hill order of battle)#에서는 스페인군 보다 10배의 수적 우위를 가진 미군이 오히려 사상자는 3배[14] 나 많이 내고 승리하는 추태를 보여줬는데 이후 벌어진 엘 카네이(Al Caney) 전투와 7월 13일 산티아고 전투에서도 수적 우위에 비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는 아래에 서술했다 싶이 양 군의 주력 제식 개인화기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후 미군은 스프링필드 M1903로 제식 화기를 교체하게 된다.
-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비난하던 작가 마크 트웨인은 처음에 이 전쟁을 지지했다가 조국도 학살과 식민지배를 되풀이하는 것에 경악하게 된다. 미국도 당시 유럽과 별 다를 게 없는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다는걸 몸소 보여준 셈이었기 때문. 그래서 <전쟁을 위한 기도>라는 책자에서 미국과 상층부를 격렬하게 깠다가 해당 저서는 무려 24년이나 출판금지당하게 된다.(...) 물론 이는 미국의 제국주의 스타트를 끊었다고 평가받는 당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의 개인 성향 탓도 컸다.[15]
- 황색언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중요한 전쟁이다. 당시 미국 저널리즘계에서 신문왕이었던 조셉 퓰리처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유명한 경쟁이 한창이던 때에 이 전쟁 또한 정당화를 했다. 퓰리처쪽 논조가 약간 온건하긴 했지만 도긴개긴. 사실 전쟁 발발 전부터 강화조약 시점까지 당시 미국에는 스페인에 대한 악의적 보고서와 사설로 넘쳐났다. 지방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7개월 동안 LA타임스나 시카고 트리뷴 같은 지방지 독자들도 매일 평균 10개 이상의 쿠바 관련 기사를 볼 수 밖에 없었다.[16]
- 이원복은 가로세로 세계사에서 이 전쟁을 대충 벌어진 충돌로 그렸으며, 미국이 울면서 필리핀에 돈 투자하는 그림과 같이 우린 제국주의와 다르다느니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미국은 필리핀의 노른자위 땅이나 사업권을 챙겼으며 결코 손해 보는 지배를 하지 않았다.
- 나비효과로 스페인 내전이 일어난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 국가주의파 군대 지휘관이었던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가문은 원래 대대로 해군 장교로 복무했는데, 미서전쟁의 패배로 식민지를 거의 다 상실한 스페인이 해군을 대폭 축소하면서 해군 장교 양성도 중단되어 버렸다.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없게 된 프랑코는 꿩 대신 닭으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이후 육군 장교로 커리어를 이어가게 된 것. 그리고 마지막 남은 식민지가 모로코와 적도 기니뿐이었으며 적도 기니보다 모로코가 훨씬 중요했기에 스페인은 정말 모로코를 사수하는데 목숨을 걸다시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모로코에 주둔하는 스페인군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버렸고 그 주둔군 사령관의 입김도 거세지게 되었다. 모로코 주둔 병력의 규모와 질 역시 스페인 군부 내에서 상당히 뛰어났다.[17] 그리고 프랑코가 바로 모로코에 주둔하던 스페인군 사령관 출신이었다. 다만 프랑코의 형은 가문 전통 대로 해군이 되어서 내전 중 동생을 지지했다.
- 위에서 말한 것처럼 패전은 스페인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미 중남미 식민지들 상당수를 잃게 되었는데 미국과의 전쟁으로 완전히 끝장난 셈. 스페인인들의 입장에서는 오랜 역사를 지녔고 가톨릭을 믿는 모국이 벼락출세한 개신교 신생국가에게 처절하게 패한 것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충격도 상당히 컸고, 이에 기존의 체제에 대한 의구심과 반발이 점점 더 커져갔다. 17세기서부터 혼란한 정치상황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은 당시 어린 알폰소 13세가 모후의 섭정을 받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스페인 내전의 원인이 되는 혼란스러운 정치-사회적 상황이 점점 더 심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른바 “98세대”라 불리는 새로운 철학적 문학적 사조가 등장하여 전후 스페인 사회에 관한 철저한 재평가와 외상에 대해 분석하는 흐름이 시작되었다. 뒤집어보면 스페인 인문학의 황금기 시작.
