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풍

 









1. 개요
2. 생애
3. 성향, 종교, 대인관계 및 기타
4. 재향군인회 중앙회 부실화 진행상황

趙南豊 (본관 : 풍양 조씨)
1938년 6월 5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군인으로 예비역 육군 대장이다. 육군사관학교 18기로 육군 제1야전군 사령관, 국군보안사령관, 육군교육사령관, 수도기계화사단장, 제1공수특전여단장 등 주요부대를 지휘하였다. 2015~2016년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중앙회장을 역임했고,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 객원연구원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정치학 박사)로 재직하였다.

2. 생애


1938년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6.25사변)이 발발하였다. 충청남도 서천중학교, 부산직할시 동래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 를 졸업하였다.
일제시대 항일학생운동의 전통을 가진 부산의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18기로 합격하였다. 육사에서는 '이과' 였으며, 럭비부(청홍회) 선수였다. 육사 재학시절 육사, 해사, 공사의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의 럭비경기에서 선수로 맹활약했다. 육사 18기로 졸업한 후 대한민국 육군 장교 소위 임관하여 32년간(1962년~1993년) 군복무 하였으며, 1967~1968년 사이에는 보병 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60년대 초급장교 시절 전방지역 1사단, 28사단 등에서 보병 소대장, 작전주임으로 근무하고, 공수특전여단으로 이동하여 기본 낙하산 강하부터 스카이다이빙까지 공수훈련을 마스터하고 (육군 복무기간 수 백회 공중강하) 특전사에서 공수훈련 및 태권도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당시 미군 공수부대 전술을 이식한 초기 공수특전여단 근무하면서 특수전 전술 및 교리발전에 기여하였고, 여러 에피소드들이 남아있다. 당시 공수특전 부대에서는 낙하산 실전 강하 중 간혹 안전사고가 발생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는데, 한번은 낙하산 강하 도중 사고로 한강에 빠진 다른 낙하병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단독으로 강물에 뛰어들어 낙하병을 구조했던 일화가 있었다. 그리고 교관 당시 다른 일화는 당시 OO 장군이 공수특전단 지휘관으로 부임했으나 전시에 낙하산으로 적후방 지역에 침투하는 공수부대는 공수기장 없이는 기본적으로 부대지휘가 어려워 새로 부임한 보병 지휘관들도 반드시 공수훈련이 필요하였고, 이에 조남풍 중위가 교관으로 뽑혀 최고 지휘관(장군)에게 기초 공수부대 강하훈련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마치 MUSAT 훈련 교관 처럼') 일반 훈련병과 동일하게 FM대로 교육시켜 피교육 대상자가 공수교육을 마칠 때까지 상당히 고생했다고 한다. 고생 끝에 결국 OO 장군은 공수특전여단 지휘관이 되었고 후일 특전사령관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조남풍 중위는 후일 특전사 대대장(중령) 시절에는 공수훈련 뿐만아니라 '천리행군'에 대대원들과 같이 행군하였고, 77년에 공수특전사령부 예하 교육단장(당시 호칭 교육대장)으로 부임하여 전체 특전사 교육훈련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84년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특수부대였던 제1공수특전여단장(준장)으로 부임하게 되고, 역시 당시에도 여단 장병들이 공수훈련을 하게되면 여단장도 같이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공중강하를 하였다고 한다. 1공수 여단장 시절에는 실제로 대테러 및 대간첩작전을 수행했고, 적후방 침투 및 비정규전 능력 향상, 부대단위 공수훈련, 고공침투훈련, 천리행군(생존훈련 포함), 하계해상훈련, 동계설상훈련련 등 특전여단의 전투능력 강화에 힘썼고, 80년대 국군의 날 행사 및 주한외교사절 초청행사 등에서 특전사 대원들의 시범행사를 선보였으며, 1984~85년에 서울 및 경기도 지역 대홍수 발생시에는 대대적인 시민 구조활동을 수행하였다.
