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리크 왕조
1. 개요
우크라이나어: Рюриковичі
영어: Rurik dynasty
초대 노브고로드 공국 대공 류리크를 시조로 하는 동유럽의 가문. 70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존속하면서 수없이 많은 루스계 공국들의 대공들과 그들을 하나로 묶은 루스 차르국의 차르를 배출해내며 동유럽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 역사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는 여러 설화에서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바이킹으로 전해진다. 12세기에 쓰인 '러시아 원초 연대기'에서는 위와 같이 러시아 현지의 슬라브족 일파가 류리크를 초청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이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당시 바이킹이나 루스의 역사라는 게 사실상 반 신화나 다름 없다보니 류리크의 실존 여부를 의심하는 시각도 있는 편이다. 다만 하플로그룹 검사로 류리크 왕조가 적어도 현지 슬라브인과는 계통이 다르다는 것은 확증이 난 상황이다.[1]'' 그리하여 그들은 바다 건너 바랴기인, 루시족에게로 갔다. 일부가 스웨덴인으로, 또 일부가 노르만인, 앵글인, 고트인으로 불리듯이, 이 바랴기인들은 루시인으로 알려졌으니, 곧 그들이 그렇게 불렸기 때문이다. ''
'' 슬라브의 크리비치 부족에 속하는 추드인이 이윽고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온 땅이 크고 부유한데, 그러나 거기에는 질서가 없습니다. 와서 우리들을 다스려주십시오! ''
러시아 원초 연대기 中
류리크 사후 그의 자리는 그의 아들[2] 이고리가 이어갔으며 이후 키예프 등지로 세력을 뻗쳐 키예프 대공국을 수립, 류리크 왕조는 루스의 지배가문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세력 확대 과정에서 키예프 대공국은 당시 중근동의 패권국이던 동로마 제국과 접촉하는데, 류리크 왕조의 키예프 대공들은 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기독교, 키릴 문자, 교회법 등 제국의 뛰어난 문물을 수용함과 동시에 자주적인 위치를 고수하며 제국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사례의 대표격으로 키예프 대공 볼로디미르의 일화가 있다.
1. 제위를 노린 군사 귀족들의 반란으로 위기에 몰린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오스 2세의 지원 요청을 받은 볼로디미르 대공은 지원군 6000명을 보내주는 대가로 황제의 여동생 안나와 결혼할 것을 약속받았다.
2. 볼로디미르 대공의 지원에 힘입어 바실리오스 2세는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여동생 안나는 '''아무리 병사가 필요하다고 여동생을 첩을 수백씩이나 거느리고 있다는 야만족 왕에게 팔아먹냐'''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고, 바실리오스 2세 자신도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적통 황녀를 이교도 야만족에게 시집보내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은가 싶었는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미적거리기 시작했다.[3]
3. 물론,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에 격분한 볼로디미르 대공은 당시 제국령이던 크림 반도를 침공하여 약탈하고, 이 지역에서 제국의 거점이던 도시 케르손을 점령한 뒤 '''약속 안 지키냐? ㅅㅂㄹㅁ?'''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4. 귀족들의 반란은 진압했으나, 언제나 양면 전선, 심하면 3면 전선에 시달리던[4] 동로마 제국으로써는 루스족까지 적으로 돌릴 여력이 도저히 없었고, 별 수 없이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써 정교회의 수호자인 입장이기 때문에... '''황실의 공주는 죽어도 이교도에게는 시집 못 보낸다! 정교회로 개종하고 첩 정리해라! 그럼 나도 약속 지키겠다!'''라고 응답했다.
5. 볼로디미르 대공은 기꺼이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안나는 별 수 없이 시집갔으며, 이로써 현대에 이르는 우크라이나 등의 슬라브 정교회 시대가 열렸다.
