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1. 개요
朝鮮王
조선국을 다스린 왕의 호칭이다. '독립국가 조선의 왕'과 '봉국 조선의 왕'이 있다.
2. 독립국가 조선의 왕
고조선, 조선시대에 군주로서의 조선왕 칭호가 쓰였다. 고조선은 대외적으론 조선후 칭호로 불리다가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자 천자를 자처하며 '조선왕'으로 자칭했다. 조선왕조는 '조선왕' 칭호를 1895년 고종 때 폐지하고 '대군주' 칭호를 사용했다.[1]
2.1. "고조선" 군주 조선왕
단군조선의 임금 조선후#s-4가 연나라에 대항하는 동시에 칭왕하여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323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이전에는 후작을 뜻하는 후(侯)[2] 로만 불렸으며 이때를 기준으로 고조선의 군주 칭호는 왕이 되었다.
2.1.1. 단군조선의 첫 번째 조선왕
원래 조선후(朝鮮侯)였다가 왕(王)을 칭해 조선왕이 되었다.
2.1.2. 단군조선의 두 번째 조선왕
- 항목 참조.
2.2. "조선" 군주 조선왕
조선 국왕은 관료제적으로는 2품, 작제적 질서와 종법적 질서에서는 친왕급이었다. 조선 국왕은 중국의 군왕급이었다는 잘못된 지식이 있는데, 예법상 이등체강(二等遞降) 원칙에 따라 황제에서 이품(이등)급을 낮추어 친왕과 동급으로 대했다. 즉 군왕보다는 높게 쳐주었던 것이다.[3]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2년 2월 기사에 명 건문제가 태종에게 면복을 주는데 칙서에
라는 구절과 태종 9년 4월 기사에조선왕은 군왕의 벼슬이니 오장(五章)이나 칠장복(七章服)을 주어야 마땅하지만 이제 특명으로 친왕(親王)의 구장복(九章服)을 내려 주며...
라고 나온다. 그러므로 대우가 친왕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詔)와 인(印)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封)하고, 이어서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면 구장(袞冕九章)을 하사하였으니,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조선이 멀쩡할 때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꽤 크게(?) 여겼다. 지금도 대체로 인구 분포가 그렇지만 한반도나 베트남 같은 경우 땅이 괜찮은 편이라[4] 땅이 비교적 좁아보일지라도 중국 기준으로 만주, 몽골, 티베트 등지의 여러 칸들보다는 훨씬 백성 수가 많았다. 근대 이전까지는 맬서스의 주장대로 인구가 경제력 측정 기준이었으니 경제력, 문화력 측면에서도 우위였다. 의외로 따지고 볼 때 명나라나 청나라와 국경을 맞댄 나라들 중 조선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지극히 드물었다.[6] 러시아와 인도는 청대에 들어 겨우 접했고 그나마도 중국의 직접 통치력이 약하다 보이는 몽골, 티베트 방면에서 접했다. 똑같이 친왕급 대우를 받은 베트남도 남부를 완전히 정복한 때는 조선 후기 시기에 해당하며, 그 이전에는 북부/중부 지역만을 지배했다.
때믄에 명나라 시대에는 천자의 대리인으로 온 사신들도 조선 국왕을 만나면 칙서를 반포하기 전에는 공손하게 읍하며 예우를 했고 초기 환관을 보내던 데서 후기로 올수록 사신 지위도 높아졌다. 황제의 스승이자 공부상서를 지낸 사람이 올 정도였다. 이 사람은 정2품으로 조선 관직상 판서에 해당한다. 명나라는 재상을 없애고 1품 직위는 대학사, 즉 황제의 자문에 불과했기 때문에 관직상 오를 수 있는 최고직이다.
청나라의 숭덕제도 삼전도의 굴욕을 시전할 때 항복 절차가 끝나고 나서 "조선왕은 일국의 국왕이니 짐의 아우들 사이에 앉혀라" 했고, 조공국들 중에 조선이 그나마 나라꼴을 갖춰서 주요국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사신으로는 만주인 고관을 보냈다. 그쪽에서 봐도 비교적 큰 나라인 조선 국왕에게 수천~수만에 불과한 몽고 추장 7~80명과 같은 왕 작위를 줬어도 대우는 현격히 달랐다.
