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전주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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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관할 구역
3. 교구 내 기관 및 단체
3.1. 학교법인 해성학원
4. 특징
4.1. 순교자와 성지
4.1.1. 순교자
4.1.1.1. 주보성인
4.1.1.1.1.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4.1.1.1.2. 성 조화서 베드로
4.1.1.1.3. 성 손선지 베드로
4.1.1.1.4. 성 이명서 베드로
4.1.1.1.5. 성 한재권 요셉
4.1.1.1.6. 성 정원지 베드로
4.1.1.1.7. 성 조윤호 요셉
4.1.1.2. 전주교구 복자 24위
4.1.1.2.1. 복자 윤지충 바오로
4.1.1.2.2. 복자 권상연 야고보
4.1.1.2.3. 복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4.1.1.2.4.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
4.1.1.2.5. 복자 최여겸 마티아
4.1.1.2.6.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4.1.1.2.7.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4.1.1.2.8. 복자 유중철 요한
4.1.1.2.9. 복자 유문석 요한
4.1.1.2.10. 복자 유중성 마태오
4.1.1.2.11. 복자 이순이 루갈다
4.1.1.2.12. 복자 이경언 바오로
4.1.1.2.13. 복자 이일언 욥
4.1.1.2.14. 복자 신태보 베드로
4.1.1.2.15. 복자 이태권 베드로
4.1.1.2.16. 복자 정태봉 바오로
4.1.1.2.17. 복자 김대권 베드로
4.1.1.2.18. 복자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4.1.1.2.19. 복자 심조이 바르바라
4.1.1.2.20. 복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4.1.1.2.21. 복자 홍재영 프로타시오
4.1.1.2.22. 복자 최조이 바르바라
4.1.1.2.23. 복자 이조이 막달레나
4.1.1.2.24. 복자 오종례 야고보
4.1.2. 성지
4.2. 청년 사목
1. 개요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지역의 천주교 교회를 관할하는 가톨릭 자치교구이다. 현재 제8대 교구장은 김선태 사도 요한 주교이다.'''순교자의 얼이 살아 있는 신앙의 못자리'''
주보성인은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조화서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이명서 베드로, 성 한재권 요셉, 성 정원지 베드로, 성 조윤호 요셉[2] 이다. 주교좌성당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서노송동에 위치한 중앙성당이며, 교구청은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남노송동에 위치해 있다.
2017년말 현재 신자 수는 198,615명[3] 이며, 220명의 사제가 소속되어 있으며, 본당 수는 96개이며 공소는 88곳이다.[4]
1.1. 역사
호남지역은 전주교구 설정 이전인 조선 시대부터 신앙이 이어져 오던 곳이었다. 호남지역의 첫 신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5] 인데, 고향인 전주로 내려와 가족과 친척, 친구 등에게 전교하였다. 이후 일가가 천주교를 믿게 되었으며, 그의 사촌인 윤지충 바오로 또한 김범우 토마스를 통해서 천주교를 접하고 신자가 되었다.
이들은 초기 한국 천주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1794년 윤지충 바오로와 그 사촌 권상연 야고보[6] 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제사를 올리지 않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으로 인해 전주에서 순교하면서 최초의 순교자가 나왔다. 이를 신해박해라고 하며 이들이 순교한 장소가 바로 지금의 전주 전동성당 자리였다.
정조가 승하한 이후 1801년의 신유박해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박해가 벌어지자, 각지의 신자들은 산간지역으로 이전해서 몰래 신앙을 지켜왔다. 이때 교우촌을 형성했는데,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수류(수류성당), 되재(되재성당지), 고산(고산성당), 전주 대승리, 여산 천호동 등이 있었다.
그후, 신앙의 자유가 생기면서 한국 천주교도 교구체계가 잡히기 시작하는데 1911년에 조선대목구[7] 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되어 나오면서 전주를 비롯한 전라도 지역은 대구대목구에 속하게 되었다. 이 당시만 해도 전라도 전체에 7개의 성당과 7명의 신부[8] 가 있었으나, 교세가 성장하면서 1931년 전라북도 지역을 전주감목대리구가 설정[9] 되었으며, 초대 감목대리로 김양홍 스테파노 신부가 임명되었다. 김양홍 신부의 교구장 임명은 방인 출신 사제로써는 처음이었으며, 이로써 전주교구는 한국 지역에 설정된 교구 중 최초로 한국인에 의해 교회 행정이 완전히 이루어진 자치교구로 불린다. 1937년에는 광주감목대리구와 함께 전주지목구로 승격되면서 대구대목구에서 완전히 분리되었고 전주지역에 새로운 교구가 설정되게 되었다.
지목구 설정 후 최초의 주교좌성당은 전동성당이였으나, 1957년 서노송동에 위치한 중앙성당으로 주교좌성당이 변경되었었다. 그 후, 1962년 한국에 정식교구체계가 설정되면서 전주지목구는 전주교구로 승격하게 되었다.
1963년에 금산군이 충청남도로 이관함에 따라 그 후 1980년 8월 29일자로 금산군의 각 본당을 천주교 대전교구로 이관시켰다.
1.2. 역대 교구장
전주교구장
2. 관할 구역
전주교구는 2019년 1월 현재 6개 지구에 96개 본당이 소속되어있다. 지구는 수원교구나 부산교구의 (감목)대리구와는 다른 단순한 지역별 구분일 뿐이다.
- 볼드체는 지구 중심 본당이며, 볼드 + 밑줄은 주교좌 본당이다.
3. 교구 내 기관 및 단체
- 재단법인 천주교전주교구유지재단 : 전주교구 그 자체이다. 전주교구내의 모든 재산(교구청, 성당 등)은 이 재단을 통해 유지되며, 별도의 유지재단이나 후원회를 가진 기관들도 있다. 이 기관들 외에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곳들도 다수 있으며, 시나 도로부터 위탁받아서 운영되는 곳도 있다. 단체는 천주교 전주교구 산하내의 가톨릭 단체들이다.
- 4개의 피정의 집, 호남교회사연구소, 14개의 성지, 5개의 청소년 수련시설, 2개의 봉안경당, 천호성지 가톨릭 성물박물관, 전주 가톨릭 신학원, 학교법인 해성학원내의 4개의 중고등학교, 14개의 유치원, 8개의 어린이집, 2개의 수도회 본원, 27개의 수도회 분원, 60개의 사회복지시설, 47개의 제단체가 있다.
3.1. 학교법인 해성학원
설립목적 :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가톨릭 정신에 따라 유아 교육, 중등 교육 등 인간 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학교법인 해성학원의 역사는 그 이전으로 올라가나. 설립이 된 시기는 1982년 8월이다. 이로써 천주교 전주교구 유지재단에서 관장하던 교육사업은 학교법인 해성학원(海聖學園)으로 이관되었다.
3.1.1. 전주성심여자중학교 "꿈도 하이(High)! 실력도 하이(High)"
3.1.1.1. 교육 이념과 목표
교육 이념 : 대한민국 교육의 근본 이념에 의거하여 여성에 대한 균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국가 신교육 이념의 취지에 입각하여 애국심이 투철한 성실 유능한 여성을 육성함으로써 우리 나라 발전에 실질적으로 이바지하고자 한다.
교육 목표 :
1. 국민 정신 교육을 통하여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하고, 투철한 애국심을 함양한다(국가관).
2. 신앙을 바탕으로 정직하게 봉사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심성을 기른다(종교).
3. 합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며 저마다의 소질을 개발하여 창조의 힘을 기른다(학습).
4. 질서를 앞세우며 주변의 정리정돈을 잘하는 정서적이고 긍정적인 생활태도를 기른다(생활).
5. 기초 체력을 신장시켜 심신의 조화로운 발달을 꾀하며, 건강하고 협동하는 태도를 기른다(보건).
