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진

 



'''
仁祖 淳皇帝 | 인조 순황제'''
'''묘호'''
순조(純祖) → '''인조(仁祖)'''
'''시호'''
순황제(淳皇帝)
''''''
주(朱)
''''''
세진(世珍)
'''생몰 기간'''
1283년 ~ 1344년
1. 개요
2. 생애
4. 여담
5.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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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추존 황제이며 명태조 주원장의 아버지. 희조유황제에 추존된 주초일(朱初一)의 차남이다. 본명은 주오사(朱五四).

2. 생애


가난한 농부 출신이며, 막내아들 중팔[1]이 16세일 때 황화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그의 아내는 후에 추존된 순황후로 4남 2녀를 두었는데, 사후 장례비와 매장이 없었다. 그저 막막한 차에 다행히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한 명 정도는 있었다. 마을 사람인 유계조(劉繼祖)가 자신의 땅에 묻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중팔 형제가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하면서 어떻게든 장지(葬地) 문제는 해결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관이나 수의(壽衣) 따위는 준비할 수가 없었다. 형제가 일가족을 거적에 둘둘 말아 둘러메고 약속된 산기슭에 이르렀을 때, 낡은 끈이 떨어져 일가족의 시체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비참한 마음을 참고, 둘째 형은 새로 끈을 가져오기 위해 마을로 되돌아갔다. 시신을 지키던 중팔은 비바람이 억수로 몰아치자 근처의 절로 피신하여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찬비 떨어지는 산골짜기에 내버려 둔 가족 생각에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새벽이 되기가 무섭게 뛰어나와 보니, 가족의 시신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신, 시신이 있었던 자리는 쓸려온 흙이 모여 절로 두툼한 흙무덤이 되었던 것이다. 기막힌 일이었다.
훗날 주원장은 이 날의 경험을 이렇게 회고했다.

관곽이 없어 더러운 옷으로 시신을 감싸, 흙으로 살짝 덮어 무덤을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하니 제삿상인들 어떻게 제대로 바칠 수 있었겠는가?

주원장은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주세진과 어머니 진씨를 각각 인조순황제(仁祖淳皇帝)와 순황후(淳皇后)로 추존하였다. 뒤에 주원장은 아버지의 황릉에 비석을 세우고 묘갈을 쓰면서 "관곽도 마련하지 못해 썩은 헝겊에 싸서 매장하였다"라며 오열하였다고 전해진다.

3. 조선왕조실록


조선 성종 6년 6월 10일 정해 6번째 기사에서는 사은사의 서장관인 이경동이 듣고 본 사건(事件)을 말했는데, 과장의 생원들이 문자(文字)를 짓기 전에 명의 황제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명의 황제들의 이름을 정리해놨는데, 먼저 명인조(仁祖)의 묘휘(廟諱)는 세진(世珍)이고, 또 홍무제영락제, 그리고 홍희제선덕제, 정통제의 이름과 성화제의 이름이 견심(見深)이라 하였는데 임금이 승문원(承文院)에 내리라고 하였다.

4. 여담


주세진의 장인은 99세로 죽기 직전까지도 허리가 꼿꼿하며 흰 수염이 인상적인 진씨 노인이었다고 한다. 이 노인은 외손자에게 자신이 60여년 전에 원나라와 싸우고 다녔고, 그 때 승상인 문천상이 잡혀가고 황제와 대신들이 바다에 몸을 던진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은 함대에서 폭풍우를 만나 죽을 뻔 했지만 온갖 고생을 다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는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의 참전자이자 생존자였다. 남송의 멸망을 함께한 사람의 외손자가 후일 원을 멸망시키고 한족의 나라를 다시 세운 것이다.

5. 가계도


  • 증조부 : 덕조(德祖) 주백륙
    • 조부 : 의조(懿祖) 주사구
[1] 중칠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