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슘페터
'''Joseph Alois Schumpeter'''
(1883년 2월 8일 체코 트르제슈티 출생 ~ 1950년 1월 8일 미국 코네티컷 솔즈베리 타코닉에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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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
동시대에 살았던 케인스와 함께 경제학의 양대산맥으로 평가받은 인물이며,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라는 개념확립에 공헌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6년 J.K. Gabraith[1] 는 슘페터를 "이번 세기의 가장 세련된 보수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했다.[2]
그는 50대 중반까지 9개의 도시와 5개의 나라를 거치며 제1차 세계대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공산주의 혁명, 경제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 등의 역사적 대혼란을 직접 겪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슘페터는 1942년에 출판된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3] >라는 책으로 오늘날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당시 다방면에서 기존 지식들에 도전하여 폭탄같은 충격을 준 책이다. 거대 기업들을 진보의 엔진(the engine of progress)이라며 찬양하였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피고용인들로 이뤄진 새로운 계층의 발흥(rise)을 경고하였으며, 위험회피(risk-aversion) 때문에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며 우려하였다.
슘페터의 경제학적 견해는 색다른 면이 많아 대체로 경제학이 영국 중심인 것에 비해 궤를 달리하는 것이 많으며 애덤 스미스와 케인즈와 같은 거장들에 비판적이었다.
슘페터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통찰력을 들자면 '''혁신'''과 '''기업가'''이다.
(1) '''혁신(innovation)'''이 '''자본주의를 이끄는 힘'''이라고 하였다. 즉 전반적인 경제적 진보(economic progress)를 이끄는 힘이 혁신이라 보았다.
(2) '''기업가(entrepreneurs)'''가 '''혁신을 이끄는 주체'''라고 보았다.
기업가들은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꿈과 의지 (the dream and the will to found a private kingdom)"가 강하지만 동시에 많은 장애물과 대면하고 있다고 하였다. 특히 혁신은 이루기가 쉽지 않으며 혁신을 이루어도 그것을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다고 하였다. 모든 성공한 사업가들은 "자신들의 발 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crumbling beneath their feet)" 곳에 서있으며, 당연하게도 자본주의는 승자(winners)뿐만 아니라 패자(losers)도 만들어 낸다고 지적했다.
슘페터에 따르면 불평등(inequality)과 격동(turbulence)은 물질적 진보를 위해 치러야할 불가피한 작은 대가 (a small price to pay for material progress)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성취는 늘 여왕들에게만 비단 양말을 더 많이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비단 양말을 생산하는 공장의 여직공들도 그것을 사 신을 수 있도록 한다[4] ."라고 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은 모두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에서는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자들에 의한 후폭풍(populist backlash)이 생길 수 있다는 위험성도 인식하고 있었다.
슘페터를 자본주의 시스템의 맹목적 찬양자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업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에 따른 불평등을 작은 대가라고 보기도 한 동시에 자본주의의 두 측면, 즉, 증가하는 번영과 그것이 가져오는 본질적인 불안정성 사이의 긴장관계를 지적하였다.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서도 사회주의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 어떠한 근거나 증거도 없다고 하였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발달과 성취가 성공한 사람과 뒤처진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1883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트리시(현 체코) 에서 출생.[5] 의류제조업체(a textile factory) 경영자[6] 인 아버지와 유명 의사의 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애칭은 요시라고. 하지만 슘페터의 아버지는 슘페터가 네 살이던 해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와 이글라우(현 루마니아)를 거쳐 1888년에 그라츠(현 오스트리아)로 이사를 간다. 여기서 슘페터는 훗날 자신의 의붓아버지가 되는 지기스문트 폰 켈러를 만나게 된다. 슘페터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슘페터와 새로운 가족은 비엔나로 거처를 옮기고 여기서 슘페터의 어머니는 폰 켈러와 재혼한다.[7] 폰 켈러는 귀족집안 출신에다가 장교출신으로,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다. 폰 켈러의 사회적 지위는 슘페터 모자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시골 부르주아가문에서 단숨에 수도 황실귀족가문의 자제로 신분 상승한 슘페터는 귀족자제들만 들어갈수 있는 테레지아눔[8] 에 입학할 수 있었다.
슘페터는 1900년 테레지아눔을 졸업한 후 빈 대학교 법정학부에 진학한다.
