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키르마우트 전투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전투 내용
5. 결과


1. 개요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칭기즈 칸이 전술, 전략적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머쥔 전투 중 하나이다.[1]

2. 배경


1203년, 칭기즈 칸은 옹 칸의 황금 장막을 기습해서 3일 동안 포위한 끝에 케레이트를 정복했다. 이로써 몽골 고원 3분의 2는 칭기즈 칸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제 칭기즈 칸에게 남은 적은 몽골 고원 서부를 장악하고 있던 나이만이었다. 나이만은 튀르크계 유목 부족이었으며 케레이트의 옹 칸이 여러 번 나이만에게 패해 죽을 위기에 처할 정도로 강력한 부족이었다. 하지만 이난차 빌게 칸 사후 두 아들인 타양 칸과 부이룩 칸의 반목으로 인해 타양 칸의 동부 나이만, 부이룩 칸의 서부 나이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칭기즈 칸은 옹 칸과 동맹 시절에 타양 칸을 공격했으나 자무카의 음모로 인해 철수하면서 승부를 내지 못했었다.
타양 칸은 칭기즈 칸이 케레이트를 정벌한 이후에도 그의 세력을 매우 얕보고 있었고 나이만에 의탁하고 있던 자무카, 토크토아[2] 등이 칭기즈 칸을 치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이에 그는 칭기즈 칸을 치기 위해 금나라 국경을 지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던 웅구트족과 동맹을 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웅구투족의 족장 알라쿠시 티긴은 현재 몽골이 막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칭기즈 칸이 타타르 정벌 이후 금나라의 관직 자우우트 쿠리(백호장)를 받은 것을 명분삼아서 나이만의 사절단을 억류한 후, 칭기즈 칸에게 웅구트 측 사절단과 함께 보내서 나이만의 음모를 알리는 동시에 복종의 뜻을 전한다. 칭기즈 칸은 이에 웅구트의 공로를 칭찬해 그의 딸인 알라카 베키를 알라쿠시 티긴의 아들 센구이와 혼인시킨다.[3] 칭기즈 칸은 나이만의 이러한 군사행동에 대응하기 위해 쿠릴타이를 열게 된다. 쿠릴타이 회의에서 칭기즈 칸의 심복들은 나이만의 세력이 막강하고 몽골이 오랜 전쟁으로 말과 병사들이 지쳐있다는 점을 들어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파와 나이만이 공격하기 이전에 선제공격하자는 파로 나뉘었다. 이 때 이복형제 벨구테이가 나이만의 병사들은 수만 많을 뿐 오합지졸이라는 점을 내세우면서 선제공격에 군심이 기울자 칭기즈 칸은 벨구테이의 의견을 받아들여 1205년 나이만의 본거지인 알타이 산맥 쪽으로 진군한다.
타양 칸은 칭기즈 칸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대군을 이끌고 알타이 산맥으로 진군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는 몽골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매우 기뻐하였고 몽골 따위는 단숨에 무너뜨릴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3. 전개


칭기즈 칸은 나이만과의 전쟁을 앞두고 부장 도다이 체르비의 책략을 수용하여 진영 곳곳에 횃불을 들게 하였는데 이는 군의 수가 적은 것을 대군을 이끌고 온 것처럼 나이만의 전초들을 속여 나이만이 혼란스러워지는 틈을 타 병력을 정비하려는 작전이었다.[4] 나이만은 이로 인해 몽골 군이 수가 예상보다 많다고 생각해서 혼란에 빠졌고 전쟁을 시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이윽고 나이만이 정신을 차리고 전쟁을 개시했을 때는 이미 몽골은 전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또한 나이만의 문제점은 나이만의 지도자인 타양 칸의 본대가 정작 전장에서 뒤로 물러나 있던것이었다.[5]