3.1.1.2. 성심의 뿌리
보두네 신부가 전주 성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은 이듬해인 1890년, 전주부중의 몇몇 인사가 전주성 내에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인 '학방' 설립을 계획하고, 보두네 신부에게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여러가지 이유로 학방 설립은 천주교의 몫이 되었고 보두네 신부는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그 후 1926년, 제2대 전주 성당 주임 라크루 신부는 문맹 퇴치와 교리교육을 위해 최정숙(베아트릭스)를 교사로 두고, 어린이를 대상으로 성당 구내에 교리와 일반 학교의 교과목 중 일부를 가르치는 강습소를 시작하였다. 그 위 김양홍 신부가 부임하여 교우 어린이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주야(晝夜) 강승소를 설립하였고, 학교를 설립할 채비를 하게 되었다.
전주 성당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기본 재산을 모으는 데 전력하였고, 이에 호응한 이학수회장은 1930년 봄, 큰아들 이춘화(토마스)를 시켜 자신의 전답 100여 마지기(약 2만평)를 학교 설립의 기본 재산으로 기증하였다.
1932년 8월경 교실 4개, 직원실 1개를 갖춘 100평 규모의 벽돌 양옥 교사와 2층 연와제 수녀원이 건축되었다.
일제는 1938년 3월 3일 제3차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바꾸도록 하였다. 이에 해성학원은 1938년 5월 9일 해성 심상소학교로 개교하였다. 다시 1941년 3월 31일 교육령 일부를 개정해 소학교를 국민학교로 이름을 바꾸도록하면서 한국민족을 말살하려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심화를 기도하여, 최민순 교장 신부 대신에 일본인으로 교장을 임명하였다. 그러다 1945년 4월에는 학교를 폐교하고 학교 건물을 저금관리국으로 징발하였다. 전주성당은 해방이 되자 징발당했던 해성국민학교를 회수하였다. 그 후 전주 성당 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한 단계 높은 중등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성심여학원이 출발하게 되었다.
보두네 신부가 여성 교육을 시도한지 55년 만에 숙원사업을 이루게 된 것이다.
3.1.1.3. 성심여자중학교 개교
성심여학원은 1946년 8월 1일 인가를 받고, 그해 10월 3일 개교식을 가졌다.
초대 원장은 전주 성당 주임 이상화 신부, 부원장은 강윤식 보좌신부였다. 학생 수는 37명이었다.
1947년 2월, 학교 봉헌식을 갖고 수호자를 '예수성심'으로 정하였다. 신앙을 바탕으로 명실상부한 여성 교육의 전당으로 발돋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해 제2대 학원장에 이약슬 신부가, 부원장에 전주 성당 김이환 보좌신부가 취임하였고, 김이환 신부는 성심여학원을 정식 중학교로 인가받게 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7월 29일 성심여자초급중학교는 3학급 150명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더욱 기쁜 일은 지난 2년간의 여학원 학력을 소급하여 인가해 줌으로써 1949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김영구 신부가 1948년 9월 1일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고, 9월 16일 개교하였다.
1951년 3월 20일 교육법이 개정되어, 그해 8월 31일 성심여자중학교로 개명되었다.
1960년 1월 14일 18학급으로 학급이 증가한 후 21학급(1963. 12. 5), 24학급(1966. 11. 17)으로 증가하였고, 1970몀 3월 2일 중,고등학교가 분리되었다.
1972년 9월, 학교 유지재단인 천주교 전주교구에서는 성심학교와 해성학교에 종교감 신부를 파견하였다. 학교 설립 목적을 제대로 구현하고 재단과의 유대를 더욱 돈독히 하고자 하는 차원이었다.
3.1.1.4. 종교 교육 활동
성심학교의 교육 이념 가운데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존엄성의 고양과 공동선의 추구'이다. 따라서 이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종교 교육에 힘써왔다. 이 종교 교육은 특정 종교의 교리를 강제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교양과목의 성격을 띤 교육이었다. 그런 한편을 희망자에 한해서 따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었다.
3.1.1.5. 특색 교육 활동
1. 이웃과 하느님 사랑 나눔 실천 [사랑의 다리]
'그리스도 정신에 의한 인간교육'이라는 학교 교육이념을 실천하여 매달 모은 성금을 천주교 전주교구 사회복지사목국을 통하여 복지시설, 기관 등 어려운 이웃에 전달하고 있다.
2.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 [노룻돌]
학습, 문화체험, 심리정서, 복지 등 4개 영역에 추진하는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을 통해 대상학생들이 동등한 교육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3. 나의 학교 생활 도우미 [스터디 플래너]
[스터디 플래너]가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보다 알차고 스마트하게 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4. [수업을 잘하는 학교] 프로젝트
'수업을 잘하는 학교'를 통해 학교교육의 신뢰성을 회복하기 위한 프로젝트(수업공개의 날, 교사학습공동체, 자기수업장학, 3년간 교실선진화구축사업)를 통하여 학생들을 위하고 있다.
5. 행복한 학교 만들기 [또래관계증진]
또래관계에 대한 바람직한 가치관 정립과 신뢰증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6. 꿈을 찾아 미래를 디자인하는 [진로직업교육]
다양한 체험 중심 진로활동을 통한 자기 이해 및 진로직업탐색능력 신장 프로그램
- 진로직업체험의 날(Career Day), 꿈 발표대회, 표준화검사
3.1.2.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
3.1.2.1. 교육 이념과 목표
교육 이념 :
1.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존엄성의 고양
2. 공동선(善)의 추구
3. 개인과 사회와의 상호 의존성의 고취
4. 인간의 자유의지와 가능성의 자각
5. 정직성의 도야(陶冶)
NON SIBI(not for self) :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는다.
교육 목표 :
1. 국가 사회 - 21세기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창의적이고 민주적인 자질을 함양한다.
2. 종교 윤리 - 깊은 신심으로 나를 다스리고 남을 섬기는 사랑의 미덕을 기른다.
3. 교과 학습 - 수요자 중심의 교육으로 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계발한다.
4. 생활 지도 - 차분한 마음과 심미안으로 주변을 미화하는 품성을 기른다.
5. 근검 절약 - 검소한 생활 태도를 기른다.
6. 보건 위생 - 기초 체력을 향상시키고 보건 위생을 생활화하는 습관을 기른다.
3.1.2.2. 약 사
1951년 8월, 교육법의 개정으로 6년의 중학교 과정이 3년 과정으로 학제가 개편되었다.
이에 따라 4학년 이상의 학생들에 대한 배려가 제기되었다. 이에 재단에서는 고등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1952년 4월 13일 고등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그해 4월 30일 15명의 학생으로 첫 입학식을 가졌다. 초대 교장은 중학교 교장인 김규승 선생이 겸임하였다.
개교 후, 김규승 교장의 확고한 교육관과, 한 마음이 된 전교직원의 의욕 넘치는 교육으로 학교는 날로 발전하였다. 김규승 교장은 유능한 교사를 초빙하기 위해 삼고초려의 노고도 아끼지 않았고, 교무실 분위기는 사랑으로 가득 찼다.
1955년 제1회 졸업식에서는 15명이 졸업장을 받았다. 그해 5월에는 전라북도에서는 유일하게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로 지정되었다.
전주성심여자고등하교는 다른 학교에 비해 특히 심성 교육에 중점을 두고 학사계획을 수행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1958년경에 치러진 학도호국단 정,부위원장 선거를 학생들이 직접 선출하다로고 한 것이다. 이것이 학교 분위기가 민주적이었음을 알게 하는 하나의 사례이다.
1996년, 성심여자중학교의 개교 기념 50주년에 맞추어 기념해사를 가졌고, 중학교와 함께 [성심 50]년을 발간하였다.
3.1.2.3. 특색 교육 활동
1. 60여 년 간 이어 온 학교 선생님의 신조
- 학생을 사랑하는 교사 - 사랑은 교사의 생명이다.
- 학생을 위하여 연구하는 교사 - 연구는 교사의 영양이다.
- 학생에게 봉사하는 교사 - 봉사는 교사의 사명이다.
2. 교과와 연계한 다양한 경시대회
3. 전공 적성과 자기 계발을 위한 정규 동아리와 학년별 자유동아리
4. 호연지기를 기르자! 지리산 천왕봉 등반
5. 공동체 의식 함양과 사랑 나누기
6. 스터디플래너(생활스케치)
7. .Dream up 학습-진로 탐색 캠프
8. 전주 한옥 마을과 연계한 전통문화 체험 활동
3.1.3. 전주해성중학교
3.1.3.1. 교육 이념과 목표
교육 이념 : 이웃을 사랑하며 진리에 따라 사는 그리스도 정신을 펴는 교육을 한다.
