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료 전쟁

 


1. 개요
2. 역사
3. 출처


1. 개요


한국에서 20세기 중반부터 후반까지 대상그룹(구 미원)-CJ제일제당(구 제일제당) 사이에서 벌어진 조미료 시장경쟁의 통칭. 삼성전자-LG전자의 가전제품 경쟁, 롯데제과-해태제과-농심-오리온의 과자 전쟁에 버금가는 '세기의 대결'로 손꼽혔다.

2. 역사


본래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산 화학조미료 아지노모토의 입지가 절대적이었다. 1945년 해방으로 아지노모토가 철수하여 조미료 공급이 수요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는 저렴하게 감칠맛을 내기 위한 화학조미료 수요가 컸으므로 여전히 많은 양의 아지노모토가 밀수입되거나 심지어 위조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1956년 동아화성공업(사명을 1962년에 미원(주)로 바꾸고 1997년에 대상으로 변경)에서 최초의 한국산 화학조미료인 미원을 출시하면서 한국 화학조미료 시장의 과반을 석권하게 되고, 아지노모토 시절부터 카테고리 이름 자체가 미원(아지노모토와 같은 한자이다)으로 인식되어버려 후발주자들은 경쟁에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미원의 전성기가 진행되면서 '일미', '선미소', '미영', '닭표맛나니', '미풍' 등 온갖 아류들이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미원은 결코 후발주자를 허용치 않았다.
1960년대 미원은 시장 점유율 50%를 넘어서며 국민 조미료로 등극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미원의 광고 모델을 거쳐갔을 정도였고, 조미료 시장에서 미원의 지위는 절대적이었다. 대상(구 미원)은 당대 인기 배우 김지미와 역대 최고 광고모델료 계약을 체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어 배우 황정순과 평화로운 가정의 분위기를 연출한 CF가 여심(女心)을 사로잡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승기를 잡은 미원은 이후 조미료 시장에서 독보적 강자로 군림했다. 실제 60~70년대 최고의 인기 선물 중 하나로 꼽혀 미원 1kg들이 금색 캔을 상자처럼 포장해 선물했다. 대상에서 경복궁의 경회루와 비원의 정자 등을 유화로 그려 넣어 제작한 상자는 최초의 미원 선물상자가 됐다.
도전자 중에서도 당시 삼성 계열사인 제일제당 미풍의 도전은 거셌다. 1963년 미풍을 생산하던 '원형산업'을 인수하면서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으며 마케팅전을 벌이고 1969년에는 아지노모도 기술제휴까지 따내며 조미료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이 둘의 경쟁은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 진행되었다.[1]
특히 1970년 1월 31일자부터 시작된 미원과 미풍의 파격적인 경품 광고 경쟁은 가장 인상이 깊었다. 미풍의 광고는 미풍 빈 봉지 다섯 장을 보내는 1만 명에게 선착순으로 3천원 짜리 여성용 스웨터를 경품으로 준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3천 원은 당시 근로자 월급의 1/10쯤 되는 큰 돈이었다. 반면 미원의 광고는 한술 더 떴다. '새 포장 발매기념 사상 최대의 호화판 사은 대잔치'란 제목으로 15만 명에게 선착순으로 3g짜리 순금반지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미풍의 광고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미원이 급히 간부회의를 열어 주부들이 좋아할 만한 경품을 모색하다 결국 '금반지'를 채택했다고 한다. 당시 미원의 사원들은 광고 이후 밀려드는 미원 봉지를 정리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이렇게 두 회사의 판촉 경쟁이 과열되자 결국 상공부치안국이 개입해 경품행사 중지를 요청하면서 결국 양사는 '사은잔치 중지' 성명서를 냄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럼에도 미원은 미풍과의 광고전쟁에서 승리한 그 때의 일을 자랑스레 여기고 있다.
또 하나의 예도 있다. 미풍 측은 '경품 전쟁'이 있기 전인 1969년 4월 3일에 일본의 이노신산 소다를 수입하겠다고 발표하고 광고 싸움을 하다 결국에는 법정 분쟁으로 번진 것이다. 미원이 새 조미료의 원료를 수입하는 건 외화를 낭비하고 한국 기술의 개발을 해친다고 하여 성명서와 신문광고를 내며 맞선 것이다. 3년 만에 끝난 싸움에서도 승리의 여신은 미원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원에게 잇따라 지면서 미풍은 영원히 2등만 걸어갈 것 같았다. 이에 마케팅만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제일제당은 1975년 11월 20일, 미풍을 밀던 제일제당은 대신 '천연조미료'란 기치를 내건 쇠고기 다시다[2]를 출시했지만[3] 이마저도 역부족이었다. 결국 미원의 판세를 못 뒤집어 한때 다시다의 철수를 고려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1977년, 미풍의 후속작으로 한국 최초의 복합조미료 '아이미'를 내놨지만 같은 시기에 내놓은 '복합미원'에 밀려 맥을 못 추고[4] 1985년에 미풍으로 회귀한 뒤 1990년에 '맛깔미풍'으로 탈바꿈했다가 1993년에 단종되었으나 인터넷에서 구입 가능한 것으로 보아 원래 이름인 '아이미'로 재생산 중인 것으로 보인다. 아이미와 비슷한 복합 조미료인 2.5도 시장에서 참패.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복합조미료는 아이미, 순도 높은 MSG는 미풍으로 생산 중이며, 한국에서는 미풍, 아이미, 2.5 모두 업소용[5]으로 유통되고 있다. 전부 인도네시아 현지공장 생산품이다.
그동안 미원에게 밀리던 제일제당에게도 기회가 왔다. 1980년대 초반에 화학조미료의 유해론이 일면서 상황이 역전되어 천연조미료 다시다의 판매가 늘었던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쇠고기맛을 손쉽게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을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며 다시다는 화학조미료 시장을 탈환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대상은 미원의 성공에 도취되기도 했거니와 당사의 주력인 미원의 매출 하락을 우려하다 대응에 주저하였다. 미원은 아성이 무너지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무려 7년 뒤에서야(1982년) 경쟁제품인 '맛나'를 내놓아서 다시다에 맞섰으며, 드라마 전원일기가 인기를 끌 당시 제일제당 측이 전속모델로 김혜자를 내세우자 미원 측은 1986년부터 며느리 역을 맡은 고두심을 내세웠다. 쇠고기 다시다와 쇠고기 맛나의 싸움은 미풍과 미원의 경쟁보다 더 격렬해서 영업직원들간의 패싸움이 연일 일어났으며, 경찰서에 끌려가봤더니 이미 경쟁사 직원들도 갇혀있는 강제정모가 다반사였다.##
전세가 역전되자 미원은 고두심을 내세운 감치미를 투입하지만 대세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김혜자와 유행어 "그래, 이 맛이야"를 내세운 다시다에게 패배한다.[6] 결국 대상은 감치미를 다시다에 비해 20% 저렴한 가정용으로, 맛나를 업소용으로 재편했다. 대상에서는 또 다시다보다 40% 저렴한 '진국다시'도 출시되었는데 다시다와의 포장과 이름의 유사성으로 CJ제일제당에서는 소송까지 걸었으나 결국 CJ제일제당이 패소하였다.##
1998년에 대상 창업주 임대홍의 손녀 임세령이 창업주 이병철의 손자 이재용과 결혼하면서 사실상 사돈 기업이 되어 대상-CJ의 조미료 전쟁은 사실상 막을 내리는 듯 했으나, 2009년에 임세령과 이재용은 이혼했다.
이 '조미료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제일제당의 모기업인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호암자전')에서 '세상에 내 마음대로 안되는게 골프, 자식, 그리고 미원'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7]

