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주교 박해

 


1. 개요
2. 신해박해
4. 기해박해
5. 병오박해


1. 개요



조선 후기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를 정리한 문서.
조선왕조는 기본적으로 유교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못박고 그 외의 종교와 사상들은 억제하였다. 이를 숭유억불로 흔히 설명되지만, 포인트는 '숭유'에 있었다. 즉 불교뿐 아니라 도교, 무교 등도 당시 교세가 불교만큼 크지 않아 덜 부각될 뿐 조선왕조에서는 유교 이외의 사상은 모두 억제의 대상이었다. 이후 뒤늦게 들어온 천주교도 그런 맥락에서 일정 이상 퍼지지 못하도록 박해를 가한 것이다.
천주교 박해는 꾸준히 있었으나, 대규모 박해는 총 4번 있었으며 이 4번의 박해로 수많은 천주교인이 순교를 하게 된다.

2. 신해박해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박해. 자세한 내용은 진산 사건 참조.
천주교는 17세기 즈음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고 책으로 소개되었던 데다 양반 일부층에게만 알려졌기 때문에 그 세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회 동요와 각종 정치적 파란 때문에 점차 현실 사회의 한계에 지친 비주류 양반층에게 널리 알려졌고, 몇몇 양반층이 평민들에게도 이를 소개하면서 파급력은 갑자기 불어났다. 영,정조의 탕평책과 중흥 정책으로 아무리 노력한들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영향력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고, 인간평등[1] 성리학 전통 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천주교를 암암리에 믿기 시작했다.[2]
그리고 이승훈이 청나라에서 한국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이승훈 베드로를 바탕으로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성리학 외 타 학문(교리) 배제라는 현실상 절대로 쉽게 인정되기 어려웠고,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 포교 방식은 어디 모여서 그냥 모임이나 기도만 하는 것이었고 사회 혼란을 유발하거나 왕실에게 적대적인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1791년 신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행동으로 인해 천주교 포교와 실체가 드러났고 이는 박해로 이어졌다. 윤지충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보통은 유교식 장례로 하면 아주 일반적이었지만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동생 권상연은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신주를 태우고 가톨릭식 장례를 지냈다. 신주를 태운다는 것은 불효, 즉 삼강오륜 중 부위자강(父爲子綱)을 어기는 역모죄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강상죄(綱常罪)'''를 저지른다는 뜻이었다.
소문이 퍼지자 당연히 조정에서는 이를 조사하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3]하고, 이들에게 천주교를 포교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유배시켰지만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일부 학계에서는 이를 가지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천주교에 관대하거나 관심이 있었다고 하지만, 당시 정조는 당사자들만 조치를 취했지 근본적인 색출은 하지 않았다. 천주교를 완전히 끄집어내고 탄압하는 순간 대규모 사회 혼란이 오는 건 당연했고, 반대로 정조 스스로가 천주교에 긍정적 관심을 가지는 순간 성리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을 왕 스스로가 이를 부정하는 꼴이 되니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느쪽으로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닌 당장의 불을 끄는 데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정조와 세도가들의 예측과는 다르게 천주교는 더욱더 퍼져나가고, 이후 4번의 대규모 박해를 겪게 되었다.

3. 신유박해


1801년(순조 원년)에 일어난 박해. 조선의 천주교의 박해는 이 박해가 일어난 원인을 계기로 계속 일어나게 되었는데 자세한 것은 항목참조.