빈 대학교에서 1904년 법학을 전공하여 졸업한 뒤 1906년에 (무려 23살)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처음엔 사회경제학에 관심이 있었으나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영향으로 이론경제학 쪽으로 진로를 정했다. 빈 대학을 졸업한 1906년 영국으로 가서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내다 사교계의 귀공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사교계에서 만난 12살 연상 영국 여성 글래디스 시버와 사랑에 빠져 1907년에 결혼하게 된다, 시버는 영국 성공회 대주교의 딸이었으며, 결혼 당시 36세였다.[9]
결혼 후 이집트 카이로의 Italian law firm에서 변호사로 일했고, 이집트 공주의 재정고문이 되어 탁월한 재산관리 성과를 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카이로에 머무르는 동안 첫 번째 저서 <이론경제학의 본질과 주요 내용[10] >을 집필하였는데, 이 책으로 일약 스타가 된다.
1907년 가을에는 뵘바베르크의 추천으로 체르노비츠 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했다. 체르노비츠는 당시 빈으로부터 700km 떨어진 시골이었으며,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그는 때때로 승마복 차림으로 교수회의에 나타나거나, 만찬용 예복을 입고 식사를 하는 등 기행을 벌이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 슘페터 사망 며칠 후, Czernowitz 대학에서 오래전 그의 강의를 들었던 이로부터 온 한 통의 편지는 그의 강의가 매우 뛰어났음을 추정케 한다.[11]
1911년 그라츠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912년 불후의 명저 <경제발전의 이론[12] >을 집필한다. 1913년과 1914년에 걸쳐 컬럼비아대학에 교환교수로 가서 강의를 담당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귀국하였다. 미국 체류를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간 1914년 무렵부터 이미 그는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하나라는 평을 곳곳에서 듣고 있었다.
36살이던 1919년 3월에 제2차 칼 레너 정부[13] 에서 재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경제난, 그리고 관료들의 따돌림과 방관을 이기지 못해 그해 10월 장관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비더만 은행(Biedermann Bank)의 총재로 취임하나 1924년 경제 공황을 이기지 못하고 은행이 파산하였고 슘페터의 개인적 투자도 실패하여 그 후 오랫동안 자신의 수입에서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가야 했다.
1925년에는 안나 라이징거(Anna Reisinger, 1903~1926)과 결혼한다. 슘페터의 친구들은 이때가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년 뒤인 1926년 6월에는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8월에는 아내가 출산 도중 사망했다. 슘페터는 그 충격을 딛고 경제학 강의에 더욱 몰두한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독일 본 대학 공공재정 교수를 지냈고, 1927-1928 년과 1930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했다. 1931년에는 도쿄 상과 대학의 객원 교수로 가기도 했다. 1932년 선거를 통해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1950년 사망할 때까지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나치즘에 의해 쫓겨난 유럽의 동료 경제학자들을 돕기위한 광범위한 노력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7년 제자인 엘리자베스 부디 (Elizabeth Boody, 1898~ 1953)와 결혼했고 1939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으며, 1950년 1월 8일 뇌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경제학 연구에 헌신하였다.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라는 단어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원제는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1942)에서 정립된 개념으로 창조적 파괴란 마르크스 경제학을 재해석한 것으로, 기술의 발전이 끝없이 기존의 기술체계를 부수고 새로운 체계를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LP판에서 카세트테이프, CD-ROM을 이어 스포티파이 등의 스트리밍 서비스로 이어지는 역사, 공중전화에서 삐삐로 그리고 PCS를 넘어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역사 등을 살펴보면 새로운 기술은 옛날의 기술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데, 이런 것이 바로 창조적 파괴의 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콘드라티예프 파동(Kondratieff Wave)의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자본주의 경제발전에서 보이는 50~60년 주기 파동으로 슘페터는 기술혁신패러다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기술 발전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사회 구성원의 학습을 필요로 하지만 이러한 불확실성과 다양성이 장기패턴을 보인다. 즉, 각 기술패러다임에 맞는 환경의 조성이 선행되어야지만 기술적인 돌파가 가능해진다. 이 이론을 인정하는 학계에서는 근대세계체계 이후로 5번의 파동이 있었고 2008년 금융위기를 5차 파동의 종료신호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6차 파동의 시작에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일컫는 인공지능 등의 포스트 정보기술 혁명, 생명공학 및 헬스케어 등에 의해 추진 될 것이라고 믿는다.