다소 희극적인 어조로 쓰기는 했지만, 사실 이 사건은 러시아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며, 동시에 동로마 제국과 키예프 대공국 양측 모두 향후 수백년간 우려먹고 긁어먹고도 남을 엄청난 이득을 얻은 외교적인 대승리라 할 만한 사건이기도 하다. 일단 볼로디미르 대공은 자신이 정교회로 개종했을 뿐 아니라 가신과 봉신들에게도 개종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직접 영토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집단 개종과 세례를 독려했다고 하는데... 체계화된 교리를 가진 국가 종교인 정교회를 받아들임으로써 행정체계를 중앙집권적, 체계적으로 개선하고 종교의 권위를 빌려 자신과 후계자들의 통치기반을 튼튼하게 할 수 있다는 효과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할 만한 일이었고, 더 나아가 당시까지 문화적, 기술적 수준이 높지 못했던 러시아로써는 당대 세계 최고수준의 문명국이었던 동로마 제국과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서 발전의 기회를 얻는 일이기도 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키예프가 정교회로 개종하는 것은 운명의 캐삭빵을 벌이던 동쪽의 이슬람 세력, 호시탐탐 제국의 영향권을 넘보는 서쪽의 가톨릭 세력, 심심하면 쳐들어와서 털고가는 북쪽의 유목민세력에 포위된 상황에서 그나마 신뢰 가능한 동맹국을 확보하여 국방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키는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사실 기독교 개종 이후라고 류리크 왕조의 대공국들이 조지아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을 전혀 안 턴 건 또 아니지만... 그래도 이교도였던 시절에 툭하면 제국을 대규모로 약탈하러 들어오던 것보다는 훨씬 부담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수백년 후 동로마 제국이 돌이킬 수 없는 쇠망기에 접어든 1300년대 무렵에는 우크라이나가 제국의 가장 중요한 우방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열심히 달래고 부탁해도 딱히 시원한 도움을 주지는 않던 서유럽 가톨릭 국가들에 비해[5] 키예프는 (자신들도 몽골의 지배에서 막 벗어나 썩 좋지 못한 형편이었는데도) 정교회의 총본산인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수리비라는 명목으로 금전적 원조를 해 주는 등 그나마 시원시원하게 동로마 제국에게 도움을 주는 편이었던 것.(결국 이 수리비는 성당 고치는 데 안 쓰고 용병 고용비로 다 써 버렸지만, 키예프 측에서는 별 말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류리크 왕조의 전성기는 키예프의 현명공 야로슬라프 치세라 여겨진다. 그의 치세에 키예프는 이슬람 해적이 활개치는 지중해를 우회해 동방과 교역하고자 하는 상인들의 집결지로 번성했으며, 동로마 제국이나 인근의 기타 소국들로부터 군사 활동을 벌여 성과를 얻어냈다. 야로슬라프 사후 키예프는 교역의 쇠퇴와 내부의 계승분쟁, 쿠만,페체네그를 위시한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여러 대공국들로 분열되는 등 부침에 빠지며 류리크 왕조는 서양사의 전면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그 와중에도 대공위를 손에서 놓지 않으며 수명을 유지했다.
류리크 왕조는 이후 전세계를 강타한 몽골 제국과 그 후계인 킵차크 칸국의 침략과 억압[6] 속에서도 명맥을 유지하다가 새로이 성장한 모스크바 대공국[7] 이 러시아 일대를 통합, 몽골 축출의 업적을 이루고 루스 차르국으로 거듭나면서 차르를 배출해내는 왕가로 거듭난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위해 친척들을 숙청하고 황태자와 임신한 며느리를 직접 때려 죽인(...) 이반 4세의 화끈한 폭정과 그 뒤를 이은 병약한 표도르 1세의 요절로 류리크 왕조는 단절되었다. 룰론 류리크의 후손들은 많았지만 직계와 떨어져서 차르계승권이 없던 상황이었다. 당시 러시아는 서유럽으로부터 귀천상혼을 배제하는 풍습이나 살리카법을 들여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먼 방계가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 자체에 익숙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자연히 러시아는 극도의 혼란속에 빠졌고 어찌어찌하여 로마노프 왕조에게 제위가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굉장한 막장 드라마가 시전되었는데 이반 4세의 막내아들인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라 자처한 가짜 드미트리가 3명씩이나 나와서 그 중 한 명이 차르에 즉위하여 9개월 동안의 치세기간을 지내는 데 성공하는 등 왕조가 개판이 되었다.