- 이 전쟁에서 미군은 개틀링으로 스페인 군을 압도한다. 그러나 개인화기에서는 후장식 스프링필드 M1873이나 크라그-에르겐센을 사용하였고, 이 때문에 스페인군의 개인화기였던 M1893 스패니시 마우저에 호되게 당하였다. 스트리퍼 클립을 통해 빠르게 장전이 가능하고 5연발 내장식 탄창을 가진 스패니시 마우저에 비해 미군의 크라그-에르겐센 소총은 클립장전이 안돼 한발씩 장전해야 했다. 이에 미군은 새로운 개인화기의 필요성을 느꼈고 1903년에 마우저계열 소총을 참고하여 스프링필드 M1903을 개발하게 된다.
- 이 전쟁의 연장선상인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미군은 필리핀의 모로족 전사들을 상대로 뜻밖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필리핀의 모로족 전사들은 금속 갑옷인 경번갑을 입었는데, 이 경번갑의 방호력이 굉장히 좋았는지, 1899년 필리핀을 침공한 미군이 모로족과 싸웠을 무렵 한 전투에서 미군 장교가 돌진해오는 모로족 전사의 가슴에 6발의 권총탄을 명중시켰는데, 그 전사가 그대로 달려들어 자신을 쏜 미군 장교를 칼로 난자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출처 그리고 이 사례는 이후 M1911를 도입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사례로 인해 미군은 기존의 권총에 쓰인 38 롱 콜트 탄의 위력을 문제삼고, 더 강한 탄인 .45 구경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서 이 45구경을 사용하는 자동권총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 자동권총 도입 심사에 출품한 물건 중의 하나가 바로 M1911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M1911 문서 참고.
- 이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스페인은 본국이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괌에 알리지 않아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가, 이대로 두 달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미군의 군함이 산타크루스 요새에 13발의 포격을 가하자 괌의 스페인 고위대표들이 배를 저어서 군함에 승선해 예포를 후하게 쏘아준 것에 감사해하며 우리도 그 답례를 해주고 싶은데 예포를 꺼내와야해서 시간이 좀 걸리니 양해를 부탁한다고 하였고, 이에 난처해하던 미국은 상황을 설명해주었는데 미국과 스페인은 전쟁 중이고 자기들은 인사가 아닌 전투를 개시하려고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괌은 두달 넘게 이 소식을 접하지 못하다가 적군에 의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 당시 미군의 포격도 요새에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했다. 하다 못해 제대로 피해를 줬다면 전쟁이 일어난 줄 몰랐다고 해도 괌 측에서 '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를 공격하느냐?'라며 정식 항의할 여지라도 있었는데 그 조차 아니어서 이런 착각이 가능했던 것. 저항의지를 상실한 괌은 며칠 후 투항했고 아직까지도 미국 영토로 남아있다.
6. 대중매체
- 존 밀리어스 감독, 톰 베린저 주연의 TV 영화 Rough Riders(1997년)가 이 전쟁에 참전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그의 의용군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내용은 미국만세! 국뽕 영화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사실 루즈벨트의 전공 자체가 뻥튀기이기도 하다.
- 2016년 스페인에서 제작된 영화 '1898. Los últimos de Filipinas' 에서는 이시기 필리핀 오지에서 전쟁이 끝나버린줄도 모르고 현지 독립세력과 싸우는 스페인군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발레르 전투라고 불리는 이 이야기는 스페인에서도 꽤나 유명한 일화다.
- 2018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연 중 한명인 유진 초이가 미군 소속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사실 유진 초이의 일부 모티브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재필이 실제 이 전쟁에 미 육군 군의관으로 참전한 바 있다고 한다.
- 엠파이어 어스 2에서 미국 캠페인의 시작 시점이다. 루스벨트도 영웅 유닛으로 등장한다.