교육 목표 :
1. 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인성교육의 강화
2. 창의력을 배양하는 다양한 교육과정 운영
3. 지식기반사회에 대응하는 역량의 배양
4.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심 함양을 교육목표로 삼는다.
3.1.3.2. 약 사
1950년대 말, 전주교구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은 성심여자중고등학교인 여성 교육기관만 있었다.
그래서 성심여중고의 전신인 '해성'학교의 명칭을 살려 성심학교와 모체를 같이하고, 같은 전통을 잇는 남매격의 남성 교육기관 설립을 계획하였다.
교구장 김현재 주교는 순교 성지인 숲정이에 남자 교육기관 신설을 추진하여 1960년 2월 19일 해성중하교의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1학년 70명 2학급으로 개교식과 함께 입학식을 가졌다.
처음 해성학교 설립 추진은 SAM회 회원으로 1959년 전주교구에 파견된 고마르 신부가 담당하였다.
고마르 신부는 전동 성당 강당을 이용하여 해성하굑를 설립하도록 하고, 벨기에에서 회원을 모아 학교를 시작할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러던 중 해성학교 설립 책임자가 고마르 신부에서 하재홍 신부로 바뀌었다.
1960년 8월 1일,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905-7번지에 7개 교실의 신축을 시작하였다. 재원은 교구와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적극적인 협조로 조달되었다.
1961년 2월 1일, 12학급으로 증설 인가되었고, 이어 3월 31일 학교 교사가 준공되었다. 그리하여 4월 4일 전동 성당 임시 교사에서 진북동 신교사로 이전하고, 학생수는 4학급 245명이었다. 그해 6월 1일 제2대 교장에 하재홍 신부가 취임하였다. 그해 9월 6일 학교 수호자를 '바다의 별'로 정하고, 12월 2일에는 완주군 비봉면 비봉국민학교와 교구촌이 천호 마을과 자매 결연을 맺고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였다.
1963년 1월 20일 제1회 졸업생 47명을 배출하였다.
1964년 12월 18일자로 교지 '해성'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1982년 7월 2일 학교법인 해성학원이 설립 인가를 받음으로써 전주해성중학교는 천주교 전주교구 유지재단에서 학교법인 해성학원으로 이관되었다.
1992년 8월 20일, 학교 건물의 누후화와 도심지에 자리잡고 있다는 교육 여건 등이 참작되어, 삼천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2001년 남학교에서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3.1.3.3. 특색 교육 활동
1. 사랑의 다리 운동
-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살아가는 주변인들에게 후원인이 되어 주는 이웃 사랑 실천 운동
2. 제자사랑 운동
- 교직원이 기금을 조성하여 장학금 지원과 학생 복지 사업을 지원하는 운동
3. 울산 현대중과 영-호남 교류학습
- 영-호남 교류를 통해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의식을 함양
4. 교사와 함께하는 아침 독서 시간 운영
5. 방과후 학교 운영
6. '해성 플래너'를 이용하여 자기 주도적 학습 향상
3.1.4. 전주해성고등학교
3.1.4.1. 교육 이념과 목표
교육 이념 :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봉사하는 성실하고 능력있는 인간.
교육 목표 :
1.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성실한 마음과 용기있는 자세로 이웃끼리 서로 돕고 봉사하는 정신을 기른다.(德性人)
2.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고 부모께 효도하며 웃어른을 공경하는 예절바른 민주시민의 자질을 기른다.(忠孝人)
3. 자학자습을 생활화하여 학문연마에 힘쓰며 배운 바를 성실히 실천하는 자세를 기른다.(和性人)
4. 위생적이고 정서적인 생활을 습관화하고 체력을 향상시켜서 강인한 심신과 순화된 품성을 기른다.(健康人)
5. 땀흘려 일하고 근검절약하며 자주적으로 장래를 개척하는 능력과 태도를 기른다.(自活人)
3.1.4.2. 설립과정
전주해성고등학교가 설립되기 이전, 전주교구에서 운영하는 교육기관은 성심여자중고등학교와 해성중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장차 이 나라 공업을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을 양성할 목적으로 공업고등학교 설립을 계획하게 되었다. 이 일은 하재홍 신부에 의해 추진되었다.
하신부는 한국의 미래를 생각할 때 인문계 학교보다 기술계 학교를 세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하신부는 오스트리아에서 모금할 때에도 한국에 기술학교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1962년 2월 해성중학교는 본교사 4교실을 증축하고, 또 다시 본교사 6교실을 증축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장차 설립할 공업고등학교 실습공장 3동 건립을 시작하였다. 해성공업고등학교는 1963년 1월 9일자로 인가를 받았고, 신입생 원서를 교부하고 접수받던 초기에 스위스에서 기술 지도교사 2명이 도착하였다. 또한 공장 신축 및 기계 도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것은 낙후된 우리 나라의 공업 교육에 크게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초대 교장 하재홍 신부가 1964년 3월 본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 천주교 부인회의 갑작스런 원조 중단으로 공업고등학교 운영이 자금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부득이 인문고등학교로 학칙을 변경하게 되었다.(1964. 2. 10)
3.1.4.3. 내실 있는 학교로 성장
전주해성고등학교는 초기부터 복음 전파에 남다른 노력을 하였다. 1965년도에만 113명이 영세를 하였다.
그것은 하교 후 특별 교리시간을 이용하여 학생들에게 신앙교육을 실시한 결과였다. 특히 전주해성고등학교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일방적으로 교화목에 종교 시간을 배당하거나, 미사 등 종교 예절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지 않았다. 다만 종교 시간을 가질 경우, 타종교와 함께 종교 일반에 대해서 교육하고 있다.
입시 위주의 교육과는 달리 인성 교육을 강조한 탓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이 다른 학교에 비해 뒤쳐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성교육과 함께 대학 진학을 위한 교육도 동시에 실시하게 되었다. 1982년 7월 2일, '학교법인 해성학원'이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그간 천주교 전주구 유지재단 소속에서 독립하게 되었고, 재단에서는 교육사업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3.1.4.4. 학교 이전과 새로운 교육 환경
1989년 들어 학교 이전 문제가 본격화되었다. 중학교와 함께 사용하기에는 대지가 비좁았고, 건물 역시 노후화되어 보수나 신축을 해야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단으로서는 이를 해결할 만한 재정적 능력이 모자랐다. 재단이사회에서는 학교 이전을 결정하고 동국건설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재단이사회에서는 학교 이전을 결정하고 동국건설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학교 부지를 동국 건설에 넘기는 대신, 새로운 부지의 마련과 교사를 신축해 주는 조건이었다.
가톨릭계 학교임에도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 전주해성고등학교는 내실있는 종교교육을 하고 있다. 또한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모습을 통해 비신자 학생들에게 가톨릭의 이미지를 심은 신앙의 텃밭으로 자리하고 있다.
3.1.4.5. 특색 교육 활동
1. 매년 사랑의 동전 모으기를 통한 [사랑의 연탄 나눔]
2.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함께하는 1박 2일 [교육공동체캠프] 및 [아버지학교]
3. 충북음성 꽃동네, 소화 진달네 마을 봉사활동
4. 사랑의 다리 운동 전개
- 천주교 전주교구 사회사목국이 주관하는 나눔과 희생의 생활을 실천하는 운동에 동참
5. 1인 2재능 갖기
- 바른 인성 형성, 특기 적성 기량 향상 및 정서 함양을 위해 모든 학생들이 운동 1종목과 악기 1개를 다룰 수 있도록 교육
4. 특징
조선대목구에서 서울대목구, 대구대목구의 분리가 논의되던 당시 전주교구 또한 분리될 '''뻔''' 했다. 당초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교구 분리에 있어서 파리 외방전교회 측과 협의할 당시 전주교구까지 포함해 3곳으로 나누는 안을 제시했었다. 하지만 파리 외방전교회 측에서 난색을 표하면서 결국 대구가 먼저 분리되었다.