한마디로 중원 질서가 제대로 돌아갔다는 전제 하 고려-조선의 위치는 종주국 바로 아래의 제1번국이었으며, 그 왕인 조선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현재 팍스 아메리카나로 치면 영국이나 캐나다 정도 되는 위치.
반면 국세가 기울어 임진왜란시기 선조 시절에 나라가 털리고 나선 경략(해당 지역 책임자)으로 온 명나라 병부우시랑 송응창은 정 3품 조선 관직으론 병조참판 해당한다. 명나라 시절 남경 정부에 시랑하나 북경엔 좌우 시랑 청나라 시기엔 만한상서 2인 밑에 만인시랑 2명, 한인시랑 2명 등 총 4명이다. 또 듣보잡 연대장급 지휘관한테도 맞절하고 광해군은 아버지의 친구를 맞는 예로 인사할 지경이 되었다. 조선 막장테크인 고종 때는 황제도 아닌 북양대신 이홍장의 '''대리로 온''' 원세개(위안스카이)에게 조선 국왕 고종도 개무시받던 안습의 역사가 있다.
그렇게 왕이라는 칭호에 진절머리가 난 고종은 갑오개혁을 하면서 '''국왕이라는 칭호를 폐지하고 대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외국의 국왕들도 전부 대군주로 번역하게 했으며 몇년뒤에는 '''대군주라는 칭호도 폐지하고 칭제하게 된다.'''
3. 봉국 조선의 왕
3.1. 당의 봉국 조선의 왕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고구려의 보장왕이 당나라의 고종에 의해 명목상 조선왕 작위에 책봉됐었다.
3.2. 고려의 봉국 조선의 왕
고려의 경우 사후 시호가 왕으로 결정된 조선국 양헌왕이 조선왕 칭호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1] 이후 1897년 칭제하여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2] 그러나 중국의 일방적인 기록일 확률도 있다.[3] 명나라는 또한 조선의 관료의 위치를 일일이 정해주기보다는 조선 국왕의 위치를 정해 관료들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정해주는 방식을 폈다. 조선의 의정부대신(삼정승)이나 좌우찬성은 조선에서 1품이지만 명나라 의전예우로는 3품대우이다. 양녕대군이 조선의 세자로 명나라에 입조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영락제는 양녕대군을 정강왕(광서성 일대를 다스렸다고 한다.)의 예에 따라 대했다고 한다. 다만 초대 정강왕은 왕작을 군왕에서 시작해 친왕으로 올라갔다고 적었다. 이 정강왕이 초대 정강왕인지 그 후대인지 아니면 친왕으로 있을 당시인지 군왕으로 있을 당시인지는 확인이 필요하다.[4] 인구 밀도로 보면 당시 조선이 훨씬 더 살기 괜찮았다. 1600년경 당시 조선의 인구밀도는 1㎢당 50, 동남아 평균은 5.8.[5] 상실이 아니다. 전국의 토지대장을 망실하고 인구이동이 심하게 일어나 제대로 세금을 매기지 못했고, 토지조사를 엄격하게 해 세금을 많이 걷는 것을 학정으로 생각한 조선정부가 일부러 생산량을 낮춰 잡았을 뿐 농업 개량이 지속되어 실제 농업생산량은 꾸준히 늘었다. 세수에 반영되지 않았을 뿐.[6] 일본은 조선과 비슷한 정도였다가 에도시대에 접어든 이후 앞서나가기 시작한다. 조선 세종조때 농업생산량이 약 2200만 석(물론 비교를 위한 일본식 기준이다)이었고, 선조 대까지 비슷하게 유지하다가 임진왜란으로 극심한 변동[5] 을 겪은 이후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성장이 침체된 반면 일본은 임란 직전 1850만 석의 식량생산량을 찍고 내란이 평정된 에도시대에 들어 광대한 간토 평야를 개간하며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여기에 상공업 발달까지 이어져 이후 제국주의 시기에 열강에 끼어들 수 있는 발판을 닦았다.[7] 천비묘지명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