류리크 왕조의 어이없는 단절은 당대에도 많은 논란을 불러왔고, 특히 이반 4세의 막남 우글리치 공 드미트리를 자칭하던 가짜 드미트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결탁해 비 류리크계 차르들의 정통성을 문제삼으며 러시아는 한동안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혼란 시대라 불리는 시기이며, 오랜 기간 동안 러시아를 지배해왔던 류리크 왕조의 위상을 짐작케 해준다. 다만 직계가 아닌 방계 가문은 혈통이 계속 이어져오기는 한다. 영국 스튜어트 왕조처럼 방계 분가가 많았기 때문.
3. 배출 작위
- 러시아의 차르
- 루스의 왕
- 키예프 대공
- 모스크바 대공
- 블라디미르#s-2 대공
- 체르니코프 대공
- 랴잔 대공
- 노브고로드 대공
- 트베리 대공
- 체르니코프 대공
- 리투아니아 대공
- 야로슬라블 공작
- 스몰렌스크 공작
- 노브고로드 공작
- 페레야슬라블 공작
- 투르노브 공작
- 폴로츠크 공작
- 로스토브 공작
- 보스니아 공작
- 마치바 공작
- 슬라보니아 총독
- 마치바 총독
- 보스니아 총독
이러한 공국들은 형이 죽으면 형의 자식들이 아닌 동생의 형의 영지를 물려받고, 이전의 자기 영지를 동생에게 물려주는 형제상속이 이루어지는 등 완전히 별개의 국가라고 보기는 어려울 정도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영토를 두고 전쟁을 벌이는 등 격심한 내분과 갈등을 겪는 경우도 많았으며, 따라서 이 당시의 루스 공국들은 키예프를 맹주로 하는 일종의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따라서 이 시대를 키예프 루시 시대라고 한다.) 물론, 이런 공국들을 통합하여 통일 국가를 구성하려는 시도 자체는 끊임없이 있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고, 결국 루스의 통합은 키예프의 쇠퇴와 몽골 강점기 이후 몽골의 조세 수취 대리를 통해 성장한 모스크바 대공국이 루스 공국들을 통합하고 몽골을 물리친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4. 대중매체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대전략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에 등장한다. 시대에 따라 약간의 부침이 있으나, 우크라이나-러시아 일대는 류리크 왕조 출신 대공들이 지배하는 고만고만한 독립 공국들이 우글우글하다. 각 공국의 대공들이 같은 가문 출신으로 혈연관계인 특성상 전쟁을 하지 않고 암살+결혼설계를 통한 상속으로 영토를 넓히기 편하고, 서로의 영토에 대해 상속권 주장(클레임)이 가능한 경우도 종종 있어서 전쟁 명분 마련이 쉽기 때문에 초보자에게 흔히 추천되는 플레이이기는 한데... 1200년대 중반에 킵차크 칸국의 바투 칸께서 오시면 싹 쓸리고 갈리고 다져지는 게 문제.(...) 덤으로, 키예프, 모스크바, 노브고로드 등 류리크 왕조가 지배하는 러시아의 대도시들은 최대 성장 한도 자체는 파리나 로마, 런던, 심지어 콘스탄티노플 수준으로 높기는 한데... 거의 성장이 안 된 상태라... 처음부터 거의 한계 가깝게 성장해 있는 대도시 콘스탄티노플은 커녕 반쯤 성장된 상태로 시작하는 파리에 비해서도 턱없이 가난하고 초라하다[8] . 삼국지 시리즈로 따지면 마치 영릉이나 계양같다. 바로 위에 개발이 빵빵한 장사가 있는데 거긴 손견, 유비, 손권 이런 군주들이 다스리는 지역이다. 돈을 모아서 성장시키려고 해도 돈 모으는 데 한세월. 게다가 돈 모아봤자... 그걸 도시 성장에 쓰지를 못하고 몽골이 쳐들어오면 용병이라도 고용하는게 더 급해서...