분리 당시 신자 수는 대구교구보다 전주교구가 많았으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대구를 분리시키기로 했던 이유는 이러하다. 먼저 호남 지역보다 영남 지방에 기차가 뚫리면서 선교의 가능성이 높았고, 무엇보다 전주교구가 가난한 교구였기 때문. 때문에 새로운 성당을 짓는 등에 있어서 돈이 필요한 데 전라도 지방의 교우들은 가난하여 이를 충당하기 어렵다고 판단, 결국 대구 지역에 먼저 교구가 설정되었다.
매주 주일에 신자들에게 발부되는 주보는 '숲정이'.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에 있는 숲정이성지의 이름을 따 왔다. 전주교구 내 신부님들의 강론글, 교구 행사 관련 소식, 교구 소식 및 공지와 각 본당별 소식을 볼 수 있다.
한국의 전반적인 상황과 마찬가지로 이농 현상이 있는 지역이라 도시권역에 성당이 압도적으로 많다. 전북 최대 지역인 동/서/남/북 전주지구의 성당만 42개로, 총 96개 성당 중 절반에 가까운 비율을 차지하며, 도시권인 전주시, 완주군, 익산시, 군산시의 성당만 총 96개 성당 중 72개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4.1. 순교자와 성지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나온 땅'''
'''순교자의 얼이 살아 숨쉬는 신앙의 못자리'''
전주교구의 천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함께 시작되었다.1784년 가을, 전주의 토호(土豪)이며 양반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경기도 양근의 권일신을 대부로 삼아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귀향하여 호남 지방의 사도가 되었다. 그리고 1784년 겨울에는 진산의 양반인 윤지충이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입교하고,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이 지방의 천주교는 전주와 진산(현 충남)을 중심으로 뿌리내려 갔다. 하지만 여러 차례에 걸친 박해(신해, 신유, 정해, 기해, 병인 등)때마다 희생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전주 지방은 순교의 땅이 되었다.
전주교구는 1791년 박해 이후 일찍이 교우촌(敎友村)이 형성되었으며, 신유박해(1801년) 이후 정국이 평온해지자 전국의 신자들은 전라도를 피난처로 삼아 모여들었다. 특히 병인박해(1866~1868년)를 전후하여 전국에서 피난해 온 신자들로 이루어진 교우촌은 이 고장 곳곳에 형성되었다. 이들은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부모’ 로 인식하며 살았고, 그 삶은 가히 ‘수도자적 믿음살이’라 하겠다. 또 ‘나눔’의 삶, 사람 대접받는 ‘신명나는 공동체’형성, ‘말씀’에 맛들이는 삶을 추구하며 살았다.
전주교구 순교자들 중 병인박해 때(1866년)순교한 정문호,조화서, 손선지, 이명서, 한재권, 정원지, 조윤호 등 일곱 분이 1984년에 성인품에 올랐으며, 신해박해(1791년) 때 순교한 윤지충과 권상연, 신유박해 (1801년)때 순교한 유항검과 유중철, 이순이 등 다섯 분을 포함한 박해시대 순교자 24위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자로 선포했다.
4.1.1. 순교자
4.1.1.1. 주보성인
4.1.1.1.1.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1801~1866년
정문호 바르톨로메오는 충청도에서 양반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많이 하여 고을 원님까지 지냈고, 학식과 교양을 겸비한 분으로 영세를 받은 뒤부터는 모든 관직을 버렸다. 박해를 피해 고향을 버리고 여러 지방을 유랑하며 살다가 병인박해 때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신리골에 살고 있었다.
12월 5일 한재권, 손선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4.1.1.1.2. 성 조화서 베드로
1815~1866년
조화서 베드로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나 기해박해 때 부친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여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다.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신부를 보필하였는데 1864년에 아내가 사망하자 김수산나와 재혼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지방으로 확산되자 그해 12월 5일 이명서, 정원지, 아들 윤호와 함께 체포되었고 모든 배교의 유혹과 고문을 이겨내고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순교하였다.
4.1.1.1.3. 성 손선지 베드로
1820~1866년
손선지 베드로는 충청도에서 태어나 어려서 입교한 후로 열심히 수계했고, 샤스탕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어 순교할 때까지 회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전주지방의 교우촌인 대성동 신리골에 살며 자신의 집을 공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15일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문호, 한재권 등과 함께 체포되어 회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더욱 잔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옥중에서도 회장의 직무를 다하였으며 갇힌 교우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4.1.1.1.4. 성 이명서 베드로
1820~1866년
이명서 베드로는 충청도의 어느 열심한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박해를 피하여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고향을 등지게 되었고, 나중에는 완주군 구이면 고소대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에 고소대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는 1866년에 다시 전주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온순한 성품과 착한 마음씨를 지녔고 예의범절이 깍듯하며 착하고 어진 사람으로도 널리 알려졌으나 가슴앓이로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조화서, 정원지와 함꼐 체포되었고 배교의 유혹을 이겨내고 숲정이 형장에서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4.1.1.1.5. 성 한재권 요셉
1836~1866년
한재권 요셉은 세례명이 베드로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일명 원서로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부모의 모범을 따라 착실히 살았으며 진잠 지방의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박해를 피해 전주 대성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아무런 직책없이 헌신적으로 교회일을 도우면서 모든 이의 모범이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전라도 지방에까지 미치게 되어 그해 12월 대성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문호, 손선지 등과 함께 체포되어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4.1.1.1.6. 성 정원지 베드로
1820~1866년
정원지 베드로는 충청도 진잠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났고 병인박해 당시에는 전주 성지동 조화서의 집에 셋방을 얻어 노모, 형,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다.
12월 5일 포졸들이 조화서 집을 습격할 때 산에 피신해 있었지만 동정을 살피러 내려왔다가 포졸에게 붙잡혀 전주감영으로 끌려갔고 12월 13일 전주 서문 밖 숲정이에서 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4.1.1.1.7. 성 조윤호 요셉
1848~1866년
조윤호 요셉은 성인 조화서의 아들로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교우로 태어났으며 1864년 부친을 따라 전주 근처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교우 처녀 이 루시아와 결혼하였다. 1866년 12월 5일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감영에서 형벌을 받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12월 23일 전주에서 최후로 곤장 16대를 맞은 후 거의 죽게 되었을 때 형리들의 교살로 순교하여 3대로 이어지는 순교자 가문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4.1.1.2. 전주교구 복자 24위
4.1.1.2.1. 복자 윤지충 바오로
1759~1791
순교지 : 전주 풍남문 밖
전라도 진산의 양반집안 출신인 윤지충은 고종사촌 정약용 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돼 1787년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프란치스코, 이종사촌 권상연 야고보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그리고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자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 유언대로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러 종친들을 대노케 했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퍼져 조정에서는 진산 군수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해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자 진산 군수는 두 사람을 전주 감영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마침내 조정은 이들을 처형토록 했다. 윤지충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권상연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4.1.1.2.2. 복자 권상연 야고보
1751~1791
순교지 : 전주 풍남문 밖
권상연은 윤지충 바오로의 외사촌 형으로, 윤지충을 통해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는 야고보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했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권상연의 고모)상을 당하고 나서 '윤지충과 그의 사촌 권상연이 유교식 장례를 치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도 불태웠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조정에까지 전해졌다. 사태가 확산되자 진산 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고 한다. 체포령을 피해 한동안 숨어 있던 권상연과 윤지충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을 듣고 관아에 자수했다.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했다. 전주 감영에서 두 사람은 갖은 문초를 겪으면서도 신앙을 굽히지 않자 전라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임금은 처형을 윤허했다. 권상연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풍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윤지충에 이어 참수 순교했다. 그의 나이 40세였다.