슘페터는 경제학자이면서 정치학자이기도 했는데, 저서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를 통해 그는 "민주주의란 인민이 단지 자신을 통치할 사람(들)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민주주의란 어떤 숭고한 이상도, 정치사상도 아니고, 단지 정치적인 수단 내지는 기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슘페터가 바라본 민주주의는 곧 '선거'이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이란 보다 완전하고 안정적인 선거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소수의 성공한 사람은 다수의 대중에게 물질적인 궁핍함이 아닌 심리적인 박탈감을 주고, 다수의 뒤처진 대중은 소수의 성공한 자에 대한 질투심, 원한 그리고 분개심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시장경제에 대한 현장 경험이 없고, 사업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 없이 글과 말로만 먹고 사는 지식인들이 뒤처지고 낙오한 대중을 선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종류의 지식인들이 그렇게 비판에 앞장서고 선동하는 이유는 비판과 선동만이 그들의 존재 가치와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은 프롤레타리아조차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더라도 자본주의는 서서히 쇠퇴하고 사회주의가 득세할 것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업가가 성공했을 때는 어마어마한 부를 상으로 주고 실패했을 때는 무시무시한 참담함과 파산의 고통을 준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뛰어들어 성공을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시스템인 동시에 기업가가 한때 성공했다고 해도 또 다른 혁신이 일어나면 판도가 통째 바뀌어 몰락할 수 있기에 기업가가 방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천재 1명이 1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믿는, 역사와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은 소수의 엘리트라고 믿는 엘리트주의자였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주인공은 기업가이고, 소수의 엘리트 기업가들이 사회전체를 끌고 간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소수의 성공한 사람과 다수의 심리적 박탈감을 느끼는 뒤처진 대중이 생기게 되는데 이들 사이에서 이런 격차를 문제시하는 지식인들이 나타난다고 하였다.이러한 지식인들이 선도하는 다수 대중의 공격을 받는 기업가들은 소수이기에 움츠러들 수 밖에 없고 종국엔 기업가들이 위축되어 자본주의는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1942년에 쓴 그의 대표작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의 한 섹션의 도입부에서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것인가? No! 살아남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들은 슘페터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결론을 내리게 만든 슘페터의 분석은 칼 마르크스의 분석과는 완전히 다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들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되기를 열망하였다.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자체의 '성공(success)'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다. 슘페터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크게 성공할수록 사유재산(private property)과 자유(freedom)라는 바로 그 부르주아 시스템을 공격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지식인 계층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달리,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열망하지 않았다. 슘페터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사가 그의 환자에게 당신은 머지않아 죽을 겁니다라고 예측한다고 해서 환자가 그렇게 될것을 의사가 바라는 것은 아니다(If a doctor predicts that his patient will die presently, this does not mean that he desires it.)".[14]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1942)는 단순히 자본주의의 미래 예측서만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을 촉발한다는 점을 기반으로 자본주의를 재기넘치게 옹호하는 저서이다. 기업가 정신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인물 중 한 명이 슘페터이다. 그는 '발명(invention)'과 기업가의 '혁신(innovation)'을 구분했다. 기업가(entrepreneur)의 혁신은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생산수단, 생산품, 조직의 완전히 새로운 변화라고 하였다. '마차를 연결한다고 기차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의 개념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오히려 자본주의에 회의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이로 인해 복지국가나 과도한 팽창 정책의 규제에 대한 요구, 협동조합 등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가치들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확산됨으로써 '창조적 파괴' 원칙을 통해 자본주의는, 소비자의 진정한 욕구를 채워 주는 재화를 생산할 수 있고 경제 파동과 실업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주의로 진화한다. 자본주의에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고 할 수 있는 창조적 파괴가 오히려 그 풍요로움을 토대로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교체시킨다는 것이다.
단 유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정확하게는 민주적 절차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는 사회민주주의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 슘페터는 이 과정에서 지식인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여겼는데, 자본주의 아래에서 교육의 기회가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 비해 훨씬 개방되었지만 노동의 기회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을 받고 노동의 기회는 얻지 못한 지식인들이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
평소 귀족적인 풍모를 즐겼다고 한다. 매일 아침 옷을 입는데 한 시간을 썼다고 하며 조드퍼즈(jodhpurs, 승마바지)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15]
하버드대학교 재직 시절 제자는 폴 사무엘슨, 존버 윌리엄스[16] 등이 있다.