1960년대초 최전방 소대장, 파월부대 중대장 및 공수특전단 교관 등으로 근무한 이래 1980년대 수도군단 작전참모,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까지 주로 지휘관 및 작전참모 임무를 수행하였고, 공수특전사령부 교육단장 및 육군교육사령관 등 교육분야에서도 업무를 맡아 육군 및 특전사의 체계적 현대전 수행 능력 향상에 일조를 하였다. 또한 한-미 협동군사훈련(월남전, 팀스프리트 훈련), 군장비 현대화, 장병 복리후생 및 부대 영내시설 개선, 적극적인 대민지원 활동 등에도 기여한 업적이 있으며, 본인은 베트남전 참전 등 오랜 군지휘관 경력 중에 심각한 인명사고가 없이 최강의 전투부대들을 이끌었던 것에 주변사람들에게 항상 감사하다고 말하곤 했다. 경력 가운데 특기할 것은 1986년 당시 육군 최강의 기갑사단이였던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사단장에 부임하여 한국 최초의 국산 전차로 개발된 '88전차'(현대중공업 제작) 및 한국형 보병장갑차(대우중공업 제작, 현 두산인프라코어)를 실전 도입하고, 이어서 북한의 침공으로 전쟁 발발시 수도기계화사단을 선두로 수립된 한국 육군의 공세 전환 전술개념(북진 공격)의 실전 적용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육군의 현대전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1987년에 대통령 및 주한 외국 무관 등 국내외 주요인사들을 초청하여 기갑부대 및 육군항공대의 대규모 야전기동 및 화력훈련 시범을 실시하여 한국의 강력한 전력을 선보였다.
62년초 임관후 보병학교, 육군대학 및 국방대학원 정규과정을 수료하고, 20사단, 28사단, 제1공수특전여단, 제5공수특전여단 및 수도경비사령부, 월남전 등에서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등 각급 보병부대 지휘관을 역임하였다. 또한 수도군단 작전참모 및 공수특전사령부 교육단장을 맡는 등 국군의 작전 및 교육 분야에서 주로 근무하였다. 1980년대에 육군 장교 가운데 최강의 야전부대 및 특수전 부대 지휘관 후보들 중 한명으로 꼽혔다.
1983년초 준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17사단 부사단장 및 제1군단 참모장을 역임했으며, 1984년부터 육군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여단장, 수도기계화보병사단 (구 수도사단: 맹호부대) 사단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국군보안사령부 사령관, 육군교육사령부 사령관, 제1야전군사령부 사령관 등 군내 주요부대를 지휘하였다. 1980년대 진행된 군 현대화 사업(특전사 K-2 소총 도입, 국산 기갑장비 도입(88전차와 한국형 장갑차 도입), 그리고 차세대 전투기 도입(F-16), 해군 잠수함 현대화 사업 등)과 더불어 대미군사외교, 아시아태평양 국가 군지휘관들과의 군사외교 및 제6공화국 당시 동구권을 대상으로 한 북방외교, 중국 수교 등 다양한 분야에 기여를 하였다. 이외에도 대테러/대간첩 작전 수행과 1988년 서울올림픽 성공적 개최 지원 등 군사 및 안보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단행된 군부 숙청에도 뛰어난 야전군 경력 및 신뢰로 제1야전군 사령관에 유임되었으나, 수 개월 후 격화된 김영상 정부의 숙군 작업의 여파로 결국 참모총장 전단계인 제1야전군 사령관(대장)을 마지막으로 국군을 떠나게 되었다.