[1] 엘 카네이 전투(Batalla de El Caney)라고도 한다. 사실 엘 카네이 전투는 미국-스페인 전쟁 중 하나이지만 대표적으로 표현되는 전투로 쓰인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미국 스페인전쟁이다.[2] '서'는 청나라 시절 에스파냐(Espana)를 음차한 '서반아(西班牙)'에서 따온 것. 지금도 중국에선 저 표기를 사용한다. 저런 케이스가 매우 많은데, 우리에게도 익숙한 단어인 구라파, 미리견, 등등 많은 단어들이 중국어 음차에서 기원했다.[3] 장갑순양함(Armored Cruiser)이란 뜻이나, 2등전함(2nd Class Battleship)으로도 분류된다.[4] 이 이름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BB-10 메인과 몬태나급 전함 3번함이 계승한다.[5] 장교 26명, 부사관 및 수병 290명, 해병 39명으로 총 355명이 승선했으나 이중 4명이 하선중이었다.[6] 장교 2명과 사병 250명이 현장에서, 나머지 9명은 구조된 후 사망했다.[7] 스페인이 조사하는 척 하면서 증거를 조작할지도 모른다고 핑계를 대면서 거부했다나.[8] 이미 사건 당시, 많은 '''미 해군 관계자'''들도 이 설을 지지했다. 다른 미국 군함에서도 유사 사례가 발생한 바 있었다.[9] 플로리다 주 드레드거스 케이(Dredgers Key)에 위치한 식스비 공원(Sigsbee Park), 멕시코 만 내에서 가장 수심이 깊은 해역인 Sigsbee Deep. [10] 보통 역사학계에서는 미국의 국력이 영국의 국력을 완전히 추월한 시점을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꼽고 있다. 그 전까지는 아직 미국이 영국보다 국력이 약했다. 그러나 경제규모나 산업생산력이나 이미 1차대전 한참 이전부터 미국이 영프독 모두를 초월했다. 당장 자동차 생산댓수만 봐도 미국은 이미 1차 대전 이전에 '''유럽 열강 전체'''의 생산량을 능가하고 있었다. 당장 이 문서보다 훨씬 예전에 일어났던 남북전쟁만 하더라도 물량의 규모가 그 어떤 유럽국가도 1대 1로 맞서지 못한다. 영국은 원래 남북전쟁에 개입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으나 파견했던 관전무관들이 '''영국군이 미 대륙에 상륙한다면 3주만에 전멸 당하고 오히려 캐나다를 빼앗길 것'''이라 보고하자 단념했을 정도였다.[11] 지금이야 우리는 메인호 침몰의 불분명한 원인, 전쟁수행과정, 전후 쿠바와 필리핀에 대한 처우와 미국의 속내를 상세히 알고있지만 이 당시 스페인은 미국 언론의 어마어마한 황색언론 경쟁으로 '''정말로 전세계 악역포지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쿠바 독립군을 십년동안 과격하게 진압중이었는데, 선제공격까지 가해 군함을 침몰시킨것으로 전세계 방방곡곡 알려졌으니...특히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이끄는 모닝통신은 하루가 멀다하고 메인호 침몰을 1면에 실어 타락하고 잔인한 문명국 스페인을 강조하며 복수를 부르짖었고, 개전 이후에도 메인호 침몰지점에 잠수부까지 파견해 특집기사를 계속 실었다. [12] 그런 독일도 뉴기니, 북마리아나 제도, 탄자니아, 나미비아, 카메룬, 토고, 칭다오 등 갖고 있던 식민지들 대부분을 미국-스페인 전쟁 패전 후 스페인처럼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몽땅 잃었다.[13] 침몰한 메인호에서 33명의 흑인 선원들이 사망하였다 한다.[14] 미군은 8412명이 참가해 124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스페인군은 800명이 참가해 48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15] 헌데 매킨리는 오히려 재선 선거 운동에서 "에스파냐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던 수많은 식민지인들을 자신이 구했다"고 뻥카를 쳤고, 이게 먹혀들어 무난하게 당선된다.(...) 하지만 얼마 안가 암살당한게 함정.[16] https://www.nationalgeographic.com/history/magazine/2019/03-04/yellow-journalism-role-spanish-american-war/[17] 이들 스페인 아프리카 군단(Cuerpo de Ejército Marroquí)과 모로코인 외인부대가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군의 주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