1883년 카를 마르크스가 죽은 해에 케인즈와 동갑으로 태어났다. 경제학의 거두가 죽자 2명의 또다른 거두가 탄생한 셈.[17]
국내에선 1980년대에 슘페터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이념적 성향을 강화하는 교재로 매도되어, 대법원에서 해당 서적에 관련된 재판까지 열린적이 있다.[18]
슘으로 시작해서 끝말잇기할때, -슘으로 끝나는 화학 원소를 카운터칠 수 있다.
(1883년 2월 8일 체코 트르제슈티 출생 ~ 1950년 1월 8일 미국 코네티컷 솔즈베리 타코닉에서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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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
동시대에 살았던 케인스와 함께 경제학의 양대산맥으로 평가받은 인물이며, ''''창조적 파괴''' (creative destruction)'라는 개념확립에 공헌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6년 J.K. Gabraith[1] 는 슘페터를 "이번 세기의 가장 세련된 보수주의자"라고 칭하기도 했다.[2]
그는 50대 중반까지 9개의 도시와 5개의 나라를 거치며 제1차 세계대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 공산주의 혁명, 경제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 등의 역사적 대혼란을 직접 겪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슘페터는 1942년에 출판된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3] >라는 책으로 오늘날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당시 다방면에서 기존 지식들에 도전하여 폭탄같은 충격을 준 책이다. 거대 기업들을 진보의 엔진(the engine of progress)이라며 찬양하였고,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피고용인들로 이뤄진 새로운 계층의 발흥(rise)을 경고하였으며, 위험회피(risk-aversion) 때문에 사회주의의 승리라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다며 우려하였다.
슘페터의 경제학적 견해는 색다른 면이 많아 대체로 경제학이 영국 중심인 것에 비해 궤를 달리하는 것이 많으며 애덤 스미스와 케인즈와 같은 거장들에 비판적이었다.
슘페터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통찰력을 들자면 '''혁신'''과 '''기업가'''이다.
(1) '''혁신(innovation)'''이 '''자본주의를 이끄는 힘'''이라고 하였다. 즉 전반적인 경제적 진보(economic progress)를 이끄는 힘이 혁신이라 보았다.
(2) '''기업가(entrepreneurs)'''가 '''혁신을 이끄는 주체'''라고 보았다.
기업가들은 "자기만의 왕국을 세우고자 하는 꿈과 의지 (the dream and the will to found a private kingdom)"가 강하지만 동시에 많은 장애물과 대면하고 있다고 하였다. 특히 혁신은 이루기가 쉽지 않으며 혁신을 이루어도 그것을 유지하기는 더욱 어렵다고 하였다. 모든 성공한 사업가들은 "자신들의 발 밑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crumbling beneath their feet)" 곳에 서있으며, 당연하게도 자본주의는 승자(winners)뿐만 아니라 패자(losers)도 만들어 낸다고 지적했다.
슘페터에 따르면 불평등(inequality)과 격동(turbulence)은 물질적 진보를 위해 치러야할 불가피한 작은 대가 (a small price to pay for material progress)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성취는 늘 여왕들에게만 비단 양말을 더 많이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비단 양말을 생산하는 공장의 여직공들도 그것을 사 신을 수 있도록 한다[4] ."라고 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은 모두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에서는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자들에 의한 후폭풍(populist backlash)이 생길 수 있다는 위험성도 인식하고 있었다.
슘페터를 자본주의 시스템의 맹목적 찬양자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기업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에 따른 불평등을 작은 대가라고 보기도 한 동시에 자본주의의 두 측면, 즉, 증가하는 번영과 그것이 가져오는 본질적인 불안정성 사이의 긴장관계를 지적하였다.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서도 사회주의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 어떠한 근거나 증거도 없다고 하였지만, 동시에 자본주의 발달과 성취가 성공한 사람과 뒤처진 사람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2. 생애
2.1. 유년기
1883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트리시(현 체코) 에서 출생.[5] 의류제조업체(a textile factory) 경영자[6] 인 아버지와 유명 의사의 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애칭은 요시라고. 하지만 슘페터의 아버지는 슘페터가 네 살이던 해에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어머니와 이글라우(현 루마니아)를 거쳐 1888년에 그라츠(현 오스트리아)로 이사를 간다. 여기서 슘페터는 훗날 자신의 의붓아버지가 되는 지기스문트 폰 켈러를 만나게 된다. 슘페터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슘페터와 새로운 가족은 비엔나로 거처를 옮기고 여기서 슘페터의 어머니는 폰 켈러와 재혼한다.[7] 폰 켈러는 귀족집안 출신에다가 장교출신으로,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다. 폰 켈러의 사회적 지위는 슘페터 모자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고, 시골 부르주아가문에서 단숨에 수도 황실귀족가문의 자제로 신분 상승한 슘페터는 귀족자제들만 들어갈수 있는 테레지아눔[8] 에 입학할 수 있었다.