4. 전투 내용


전투는 나이만 선봉대의 진격으로 개시되었다. 칭기즈 칸은 수적으로 우세한 나이만 군을 무너뜨리기 위한 작전을 세우는데 몽골비사에서는 ''' "카라카나 행군으로 행군하여 호수 대형으로 전개한 뒤 끌 전투로 결판을 내자!" '''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내용에 따르면 당시 몽골 군의 진형은 밀집 대형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적의 주력 부대가 접근하자 칭기즈 칸은 군대를 넓은 지역에 산개시키고 산개한 군대가 각 방향에서 신속하고 지속적인 공격과 후퇴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서 나이만 군은 병력을 길게 늘어뜨리기 시작한다. 이때 몽골 군은 일제사격을 개시하였고 진격해오는 선봉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절대로 전군이 한꺼번에 공격하지 않고 선봉대가 진격하고 그 이후에 본대가 진격하고 마지막에 예비대를 투입하는 선진 전술을 구사한다. 적의 선봉대가 화살 공격에 주춤하자 칭기즈 칸은 제베, 쿠빌라이, 젤메, 수부타이로 이루어진 사준사구가 지휘하는 부대를 먼저 출격시켰다. 사구가 이끄는 부대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적의 선봉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칭기즈 칸은 측면에 배치되어 있던 망구트, 오로이트 부족들로 구성된 부대를 2차로 출격시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뒤로 물러나 있던 나이만의 주력 부대도 출격하면서 격렬한 난전이 펼쳐졌다. 이렇게 되자 칭기즈 칸은 직접 본대와 나머지 예비대를 이끌고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듯 기존의 유목민 전투 방식을 탈피한 몽골군의 공격에 나이만군은 패주해 절벽까지 몰리게 되었고, 이후 몽골군에 절벽이 포위당하면서 모조리 전멸하고 타양 칸 등 수뇌부도 대다수가 전사한다.[6]

5. 결과


나이만을 마지막으로 칭기즈 칸에게 대항하였던 모든 몽골 고원의 부족은 멸망하거나 몽골에게 복속되었고 칭기즈 칸은 마침내 몽골 고원의 통일을 이룩하고 1206년 몽골 제국을 건국한다.[7][8] 이후 타양 칸의 아들 쿠출루크는 숙부 부이룩 칸에게 의탁했다가 몽골 제국에 의해 서부 나이만마저 멸망했을 때 서요로 도피해 쿠데타를 일으켜 서요를 차지하나 몽골 제국이 다시 서요를 공격하면서 쿠출루크를 비롯한 나이만 잔당은 완전히 멸망한다. 또한 이 전투에서 칭기즈 칸이 보여준 전술과 부대 편성은 이후 몽골 제국의 군사 제도의 기본으로 자리잡는다.
[1] 차키르마우트 전투는 공식적으로는 나이만과 칭기즈 칸의 전투이지만 한편으로는 칭기즈 칸과 나이만에 의탁해있던 그의 숙적이자 안다였던 자무카와의 최후의 대결이기도 했다.[2] 메르키트의 족장으로 칭기즈 칸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했었던 인물이다.[3] 웅구트는 이후 몽골-금나라 전쟁에서 몽골에게 금나라로 향하는 길목을 열어주고 길잡이 역할을 자처해 몽골 제국의 승리에 일조한다.[4] 위 문단에도 서술되어있지만 몽골은 나이만한테 수적으로 열세였고 케레이트와의 전쟁 여파로 말들이 풀을 먹지 못해서 여위었고 적지로 원정와서 지쳐있던 상태였다.[5] 타양 칸은 그의 아버지가 죽기 전 그에게 나이만을 맡기는 걸 두려워했고 아들 쿠출루크와 부하 장수들이 모두 그를 대놓고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천막 밖으로 볼일을 보러 갈 때 빼고 밖에 나온 적이 없다고 모욕하고 나이만의 장군 쿡세우 사브락이 그의 모친인 구르베수가 전쟁을 지휘하는게 낫다고 말할 정도로 전쟁을 한 번도 직접 지휘한 적이 없었고 결정적으로 '''겁쟁이'''였다.[6] 몽골비사에서는 전투 중 타양 칸이 곁에 있던 자무카에게 테무친과 몽골 군에 대해 자문을 구했는데 자무카는 몽골 군과 테무친의 능력을 과장해서 얘기했다고 하며 이에 겁을 먹은 타양 칸은 점점 군사를 절벽까지 몰게 되었고 이에 몽골이 계속해서 절벽을 포위하면서 궁지에 몰린 나이만 군대가 전멸당했다는 기록이 있다.[7] 오이라트, 투마트를 포함한 삼림 부족이 남아있었지만 이들 역시 몇 년 후에 몽골 제국에 복속한다.[8] 자무카 역시 전투 이후 도주했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인해 몽골 제국에 끌려가 처형된다. 토크토아는 조지아 지역까지 도망갔다가 추격해온 수부타이에 의해 전사하고 그의 아들인 쿠두는 간신히 도망쳐서 재기를 노렸으나 11년이 지난 1217년 주치에 의해 메르키트는 멸망한다.