예편후 공기업이나 정치권 근처로 가지 않고, 만학도가 되어 못다한 학업의 길을 걸었다. 1994년초 미국의 명문 스탠퍼드대학교 후버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2년 가까이 체류하면서 연구활동을 하였으며, 그후 당시 매우 드물게도 예비역 대장(4성) 임에도 60세가 가까운 나이에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대학원에 입학하여 정규 박사과정 수료하고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후일담이지만 이때 뒤늦은 학구시절에 지도교수들이 나이어린 제자들에게 조남풍 장군 좀 본받아라, 뒤늦은 나이임에도 한번의 결석, 조퇴없이 학업에 열중한다며 조남풍 장군의 높은 학구열을 인정했다는 후문이다. 1990년대말 동국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동국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로 임명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안보 및 국제정치 관련 강의를 하였다. 2007년 이후 사단법인 글로벌전략개발원 의 이사장을 맡아 다양한 사회단체를 대상으로 한국의 안보 및 한미군사협력 등과 관련한 연구 및 발표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사회봉사 및 자연재해 복구활동(2009년 충남 태안 기름오염 사건 등)을 하였으며, 특히 학생, 군 예비역 단체, 장애인, 중소상공인, 주한미군 등을 위해 각종 행사 및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2015년에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중앙회 회장(제35대)으로 선출되어 2016년까지 재임 하였다.
당시 조남풍 회장은 재향군인회의 기본적인 역할을 회복함과 동시에 예비역 군인 지원을 강화하고, 향군 내부의 안보분야 연구 및 교육역량도 강화하려고 하였다. 당시 조남품 회장은 전임회장들로 인해 심각해진 재향군인회 경영부실화를 조속히 해결하고, 향군 중앙회가 아닌 해외 및 국내 지방소재 재향군인회회의 일반회원들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 강화를 모토로 2015년초 개최된 제35대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중앙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최다득표로 중앙회장에 당선되었다. 조남풍 장군은 재향군인회 중앙회장에 취임후 2000년대 안보환경 변화에 따른 재향군인회 역할의 재정립 및 한국 안보분야 연구지원 역량 제고, 휴전선 일주 등 신세대 청소년을 위한 안보교육 활동 강화 및 장학금 지급 확대, 미국 등 6.25전쟁 참전국 및 중국 재향군인회와의 국제적 협력관계 구축, 미국 메릴랜드 주지사 등 미국내 주요 정치인 방문 등 활동을 하였다. 향군 재정 악화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향군 중앙회와 산하기업의 조직 개편 및 슬림화, 경비 절감 등 및 불용자산 매각 등을 통해 실시하고, 북한 목함지뢰 장병 위문 등 안보관련 각종 이슈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추진하였으나, 전임회장 시절부터 근속한 기존 재향군인회 중앙회 및 산하기업 임직원들을 중심으로 기존 향군 기득권 세력이 조남풍 회장 업무지시에 대해 비토하고 태업을 하면서 중앙회장에 대한 비난 및 대언론 선전전을 실시하였으며, 건국 이래 초유의 사태인 재향군인회 노조(?)를 결성하고 회장단 지시를 거부하면서 업무 방해, 대언론 홍보 등의 공격이 지속되면서 향군 중앙회의 마찰이 격화되어 업무가 마비되었다. 게다가 전임 회장단 장기집권 시절 형성된 세력과 정치권의 간섭이 겹치면서 향군 내부 혼란한 상황이 악화되면서 조남풍 회장은 법정 공방 등 우여곡절 끝에 2016년에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현재 조남풍 장군은 사단법인 글로벌전략개발원 이사장으로 자비를 들여 각종 예비역 군단체 및 주한미군, 사회단체 등을 대상으로 하는 안보강연 및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3. 성향, 종교, 대인관계 및 기타


학창 시절이나 군복무시절 주변에서는 성실하고 강직한 성품의 인물로 리더쉽이 강하다는 평판을 들었다. 군인으로 반공주의자이지만 안보전문가는 특정정당이나 정파에 속하기 보다는 국가안보를 최우선적 가치로 삼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으며, 전직 보안사령관이었음에도 진보적 교수가 많은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나, 한국의 안전보장은 한미군사동맹에 기초한 전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위인은 성웅 이순신 장군이며, 광복군 철기 이범석 장군의 영향을 받았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우선 및 자주적인 국방력 강화 등 현실적인 부국강병론 주장에 동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인이였지만 스포츠, 학문과 음악을 상당히 좋아한다. 군복무 시절 국방대학원을 졸업했고, 전역후 본격적으로 후버연구소 및 동국대에서 학업을 마치고 박사학위 취득후 교수 생활을 하였다. 한편 운동도 즐겨 학창시절 단거리 육상선수 및 럭비선수로 활동했으며 축구, 테니스, 골프, 스카이다이빙을 즐기는 만능 스포츠맨이다. 취미는 독서 및 컴퓨터 조립이다. 그리고 엄청난 음악 매니아로 최고의 성악가였던 엄정행 교수와 동래고등학교 동창으로 두 사람이 음악을 매개로 친한 사이였다. 조남풍 장군은 젊은 시절 성악가의 꿈을 가진 바 여러 자리에서 상당한 실력을 선보였다고 한다. 최근 노년기 임에도 여러 공식행사에서 클래식 및 가곡을 부르면서 성악가 기질을 선보이고 있다.