슘페터는 1900년 테레지아눔을 졸업한 후 빈 대학교 법정학부에 진학한다.
2.2. 학문적 성취와 교수 임용
빈 대학교에서 1904년 법학을 전공하여 졸업한 뒤 1906년에 (무려 23살)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처음엔 사회경제학에 관심이 있었으나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영향으로 이론경제학 쪽으로 진로를 정했다. 빈 대학을 졸업한 1906년 영국으로 가서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내다 사교계의 귀공자로 떠오른다. 그리고 사교계에서 만난 12살 연상 영국 여성 글래디스 시버와 사랑에 빠져 1907년에 결혼하게 된다, 시버는 영국 성공회 대주교의 딸이었으며, 결혼 당시 36세였다.[9]
결혼 후 이집트 카이로의 Italian law firm에서 변호사로 일했고, 이집트 공주의 재정고문이 되어 탁월한 재산관리 성과를 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카이로에 머무르는 동안 첫 번째 저서 <이론경제학의 본질과 주요 내용[10] >을 집필하였는데, 이 책으로 일약 스타가 된다.
1907년 가을에는 뵘바베르크의 추천으로 체르노비츠 대학교의 교수로 취임했다. 체르노비츠는 당시 빈으로부터 700km 떨어진 시골이었으며,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그는 때때로 승마복 차림으로 교수회의에 나타나거나, 만찬용 예복을 입고 식사를 하는 등 기행을 벌이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1950년 슘페터 사망 며칠 후, Czernowitz 대학에서 오래전 그의 강의를 들었던 이로부터 온 한 통의 편지는 그의 강의가 매우 뛰어났음을 추정케 한다.[11]
1911년 그라츠 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912년 불후의 명저 <경제발전의 이론[12] >을 집필한다. 1913년과 1914년에 걸쳐 컬럼비아대학에 교환교수로 가서 강의를 담당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귀국하였다. 미국 체류를 마치고 유럽으로 돌아간 1914년 무렵부터 이미 그는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하나라는 평을 곳곳에서 듣고 있었다.
2.3.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이후 미국 망명
36살이던 1919년 3월에 제2차 칼 레너 정부[13] 에서 재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과 경제난, 그리고 관료들의 따돌림과 방관을 이기지 못해 그해 10월 장관직을 사임한다.
그리고 비더만 은행(Biedermann Bank)의 총재로 취임하나 1924년 경제 공황을 이기지 못하고 은행이 파산하였고 슘페터의 개인적 투자도 실패하여 그 후 오랫동안 자신의 수입에서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가야 했다.
1925년에는 안나 라이징거(Anna Reisinger, 1903~1926)과 결혼한다. 슘페터의 친구들은 이때가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1년 뒤인 1926년 6월에는 어머니가 사망하였고, 8월에는 아내가 출산 도중 사망했다. 슘페터는 그 충격을 딛고 경제학 강의에 더욱 몰두한다.
1926년부터 1932년까지 독일 본 대학 공공재정 교수를 지냈고, 1927-1928 년과 1930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강의했다. 1931년에는 도쿄 상과 대학의 객원 교수로 가기도 했다. 1932년 선거를 통해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고, 1950년 사망할 때까지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나치즘에 의해 쫓겨난 유럽의 동료 경제학자들을 돕기위한 광범위한 노력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7년 제자인 엘리자베스 부디 (Elizabeth Boody, 1898~ 1953)와 결혼했고 1939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으며, 1950년 1월 8일 뇌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경제학 연구에 헌신하였다.