3. 출처


[1] 이 때 벌어졌던 더티 플레이를 알고 싶다면 이 기사를 참조.[2] 이때부터 아지노모토식 감칠맛 베이스던 한국 조미료 시장에서 소고기맛 조미료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3] 쇠고기 다시다와 함께 생선 다시다의 2종을 출시했으나, 가다랭이맛으로 추정되는 생선 다시다는 인기가 없었는지 금방 단종되었고 이후 멸치 다시다가 새로 시판되었다.[4] 당시 아이미는 일본 큐피 마요네즈의 그것과 거의 흡사한 캐릭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은품으로 그 인형을 내놓자 미원에서는 앞치마로 응수했다. 조미료를 구입하는 주부들이 사은품으로 어떤걸 더 선호했을지 생각해보면 마케팅에서 이미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음이...[5] 1kg 제품도 있는데, 이게 가정용의 역할도 해내고 있다. 그리고, 3kg 제품은 식자재마트 등에도 진열되어 있다.[6] 감치미 중 쇠고기 감치미는 2003 광우병 파동 때 단종되었다가 2011년 다시 부활했다. 한편 그 와중에 감치미는 2006년 "무슨 남자가 국도 없이 밥을 먹어요?"라며 주부들을 분노케 하는 광고를 내보내는 삽질을 한 바 있다.[7] 이 말에 자식이 들어간 것은 아들 이맹희, 이창희와의 부자 갈등을 언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시라가와 덴노가 한 "세상 내 맘대로 안 되는 게 주사위 놀이(확률), 카모가와 강의 범람(자연재해) 그리고 승병들.(이때 거대 권력화된 사원세력이 승병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조정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의 패러디이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