4. 기해박해


1839년(헌종 5년)에 일어난 박해.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 성직자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4],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그 외 수많은 조선인 신자들이 순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천주교 포교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지만 이후 홍경래의 난과 세도정치의 문란 등 대규모 사회혼란이 연달아 터지면서 조선 사회는 급속도로 불안해졌고 이 덕분에 다시 천주교는 다시 한번 평민들 사이로 포교가 확대되었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인 주교 앵베르, 신부 모방, 샤스탕이 본격적으로 포교에 나서면서 그 세는 신유박해 전보다 더욱 더 커졌다. 그리고 신유박해 때 대규모 확대로 번지지 않기를 바랬던[5] 정순왕후의 박해 중단 때문에 양반들 위주로 박해당했지 평민들은 피해가 크지 않아서 포교가 확대되었던 영향이 크다.[6]
하지만 1834년 순조가 사망하고 헌종이 즉위하자, 세도 정치 구도는 일단은 안동 김씨가 우세했지만 1839년 천주교에 적대적이었던 우의정 이지연이 상소를 올리면서 다시 한번 박해가 일어난다. 30년 전보다 그 인원은 더 많았으며, 이번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논란이 커지자, 신자들의 박해를 그냥 볼 수는 없던 프랑스인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자수를 했고, 조정에서는 신유박해 때 청나라인 주문모 신부의 사례와 똑같이 적용해 이들과 천주교인 대부분을 처형했다. 그리고 순교당한 양반들 일부가 안동 김씨와 연루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1839년 때 남인 시파를 제거하면서 박해 때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풍양 조씨가 세도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안동 김씨는 철종 즉위전까지 잠시 밀려나게 된다.
총 70명의 순교자들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성인품에 올랐다. 자세한 것은 한국 103위 순교성인 참조.

5. 병오박해


1846년(헌종 12년)에 일어난 박해. 다른 박해들에 비교하면 순교당한 사람들은 적지만,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순교한 사건이기 때문에 다른 박해들과 급을 같이 한다.
신유박해 때와 다르게 기해박해 이후로 풍양 조씨의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고,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조선에 온 천주교 조선교구 주교 장 조제프 페레올(1808~1853)[7]은 포교 활동에 지장을 받게 되자 김대건 사제를 육로 대신 해로로 통해 포교 활동을 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김대건이 순위도에서 붙잡히면서 사제라는 직책 때문에 그 심각함이 조정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프랑스 함대 사령관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이 외연도에 군함 3척을 끌고 오면서 기해박해 때 죽은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순교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겠다 하고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은 더욱더 통상 수교 거부와 천주교 박해에 열을 올려야겠다 판단해 김대건의 처형일자를 앞당긴다. 한편 조정에서는 김대건에게 배교를 요구했으나 그는 거부했다(헌종실록 13권 분량 참고).
한국 최초의 사제김대건 안드레아를 비롯한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8]

6. 병인박해


1866년(고종 3년)에 일어난 박해. 조선의 마지막 천주교 박해이지만, 조선의 천주교 박해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총 24명의 순교자가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이 박해로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된다.

[1] 정확히는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2] 이는 조선 사람들이 기존 관념이었던 하늘(天) 개념이 하느님이라는 유일신으로 일치가 되었기에 수용이 아주 쉬웠다.[3] 이들이 순교한 터에는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성당이 세워졌다.[4]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2대 교구장. 라우렌시오를 프랑스어로 읽으면 로랑이며, 범은 앵베르 주교가 쓰던 조선 이름인 범세형을 줄였다. 앵베르 주교를 따라온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의 프랑스 이름은 베드로와 야고보를 프랑스어로 읽은 피에르, 자크로 두 신부는 나백다록, 정아각백이란 조선 이름을 썼다. 앵베르 주교가 2대 교구장인 이유는 전임자인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1792~1835. 세례명 바르톨로메오, 조선식 성은 소蘇) 주교가 초대 교구장(당시에는 조선대목구 감목, 이후 서울대교구 교구장 목록으로 소급)이며 범 주교는 후임이다.[5] 신유박해 때 천주교를 믿었던 남인들 대부분이 제거당했고, 더 수사하려니 그 인원이 어느새 500명까지 불어나니 양반층의 동요와 분노를 살 수 있었다.[6] 그리고 안동 김씨 세도가가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던 것이 크다. 애초에 안동 김씨들 일부가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니 말 다했다.[7] 현지화를 위해 쓴 조선식 성은 고(高)씨다.[8] 김대건 안드레아, 현석문, 남경문, 한이형, 임치백, 우술임, 이간난, 김임이, 정철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