4.1.1.2.3. 복자 한정흠 스타니슬라오
1756~1801
순교지 : 김제 장터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전주에 살던 먼 친척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아이들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유항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한정흠은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는 한편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폐지하였고,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전주를 방문하였을 때 그로부터 성사를 받았다. 1801년 3월 유항검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았으며, 이곳에서 열심한 신자 김천애 안드레아와 최여겸 마티아를 만나는 행운도 얻을 수 있었다. 이어 동료들과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굳게 지키고 1801년 8월 고향 김제로 이송되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4.1.1.2.4. 복자 김천애 안드레아
1760~1801
순교지 : 숲정이
고향을 알 수 없는 김천애 안드레아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종살이를 하던 중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신앙을 받아들인 뒤 안드레아는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고결한 마음으로 신자의 본분을 지켜나갔다. 진리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으며, 교리의 가르침을 굳게 지킬 줄도 알았다. 그는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으면서 "십계명을 버릴 수는 없으며, 한 번 죽는 것인 만큼 죽음을 달게 받겠다."고 진술하며, 참수형으로 41세때 순교했다.
"천주교는 큰 도리요 지극히 훌륭한 행위로, 여러 해 동안 깊이 믿어 이미 뼛속까지 사무쳐 있습니다. (저에게) 형벌과 죽음은 영예로운 일이니, 어찌 마음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범한 죄를 돌이켜보건대, 오직 빨리 죽기만을 원할 따름입니다."
4.1.1.2.5. 복자 최여겸 마티아
1763~1801
순교지 : 고창 개갑장터
최여겸은 한산에서 체포된 후 감사의 명에 따라 무장으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굴하지 않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하고 배교를 강요받았다. 옥중에서 한정흠 스타니슬라오와 김천애 안드레아를 만나 같이 한양으로 압송돼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그는 "십계명을 버릴 수 없으니 죽음을 택하겠다."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순조실록'에는 "호남의 한정흠, 최여겸, 김천애 등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여 그릇된 방면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천주를 독실하게 믿으며 교리를 따라붙어 익혀서 십계명을 버리기 곤란해 하고 죽음을 달갑게 받는다고 말하고 있으니 아울러 다시 자백을 받은 뒤 전주 감영으로 압송하여 각각 그 고을에서 사형에 처하소서."라고 기록되었다. 최여겸은 고향 무장으로 이송돼 1801년 8월 개갑장터에서 많은 장꾼들이 구경하는 때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4.1.1.2.6.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
순교지 : 전주 풍남문 밖
유항검의 출생지는 전주 초남이다. 지금의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서 당시 호남 부호였던 아버지 유동근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여 전라도에서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경기도 양근 권철신 암브로시오 집에서 천주교 서적과 십자고상을 접한 유항검은 권철신의 동생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박해 주도세력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 주동자로 유항검을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할 것을 강요했다. 하지만 그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었기에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정은 유항검에게 대역부도죄를 적용, 능지처참형을 선고했다. 그의 가족들은 함께 처형되거나 각 지방 관청의 노비로 보내어졌고,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살던 집은 대역죄인의 집이라 하여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연못을 파서 집을 수몰시키는 파가저택(破家瀦宅)이 되었다. 전주로 이송된 그는 45세의 나이로 풍남문 밖에서 순교했다.
4.1.1.2.7.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1764~1801
순교지 : 전주 풍남문 밖
전라도 진산에서 학문으로 이름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 형으로, 윤지헌은 1789년 윤지충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1791년 형이 순교하자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된 윤지헌은 가족을 데리고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해 살면서 교회 서적을 베껴 읽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에 입교시키곤 했다. 1795년 주문모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았고, 교회 밀사 황심 토마스를 북경에 파견하는 일에 동참했다. 1801년 체포되어 전주감영 옥에 갇혔다가 한양으로 압송, 포도청과 형조를 거쳐 의금부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4.1.1.2.8. 복자 유중철 요한
1779~1801
순교지 : 전주 옥
‘종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철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이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부친이고, 이순이 루갈다는 아내이며, 유문석 요한은 동생이다. 유중철 요한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루갈다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였으며, 옥중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지키다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요한이 순교한 뒤 아내 루갈다는 그의 옷 안에서 편지를 발견하였는데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4.1.1.2.9. 복자 유문석 요한
1784~1801
순교지 : 전주 옥
유문석 요한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가 부친이고, 유중철 요한은 형이며, 이순이 루갈다는 형수가 된다. 유문석은 부친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앙 안에서 자랐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했을 때 유문석의 나이는 열한 살이었다. 1801년 박해 때, 초남에서는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됐고, 이어 형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다행히 체포되지 않은 유문석은 여름 내내 전주 옥사를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9월 중순쯤 유문석도 남은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옥에 갇히고, 형 유중철과 함께 11월 14일에 교수형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17세였고 미혼이었다.
4.1.1.2.10. 복자 유중성 마태오
~1802
순교지 : 숲정이
‘완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성은 전라도 전주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주 어렸을 때 부친이 사망한 후 전주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랐다. 1801년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 요한과 유문석 요한은 사촌 형제들이다. 작은 아버지 유항검과 그 가족들 영향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유중성은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해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1802년 1월 사촌형수 이순이 등 친척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8살가량이었고 미혼이었다.
그는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주교는 집안에서 전해오던 신앙입니다. 유항검 등 삼촌들이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그들과 같이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4.1.1.2.11. 복자 이순이 루갈다
1782~1802
순교지 : 숲정이
‘유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순이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경도 가롤로와 이경언 바오로는 그녀와 남매간이고, 유중철 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루갈다는 혼인 후 남편의 고향 전주 초남이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후 남편 요한과 함께 동정 서약에 대한 유혹이 올 때마다 서로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하였다.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되어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녀는 함께 갇혀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며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권면하였다.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힌 후 1802년 1월 친척들과 함께 형장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했으며,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4.1.1.2.12. 복자 이경언 바오로
1792~1827
순교지 : 전주 옥
이경언 바오로는 한양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9살 때인 1801년 신유박해로 형 이경도 가롤로와 누나 이순이 루갈다가 순교하면서 집안에서조차 버림을 받은 그는 과부인 어머니와 형수를 책임지며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궁핍한 삶이 그의 신앙을 꺾지는 못했다. 교회서적들을 베끼고 상본을 그려서 팔아 얻은 적은 수입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새로운 신부를 영입하려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명도회의 일원으로서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며 지도자의 역할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잘 알려진 지도자여서 1827년 전라도에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그는 이것을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는데, 누나 이순이가 전주 옥에 갇혀 있다가 순교하였고 자신도 그 뒤를 따를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받은 고문으로 1827년 6월 35세의 나이로 옥에서 순교했다.
4.1.1.2.13. 복자 이일언 욥
1767~1839
순교지 : 전주 장터
이일언은 아버지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경상도 안의(현 경남 함양군 안의면)로 유배됐다. 이곳에서 그는 관장의 눈 밖에 나서 다시 옥에 갇혔고, 물도 얻어먹지 못하는 고통을 겪었다. 키가 작고 몸집도 보잘것없었지만 믿음의 인내로 모진 형벌을 꿋꿋이 참아 받았다. 이후 갇혀 있는 10년 동안 그는 갖은 모욕과 학대를 견뎌내면서 참다운 신자로서 모범을 보였다. 이후 관장 허락으로 개인 집에서 연금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안의로 찾아온 아내와 함께 생활했다. 1826년 5월에는 연금에서 풀려나 전라도 임실 대판이라는 곳으로 옮겨가 살면서 교리를 실천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힘썼다. 이듬해 정해박해가 일어나 전주 포졸들에게 붙잡힌 그는 모진 형벌에도 꿈쩍하지 않아 천주교인들의 두목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후 김대권 베드로 등과 함께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생활하던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72세의 나이로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4.1.1.2.14. 복자 신태보 베드로
~1839년
순교지 : 전주 장터
신태보 베드로는 경기도 용인 근처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을 알 수 없지만 훗날의 행적을 미루어 볼 때 교육을 통해 어느 정도의 학습을 습득한 듯 보인다. 1840년 전주에서 순교한 최조이 바르바라가 며느리다. 1801년 신유박해가 끝난 후 용인 순교자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로 이주해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살다 다른 교우들과 연락해 교회 재건 운동을 시작했다. 성직자 영입을 위한 경비조달에 힘을 쏟았던 그는 일이 잘 되지 않자 경상도 상주 잣골에 정착해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교회 서적을 필사해 나눠주곤 했다.