프랑스 코미디 영화 감독으로 유명한 자크 타티가 류리크 왕조의 후예라고 한다.
[1] https://www.familytreedna.com/public/rurikid/default.aspx 유전자로만 볼 때는 우랄어족민족들과 흡사하다.[2] 류리크의 친척이거나 아예 남남이라는 설도 있다.[3] 이런 바실리우스 2세의 태도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능한 것이, 제위의 여계 계승(특히 사위 계승)을 폭 넓게 인정하던 동로마 제국에서는 적통 황녀를 외국으로 시집보내는 것을 엄청난 금기로 여겼다. 혼인동맹을 위해 황실의 여성을 외국 군주에게 시집보낸 사례 정도는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황제의 여동생인 포르피로예니타를 외국 군주에게 시집보낸 사례는 볼로디미르 대공과 안나의 사례 이외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4] 사실 당시 동로마 제국이 유럽과 지중해, 중근동 문화권의 강대국이었다는 평이 아깝지 않은 것이... 사실상 모든 국경이 군사적 접경지대인 상태에서도 잘만 버텨냈다는 것이다.[5] 서유럽이 도와주기 싫어서 도와주지 않았다기 보다는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이미 한 차례 십자군을 결성해서 동로마를 도와주러 왔다가 오스만에게 완전 박살이 났고, 프랑스와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을 하느라 도와줄 여력이 없었으며,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레콩키스타에 온 힘을 쓰고 있는 실정이었다. 거기다 교황이 서유럽 각국에 동로마를 도와달라고 호소했지만 이전만큼 교황을 말을 듣던 시기가 아니었다.[6] 이른바 타타르의 멍에[7] 모스크바 대공국 역시 류리크 왕조가 공위를 독점했다.[8] 해당 게임에서 특정 영토의 성장 가능 상한선은 홀딩 수, 즉 해당 영토에 속한 영지를 개발할 수 있는 슬롯 수에 따라 결정되고, 영지(백작령)당 홀딩 수는 1~7이다.(여담이지만 홀딩수 1의 완전 똥땅은 7홀딩짜리 꿀땅보다 더 희귀하다.) 그리고 류리크 러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보면 키예프 같은 경우 홀딩 7로 파리나 콘스탄티노플, 로마, 바그다드등에 맞먹고, 노브고르드, 모스크바, 폴로츠크등의 다른 주요 도시들도 홀딩수 6으로 런던이나 그라나다, 모술이나 피렌체와 맞먹는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성장 가능성일 뿐이고, 똑같이 홀딩수 7 이라도 콘스탄티노플이나 바그다드, 카이로등은 처음부터 7개 홀딩이 다 건설되어 있고 각각의 홀딩 역시 상당히 개발되어 있는 데 비해(즉, 이미 대도시) 파리는 슬롯 수는 7개지만 건설된 것은 3~4개로 나머지는 빈 땅인 상태이며(즉, 대도시로 성장할 가능성은 있지만 중소도시) 키예프의 경우는 건설된 홀딩이 2개 뿐인 것(즉, 먼 미래엔 대도시가 될지도 모르지만 완전 깡촌). 모스크바 같은 경우 더 심해서, 말로만 6홀딩급 영토지 실제로 개발된 홀딩은 하나뿐이라는 식이다. 게다가 빈 땅에 새 홀딩을 세우는 것 자체가 워낙 큰 돈과 긴 시간이 들어가고, 새로 새워진 홀딩(영지)를 또 다른 영지에 뒤지지 않도록 성장시키는데도 큰 비용과 긴 시간이 소모되는데, 더구나 러시아 일대의 경우 킵차크 칸국의 공격을 직격으로 받아내야 하는 위치이기도 한 것. 말하자면 새 홀딩 박을 돈 있으면 모아놨다가 몽고가 쳐들어왔을 때 용병을 사는게 더 낫다.(그래봤자 못 막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