종교는 천주교이다. 김수환 추기경님 생존시 1990년경 군에 군종교구가 탄생하는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일부 군인들이 부대 안에서 특정종교의 선교 및 강요 등 종교적 편향성을 보이면서 행동하는 경우에는 주의를 주었으며 군장병에게 종교 선택과 믿음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군출신 정치인을 제외하고 가까운 정치인도 상당하나 특히 70~80년대 야당인 신민당(민주당 계열)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조중연 의원(충남 서천)과 가까왔다. 이는 조중연 의원이 같은 종중(풍양 조씨)으로 고향의 조카뻘 관계였기 때문이다. 또한 출신고교인 부산 동래고등학교 선후배들과도 관계가 좋은 편이며, 신한국당 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도언 전 검찰총장과도 친한 관계이다.
세간에 알려진 군출신 인물들과 인간관계가 좋은 편이며, 정규 육사 선배로는 전두환, 노태우, 정호영, 박희도, 최세창, 이종구, 이현우 등과 밀접한 관계였지만,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과도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80년대 이후 그들의 위치는 부침이 있었어도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정 사령관과 장 사령관도 조남풍이란 사람을 괜찮은 후배라고 평했다.
육사, 3사, ROTC 등 출신을 가리지 않고 많은 선후배들과 친했으나, 육사 18기 동기생 가운데 이진하(전 벽산엔지니어링 사장/고문), 김서환 대령 등과 아주 가까운 관계이며, 다른 동기생들과 매우 좋은 관계이다. 그중 알려진 동기생은 오명(전 부총리 및 장관), 최창윤(전 국회의원), 김재창(예비역 육군 대장), 구창회(예비역 육군 대장), 이학봉(전 국회의원), 김정헌, 성환옥, 이승남, 배대웅, 표명렬 등 다수의 인물이 있다.
조남풍 장군은 특이하게도 70년대 이후 현재까지 역대 한국 대통령들(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과 개인적 인연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1993년 김영삼 정권 당시 예편한 후 2010년대 까지 오랜 기간 정치권의 러브콜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동창회, 성우회, 특전사 전우회 등 여러 예비역 조직 및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했으며, 재향군인들의 처우 개선에 관심을 두고 향군 중앙회장 선거에 나서 선출되기도 하였다.
장교 시절 뛰어난 군인으로 인정 받았으나, 일반인에게 알려진 계기는 6공화국 노태우 대통령 시절 88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 이후 군내 요직이면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장관급 직책인 국군보안사령관에 당시 소장(2성)이었던 야전군인 조남풍을 전격적으로 임명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이후 1988년말~1990년말 까지 국군보안사령관 재직기간 한국은 경제는 3저 호황, 노사갈등 격화, 5공 청산작업과 각종 민주화 요구, 동구 공산권 대상 북방외교의 성공에 따른 수교국가 급증 등 대한민국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역사적 전환기였다. 특히 이전 적성국이었던 동구권 및 베트남, 중공 및 소련과의 정식수교(이후 러시아산 군사무기 수입 불곰사업 등으로 연결), 민자당 창당(여야 3당 합당) 등 외교 및 정치적으로 대형 이벤트가 많았던 시대였다.