1827년 정해박해가 시작된 지 얼마 후 그는 포졸들에게 붙잡혔고, 형벌을 받으면서도 결코 교우들을 밀고하지도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그는 1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39년 5월 전주 장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 쯤 되었다.
4.1.1.2.15. 복자 이태권 베드로
1782~1839
순교지 : 숲정이
이태권 베드로는 충청도 홍성 양인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전라도로 유배되어 사망한 이무명이 아버지고, 1812년 홍주에서 순교한 이여삼 바오로는 삼촌이다. 이태권은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아버지와 삼촌, 형과 함께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그 이듬해에도 삼촌들과 함께 체포됐다가 석방됐다. 이처럼 그는 마음이 심약했으나 석방된 후에는 신자 본분을 계속 지켜나갔다. 교회 서적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눠주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가족과 함께 전라도 지역으로 이주해 살던 그는 1827년 박해 때 다시 체포됐다.
전주로 압송된 그는 첫 번째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다시 약해져 "교회 서적을 바치고 교우들이 있는 곳을 말하겠다"고 대답했으나 곧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에는 혹독한 형벌에도 끝까지 신앙을 굳게 지켰다. 김대권, 이일언 등과 함께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생활하다 1839년 5월, 57세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4.1.1.2.16. 복자 정태봉 바오로
1796~1839
순교지 : 숲정이
어려서 부모를 잃고 5촌 당숙 손에서 자란 정태봉은 자립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전라도 용담 고을(현 전북 진안군 용담면)로 옮겨가 살았다. 그때 이미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항상 본분을 지키려고 노력했으며 교회 서적을 펴면 끝까지 읽은 다음에야 덮을 정도로 교리를 배우려는 열망이 강했다. 1799년쯤 덕산에서 순교한 정산필 베드로 회장이 사촌 형이다.
1827년 정해박해 때 밀고자에 의해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킨 정태봉에게도 약함은 바로 가족들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당숙의 손에서 자랐기에 가족들로 인해 마음이 약해질까 하여 아내와 아이들이 형장에 오지 못하도록 옥졸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이일언, 김대권 등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갇혀 지내다 참수형으로 43세 때 순교했다.
4.1.1.2.17. 복자 김대권 베드로
~1839
순교지 : 전주 장터
김대권 베드로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교리를 배워 왔으나, 열심히 수계하기 시작한 것은 부모가 사망한 뒤부터였다. 한때 베드로는 충청도 공주의 옹기점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는데, 이 무렵에는 아내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느 날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아내를 구하는 꿈을 꾼 후,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내와 화합하여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이후 전라도 고산으로 이주, 정해박해 소식을 듣게 된 그는 교우들에게 피신을 권유하면서도 자신은 천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종용히 기다렸다.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그는 웃는 얼굴로 그들 앞에 나아가 순순히 고산 관아로 끌려갔다. 동료들과 함께 12년 동안 전주 옥에서 지냈으며, 세 번이나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면서 한결같이 목숨 건지기를 거부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전주 장터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4.1.1.2.18. 복자 김조이 아나스타시아
1789~1839
순교지:전주 옥
김조이 아나스타시아는 충청도 덕산의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장성한 뒤 이성삼 바오로와 혼인하였다. 본래 원만한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남편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한 이후로는 더욱 더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언제나 교리를 실천하는데 열심이었으며, 자녀들의 교리 교육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그녀의 가정은 모두가 열심한 신자로 성가정의 본보기가 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전주에 도착한 뒤 그녀는 여러 차례 신문을 당하였으나, 어떠한 위협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다. 마침내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인해 전주 옥에서 순교했다.
4.1.1.2.19. 복자 심조이 바르바라
1813~1839년
순교지 : 전주 옥
심조이 바르바라는 인천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20세 무렵에 홍봉주 토마스와 결혼하였다. 그의 시조부는 1801년에 순교한 홍낙민 루가이며, 그녀와 같이 체포되어 순교한 홍재영 프로타시오는 그의 시아버지였다. 남편 토마스도 1866년에 순교하였다.
바르바라는 지능이 아주 낮아 아무리 노력을 해도 중요한 교리 외에는 배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신앙은 말할 수 없이 굳었으며, 자선심 또한 열렬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났을 때, 심조이 바르바라는 시아버지를 비롯하여 함께 살던 교우들과 같이 체포되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 여러 차례 고문을 당한 뒤 옥에 갇히게 되었다.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고통으로 이질까지 걸려 마침내 옥사했다. 그녀의 나이는 27세였다.
4.1.1.2.20. 복자 이봉금 아나스타시아
1827~1839
순교지 : 전주 옥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는 1827년 이성삼 바오로와 김조이 아나스타시아의 딸이다.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훌륭한 신앙의 가르침을 받게 된 아나스타시아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킬 줄 알고, 천주를 진심으로 사랑할 줄도 알았다. 그녀는 10살 때에 교리문답과 아침․저녁 기도를 배웠다. 선교사는 그녀의 나이가 비록 어렸지만, 그 마음에 감동하여 성체를 모시는 것을 허락하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어머니와 함께 홍재영 프로타시아의 집으로 피신해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되었다.
포졸과 옥리들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의 나이가 어린데다가 얌전하였으므로 동정심을 발휘하여 목숨을 건지라고 간청하였으나,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자 관장은 형리들을 시켜 한밤중에 옥에서 교수하라고 명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2세를 넘지 못하였다.
4.1.1.2.21. 복자 홍재영 프로타시오
1780~1840
순교지 : 숲정이
홍낙민 루가를 시작으로 홍재영 프로타시오, 홍봉주 토마스와 심조이 바르바라 부부, 홍봉주의 아들까지 4대가 순교한 집안이다. 이 가운데 기해박해 당시 전주에서 순교한 이는 충청도 예산의 유명한 양반 집안 출신인 홍재영이다. 홍낙민의 셋째 아들로 부모 입교 당시에 함께 입교했다. 성장한 뒤 동료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교리를 연구하고 교회활동에 참여했던 그는 신유박해 때 체포됐으나 배교 뒤 전라도 광주로 유배됐다. 하지만 유배지에서 한동안 냉담한 뒤 다시 신앙을 되찾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어떤 때는 너무나 오랫동안 꿇어앉아 기도를 하여 걷기 어려울 정도가 된 적도 있었다. 38년을 유배지에서 살고 기해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40년 60세의 나이로 전주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4.1.1.2.22. 복자 최조이 바르바라
1790~1840
순교지 : 숲정이
최조이는 경기도 여주에서 순교한 최창주 마르첼리노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된 그녀는 부친이 순교한 뒤, 비참한 생활을 하였으나 천주님이나 이웃에 대한 열렬한 애덕과 인내는 모든 사람들을 탄복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신태보 베드로의 아들과 결혼하였지만 얼마 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다. 1827년 정해박해 때 시아버지와 같이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친척이나 친구들의 집에 얹혀살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는 시아버지와 다른 죄수들에게 도움을 베풀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는 문초하던 감사에게 "죽음은 제가 바라던 것이고, 오래전부터 저는 그 준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1840년 50세 때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4.1.1.2.23. 복자 이조이 막달레나
1808~1840
순교지 : 숲정이
이조이가 태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19세 때 자식 없이 과부가 되었다. 막달레나는 오로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과 시부모에 대한 효도에만 전력을 다하였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는 천주님께서 비교적 덕을 닦기 쉬운 처지에 두어 주신 것을 자주 감사하였다. 비록 가난하였지만 자발적으로 대재와 소재를 지키면서 극기를 실천하였으며,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데 힘썼고, 무엇보다도 무지한 이들을 가르치는 귀찮은 일을 기꺼이 맡았다. 그녀는 함께 있는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무엇보다 천주님과 더불어 솔직하게 행동합시다. 그분께 충실하여 모두 함께 천국에 올라갑시다. 하나도 빠지는 사람이 없도록 합시다."