3. 주요 저서 및 업적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라는 단어로 유명하다. 그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원제는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1942)에서 정립된 개념으로 창조적 파괴란 마르크스 경제학을 재해석한 것으로, 기술의 발전이 끝없이 기존의 기술체계를 부수고 새로운 체계를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다. LP판에서 카세트테이프, CD-ROM을 이어 스포티파이 등의 스트리밍 서비스로 이어지는 역사, 공중전화에서 삐삐로 그리고 PCS를 넘어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역사 등을 살펴보면 새로운 기술은 옛날의 기술을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데, 이런 것이 바로 창조적 파괴의 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콘드라티예프 파동(Kondratieff Wave)의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자본주의 경제발전에서 보이는 50~60년 주기 파동으로 슘페터는 기술혁신패러다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기술 발전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사회 구성원의 학습을 필요로 하지만 이러한 불확실성과 다양성이 장기패턴을 보인다. 즉, 각 기술패러다임에 맞는 환경의 조성이 선행되어야지만 기술적인 돌파가 가능해진다. 이 이론을 인정하는 학계에서는 근대세계체계 이후로 5번의 파동이 있었고 2008년 금융위기를 5차 파동의 종료신호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6차 파동의 시작에 있다고 생각하며, 이것은 제4차 산업혁명으로 일컫는 인공지능 등의 포스트 정보기술 혁명, 생명공학 및 헬스케어 등에 의해 추진 될 것이라고 믿는다.
슘페터는 경제학자이면서 정치학자이기도 했는데, 저서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를 통해 그는 "민주주의란 인민이 단지 자신을 통치할 사람(들)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민주주의란 어떤 숭고한 이상도, 정치사상도 아니고, 단지 정치적인 수단 내지는 기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슘페터가 바라본 민주주의는 곧 '선거'이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성숙이란 보다 완전하고 안정적인 선거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소수의 성공한 사람은 다수의 대중에게 물질적인 궁핍함이 아닌 심리적인 박탈감을 주고, 다수의 뒤처진 대중은 소수의 성공한 자에 대한 질투심, 원한 그리고 분개심을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시장경제에 대한 현장 경험이 없고, 사업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 없이 글과 말로만 먹고 사는 지식인들이 뒤처지고 낙오한 대중을 선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종류의 지식인들이 그렇게 비판에 앞장서고 선동하는 이유는 비판과 선동만이 그들의 존재 가치와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시스템은 프롤레타리아조차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더라도 자본주의는 서서히 쇠퇴하고 사회주의가 득세할 것이라고 보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기업가가 성공했을 때는 어마어마한 부를 상으로 주고 실패했을 때는 무시무시한 참담함과 파산의 고통을 준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뛰어들어 성공을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시스템인 동시에 기업가가 한때 성공했다고 해도 또 다른 혁신이 일어나면 판도가 통째 바뀌어 몰락할 수 있기에 기업가가 방심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하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천재 1명이 1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믿는, 역사와 세상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은 소수의 엘리트라고 믿는 엘리트주의자였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주인공은 기업가이고, 소수의 엘리트 기업가들이 사회전체를 끌고 간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소수의 성공한 사람과 다수의 심리적 박탈감을 느끼는 뒤처진 대중이 생기게 되는데 이들 사이에서 이런 격차를 문제시하는 지식인들이 나타난다고 하였다.이러한 지식인들이 선도하는 다수 대중의 공격을 받는 기업가들은 소수이기에 움츠러들 수 밖에 없고 종국엔 기업가들이 위축되어 자본주의는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1942년에 쓴 그의 대표작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의 한 섹션의 도입부에서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살아남을 것인가? No! 살아남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들은 슘페터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결론을 내리게 만든 슘페터의 분석은 칼 마르크스의 분석과는 완전히 다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들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고 믿었고 또한 그렇게 되기를 열망하였다.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자체의 '성공(success)'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고 보았다. 슘페터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크게 성공할수록 사유재산(private property)과 자유(freedom)라는 바로 그 부르주아 시스템을 공격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하는 지식인 계층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달리,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무너지는 것을 열망하지 않았다. 슘페터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사가 그의 환자에게 당신은 머지않아 죽을 겁니다라고 예측한다고 해서 환자가 그렇게 될것을 의사가 바라는 것은 아니다(If a doctor predicts that his patient will die presently, this does not mean that he desires it.)".[14]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1942)는 단순히 자본주의의 미래 예측서만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을 촉발한다는 점을 기반으로 자본주의를 재기넘치게 옹호하는 저서이다. 기업가 정신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인물 중 한 명이 슘페터이다. 그는 '발명(invention)'과 기업가의 '혁신(innovation)'을 구분했다. 기업가(entrepreneur)의 혁신은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생산수단, 생산품, 조직의 완전히 새로운 변화라고 하였다. '마차를 연결한다고 기차가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의 개념이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발전이 오히려 자본주의에 회의적인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이로 인해 복지국가나 과도한 팽창 정책의 규제에 대한 요구, 협동조합 등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가치들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확산됨으로써 '창조적 파괴' 원칙을 통해 자본주의는, 소비자의 진정한 욕구를 채워 주는 재화를 생산할 수 있고 경제 파동과 실업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주의로 진화한다. 자본주의에 풍요로움을 가져다 준다고 할 수 있는 창조적 파괴가 오히려 그 풍요로움을 토대로 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교체시킨다는 것이다.