이로 인해 당시 조남풍 사령관의 국군보안사령부도 급격한 시대변화에 따라 구시대적 관행에서 벗어나 민주적 변화를 추진하였으나, 조직내 기존 타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문제점들이 노출되었고 이로인해 사회의 민주화 요청에 맞지 않는 사건사고들이 발생하였다.(현재까지 정보기관의 변화요구가 계속 되고 있듯이 80년대말도 정보기관의 변화는 사실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리고 적성국가였던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와 관련한 한가지 숨은 일화가 있다. 사실 조남풍 국군보안사령관은 중국 조선족 가운데 최고위직까지 올라간 조남기 정협 부주석(인민해방군 상장 출신)과 개인적으로 특별한 인연이 있다. 현재 고인이 된 조남기 정협 부주석은 일제시대 충청북도에서 태어나서 만주로 이주하였고, 해방후 중국군이 되어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고 한국전쟁에 중공군으로 참전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남풍 보안사령관의 종친으로 일가친척이라고 하며 노태우 정부 당시 한국과 중국의 수교 전후 여러가지 역할을 했다고 한다. 조남기 장군은 현재까지도 중국 조선족 가운데 중국 중앙정부 최고위직을 맡았던 인물로 한중 수교 전후 조남풍 장군과 알게되어 서로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고 알려졌다.


4. 재향군인회 중앙회 부실화 진행상황


결과론적으로 조남풍 회장은 2000년대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재향군인회의 천문학적 부채 및 부실자산 발생과는 무관하다. 2000년대 초반 재향군인회 중앙회는 이상훈 전임회장 시절부터 부실경영과 불투명하고 아마추어적 의사결정으로 누적된 문제들이 많았음에도 이를 은폐하였고 이후 향군의 부채는 수천억원대로 급증하게 되었다. 또한 향군 중앙회의 독단적인 조직 운영과 잘못된 경영에 대한 지방 향군회들의 불만 심화와 다툼이 있어왔다. 정부도 향군 정상화를 위한 지도 및 제도개선을 방관하였고, 게다가 이명박 정권 시절 취임한 박세환 전임회장은 재임기간 향군은 정부보조금 및 탄탄한 자회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장과 중앙회의 부실한 경영 및 불투명한 투자가 계속되면서 2012~2014년에 부채가 5000억~6000억원까지 급증하면서 향군은 한국 최대 안보단체로 정상적인 경영과 활동이 어려운 심각한 부실경영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향군 중앙회의 엄청난 부실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5년에 회장 선거에서 조남풍 회장이 승리하였으나, 취임후 향군 중앙회의 부실자산과 경영정상화를 위해 제대로 손을 대기도 전에 기존 향군 중앙회 직원들을 중심으로 한 노조 설립등 내부 반발과 정부의 간섭 등으로 회장 직무를 중단하였다.
사실 향군 중앙회는 이상훈 전임회장 시절부터 누적된 부실경영과 적자를 해결하지 못했고, 2010년대 박세환 전임회장 시절에도 향군 중앙회는 잠실의 향군소유 빌딩 매각 등에도 불구하고 수 천억원의 부채를 갚지 못했고, 이로 인해 향군은 내외에서 각종 의혹 및 문제제기, 소송전이 난무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새로 취임한 현재의 김진호 향군 회장은 2019년 최대 산하기업인 향군상조회를 매각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향군상조회는 각종 사건,사고 발생으로 의혹이 생기서 현재 검찰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김회장이 이끄는 향군조직도 내부 갈등이 계속 되는 가운데 향군 업무 및 자산부실화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상태이다. 현재 향군은 과거와 달리 활발한 안보활동이나 새로운 변화도 보이지 않는 궁색한 상황이고 단지 문재인 정권에 어굿나지 않는 활동만 한다고 평가된다. 지난 10여 년간 수천억원이 급증한 향군의 부채 및 부실한 대형자산 매각에 대한 의혹에 대해 관계기관의 제대로 된 조사는 없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