4.1.1.2.24. 복자 오종례 야고보
1821~1840
순교지 : 숲정이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 교리를 실천하였다. 장성하여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결혼 직후 전라도 고산에서 살았는데, 진산에 살고 있던 형을 찾아갔다가 1839년 7월에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야고보는 관장 앞에서 문초를 받게 되었을 때 아직 젊은 나이이니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하면 놓아주겠다고 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주를 섬기는 행복을 알고 있는데, 어찌 형벌이 두려워 천주를 배반하겠습니까?" 야고보는 여러 차례에 걸쳐 갖가지 형벌을 받았으나 이를 꿋꿋하게 참아낸 다음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는 그가 오래전부터 원하던 일이었으나 형이 배교하는 것을 보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19세의 나이로 1840년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4.1.2. 성지
4.1.2.1. 치명자산 성지
"유항검의 가족 7분이 묻힌 곳"
치명자산에는 신유박해(1801)때 순교한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그의 가족 6명이 합장되어 있다. 이 중에는 다블뤼 주교가 “한국 순교자들의 보석”이라고 칭송한 동정부부 순교자 이순이와 유중철도 포함되어 있다.
유항검 가족은 처음에 초남이 근처 바우배기에 매장 되었다가 1914년 전주성당(현 전동성당)의 보두네 신부가 유해를 모셔와 현재 자리에 모셨다.
보두네 신부가 해발 300여 미터의 산정에 순교자들을 모신 뜻은
순교자들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을 높이 기리고, 순교자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이후 1993년 유항검의 유해 확인을 위한 시굴 작업을 진행하여 유항검과 그 가족 6명 모두의 유해를 확인한 후 재안장했다.순교자 묘 밑에는 1994년 건립된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성직자 묘지와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있다.
순교자 묘는 도지정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되어 있다.
4.1.2.2. 전동성당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성지"
전동성당이 세워진 자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풍남문 밖, 현 전동성당 자리는 신해박해(1791)때, 한국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웠던 진산사건으로 순교한 곳이고, 또 ‘호남의 사도’로 불렸던 유항검과 그의 동료들이 신유박해(1801) 때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
전동성당의 초대 주임신부는 프랑스인 보두네 신부였다. 1889년 전주본당이 설립되고 보두네 신부가 부임했지만, 당시 전주에는 신자가 1명도 없어 처음에는 완주 소양 대승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91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고, 1908년에 성당 건축을 시작했으며,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했다. 보두네 신부를 통해 이곳에 성당이 건립된 일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보두네 신부 자신도 이곳이 순교터인 줄은 몰랐지만 순교자들의 피가 서려있을 법한 전주성 성벽의 돌과 흙으로 주춧돌을 세웠는데, 바로 그곳이 순교터였기 때문이다.
전동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써 사적 제 288호이고 사제관은 도지정 문화재 자료 178호이다.
4.1.2.3. 숲정이 성지
"순교자들의 피의 꽃으로 피어난 곳"
숲이 칙칙하게 우거져 있어 숲정이로 불렸던 이곳은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이었다.
이 근처에는 피 묻은 칼을 씻을 수 있는 전주천이 있었기에 사형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신유박해(1801) 때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의 일부(신희, 이육희, 이순이, 유중성)와 동료(김천애 등)가 순교한 이후로 천주교인들의 피가 마르지 않았던 곳이다.
기해박해(1839) 때는 12년간 전주옥에 수감되어 있던 5명(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과
많은 신자(홍재영, 최조이,이조이, 오종례 등)들이 순교했다.
병인박해(1866) 때는 6명(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조화서, 정원지)이, 1867년에도 많은 신자들(김사집 등)이 참수형을 받아 순교했다. 숲정이 순교터는 후에 이명서 성인의 후손이 매입해 순교자비를 세웠다. 숲정이 순교터는 도지정 기념물 제71호이다.
4.1.2.4. 초남이 성지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생가터"
초남이 성지는 유항검과 그의 가족이 살았던 생가터이다.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내려와 가족들과 가솔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김제, 금구, 고창, 영광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했다.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 신부로도 활동했지만, 가성직제의 부당함을 알고 난 후에는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만 둘 것을 요청했다. 그 후 동료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운동을 함께했다. 1795년에는 주문모신부가 이곳에 내려와 미사를 집전하고 유항검과 교회의 여러 현안들을 논의했다.
유항검은 신유박해(1801) 때 체포되었고 ‘대박청래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지목되어 대역무도죄를선고받아 그해 9월 17일 풍남문 밖(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또한 그의 가족들은순교하거나 유배되었고 그의 집은 파가저택 되었다. 또 이곳은 유중철과 이순이가 동정부부의 삶을 4년동안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살던 유항검의 가족들 중 7명이 신유박해 때 순교했는데이들의 시신은 처음에 바우배기에 모셨다가 1914년에 치명자산으로 이장했다.
4.1.2.5. 천호성지
"하느님을 부르며 살아온 신앙의 터전"
천호성지는 병인박해(1866)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이명서,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네 명과 그해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등이 묻혀있고, 또 2년 뒤 여산에서 순교한 열 명의 순교자가 묻혀 있다.
신유박해(1801) 때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의 일부(신희, 이육희, 이순이, 유중성)와 동료(김천애 등)가 순교한 이후로 천주교인들의 피가 마르지 않았던 곳이다. 그러나 아직도 종적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이 천호산 자락에 묻혀있다.
천호는 기해박해(1839) 이후로 박해를 피해와 숨어살던 신자들이 이룬 유서깊은 교우촌이다.
또한 성지 인근에는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된 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숨어서 미사를 드리던미사굴과 1867년 블랑 신부가 처음으로 정주하여 사목한 전라도 최초의 사목지 어름골이 있다. 또한 이웃사랑을 실천한 박준복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낙수골이 있다. 천호성지에는 피정의 집과 세상을 떠난 영혼을 모신 봉안경당, 그리고 성물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4.1.2.6. 여산성지
"순교자들의 피의 꽃으로 피어난 곳"
여산은 작은 고을이지만 왕비를 배출한 지역이어서 특별히 사법권을 지닌 부사와 영장이 있었다.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형도 이뤄졌는데,
특히 1868년에는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이곳 순교자들은 여산, 고산, 진산, 금산 등지에서 잡혀와 다양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배다리 근처에서는 교수형으로, 여산 숲정이에서는 참수형이 주로 집행되었고, 동헌 앞마당에서는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얼굴에 물을 뿌린 후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시켜 죽게하는 백지사형이 집행되었다.
여산옥터는 옥에 갇힌 신자들의 고통과 신앙을 묵상할 수 있는 곳이다. 여산의 순교자들은 옥에서 한마음으로 서로 격려하며 기도했던 공동체로 유명하다.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굶주림의 고통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통 중에 있던 신자들은 옷 속에 있는 솜을 먹기도 하고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풀을 뜯어 먹기 바빴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곳 순교자들 중의 대표적인 인물은 김성첨이며, 이들의 유해는 천호성지와 천호산 일대에 묻혀 있다.
4.1.2.7. 나바위 성지
"김대건 신부의 최초 기착지"
나바위 성지는 한국인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신자들과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금강으로 들어와 입국한 곳이다.
1845년 10월 12일 밤 김대건 신부 일행은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도착했다.
이곳에 본당이 설립된 것은 1897년이었고, 초대 주임은 베르모렐 신부였다.
베르모렐 신부가 성당을 세울 때는 김대건 신부 일행을 기념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나나중에 김대건 신부의 착지(着地)로 알려져 이곳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할 수 있다. 나바위성당의 건축 양식은 처음엔 한옥 형태를 취했다가 1916~1917년에 흙벽은 서양식 벽돌로 하고, 용마루 부분의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 벽돌을 붙여 종탑을 세웠고,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다.
이러한 건축 양식의 특이함으로 국가지정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4.1.2.8. 서천교 성지
"성 조윤호의 순교터"
서천교는 병인박해때 순교한 조윤호 성인의 순교터이다. 조윤호는 조화서 성인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로, 부친 조화서와 함께 완주 소양 성지동에 살다가 함께잡혀와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 뒤에 서천교에서 밧줄로 목이 졸려 순교했다.