단 유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는 정확하게는 민주적 절차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는 사회민주주의에 가깝다는 것이다. 또 슘페터는 이 과정에서 지식인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여겼는데, 자본주의 아래에서 교육의 기회가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 비해 훨씬 개방되었지만 노동의 기회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을 받고 노동의 기회는 얻지 못한 지식인들이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
4. 여담
평소 귀족적인 풍모를 즐겼다고 한다. 매일 아침 옷을 입는데 한 시간을 썼다고 하며 조드퍼즈(jodhpurs, 승마바지)를 즐겨 입었다고 한다.[15]
하버드대학교 재직 시절 제자는 폴 사무엘슨, 존버 윌리엄스[16] 등이 있다.
1883년 카를 마르크스가 죽은 해에 케인즈와 동갑으로 태어났다. 경제학의 거두가 죽자 2명의 또다른 거두가 탄생한 셈.[17]
국내에선 1980년대에 슘페터의 저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가 이념적 성향을 강화하는 교재로 매도되어, 대법원에서 해당 서적에 관련된 재판까지 열린적이 있다.[18]
슘으로 시작해서 끝말잇기할때, -슘으로 끝나는 화학 원소를 카운터칠 수 있다.
[1]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위키백과 한국어판)[2] Described by John Kenneth Galbraith as "the most sophisticated conservative" of the twentieth century (A BOOK REVIEW: PROPHET OF INNOVATION 中)[3]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두산백과)[4] The capitalist achievement does not typically consist in providing more silk stockings for queens, but in bringing them within the reach of factory girls in return for steadily decreasing amounts of effort.[5] 그러나 그는 죽을때까지 그의 조상이 체코인(슬라브)인걸 인정하지 않았고 독일인(게르만)으로 간주했다[6] 그래서 대학에 가서 경제학을 공부할 때 공장 경영인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경제학에 대해 낯설지 않았다[7] 하지만 이마저도 1906년 7월 이혼한다.[8]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가 세운 귀족전용 명문 사립학교[9] 수년 후 슘페터는 그라츠 대학 교수가 되어 1년 동안 교환교수로 컬럼비아 대학에 머물렀고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그라츠로의 귀환을 결정했으나, 부인 글래디스 시버는 그라츠로 가기를 거부하고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공식적으로 이혼하게 된다.[10] 이론경제학의 본질과 주요 내용 (네이버 지식백과)[11] '저는 여전히 Czernowitz 대학에서 첫 강의를 하기 위해 교실에 들어온 멋지고 우아한 옷을 입은 청년을 기억합니다.그의 탁월한 전달력과 심오한 생각은 즉시 그에 대한 가장 깊은 존경심을 불러왔고 우리를 감동시켰습니다.' Joseph A. Schumpeter: His Life and Work 中[12] 경제발전의 이론 (네이버 지식백과)[13] 제2차 칼 레너 정부 (위키백과 영어문서)[14] 출처 https://www.econlib.org/library/Enc/bios/Schumpeter.html[15] 2009년에 출간된 하버드 비지니스 스쿨의 명예교수인 토마스 맥크로가 저술한 슘페터 전기인 "Prophet of Innovation: Joseph Schumpeter and Creative Destruction" 참고[16] John Burr Williams (위키백과 영어문서)[17] 비슷한 케이스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죽은 해에 아이작 뉴턴이 태어난 사실도 있다.[18] 대법원 1982.10.26.선고. 82도1861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