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에머리치 에드워드 달버그 액튼
1. 개요
존 에머리치 에드워드 달버그 액튼(John Emerich Dalberg-Acton, 1st Baron Acton, 13th Marquess of Groppoli, 1834.1.10~1902.6.19)은 영국의 정치가, 작가, 역사가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 명언은 그가 한 성공회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왔다. 전체 문장을 옮기면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합니다."'''Power corrupts.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
'''권력은 부패한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국내에는 이 명언을 남긴 사람 정도로만 알려진 경향이 있지만, 사실 당대 제일의 역사가들 중 한 명으로,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도 19세기 역사학의 대표 격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현재까지도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역사학 학술 저널 중 하나인 The English Historical Review의 창립자이기도 하다.
신학적[1] 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자유주의 성향의 가톨릭 신자로도 알려져 있다.
2. 생애
이탈리아(당시에는 양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출생이다. 단 본래 이탈리아 토박이는 아니었고, 슈롭셔에 기반을 둔 귀족인 액턴 가문의 일원으로서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이주한 집안의 후손이다. 이후 영국의 본가가 후손이 끊어지자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토지와 작위를 계승하였다. 1859년 영국으로 귀국한 뒤 하원 의원을 지냈으며, 훗날 휘그당(휘그당은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본래 반가톨릭 성향의 개신교도들이 주축이 된 정당이었으나, 18세기 말을 기점으로 가톨릭 관용에 찬성하는 노선으로 전향한다.)에 입당한다. 같은 당 출신인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총리와 절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9년에 준남작에서 남작으로 승작한 것도 역사학에서 쌓은 업적보다는 정치 활동에 의한 부분이 컸다. 이후 그는 후에 근대사 연구에 매진하여 많은 저서들을 남긴다.
전통적인 명문 가톨릭 귀족 가문이었으나, 아직 영국이 가톨릭 차별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톨릭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기도 하였다.[2] 그러나 이후 역사가로서 명망이 높아지자 이번엔 오히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모셔가(1895년) 근대사 담당교수가 되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여, 당시 가톨릭 교회의 보수화에 격렬하게 저항하였으며, 교황무류성 교리의 선포를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3] 그 결과 교회와는 상당히 불편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코 교회와 관계를 끊지 않았으며, 케임브리지 대학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에도 계속 미사에 참석하였다. 당시 1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에 반발한 신자들을 중심으로 구 가톨릭 교회가 생겨났지만, 액튼 경은 여기 동참하지 않았으며, 본인 스스로도 "로마 교황청과의 일치는 나에게 목숨보다 더 소중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교황청도 액턴 경의 반대활동에 대해 특별히 터치하거나 제재를 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오늘날의 한스 큉과 비슷한 면모일지도.
1901년 들어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어, 이듬해 처가가 있는 독일 바이에른 왕국 테게른제에서 6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생애 마지막까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았으며, 병자성사를 받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