그는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갈 때에는 서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지 10일 뒤인 12월 23일(혹은 12월 18일, 12월 28일)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모진 매를맞았지만, 죽지 않아 끝내는 밧줄로 목을 졸라 사형시켰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4.1.2.9. 초록바위 성지
"남명희와 홍봉주의 아들이 수장당한 순교터"
초록바위는 병인박해(1866)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남종삼의 큰아들 남명희와, 남종삼과 함께 순교한 홍봉주의 아들을 교수형으로 죽인 후
전주천으로 밀어넣어 수장시킨 곳이다.
남종삼이 처형되고 난 후 그의 부친 남상교와 큰아들 남명희는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를 한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14세였던 남명희는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남명희는 국법에 따라 성인(15세)이 되는 이듬해까지 처형을 연기하고 옥에 가두어 두었다.
그후 이듬해에 이곳 전주천 옆의 초록바위에서 교수형으로 죽인 다음 그 시신을 전주천에 수장시켰다.
남명희 집 안은 3대가 순교의 영광을 입었다.
4.1.2.10. 전주옥 성지
"심문과 형벌의 장소이자 기도하던 곳"
전주옥은 신유박해(1801)때 동정부부인 유중철과 그의 동생 유문석이 그해 10월 9일 옥중 교살된 곳이다.
정해박해(1827) 때는 240여 명이 넘는 천주교인들이 감금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때 이순이의 동생 이경언도 이곳에서 옥사했다.
기해박해(1839) 때는 김조이, 홍봉주 토마스의 아내 심조이가 옥중 생활에서 얻은 병과 형벌로 인한 상처로 옥중에서 순교했으며,
한국 천주교 순교 역사상 가장 어린 이봉금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이때 이봉금의 나이는 만으로 12세를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박해시기에 옥은 고통스런 곳이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기도처였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는 곳이었다.
기해박해(1839) 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는 정해박해(1827) 때 잡혀와 만 12년간을 옥중에서 긴긴 세월을 보낸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옥중에서도 밤마다 등불을 켜 놓고 함께 성경을 읽으며 큰소리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한때 이 옥에는 240여 명의 교우들이 갇혀 있었다고 한다.
4.1.2.11. 김제 순교성지
"복자 한정흠의 순교지"
김제동헌은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자녀의 스승이었던 순교자 한정흠이 감금되었던 곳이다.
한정흠은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출신으로 1784년 9월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해에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고향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고 그해 3월 박해의 불길이 전주까지 번져 유항검이 체포되자 한정흠 또한 체포되어 전라감영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혹독한 형벌과 회유책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이후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지만 그의 뜻은 더욱 굳어져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신앙을 선택했다. 형조에서는 8월 21일 한정흠을 김제로 보내어 처형토록 했다. 고향에서 처형하여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였다. 한정흠은 김제로 이송되어 옥에 갇혀 있다가 전시효과를 최대로 높일 수 있는 장터에서 1801년 8월 26일 45세의 나이에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복자 한정흠의 순교비는 김제 요촌성당에 있으며
순교터는 요촌제1공영주차장 내(김제 코러스마트 뒤)에 자리잡고 있다.
4.1.2.12. 고창 개갑 장터 성지
"복자 최여겸의 순교지"
무장현 공음치면(현 공음면 석교리)의 개갑 장터는 유명한 우시장이었다.
이곳에서 순교한 최여겸은 전라도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윤지충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이후 충청도 한산으로 장가든 후 이존창을 통해 독실한 신자가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와 무장, 흥덕,고창, 영광, 함평 등 서남 해안 지역을 대상으로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가 복음을 전해 세례를 받은 사람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도 28명이나 되었다.
신유박해(1801)가 일어나자 처가인 한산으로 피신하였지만 거기에서 체포되어 무장과 전주 감영으로 차례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심한 신자 한정흠과 김천애를 만나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였다.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했다.
이에 따라 최여겸은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어 며칠 후 개갑 장터에서 8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나이는 39세였다.
이곳은 고창군 지정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4.1.2.13. 김난식 방지거, 김현채 토마스 묘소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 산 215
- 감수 중-4.1.2.14. 신시도 최양업 신부 체류지
군산시 옥도면 신시도리 산4-1
- 감수 중 -
4.2. 청년 사목
안동교구가 노인/농촌 사목에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면, 전주교구는 청소년/청년 사목이 상당히 활발하고 잘 이루어져 있는 교구로 유명하다. 청소년과 청년 관련된 행사가 자주 열리고 있으며 청년들의 교구 차원 참여율도 상당히 높다. 단적인 예로, 인천교구, 대구대교구와 함께 서울대교구의 청년성서모임을 초창기에 빨리 받아들인 교구이다.[18] 또한 교리교사회 등 다른 청년들의 모임 역시 상당히 체계적으로 운영되는 편이다.
전주시 완산구 전주시청 근처의 오래된 가톨릭 센터는 과거 가톨릭 기관 및 전주교구청의 역할 뿐만 아니라 전주시민 문화의 장까지 마련된 곳이었다고 한다. 교구청이 이전한 현재에도 가톨릭 센터는 여러 기능을 수행하지만 특히 그중에서도 청년 사목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전주교구의 청년들은 이곳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완주군 소양면 해월리의 '해월리 피정의 집' 같은 경우도 청년, 청소년 연수나 캠프로 아주 홀륭하게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은 타 교구에서도 이용 신청을 할 정도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전주교구에서 신앙생활을 해본 청소년/청년의 경우 해월리 피정의 집은 한번 정도는 가 본 사람들이 많다. 또한 가톨릭 센터는 교리교사와 같은 본당 봉사를 하는 청년이면 한 번씩은 갈 경우가 많으며 아예 교구 차원에서 가톨릭 센터 내에서 청년사목을 일구어나가는 봉사를 하는 것도 활발하여 일주일에 몇 번씩 이곳을 오가는 청년들도 많다.
보통 전주교구 청년 사목으로 가장 넘버원인 성당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에 있는 덕진성당으로 여기는데, 전북대학교 대학가 앞에 있는 성당이기 때문에 청년 사목 활동이 상당히 활발하고 청년 수도 많다. 특히 외지인 비율이 높은 전북대 특성상 다른 지역에서 온 청년들이 학기 중에 이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덕진성당은 청년특성화성당으로 다양한 청년 활동과 사목으로 알차다. 덕진성당 외에도 전동성당에도 청년 교우가 많은 편이다.
[1] 사무처장 겸직[2] 7위 모두 전주 인근 교우촌에서 살다 병인박해 때 전주 감영에서 순교한 성인들이다.[3] 전북 인구의 약 10.7%에 해당한다.[4] 2017년 전주교구 교세통계표(천주교 전주교구 발간), 천주교 전주교구 홈페이지 참조[5]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복자로 시복됐다. 유항검의 아들인 유중철 요한과 유중철의 아내인 이순이 루갈다, 유항검의 또 다른 아들인 유문석 요한 등 그의 가족도 다수 이때 함께 시복됐다.[6] 두 사람은 나란히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복자로 시복됐다.[7] 분리 후 경성대목구로 개칭.[8]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외국인 신부 5명 포함.[9] 이때 전라남도 지역도 함께 감목대리구로 분리되었으나, 전남 지역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완전히 위임되었다는 점이 전주와 달랐다. 해당 내용은 천주교 광주대교구 역사 항목 참조 바람.[10] 사목표어 "복자 안드레아여 인도하소서 (B.ANDREA DUCE)" [11] 사목표어 "십자가로 구원 (SALUS IN CRUCE)" [12] 사목표어 "네 나라가 임하시며 (ADVENIAT REGNUM TUUM)" [13] 사목표어 "스승의 말씀대로 그물을 치리이다 (IN VERBO TUO LAXABO FETE)" [14] 사목표어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서 (PER QUEM OMNIA)" [15] 사목표어 "충성과 온유 (IN FIDE ET LENITATE)" [16] 사목표어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NON QUOD EGO VOLO SED QUOD TU)" [17] 사목표어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VADE ET TU FAC SIMILITER 루카 10,37)" [18] 지금이야 대부분의 교구에 청년성서모임이 있지만, 대부분 서울대교구를 제외한 교구들은 2000년대에 이를 시작했으며 인천교구, 전주교구, 대구대교구는 이를 90년대부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